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닛이 내어준 언어의 방에 머물면서 내 깊고 어둑한 곳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놓을 용기를 냈습니다. 음, 솔직히말하면 그가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장기간을 싸우고, 대뜸 트럭에 올라 몇주고 어디론가 떠나는 대목에서는 너무 부럽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기혼 유자녀 여성이었다면 집안과 밥상에서 전투를 치르는 이야기도 멋지게 써냈을지 모르겠습니다. 솔닛이 쓴 밥 이야기를 읽었다면, 나는 내 삶의 지배자 노릇을 하는 ‘밥‘에 끌려다니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내가 바라는 건 명절 철폐도 아버지와 밥 먹지 않기도 아닙니다. 집을 밥의 즐거움을 되찾는 장소로 만드는 것입니다. 엄마 제사를 간소화하자는 제안을 수용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나도 가족의 구성원이자 상 차리는 당사자로서 권한을 갖고 있음을 차분하게 말하고 싶은 거죠. 끊어내지 않고 연결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싶습니다. 솔닛이 말한 작가의 책무인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 - P37

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302) 일을 계속해보고 싶습니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을 두번 읽었습니다. 한번은 솔닛은 어떻게 오늘의 솔닛이 되었나를 생각하며 읽었고, 한번은 그의 삶에 빗대어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되었나를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선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전진한 것은 후퇴할 수도 있고, 닫힌 것이 다시 열리기도 한다는것. 한 사람의 긴 강물 같은 삶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보여주있습니다.
다시 써야겠습니다. 우리의 핵심 도구는 이야기니까요. "낮은 곳들로부터 벗어날 때 사다리로 쓴 논리와 서사를 다른 이들에게도 건네주고 싶"(15면)다는 솔닛의 자상함이 내 막힌 글을 뚫어주고 이야기를 끌어내주었듯이, 내 이야기도 누군가의 말문을 틔우는 입김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 P38

‘가족‘이 삶의 화두가 됐다. 마치 공기처럼 삶에서 한번도분리된 적 없는 그것. ‘보호‘보단 ‘제약‘이 연상되는 단어. 『반사회적 가족』이라는 책은 제목부터 나를 자극했다. 모두가느끼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금기가 들어 있을 것 같았지. 예감대로였다. 저자는 가족의 폐단을 세가지로 꼽는다.
첫째, 부와 빈곤을 세습하는 것. 둘째, 사생활권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개성과 인권을 억누르고 갈등을 은폐하는것. 셋째, 모성 역할과 가사노동에 여성을 속박하는 것.
난 한줄한줄 빨려들었다. 흙수저·금수저란 말도 있듯이 부모의 능력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된다. ‘계급 배치의 강력한 기관‘으로 가족이 기능하지. 우리나라에서도 가정폭력은 뉴스의 단골 소재잖아. 부모는 자식을 독립된 인격으로 대하기보다 통제하고 간섭하지. 사람들은 그래도 가족밖에 없다고들 말하지만, 가족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경우도 허다한 게 현실이다.
특히 가족이 ‘여성을 모성 역할과 가사노동에 속박한다‘ - P41

는 내용에 아무래도 난 공감했다. 너희들 성장을 지켜보는일은 과한 축복이자 더없는 행복이었지만 그 일상을 떠받치는 노동과 일상은 혹독했다. 육아는 퇴근과 퇴직도 없다고 하는데, 그 피할 길 없음과 미룰 수 없음이 가장 억압적인점이었다. 어떤 좋은 직업도 자기 의지로 쉬거나 그만둘 수없다면 끔찍하겠지.
어쩌면 너희들에겐 엄마의 손길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일을 시작하고는 체력이 달려서 양육에 전념하지 못했지만, 어떤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건 아니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엄마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떨쳐지지 않으니까. 읽고 쓰고 강의하는 순간순간에도 불쑥 엄마 자아가 튀어나와 당황하곤 했다. 엄마 일과 작가 일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느라 어느 하나도 제대로 누리기 어려웠지.
내가 ‘자취‘를 해볼까 하고 결심한 이유다. 실은 너희들이 자취 이야기를 할 때 힌트를 얻었어. 흔히 자녀들이 다 커서 독립하면 중년 여성은 집에서 홀로 ‘빈둥지증후군‘을 겪 - P42

는다고들 하잖아.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어. 왜 엄마는 꼭 남겨진 자의 역할이어야 하는가? 나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들었고, 떠나보고 싶었다. 젊어서 누리지 못한자유를 이제라도 되찾고 싶은 마음 같은 거야. 내가 세운 자취의 목표는 두가지다.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고요한 단독자‘의 시간을 늦게라도 살아보는 것. 그리고 반사회적 가족』을 교본 삼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중산층 가족을 가족 외부에서 비판적으로 사유해볼 기회를 갖는 것.
늘 현실은 이론보다 앞선다. 요즘 한국사회도 혈연 중심의 가족에 대한 신비화와 과대평가가 사라지고 있지. 이미 독신, 생활공동체, 동성가구 등 다양한 가구 형태가 늘어나고 있고, 굳이 가족이 아니더라도 관계를 만들고 연결되고자하는 인간의 열망은 더 기발하고 긴밀해지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내 가족도 못 챙기는 사람이 되는 것만큼이나 내가족만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렵다. 우선 가족 바깥을 향해 몸을 틀어본다. - P43

『욕구들』에서 저자는 ‘딸‘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어?"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뻥 뚫리는 말입니다. ‘하지 마‘ 의 세계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멋진 문장이죠. 사랑눈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나중에‘라는 시간은 영영 도래하지 않으며 지금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해도 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증여이고, 원함에 관해 아이들이 본받을만한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에 비해 모자람 없는 어머니의 일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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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나머지 여섯 날에 힘을 내어 일하고, 슬픔을 견디고, 화를 내고, 해야 할 싸움을 이어나갈지도 모른다고요. 전통음악에 담긴 정서로 ‘한‘을 이야기할 때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너무 강렬한 개념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조금씩 수긍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꾸 억울하게 죽는 사회에서, 낫기도 전에 또 쌓이는 이 슬픔과 좌절의 응어리는 다 어디로 갈까요?
안부를 묻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바로 지난 편지에서버거 값을 치르지 못해 곤란해하다 담배 세 갑과 물물교환이라는 신박하고도 유쾌한 해결책을 만나는 늦은 밤의혼비씨를 상상하며 웃었는데, 그 노점이 있던 장소가 이대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이제 마음이 저릿합니다.
물론 저의 이태원에서도 수많은 즐거운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대체 우리 중 누구에게 그렇지 않겠어요?
혼비씨는 무엇에 기대어서 이 시간을 견디고 있나요? 담요님은 담배가 더 늘진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부디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곁에 두고 단단히 붙드시길 바랍니다. - P94

몸과 마음을 바닥에 질질 끌듯 조금 힘겹고 무겁게 11월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여러 일정과 약속들을 취소했고, 과수면과 불면 사이를 끝없이 왔다갔다하고 있고,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두꺼운 책들과 긴 드라마를 골라폭식하듯 읽고 보았습니다. 친구들을 만난 이틀을 빼고는근 한 달 동안 술은 조금도 마시지 않은 대신 아침마다 보이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6.1킬로그램의 하리보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도무지 나아지지 않을 때는 근처관악산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번만은 생각보다 산이 그리위로가 되어주지 못했어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나무들이 유난히 쓸쓸해 보여서,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김설인 옮김, 현암사, 2019)에서 한번 읽은 뒤로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혀버린 앤 섹스턴의 시구가 자꾸 떠오르고야 말았습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나무들까지도 알고 있네.
_앤 섹스턴, 「애도 Lament」 중에서 - P97

이런 죽음들을 겪을 때마다 여전히 무엇을 어디에 놔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제 몸과 마음부터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울다가, 오늘의 세번째 하리보 봉지를 뜯어 초록색 젤리를 골라먹는 데에 몰두하다가 잠들기 위해 수면제 한 알을 입에 넣다가, 관련된 건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찾아 읽다가, 관련된건 하나도 보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책이나 드라마 속으로 도망치다가, 문득문득 어리둥절해집니다. 이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때로는 이보다는 더 고통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날에는 슬픔에 휘둘려 아무것도 못하는 제가 나약하게 느껴졌다가 어떤 날에는 변함없이 일상을 꾸려나가는 제가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온전히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이고, 그래야 한다고 학습된 슬픔인지헷갈리기도 합니다. - P100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느끼는 고통에 대해충분히 말하고 귀 기울이며 서로에게 ‘고통의 곁‘이 되어주어야 개별적 슬픔이 모여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을 믿으면서도, 상담 선생님께 힘든 마음을 털어놓다가 이런 시기에 감히 고통이라는 단어의 주어 자리에 제가잠깐이라도 앉는 게 가당키나 한지 부끄러움이 몰려와 갑 - P100

자기 상담을 끊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 달째 완전히 멈춰있는 제 SNS를 보고 괜찮은지 걱정돼서 보낸다는 온-오프 친구들의 안부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드는 죄책감과비슷합니다. 이 일로 걱정의 목적어가 되는 건 고통의 주어일 때보다 몇 배 더 무언가를 훔쳐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래도 될까?‘라는, 슬픔 속에서 어떤 유의 당위나 윤리를 가늠하려는 감정들이야말로 제가 이 커다란 비극의 중심에서 실질적으로는 거리가 먼,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가 유가족이었을 때 느꼈던 슬픔은가늠의 여지조차 없는 슬픔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요. 바깥의 사람이라는 이 거리는 온전한 공감을 불가능하게하겠지만, 이 거리가 가능하게 해주는 일을 하나씩 찾는게 애도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퍼만 하는 시간에서 벗어나서요.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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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무

성취 앞에서 저렇게 절제할 수 있을까 
시련 앞에서 저렇게 겸허할 수 있을까

나무 가득 꽃 피워놓고
교만하지 않는 백매화처럼


단 한잎도 붙잡지 못하고 날려 보내면서
비통해하지 않는 산벚나무처럼

어떤 꽃나무


이쁜 날들은 갔어

그래도 널 사랑해

네가

어떤 꽃나무였는지 아니까

라일락



라일락은 왜 거기 있을까


사월이
간절하게 불러서
거기 있다


너는 왜 거기 있는가

좋은 나무



가지마다 굵은 열매를 매달아
주인이 흡족해하는게
자랑인 나무가 있다
이른 봄부터
희고 수려한 꽃을 피우는 게
생의 기쁨인 나무도 있다
그런 나무들 사이에서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이 먼저라고 믿는
나무가 있다
작고 조촐한 꽃밖에 못 피웠지만
울퉁불퉁 못생긴 열매만을 키웠지만
향기 짙은 열매를 키웠다는
뿌듯함 하나로 사는 나무가 있다
잘난 나무는 아니지만
늘 좋은 나무가 되려고 애쓰는 나무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이 먼저라고 믿는
나무가 있다

철쭉꽃



철쭉꽃이 아침에 마시는 바람을
나도 마신다

철쭉꽃을 흔드는 바람에
나도 나부낀다

흔들린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사월에서 오월로 넘어가는
바람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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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우


멋있으면 다 언니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쓰고, 『여자 둘이살고 있습니다 퀸즐랜드 자매로드』를 김하나와 함께 썼다. 팟캐스트 <여둘: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를 제작,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편지 저편 ‘혼비씨‘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꽃이 피었다가 졌다.
시간이 사람에게 하는 일이 그사이 어김없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풍경 사이로 끊임없이 일상의 피로를 해결되지 않는문제들을 늙음과 죽음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 말이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다정소감을 쓰고, 전국축제자랑을 박태하와 함께 썼다. 못 견디게 쓰고 싶은 글들만을 천천히 오래 쓰고 싶다.


"당연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것을 실현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텐데, 그중 ‘함께 나눠서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꼭 물리적인 몫의 나눔이 아니더라도함께 꾸준히 일상을, 웃음을, 마음을 나누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어려서부터 호칭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권 사람들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한국어 호칭이 상대방에 대한 나의 태도를 담는 그릇으로서 기능하는 것에 익숙해진 저 같은 사람은 머리로는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서는 이게 분리가 칼같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공식석상에서는 "김연경씨"라고 말하겠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연경언니‘ ‘연느님‘인 것처럼 말이에요. 이럴 때 저에게 "김연경씨"는 의미의 누수, 존경심의 누수를 넘어 정체성의 누수가 생기는 단어가 되어버리고 말아요. ‘언니‘나 ‘선배‘ 같은 호칭에 이미 새겨진 위계가 싫으면서도, 호칭을 버리는 것이 언어적 평등의 시작임을 알면서도, 나이나 직함과 전혀 관계없이 순수한 존경심을 담아낼 명명법을 찾고 싶은 관습적인 욕망 또한 남아 있어서, 찾다보면 결국 위계적 호칭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 도돌이표. 현재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 체계 안에서는 존경심을 담는 호칭으로 ‘언니‘나 ‘선배‘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 이상의 대안은 없으니까요. - P21

재미있냐고 자꾸 물어보는 선생님이 다음달 말일 자유 탁구 시간에 다른 반 풋내기들과 친선 경기를 가져보자고 하셔서 저희는 약간 흥분 상태입니다. 승부 vs. 상부상조의 혼란에다 경쟁자 vs. 같은 팀 복식조 파트너로서의 혼합된 감정까지 더해져 아주 파란만장한 한 달을 보내게 될 예정입니다. 어쨌거나 이 지름 40밀리미터짜리 가볍디가벼운 공이 만들어내는 ‘탕타당타당‘과 ‘통토동토동‘에 집중하는 동안만은 많은 시름을 잊고 있습니다. 천둥같이 발 구르는 소리에 놀라고 분하기도 하지만요.
누군가는 속이 빈 나무를 두드리는 데 집중하며, 또다른 누군가는 속이 빈 플라스틱 공을 쫓아다니는 데 몰두하며 자신만의 번뇌를 다스리는 거겠죠. 이 목- 탁 - 구가 어디로 나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당분간은지속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믿지 못하시는 것 같아도재미가 있거든요. 재미와 (얄)미움이 승부와 상부상조처럼 공존하는 탁구입니다. - P55

혼비씨의 편지를 읽으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진되었다고, 지금 상태가 번아웃이 맞다고 혼비씨가 알아차렸다는 점 말입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일 거예요. 일을 의식적으로 줄이는 것도, 작정하고 쉴 틈을 만드는 것도,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해보거나 뭐든 에너지를 채우는 활동도 말이죠.
한국 사회의 많은 일하는 사람들처럼 저 역시 번아웃으로 짐작되는 시기를 지나온 것 같아요. 짐작이라 말하는 건 그때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 뭔지 당시에는 스스로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험들은 한창 그가운데 있을 때는 진행중이라는 게 보이지 않다가 지나가고 나서야 그 시간이 뭐였는지, 그때 내가 어땠는지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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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모레아 기행』에서모뎀바시아 편을 읽어보면 모넴바시아를 아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믿을 만한 안내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에 따라 모넴바시아를 조금 더 파악해보면 이렇다.


어떤 사람들이 여기 살았을까? 바람, 바다, 외로움, 가난이 망치가 되어 영혼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것을 견딘 사람들.
이곳에 없는 것?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속삭일정원. "여기는 비옥한 땅이야. 이곳을 잃으면 안되니까 고개를 숙이고 폭군과 화해하자!"라고 말할 경작지.
있는 것? 무자비한 바다.
할 수 있는 일? 어부, 무역상, 해적.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 비잔틴 황제들은 이렇게판단했다. "걔들은 그냥 놔둬" (그들은 오직 독립,독립만을 원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넴바시아 여행기를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 P160

폐허에서 여행자는 희망 없는 투쟁에 기꺼이 뛰어드는 영혼을 본다.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않고 치열한 투쟁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영혼을 보는 것이다. 그 영혼은 승부를 떠나서 마치 게임을 하듯 그 투쟁에 몰두하기 때문에 즐거움을느낀다. 그리하여 내 영혼은 이렇게 맹세한다. 다시는 내 마음에 인생의 환락, 도취, 근심으로 부담주지않으리라. 나는 허공에 튀어 오르는 불꽃같은 상태로 내 영혼을 보존하리라."


니코스의 충실한 독자였던 나는 이 문장이 낯익어도 너무 낯익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일생에 걸쳐 아무런 대가도 보상도 바라지 않고(대가나 보상 때문에 하지 않게 되는 일이 너무 많으므로) 용감하게 삶 속으로 돌진하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 ‘튀어 오르다‘ ‘솟구쳐 오르다‘는 그가 특히 좋아하는 표현으로 그는 어디 가서 뭘봐도(꼭, 모뎀바시아가 아니어도) 허공에 튀어 오르는 불꽃이 되고 싶어 했지 납작 엎드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여행자는 풍경을 보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본다고 한 것은 프루스트였던가?). - P161

그때부터 마법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정신을 조금 차리고 처음에는 눈동자만 나중에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위를 봐도 옆을 봐도 아래를 봐도 모두 다 별이었다. 어떤 꿈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는 꿈같은 우주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크고 선명하고 고요하고 가까운 밤하늘은 처음이었다. 꼭 별이 나를 하늘로 끌어당긴 것처럼 내가 땅이 아니라 땅과 하늘의 중간계에 붕 떠 있는 것같았다. 느닷없이 찾아온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나는 길잃은 나방 한 마리와 함께 한쪽 발은 맨발인 채로 별에 에워싸여 있었다. 저 멀리 내가 저녁을 먹던 식당들도 불빛하나씩만을 켜둔 채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외로운 불빛아래 잠든 사람들 머리 위에도 커다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바위도 거대했고 바다도 거대했고 하늘도 거대했다. 지상의 거대한 공간들은 별들이 가득한 영원으로 통하고있었다. 우리 자아 너머의 세계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인간의 마음도 별 하나를 품을 만큼, 우주를 품을 만큼 거대할지 모른다. 너무 애틋했다. 너무 경이로웠다. 숭고했다. 서로 오염시키고 상처 입히고 온갖 일을 엉망진창 벌이면서도 어찌어찌 각자 인간의 꼴을 갖춰가는 세속적인 - P168

삶과 천상의 삶이 이곳에서는 아주 멋지게 만나고 있었다. 바로 이런 별밤 때문에 인간들은 죽은 사람들이 별이되었을 거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크고 가득하고 눈부신 모습으로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방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꿈결처럼 은하수를 타고 흘러들어온 것 같다. 내가 방에 들어오기전 나방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향해 작은 별처럼 날아갔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과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한데 도대체뭘 그렇게 많이 원하고 괴로워했단 말인가. 모든 밤마다별은 반짝이는데, 별이 가득한 우주가 뭔지 정체를 알 수없지만, 별은 신비로운 에너지를 흘리면서, 무한을 상상하게 하면서 그냥 거기, 그 모습으로 있는 것만으로 좋은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밤하늘처럼 큰 세계가 내 마음을잡아끌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렇게 놀라고 감탄해야만 가벼워진다. 감탄이 나의 힘이다.
영원한 행복은 없지만 영원한 기쁨은 있다. 그날의 밤하늘은 나에게 스며들었고 내가 사는 동안 내내 나와 함께할 풍경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나의 습관이고 취미고 쾌락이다. 늦은 밤 퇴근할 때 - P169

마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은 적이 없고 그때마다 모뎀바시아 밤하늘의 기억이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함께 펄럭인다. 내 마음의 일부분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내 몸의 일•부분은 한쪽 발은 들고, 황금빛 나방을 든 한쪽 팔은 하늘을 향해 뻗은 자세로 영원히 굳어 있다. 그날 밤의 하늘은이 세계에 다가가는 나의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내삶에 경이로움을 섞어놓고 싶어졌다. 경이로움은 내 안에없던 빛이 내게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니 이제 나는 나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 홀로 창조적이지 않다. 자율성에는 한계가 있고 세상에 나와는 다른 생각, 나와는 완전히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사방 어디를 봐도보이는 것이 나뿐이었다면 나는 지금쯤 ‘나나나나‘로이어지는 가시철조망에 찔려 죽었을 것이다. 나를 변하게하는 것은 고백도 아니고 내면의 응시도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생명, 다른 이야기다. 내가 자꾸만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그날 밤의 경이로움과 같은, 세상에 숨겨진 경이로움과 마주치는 그 우연을 기대해서다. 우리는시간과 우연의 자식들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시간과 우연을 초월해서 살아남는 경이로운 것들,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불멸일 것들, 우리를 끝까지 기쁘게 인간이게 하는것들도 있다. 그것들도 별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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