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센소지는 ‘물방울관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불화를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다. 1978년 야마토분카칸에서 처음으로 열린 특별전에는 고•려불화 52점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이 작품만은 출품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1981년에 아사히신문사에서 발간한 《고려불화> 호화도록에도 실리지 못했다. 2010년국립중앙박물관이 700년 만의 해후‘라는 기치 아래 ‘고려불화대전‘을 기획할 때도 출품을 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이 단지 유물의 존재 여부만이라도 확인하게 해달라는 요청에 억지로 응했는데, 이 불화를 꺼내왔을 때 박물관장과 학예원이 작품에 큰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감복하여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리하여내 평생에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했던 이 전설적인 명작을 실견할 수 있었다. ‘물방울관음‘은 과연 천하의 명작이었다. 다른 수월관음도는 법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온 선재동자를 앉아서 맞이하는데, 이 ‘물방울관음‘은 자리에서일어나 오른손엔 버들가지, 왼손엔 정병을 들고 서 있는 구도다. 그 자세가 너무도고아한테 신비롭게도 관음보살의 전신이 물방울에 감싸여 있다. 혹자는 이것을 버들잎으로 보기도 하고 관음보살이 아니라 정취보살趣菩薩이라고도 하지만 본래의 도상이 무엇이든 현재의 시점에서는 ‘물방울관음‘이라는 것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본래 명작이란 사진 도판으로 익혀온 탓에 실제 작품을 보면 무덤덤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물방울관음은 달랐다. 예리한 선묘와 품위 있는 채색은 도판에선전혀 느낄 수 없던 감동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아! 숭고하고도 아름다워라!" 라는 찬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어 다시 들어가 하염없이 바라보다 마지못해 박물관을 나왔다. - P12
수월관음은 아름다운 무늬를 금박으로 수놓은 붉은 법의法衣에 흰 사라(명주실로 거칠게 짠 비단)를 걸치고 반가부좌를 틀고서 용맹장부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곁에는 당신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정병에 버들가지를 꽂아 유리그릇에 받쳐 놓았고 등 뒤로는 시원스럽게 솟아오른 청죽 두 가닥, 발아래로는 흰 물결이 일렁인다. 불화 부분부분의 세세한 표현은 각 작품마다 약간씩 달라 일본 다이도쿠지 소장품에는 이채롭게도 동해용왕을 그려 넣었고 선재동자의 모습은 아주 귀엽게 폭마다 다르게 그렸다. 고려불화의 압권은 붉은 법의 위에 걸친 흰 사라의 표현에 있다. 그 기법이 얼마나 정교한지 속살까지 다 비친다. 곁에서 그림을 보던 한 중학생이 "야! 웨딩드레스를 입은 것 같다"라며 감탄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뒤이어 온 젊은 여성 관객은 ‘시스루 패션 see through fashion‘이라며 그 신기한 기법에 놀라움을 표한다. 수월관음의 우아한 자태와 화려한 복식 표현은 한국 미술사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 P16
한국미술사 불후의 명작인 안견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이제까지 국내에서 세 번 전시되었다.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개관할 때 보름간 전시된 것이 국내를 떠난 뒤 처음 공개된 것이고,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 전기 국보전‘ 때 두 달간 전시된 것이 두 번째이며, 2009년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9일간 전시된 것이 세 번째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남의 유물을 가져가 놓고 빌려주는데 뭐 그렇게 인색하냐고 원망할 수도있다. 그러나 소장처인 일본 뎬리대天理大도서관은 상설전시는 절대로 하지 않고대여해주는 일도 거의 없을 정도로 작품 보존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청을 받아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447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560년이 넘은 작품이다. 흔히 ‘견오백지천년百年‘이라고 해서, 비단은 오백년 가고 종이는 천 년 간다며 무생물도 수명이 있음을 말하곤 하는데<몽유도원도>는 신기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완벽해서 마치 어제 그린 그림 같다. 몽유도원도, 즉 ‘꿈속에 도원을 노닐다‘라는 이 그림의 내력은 안평대군이 발문에 밝힌 바대로 그의 꿈 이야기를 그대로 그린 것이다. - P22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는 남송의 대가인 마원풍의 산수화로 가히 명화라 할 만하다. 벼랑 위 멋들어진 소나무 아래로 난 길을 도포를 입은 한 선비가 동자와 더불어 거닐고 있다. 선비의 수염과 옷자락, 소나무가지와 가지에 매달린 넝쿨들이 같은 방향으로 바람에 나부끼고 있어 화면상에는 강한 동감이 일어나는데 소나무 너머 저 멀리 화면 맨 위쪽에는 둥근 달이 떠 있다. 여백을 살린 대각선 구도로 대단히 시정적詩情的인 작품이다. 비록 전칭으로 불리지만 조선 전기에 <송하보월도> 같은 명화가 전한다는 것은 한국 회화사의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이상좌 같은 전설적인 화가에 대해서는 마땅히 전기를 기술하는 것이 미술사가의 임무이고 도리이겠건만 그에 관한 자료가 이것뿐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 P30
《병진년화첩》에서 본격적으로 구현된 단원 산수화와 화조화의 특징은 어떤특수한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소재를 택하면서도 우리 산천의 아늑하고 편안한 모습을 한 폭의 서정적인 공간으로 잡아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일컫는다. <병진년화첩>을 보면 단원의 그림은 대단히 부드럽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산이나 나무줄기를 묘사한 것을 보면 필치가 아주 거칠다는 것이 눈에 띈다. 속도감마저 느껴지는 붓놀림이다. 이는 그의 필력이 능숙할 데로 능숙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처럼 스스럼없는 필치가 스스럼없이 구사될 때 단원은 가장 단원다웠다. - P45
국보·보물은 100년 이상 된 유물을 대상으로 하므로 20세기의 근대문화재는 국가지정 문화유산이 될 수 없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한 것이 등록문화재다. 등록문화재는 50년 이상 된 유물을 대상으로 한다. 18세기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19세기 추사 김정희 작품에 국보·보물이 있듯이 20세기 화가의 작품도 언젠가는 문화재가 될 것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근대미술사학계에 검토.의뢰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국민화가로 칭송되는 박수근(1914~1965)도 당연히 들어 있다. 미술사가들은 그의 대작에 속하는 60호(가로 97cm 세로 130cm) 크기의 <절구질하는 여인>과 <나무와 두 여인>을 등록문화재 대상으로 꼽았다. 그러나 박수근은 소품에 더 익숙했다. 생전에 대작을 할 기회가 적어 소품속에 자신을 완벽히 표현해왔다. 박완서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나목>이라는 소설은 한국전쟁 중 밥벌이로 PX에서 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손수건에 초상화를 그려주던 박수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 P54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 수심엔 봄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박수근 서거 45주기 유작전‘에서 박완서 선생을 만나게 되어 소설 속 작품이 어느 것이냐고 물으니 <나무와 여인>(3호)이라고 가리켰다.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서민들의 모습은 하루를 넘긴다는 것 자체가 힘겨웠던 50년 전 우리네 삶의 표정인데 우리는 나목처럼 그것을 견디어냈고 그것을 그린그림은 어느덧 문화재가 될 정도로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는 얘기다. - P54
박물관에 가면 ‘원삼국시대‘라는 표기가 있다. 한때 이것은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왜 우리나라 박물관에는 삼한시대라는 표기가 없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적 없는 ‘원삼국시대‘라는 말이 나와 학생과 일반인들을 혼동시키냐는 것이다. 당연한 문제 제기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고고학, 미술사학의 고민이다. 원삼국시대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철기시대가 전개된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 한반도 북쪽에는 부여·동예 · 옥저가,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여에서 고구려가 갈라져 나왔고, 고구려의 한 갈래가 백제를 낳았고, 진한의 사로국은 신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낙동강 지역에서는 가야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남은 부족이 고대국가를 향하여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였다. 삼한시대도 아니고 삼국시대 초기만도 아니다. 결론이 삼국시대였을 뿐이다. 그래서 고 김원용 선생은 삼국정립의 기원起原.proto-type단계라는 의미로 ‘원삼국‘이라는 시대개념을 제시하였다. - P80
이 시기 문화의 체질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질그릇에 뚜렷이 나타났다. 야철술의 에너지 활용 기술을 토기 제작에 적용한 가마)는 1천 도까지 올릴수 있어 종래의 토기에서 와도기라는 회색 연질도기로 바뀌었다. 이것이 기원후 300년 무렵에 경질도기로 발전한 것이 가야 도기와 신라 도기이다. 원삼국 도기 중에는 ‘쇠뿔손잡이항아리‘라는 아주 특이한 질그릇이 있다. 어찌 보면 멕시코나 잉카의 그릇처럼 생겨 우리나라에도 저런 그릇이 있었던가 의아해하곤 한다. 이것을 한때는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라고 어렵게 부르기도 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목이 긴 항아리에 한 쌍 또는 서너 개의 쇠뿔 모양 손잡이를 붙인 것이다. 쇠뿔손잡이는 기능보다도 쇠뿔 같은 힘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디자인적 변형이다. 기능만을 생각한다면 쇠뿔이 아래로 향해야 한다. 한마디로 질그릇에서도 이처럼 디자인적 과장이 일어났던 것이다. 원삼국시대는 고대국가로 가기 위해 지배층의 권위가 한껏 강조되던 시기였다. - P80
똑같은 연꽃무늬 수막새 와당인데 백제는 우아하고, 고구려는 굳세고 신라는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일본 기와는 디자인이 깔끔하고 중국 기와는 형태미가 강하다. 이것은 와당뿐만 아니라 삼국과 동아시아 미술 전반에 나타나는 미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을 연꽃무늬 와당이라는 단일 주제로 놓고 보니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유익했다. 삼국시대 건축에 언제부터 기와가 나타났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삼국사기》고구려 미천왕조를 보면, 그는 어려서 신분을 감추고 수실촌의 한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집주인이 아주 못되게 굴어 어떤 때는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워잠을 못 잔다며 어린 을불(미천왕)에게 밤새도록 연못에 ‘깨진 기왓장을 던지게 했다고 하니 그 이전부터 기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원삼국시대 와질도기가나타나는 1세기 무렵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삼국 중 백제 기와가 단연 돋보인다. - P84
백제는 장인을 사회적으로 우대하여 기와 잘 굽는 와공瓦工 와박사라고 했다. 많은 외박사가 아스카시대 일본에 파견되었고 신라 황룡사 건축에 초빙된 백제의 아버지는 와박사를 대동하고 갔으니 신라와 일본 와당에 백제의 영향이나타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백제와당의 백미는 8판 연꽃잎을 보드랍게 공굴리는 형태미에 있다. 유연한 볼륨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가볍게 테두리를 두르기도 했고 봉긋이 솟은 모습을 위하여 귀꽃을 살짝 뾰족이 세우기도 했다. 공굴림이나 귀꽃이 더 강했다면 그런 우아함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 와박사들은 디자인의 절제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 P84
우리나라 미술이 지향했던 구체적인 미적 목표가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내가가장 먼저 제시하는 대답은 ‘검이불루화이불치여덟 글자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5년(기원전 4)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新作宮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儉而不陋화려하지만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華而不侈"
위례성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궁궐의 자태를 말한 이 여덟 글자의 평문은 백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감을 대표할 만한 명구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왕흥사 사리함, 불국사의 석가탑은 ‘검이불루‘ 하고 미륵사 서탑 사리호와 불국사 다보탑은 ‘화이불치‘ 하다는 평이 너무도 잘들어맞는다. - P97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특히 궁궐 건축의 상량문에 계속 등장한다. 고종이 경복궁 북쪽 끝에 건청궁을 짓고 그 곁에 당시로서는 현대풍을 가미한 화려한 서재로 집옥재를 지었다. <집옥재 상량문>을 보면 예의 여덟 글자를 약간 바꾸어 "검부지루화부지사儉不至陋 華不至奢"라고 했다. 조선 헌종은 21살(1847) 때 후궁 경빈김씨를 맞이하면서 새 생활공간으로 지금의 낙선재를 지으며 자신이 직접 쓴 <낙선재 상량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곱고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은 것은 과도한 규모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채색한 서까래를 놓지 않은 것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이라네." 그래서 낙선재는 궁궐의 전각이지만 단청을 입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도 낙선재가 누추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확실히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백제의 미학이자 우리 민족의 미학으로 삼을 만하다. - P97
금·은·동 사리함을 보면 한결같이 형태가 아름답다. 동사리함은 통형이고, 은사리함은 긴 목이 달린 항아리 모양이며, 금사리함은 구기자 열매 같은 예쁜 형태이다. 동사리함은 소박하고, 은사리함은 듬직하며, 금사리함은 고급 향수병으로 제격이라 생각될 정도로 고귀한 모습이다. 세 사리함의 형태는 그렇게 다르지만 뚜껑에는 모두 봉곳한 꼭지가 달려 있어 한 세트로서의 디자인적 통일성을 갖추었다. 아무리 보아도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다‘는 백제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리함이 갖는 미술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 이는 땅속의 왕을 위한 금관의 시대에서 절대자의 분신(사리)을 모신 사리함의 시대로 전환했음을 말해준다. 백제의 공예가 고분미술에서 불교미술로 일대 전환한 것이다. - P98
오늘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백제의 아름다움에 경탄과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백제미의 실체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 것은 불과 지난 50년 동안 있었던다섯 차례의 기념비적 발굴 덕분이다. 1959년의 서산 마애불, 1971년의 무령왕릉, 1993년의 백제금동대향로, 2007년의 왕흥사 사리함 그리고 2009년 1월 익산미륵사에서 출토된 순금사리호이다. 6층까지 간신히 남아 있던 미륵사 서탑이 붕괴 위험에 놓여 해체수리하던중 1층 사리공에서 출토된 이 환상적인 사리호는 말할 수 없이 화려하면서도 고귀한 품위가 있어 왕흥사 사리함과는 정반대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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