그러나 센소지는 ‘물방울관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불화를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다. 1978년 야마토분카칸에서 처음으로 열린 특별전에는 고•려불화 52점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이 작품만은 출품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1981년에 아사히신문사에서 발간한 《고려불화> 호화도록에도 실리지 못했다. 2010년국립중앙박물관이 700년 만의 해후‘라는 기치 아래 ‘고려불화대전‘을 기획할 때도 출품을 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이 단지 유물의 존재 여부만이라도 확인하게 해달라는 요청에 억지로 응했는데, 이 불화를 꺼내왔을 때 박물관장과 학예원이 작품에 큰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감복하여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리하여내 평생에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했던 이 전설적인 명작을 실견할 수 있었다.
‘물방울관음‘은 과연 천하의 명작이었다. 다른 수월관음도는 법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온 선재동자를 앉아서 맞이하는데, 이 ‘물방울관음‘은 자리에서일어나 오른손엔 버들가지, 왼손엔 정병을 들고 서 있는 구도다. 그 자세가 너무도고아한테 신비롭게도 관음보살의 전신이 물방울에 감싸여 있다. 혹자는 이것을 버들잎으로 보기도 하고 관음보살이 아니라 정취보살趣菩薩이라고도 하지만 본래의 도상이 무엇이든 현재의 시점에서는 ‘물방울관음‘이라는 것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본래 명작이란 사진 도판으로 익혀온 탓에 실제 작품을 보면 무덤덤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물방울관음은 달랐다. 예리한 선묘와 품위 있는 채색은 도판에선전혀 느낄 수 없던 감동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아! 숭고하고도 아름다워라!" 라는 찬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어 다시 들어가 하염없이 바라보다 마지못해 박물관을 나왔다. - P12

수월관음은 아름다운 무늬를 금박으로 수놓은 붉은 법의法衣에 흰 사라(명주실로 거칠게 짠 비단)를 걸치고 반가부좌를 틀고서 용맹장부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곁에는 당신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정병에 버들가지를 꽂아 유리그릇에 받쳐 놓았고 등 뒤로는 시원스럽게 솟아오른 청죽 두 가닥, 발아래로는 흰 물결이 일렁인다. 불화 부분부분의 세세한 표현은 각 작품마다 약간씩 달라 일본 다이도쿠지 소장품에는 이채롭게도 동해용왕을 그려 넣었고 선재동자의 모습은 아주 귀엽게 폭마다 다르게 그렸다.
고려불화의 압권은 붉은 법의 위에 걸친 흰 사라의 표현에 있다. 그 기법이 얼마나 정교한지 속살까지 다 비친다. 곁에서 그림을 보던 한 중학생이 "야! 웨딩드레스를 입은 것 같다"라며 감탄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뒤이어 온 젊은 여성 관객은 ‘시스루 패션 see through fashion‘이라며 그 신기한 기법에 놀라움을 표한다. 수월관음의 우아한 자태와 화려한 복식 표현은 한국 미술사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 P16

한국미술사 불후의 명작인 안견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이제까지 국내에서 세 번 전시되었다.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개관할 때 보름간 전시된 것이 국내를 떠난 뒤 처음 공개된 것이고,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 전기 국보전‘ 때 두 달간 전시된 것이 두 번째이며, 2009년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9일간 전시된 것이 세 번째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남의 유물을 가져가 놓고 빌려주는데 뭐 그렇게 인색하냐고 원망할 수도있다. 그러나 소장처인 일본 뎬리대天理大도서관은 상설전시는 절대로 하지 않고대여해주는 일도 거의 없을 정도로 작품 보존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청을 받아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447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560년이 넘은 작품이다. 흔히 ‘견오백지천년百年‘이라고 해서, 비단은 오백년 가고 종이는 천 년 간다며 무생물도 수명이 있음을 말하곤 하는데<몽유도원도>는 신기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완벽해서 마치 어제 그린 그림 같다. 몽유도원도, 즉 ‘꿈속에 도원을 노닐다‘라는 이 그림의 내력은 안평대군이 발문에 밝힌 바대로 그의 꿈 이야기를 그대로 그린 것이다. - P22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는 남송의 대가인 마원풍의 산수화로 가히 명화라 할 만하다. 벼랑 위 멋들어진 소나무 아래로 난 길을 도포를 입은 한 선비가 동자와 더불어 거닐고 있다. 선비의 수염과 옷자락, 소나무가지와 가지에 매달린 넝쿨들이 같은 방향으로 바람에 나부끼고 있어 화면상에는 강한 동감이 일어나는데 소나무 너머 저 멀리 화면 맨 위쪽에는 둥근 달이 떠 있다. 여백을 살린 대각선 구도로 대단히 시정적詩情的인 작품이다.
비록 전칭으로 불리지만 조선 전기에 <송하보월도> 같은 명화가 전한다는 것은 한국 회화사의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이상좌 같은 전설적인 화가에 대해서는 마땅히 전기를 기술하는 것이 미술사가의 임무이고 도리이겠건만 그에 관한 자료가 이것뿐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 P30

《병진년화첩》에서 본격적으로 구현된 단원 산수화와 화조화의 특징은 어떤특수한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소재를 택하면서도 우리 산천의 아늑하고 편안한 모습을 한 폭의 서정적인 공간으로 잡아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일컫는다.
<병진년화첩>을 보면 단원의 그림은 대단히 부드럽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산이나 나무줄기를 묘사한 것을 보면 필치가 아주 거칠다는 것이 눈에 띈다. 속도감마저 느껴지는 붓놀림이다. 이는 그의 필력이 능숙할 데로 능숙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처럼 스스럼없는 필치가 스스럼없이 구사될 때 단원은 가장 단원다웠다. - P45

국보·보물은 100년 이상 된 유물을 대상으로 하므로 20세기의 근대문화재는 국가지정 문화유산이 될 수 없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한 것이 등록문화재다. 등록문화재는 50년 이상 된 유물을 대상으로 한다. 18세기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19세기 추사 김정희 작품에 국보·보물이 있듯이 20세기 화가의 작품도 언젠가는 문화재가 될 것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근대미술사학계에 검토.의뢰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국민화가로 칭송되는 박수근(1914~1965)도 당연히 들어 있다. 미술사가들은 그의 대작에 속하는 60호(가로 97cm 세로 130cm) 크기의 <절구질하는 여인>과 <나무와 두 여인>을 등록문화재 대상으로 꼽았다.
그러나 박수근은 소품에 더 익숙했다. 생전에 대작을 할 기회가 적어 소품속에 자신을 완벽히 표현해왔다. 박완서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나목>이라는 소설은 한국전쟁 중 밥벌이로 
PX에서 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손수건에 초상화를 그려주던 박수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 P54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 수심엔 봄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박수근 서거 45주기 유작전‘에서 박완서 선생을 만나게 되어 소설 속 작품이 어느 것이냐고 물으니 <나무와 여인>(3호)이라고 가리켰다.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서민들의 모습은 하루를 넘긴다는 것 자체가 힘겨웠던 50년 전 우리네 삶의 표정인데 우리는 나목처럼 그것을 견디어냈고 그것을 그린그림은 어느덧 문화재가 될 정도로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는 얘기다. - P54

박물관에 가면 ‘원삼국시대‘라는 표기가 있다. 한때 이것은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왜 우리나라 박물관에는 삼한시대라는 표기가 없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적 없는 ‘원삼국시대‘라는 말이 나와 학생과 일반인들을 혼동시키냐는 것이다. 당연한 문제 제기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고고학, 미술사학의 고민이다.
원삼국시대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철기시대가 전개된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 한반도 북쪽에는 부여·동예 · 옥저가,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여에서 고구려가 갈라져 나왔고, 고구려의 한 갈래가 백제를 낳았고, 진한의 사로국은 신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낙동강 지역에서는 가야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남은 부족이 고대국가를 향하여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였다. 삼한시대도 아니고 삼국시대 초기만도 아니다. 결론이 삼국시대였을 뿐이다. 그래서 고 김원용 선생은 삼국정립의 기원起原.proto-type단계라는 의미로 ‘원삼국‘이라는 시대개념을 제시하였다. - P80

이 시기 문화의 체질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질그릇에 뚜렷이 나타났다. 야철술의 에너지 활용 기술을 토기 제작에 적용한 가마)는 1천 도까지 올릴수 있어 종래의 토기에서 와도기라는 회색 연질도기로 바뀌었다. 이것이 기원후 300년 무렵에 경질도기로 발전한 것이 가야 도기와 신라 도기이다.
원삼국 도기 중에는 ‘쇠뿔손잡이항아리‘라는 아주 특이한 질그릇이 있다. 어찌 보면 멕시코나 잉카의 그릇처럼 생겨 우리나라에도 저런 그릇이 있었던가 의아해하곤 한다. 이것을 한때는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라고 어렵게 부르기도 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목이 긴 항아리에 한 쌍 또는 서너 개의 쇠뿔 모양 손잡이를 붙인 것이다.
쇠뿔손잡이는 기능보다도 쇠뿔 같은 힘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디자인적 변형이다. 기능만을 생각한다면 쇠뿔이 아래로 향해야 한다. 한마디로 질그릇에서도 이처럼 디자인적 과장이 일어났던 것이다. 원삼국시대는 고대국가로 가기 위해 지배층의 권위가 한껏 강조되던 시기였다. - P80

똑같은 연꽃무늬 수막새 와당인데 백제는 우아하고, 고구려는 굳세고 신라는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일본 기와는 디자인이 깔끔하고 중국 기와는 형태미가 강하다. 이것은 와당뿐만 아니라 삼국과 동아시아 미술 전반에 나타나는 미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을 연꽃무늬 와당이라는 단일 주제로 놓고 보니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유익했다.
삼국시대 건축에 언제부터 기와가 나타났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삼국사기》고구려 미천왕조를 보면, 그는 어려서 신분을 감추고 수실촌의 한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집주인이 아주 못되게 굴어 어떤 때는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워잠을 못 잔다며 어린 을불(미천왕)에게 밤새도록 연못에 ‘깨진 기왓장을 던지게 했다고 하니 그 이전부터 기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원삼국시대 와질도기가나타나는 1세기 무렵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삼국 중 백제 기와가 단연 돋보인다. - P84

백제는 장인을 사회적으로 우대하여 기와 잘 굽는 와공瓦工 와박사라고 했다. 많은 외박사가 아스카시대 일본에 파견되었고 신라 황룡사 건축에 초빙된 백제의 아버지는 와박사를 대동하고 갔으니 신라와 일본 와당에 백제의 영향이나타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백제와당의 백미는 8판 연꽃잎을 보드랍게 공굴리는 형태미에 있다. 유연한 볼륨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가볍게 테두리를 두르기도 했고 봉긋이 솟은 모습을 위하여 귀꽃을 살짝 뾰족이 세우기도 했다. 공굴림이나 귀꽃이 더 강했다면 그런 우아함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 와박사들은 디자인의 절제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 P84

우리나라 미술이 지향했던 구체적인 미적 목표가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내가가장 먼저 제시하는 대답은 ‘검이불루화이불치여덟 글자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5년(기원전 4)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新作宮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儉而不陋화려하지만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華而不侈"


위례성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궁궐의 자태를 말한 이 여덟 글자의 평문은 백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감을 대표할 만한 명구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왕흥사 사리함, 불국사의 석가탑은 ‘검이불루‘ 하고 미륵사 서탑 사리호와 불국사 다보탑은 ‘화이불치‘ 하다는 평이 너무도 잘들어맞는다. - P97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특히 궁궐 건축의 상량문에 계속 등장한다. 고종이 경복궁 북쪽 끝에 건청궁을 짓고 그 곁에 당시로서는 현대풍을 가미한 화려한 서재로 집옥재를 지었다. <집옥재 상량문>을 보면 예의 여덟 글자를 약간 바꾸어 "검부지루화부지사儉不至陋 華不至奢"라고 했다.
조선 헌종은 21살(1847) 때 후궁 경빈김씨를 맞이하면서 새 생활공간으로 지금의 낙선재를 지으며 자신이 직접 쓴 <낙선재 상량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곱고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은 것은 과도한 규모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채색한 서까래를 놓지 않은 것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이라네."
그래서 낙선재는 궁궐의 전각이지만 단청을 입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도 낙선재가 누추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확실히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백제의 미학이자 우리 민족의 미학으로 삼을 만하다. - P97

금·은·동 사리함을 보면 한결같이 형태가 아름답다. 동사리함은 통형이고, 은사리함은 긴 목이 달린 항아리 모양이며, 금사리함은 구기자 열매 같은 예쁜 형태이다. 동사리함은 소박하고, 은사리함은 듬직하며, 금사리함은 고급 향수병으로 제격이라 생각될 정도로 고귀한 모습이다. 세 사리함의 형태는 그렇게 다르지만 뚜껑에는 모두 봉곳한 꼭지가 달려 있어 한 세트로서의 디자인적 통일성을 갖추었다.
아무리 보아도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다‘는 백제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리함이 갖는 미술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 이는 땅속의 왕을 위한 금관의 시대에서 절대자의 분신(사리)을 모신 사리함의 시대로 전환했음을 말해준다. 백제의 공예가 고분미술에서 불교미술로 일대 전환한 것이다. - P98

오늘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백제의 아름다움에 경탄과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백제미의 실체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 것은 불과 지난 50년 동안 있었던다섯 차례의 기념비적 발굴 덕분이다. 1959년의 서산 마애불, 1971년의 무령왕릉, 1993년의 백제금동대향로, 2007년의 왕흥사 사리함 그리고 2009년 1월 익산미륵사에서 출토된 순금사리호이다.
6층까지 간신히 남아 있던 미륵사 서탑이 붕괴 위험에 놓여 해체수리하던중 1층 사리공에서 출토된 이 환상적인 사리호는 말할 수 없이 화려하면서도 고귀한 품위가 있어 왕흥사 사리함과는 정반대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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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거미줄


핏속에 거미들이 산다

핏속에서 일하고
핏속에서 잠들고
핏속에서 사랑하고
핏속에서 먹고
핏속에서 죽고
핏속에서 부활하는 거미들에게

피는 무궁무진한 슬픔의 창고

물과 피를 거미줄로 바꾸는
직조의 달인들은
어떤 혈관에든 숨어들어 실을 뽑고 천을 짠다

그러나 너무 밝은 피나
너무 어두운 피는 좋은 재료가 되지 못한다

거미들이 실을 뽑아내기 직전
아주 작고 단단하게 몸을 긴장시킬 때
나는 거미들을 느낀다
내 몸에서 피가 조금 빠져나갔다는 걸 알아차린다 - P14

내 피로 뽑아낸 붉은 거미줄은
누군가에게 ..
거처가 되기도 하고 덫이 되기도 했으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거미들은 희미한 진동을 따라 움직인다피의 만다라에 마악 도착한 어떤 날개를 향해날개가 파닥거리는 동안빈혈의 시간은 잠시 수런거리다 고요해진다

입술들은 말한다


입술들은 말한다

자신의 이름과 고향과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에 대해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에 대해
기후 위기와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대해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마을을 휩쓸고 간 장맛비에 대해 파도 소리에 대해

얼굴도 없이 몸뚱이도 없이
격자무늬 벽에 처박힌 채 입술들은 말한다

입술들은 대체 어디서 모여든 것일까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목소리들은 서로 삼키고 뱉고 다시 삼키고 뱉고 삼키고

들리지 않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봐
귀가 먹먹해 - P16

먼 들판에 풀벌레 소리 자욱해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복용해온 약에 대해
또는 피 흘리는 말, 다른 입술들에 대해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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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 년에 몇 번은 경주에 다녀온다. 대개 강연이 있어 오는데, 묵어갈 때면 즐겨 봉황대를 찾아 가까이 있는 단골집에서 갈치조림찌개로 저녁을 먹고 노동동·노서동에서 산보를 즐기다 숙소로 돌아가곤 한다.
어느 때 간들 마다하냐마는 늦가을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봉분위의 잔디가 누렇게 물들 때면 처연한 분위기가 절로 일어나는데 해질녘이 되어 노을이 짙게 물들 때면 노년의 황혼에 깃드는 스산한 서정의 울림이 있다. 특히나 해가 긴 여름날 경주에 답사 올 때면 시내에서 맛있는 토속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땅거미가질 때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고분과 고분 사이를 거니는 것은 내 답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억들이다. - P194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지 않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아주리.


태종무열왕은 그 뜻을 이해하고 원효를 요석공주와 연결시켜주려고 신하에게 그를 찾아 요석궁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신하는 문천 다리를 지나는 원효를 발견하고서 다리 아래로 밀어 물에 빠뜨리고는 젖은 옷을 말려준다는 구실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혹은 원효가 일부러 직접 뛰어내렸다고도 한다).
옷을 말리러 요석궁으로 들어간 원효는 결국 사흘간 머물면서 요석공주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때 원효는 나이 마흔 전후이고 요석공주는 20대의 청상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설총(薛聰)이고 그렇게 파계한 원효는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가 민중 속에서 불교를 설파하며 무애(無碍)의 경지로 나아갔다. - P255

가야는 1세기 전후부터 6세기 중엽까지 우리나라 고대국가형성기에 낙동강 유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던 미완의왕국이다. 가야는 문헌에 따라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가락(駕洛), 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나오는데 변한의 12개소국 중 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이 맹주로 등장하면서 느슨한 연맹체제로 개편되기 시작하여 300년 무렵에는 김해 금관(金官)가야, 함안 아라(阿羅)가야, 고령 대(大)가야, 고성 소(小)가야, 상주 고령(古寧)가야, 성주 성산(星山)가야 등 6가야로 퍼져 있었다. 우리가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는 사실상 삼국에 가야까지 더한 사국시대였다. - P261

우리는 비화가야의 옛 터를 찾아 창녕을 답사하지만 창녕의 명소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 습지인 우포늪(천연기념물 제524호)이다. 우포늪은 둘레 7.5킬로미터, 전체 면적은 340만 제곱미터로 3개 면에 걸쳐 있다. 이곳에 습지가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약 1억 4,000만 년 전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 백악기다. 당시에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낙동강 유역의 지반이 내려앉아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물이 고이게 되면서 곳곳에 습지와 자연 호수가 생겨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포늪에는 공룡 발자국화석도 남아 있다.
우포늪은 장마철에는 수심이 5미터에 이르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1~2미터를 유지한다. 늪의 바닥이 두꺼워서 ‘생태계의 고문서‘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습지로, 2008년에는 환경 올 - P266

림픽 격인 람사르 총회가 여기서 열렸고 2018년에 처음으로 람사르 습지도시를 선정할 때 습지도시로 인정받았다.
현재 우포늪 일대에는 8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며, 건강한수생 생태계를 갖추고 있어 어류는 붕어, 잉어,가물치, 피라미 등28종이 서식하고 있고, 조류는 논병아리 등 텃새와 천연기념물인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를 비롯하여 청둥오리, 쇠오리, 기러기등 약 200종이 있다. 1970년대 이후 국내에서 멸종된 따오기를 중국에서 4마리 데려와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현재 359마리를자연 복귀 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우포늪은 실로 ‘살아 있는 자연사박물관‘ 이라고 할 만하다. - P267

창녕의 가야시대 이전 선사시대 유적지로는 비봉리 패총이 유명하다. 이 패총은 2003년 태풍 매미로 붕괴된 배수시설을 복구하는 과정에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여기에서는 패총과 함께 빗살무늬토기, 무문토기 등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고, 저장공에서 도토리, 가래, 솔방울 등 식물과 잉어, 멧돼지 등 동물 뼈가 나와 2007년 국가사적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비봉리 패총은 무엇보다도 내륙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개더미일 뿐 아니라, 신석기시대 모든 기간의 유물이 층위별로 나타나각 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유적의 연대를 설정하기 좋은귀중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특히 여기서는 소나무를 유(U)자형으로 파내어 만든 통배(丸木舟)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배다. 이것과 함께 출토된 망태기는 두 가닥의 날줄로 씨줄을 꼬는 ‘꼬아뜨기 기법‘으로 만들어져 있어 신석기시대의 편물(物)기술을 알려준다. 여기서 출토된 도토리, 목재, 조개껍데기 등에서 채취한 시료를 가속질량분석기(AMS)로 측정한 결과 시기가 7,700년 전부터 3,500년 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 P268

성을 쌓은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전설로는 비화가야 시절로 올라가고 기록으로는 조선 태종 10년(1410) 경상도.
전라도에 중요한 산성을 수축했다는 실록의 기록에 화왕산성이나온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왕산 석성은 둘레가 1,217보()이고 그 안에 샘이 아홉, 못이 셋 있으며 또 군창(軍倉)도 있었다.
전란에 대비해 쌓은 산성은 50년, 100년이 가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화왕산 고성은 석축 산성으로 둘레가 5,983척(尺)이나지금은 폐성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강화 교섭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였고, 일본군이 동래·울산·거제 등 해안에 장기 주둔하다가 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경상좌도방어사로 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는 밀양·영산·창녕 현풍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을 수축하고 왜군을 기다렸다가 대파했다.
그 뒤로 화왕산성은 다시 산성으로 사용된 일이 없고, 지금은9개의 샘도 사라지고 무너진 석성의 잔편만 남았지만 역사의 유적이 되어 답사객과 등산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 P293

지난번 창녕 답사 때 나는 이도 저도 아니고 장마면의 유리 고인돌로 향했다. 유리 고인돌은 내 경험상 우리나라 남방식 고인돌 중에서 가장 믿음직하게 생겼다. 여기에는 본래 7기가 있었다지만 다 없어지고 오직 한 기만 언덕바지에 빈 하늘을 배경으로버티듯 서 있어 좀 외로워 보이긴 해도 오히려 홀로 우뚝한 데서장중한 기품이 느껴진다.
높이는 사람 키보다 훨씬 큰 2.5미터고 폭이 5미터가 넘으니수치만으로도 장대함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생김새가 꼭 메줏덩이 같아서 아주 듬직하고 순박한 인상을 준다. 그냥 자연석을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바둑판 발처럼 낮은 받침을 고였다. 그 받침돌로 인하여 설치 조형물로서 고인돌의 의미가 진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 P311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자 유족과 장의위원회에서 내게 고인의 비석과 안장 시설을 맡아달라고 의뢰해왔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 유리 고인돌이었다. 저 메줏덩이 같은 고인돌 하나 얹어놓고 ‘대통령 노무현‘ 6자만 새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자연석을 구하기 쉽지 않아 설계를 맡은 건축가 승효상은 메줏덩이처럼 생긴 고인돌 대신 둥글넓적 맷방석만 한 너럭바위로 대신했다.
그런데 다시 보아도 유리 고인돌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 - P311

지와 잘 맞는다. 메줏덩이 같던 순박한 심성과 언덕바지에 외로이 우뚝 선 그 당당한 모습이 절로 고인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그분이 아니라 해도 저 유리 고인돌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라면 뭇 사람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분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유리 고인돌에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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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고대 국가는 다 쇠망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삼천궁녀의 투신이라는 ‘가짜 뉴스‘에 귀를 버리지 말고 부소산 백마강변의 이 평온한 정취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잠시 번잡한 일상을 흘려 보내고 국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일이다. - P71

실제로 낙화암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는 백마강 물줄기와강 건너 키 큰 미루나무가 줄지어 달리는 규암 들판의 평온한 풍광은 있는 그대로가 완벽한 구도를 보여주는 한 폭의 산수화다. 그래서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운보 김기창, 남농 허건, 고암이응노, 취봉 이종원, 소송 김정현, 검돌 이호신 등 많은 수묵화의대가들이 그린 이곳의 실경산수화가 거의 똑같은 구도를 취하고있으며, 유화로도 좋은 소재여서 이종구의 「낙화암」 같은 풍경화가 나왔다.
유람선을 타고 지나가다 절벽에 보이는 ‘낙화암(落花巖)‘이라는붉은색 암각 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고 한다.
부여에는 우암의 커다란 암각 글씨가 또 하나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강 건너 규암면의 대재각에 있다. 대재각은 낙화암에 버금가는 백마강의 명소로, 부여 답사 때 여러 번 낙화암 대신 대재각을 답사 코스로 잡았다. - P72

악수논정(握手論情)이란 손잡고 정을 나누자는 뜻이다. 백제의역사는 그렇게 끝났고 백제의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유왕산에서 ‘악수논정‘하고 있다.
유왕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참으로 유장하다. 상류 쪽을 바라보니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하구 쪽을 바라보니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그 물길 따라 끌려간 의자왕과 백성들을 생각하자니 절로 비장감이 감도는데 유왕산을 내려오는 돌계단 양쪽에는 새빨간 무릇꽃이 그리움에 지친 듯 피어 있어 사람의 심사를 애잔한 서정으로 젖어들게 한다. - P105

그렇다고 해서 경주 시내에 신라 고분이 155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봉분이 남아 있는 고분에 붙인 것만 그렇다는 것이고 이 일대에는 무수히 많은 고분들이 더 있었다. 이를테면 미추왕릉지구라 불리던 곳을 오늘날의 대릉원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계림로, 월성로 일대를 발굴 정비할 때는 대학박물관 발굴단들을 총동원하여 수백 기의 고분을 발굴했다. 모두 합하면 대략 1천 기에 달했다.
이처럼 경주 시내 신라 고분은 구역이 여럿으로 나뉘어 있지만 문화재청은 2011년, 이를 하나로 통합하여 ‘경주 대릉원 일원‘(사적 제512호)으로 재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P119

"나는 신라 고분 답사라고 해서 옛날에 대릉원에 가서 천마총속을 구경한 것만 생각하고 무엇 때문에 한나절을 여기서 다 보내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 고분이 이렇게 많고이렇게 거대하고 이렇게 시내 깊숙이 있는 줄 처음 알았네. 이게마립간 시기 무덤들이라고? 왜 그런 사실을 이제 알고 무턱대고신라왕릉이라고 기억하고 있었지?
그리고 금관총 전시관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성할 때 비계를 쌓은 걸 보면서 저렇게 했기 때문에 1천 5백 년을 버텨온 것이라는감동을 받았네. 자네가 신라 고분 답사는 봉황대로 가서 금관총부터 보아야 한다고 한 이유를 이제 충분히 알았네. 고마우이."

그러나 이는 신라 고분 답사라는 심포니의 제1악장 안단테에 불과하다. 나의 신라 고분 이야기는 제2악장 아다지오(금령총과서봉총), 제3악장 프레스토(천마총과 황남대총), 그리고 제4악장 라르고(계림과 월정교)로 이어질 것이다. - P152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굴된 것은 ‘황금의 나라, 신라‘로 나아가는 우렁찬 팡파르였다. 1,500년 전 신라에 이런 순금 관(冠)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1만여점의 유물이 3만 점의 구슬과 함께 쏟아져 나온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첫걸음에 불과했다. 이어 3년 뒤 1924년에 금령총에서 아름다운 금방울과 함께 금관이 발견되었고, 1926년엔 서봉총에서 또 금관이 나왔다. 5년 사이에 신라 금관 셋이 출토된것이었다.
당시는 이 금관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신라 왕관으로 생각했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일제가 신라 고분에 관심을 갖고 적 - P155

극 발굴에 나선 것은 일본이 옛날부터 한반도를 지배해온 역사가있다는 식민사관의 근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발굴하면 할수록 신라는 일본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상상 이상으로 찬란하고 위대했음을 이 유물들이 웅변했다. 아무리 역사를 조작해 왜곡하려해도 유물이 말해주는 것을 속일 수 없다. 그들로서는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문화재 분야에서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관의 맨 앞장에 선사람은 세키노 다다시였다. 그는 평양에서 낙랑 고분 발굴을 주도했 - P156

고, 저 방대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전15권의 책임편집자였다. 금관총 발굴 유물도 결국 총독부에서 그를 파견하여 뒷수습시킨 것이었다. 그는 1929년에 조선의 건축과 미술』, 1932년엔 「조선미술사』를 펴낸 학자였다. 이 『조선미술사』는 독일인 신부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가 1929년에 독일어와영어로 동시에 펴낸 『조선미술사』에 이은 두 번째 한국미술사통사다.
우리의 입장과는 관계없이 일본인들에게 세키노 다다시는 이른바 대정(大正, 다이쇼) 연간의 문예부흥기,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뛰어난 학자 중 하나로 꼽힌다. 일본인들은 존경하는분의 이름을 부를 때는 훈독이 아니라 음독하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당시엔 그를 세키노 ‘다다시‘라고 하지 않고 세키노 ‘데이‘
라고 불렀다(이런 ‘유식자 읽기(有)‘는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도있다). - P157

확실히 세키노 다다시에게는 아름다움의 특질을 바로 잡아낼수 있는 미적 안목이 있었다. 그는 경주의 신라 고분을 조사하러다니던 중 태종무열왕릉의 돌거북이 받침돌과 용머리 지붕돌을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자신이 중국에서 보아온 것을 포함하여 가장 훌륭한 비석받침 조각이라고도 했다. 그의 정직한 눈으로 보건대 신라문화는 위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일제가 만들어가던 식민사관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내적 모순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 - P157

서 주장한 것이 대륙(중국)의 영향을 계속 받은 반도적성격론과 조선 역사에서 문화가 점점 쇠퇴해간다는 ‘정체성(停滯性)‘이론이다. 그 요지는 「조선미술사』 총론에 명확히 밝혀져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조선 미술의 융성기다. 고려 시대는 그 전성기라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신라 예술의 연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송나라와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의 것에 비하면 섬세하고 치밀한 면을 잃어버렸지만 우수한 것을 만들어냈다. 조선 시대는 미술의 쇠퇴기로 고려 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며, 다소 명나라의 영향도 받았다. 초기에는 상당히 볼만한 것이 만들어졌지만, - P158

후기에 들어 국가의 기운이 쇠퇴함에 따라 서서히 쇠락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세키노 다사시는 학자적 소신과 양심으로 조선시대 미술 중에는 ‘고유의 특질을 발휘한 것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식민사관을 앞장서서 전개한 학자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한반도 문화가 사대주의에 빠져 독자성을 잃고 당파싸움을 일삼으면서 문화는 피폐해지고 마침내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 ‘다행히도‘ 이제 일본 황국의 도움을 받아 폐습을 청산하고 새로 문명을일으키게 되었다는 논지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문화 행사와 발간물, 이를테면 조선미술전람회, 문화재 도록, 고미술 전시회 등에 등장하는 조선총독, 경무총감, 학무총감 등 고관들의 축사에 녹음기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논리라면 식민사관에 젖어 있다 하더라도 신라 금관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예찬해도 되는 것이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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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2023년 초겨울
유홍준

답사 당일 아침 10시까지 신청자들이 개별적으로 정림사지 주차장에 집결하면 나의 인솔과 해설을 받으며 부여의 유적지들을 두루 답사한 뒤 오후 5시에 다시 정림사지 주차장으로 돌아와 끝나는 당일 답사다. 초창기엔 버스 2대80명이었으나, 요즘은 인솔하기 버거워서 버스 1대 4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답사 코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국립부여박물관만이 기본이고 매번 다르다. 서쪽으로는 만수산 무량사, 반교마을 돌담길, 홍산 관아, 남쪽으로는 임천의 대조사와 장하리 석탑, 동쪽으로는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지와 능산리 백제왕릉 등이 주요 답사처다. 때로는 부여군을 벗어나 보령의 성주사지, 논산의 관촉사,
공주의 무령왕릉과 공산성, 서천 비인의 오층석탑, 익산 나바위성당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 P13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우아한 자태로 우리를 맞이한다. 책에서 사진으로 볼 때는 왜소한 인상을 주지만실물은 키가 훤칠하고 5층의 체감율이 단아한 비례감을 자아내어 백제 미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성의 존재를 증언해주는 가장 확실한 유물이자 백제의 아름다움을 실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다시 말해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있기에 부여가 고도로서 존재감을 갖고 백제의 미학이 살아나는 것이다. - P16

이 향로의 발견으로 우리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顧 華而不侈)‘의 미학을 지녔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이 향로는 높이 61.8센티미터, 무게는 11.85킬로그램이나 되는대작으로 다른 향로들과 비교할 때 부피가 2배 가까이 된다. 향로의 구조는 받침, 몸체, 뚜껑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뚜껑이 닫힌 상태에서 보면 용의 입에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분출하는 듯한데, 맨 위에 봉황이 올라앉아 있는 3단 구조다. 이 향로는 기본적으로 한나라 때부터 유행한 박산향로(博山香爐)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중국의 박산향로는 대개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承盤) 위에 박산을 상징하는 중첩된 산봉우리가 얹혀 있는 모습이다.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한가운데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았다는 이상향으로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 등 삼신산을 말한다. - P46

백제금동대향로는 이런 도교적인 상징성을 갖는 박산향로에불교적 이미지인 연꽃을 결합시키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형식을 구현한 것이다. 받침대의 용은 힘껏 용틀임하면서 치솟아오르는 강한 동세를 보여주며, 뚜껑 꼭지의 봉황은 부리와 목사이에 구슬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 날갯짓을 하기 위해 꼬리를 한껏 치켜 올린 모습이다.
이에 반해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진 꽃봉오리는 풍만하면서도 팽팽한 입체감이 넘친다. 이처럼 받침대와 몸체는 동(動)과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뚜껑에는 신선의 세계를 나타내 - P46

는 무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나오는 도상은 백제인의관념 속에 있는 신선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영원불멸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는 것이다.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라는 명제를 이 백제금동대향로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추사(秋史)김정희는 명작 감상을 할 때는 ‘금강역사의 부릅뜬 눈으로,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처럼 치밀하게‘ 보아야 그 진수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고, 홈런 타자가 공을 끝까지 보듯이 작품의 구석구석을 끝까지 보라고 하면서, 내가 말하는 대로 백제금동대향로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살펴보라고 했다. 보면 다 보일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조용히 낱낱 도상을 읽으며 답사객들의 눈을 이끌었다. - P48

위덕왕 재위기는 진실로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지금 나성에서 떠올리는 유적과 유물 외에 ‘백제의 미소‘로 칭송받는 ‘서산마애삼존불‘, ‘미스 백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규암 출토 금동보살입상‘, 비록 국적과 시대가 명확지 않지만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이 6세기 후반 백제 미술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위덕왕 때 유물이다.
그럼에도 백제의 이미지를 말할 때면 멸망할 때의 의자왕을 - P58

먼저 기억하고 위덕왕 시대의 백제문화 전성기에 대해서는 말이없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역사를 연대기로 나열하면서 전란과정변을 중심으로 한 정치·전쟁사, 비유컨대 ‘사건 및 사고의 역사‘에만 치중하고 문화사로 익히지 않았던 병폐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여로 내려가 지금까지 50회에 걸쳐 봄가을로 백제문화답사를 이끌어온 것은 백제문화의 꽃과 영광을 온 국민에게 전도하고자 함이었다. 실로 이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남겨준 위덕왕치세의 백제인들에게 보내는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그지없다.
나의 느린 걸음을 앞질러 나성을 내려간 답사객들은 김인권국장의 인솔 아래 능사 터 옆으로 길게 난 긴 도랑의 다리 옆에모여 나의 다음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 옛날 나무다리가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유구와 목재가 발견되었다. 이를 토대로 이 도랑과 다리를 복원한 것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것이 있음으로써 능사 터는 더욱 진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항시 시간을 체크하며 늦을까봐 마음 졸이는 이미영 팀장이12시가 다 되어간다고 했다. 우리는 서둘러 부여 왕릉원 주차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위하여 관북리 유적지와 부소산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향우정 식당을 향해 떠났다. - P59

명작은 명작을 낳는다고 백제금동대향로를 주제로 무수한 사진 작품과 도록이 발간되었고, 이를 소재로 한 단독 저서(서정록『백제금동대향로』, 학고재 2001)도 나왔으며, 방송국의 역사 프로그램의 단골 주제로 이 향로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중 내게 가장 감동적인 프로그램은 대전방송(TJB)에서 향로의 악사 5명이 들고있는 악기를 재현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국악 연구자들은 봉황의 바로 밑에 위치한 악사부터 짧은 피리는 ‘배소‘, 긴 피리는 ‘종적(縱)‘, 기타비슷한 악기는 ‘완함‘, 그 왼쪽은 북, 다시 그 왼쪽은 거문고로 고증했다. 그리고 이 악기들을 인간문화재가 직접 만들었고,
국립국악원의 연주자가 백제 「산유화가」에 맞추어 연주했다. 지금은 유튜브로 모든 게 다 검색되어 이 글을 쓰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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