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나머지 여섯 날에 힘을 내어 일하고, 슬픔을 견디고, 화를 내고, 해야 할 싸움을 이어나갈지도 모른다고요. 전통음악에 담긴 정서로 ‘한‘을 이야기할 때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너무 강렬한 개념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조금씩 수긍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꾸 억울하게 죽는 사회에서, 낫기도 전에 또 쌓이는 이 슬픔과 좌절의 응어리는 다 어디로 갈까요? 안부를 묻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바로 지난 편지에서버거 값을 치르지 못해 곤란해하다 담배 세 갑과 물물교환이라는 신박하고도 유쾌한 해결책을 만나는 늦은 밤의혼비씨를 상상하며 웃었는데, 그 노점이 있던 장소가 이대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이제 마음이 저릿합니다. 물론 저의 이태원에서도 수많은 즐거운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대체 우리 중 누구에게 그렇지 않겠어요? 혼비씨는 무엇에 기대어서 이 시간을 견디고 있나요? 담요님은 담배가 더 늘진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부디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곁에 두고 단단히 붙드시길 바랍니다. - P94
몸과 마음을 바닥에 질질 끌듯 조금 힘겹고 무겁게 11월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여러 일정과 약속들을 취소했고, 과수면과 불면 사이를 끝없이 왔다갔다하고 있고,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두꺼운 책들과 긴 드라마를 골라폭식하듯 읽고 보았습니다. 친구들을 만난 이틀을 빼고는근 한 달 동안 술은 조금도 마시지 않은 대신 아침마다 보이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6.1킬로그램의 하리보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도무지 나아지지 않을 때는 근처관악산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번만은 생각보다 산이 그리위로가 되어주지 못했어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나무들이 유난히 쓸쓸해 보여서,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김설인 옮김, 현암사, 2019)에서 한번 읽은 뒤로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혀버린 앤 섹스턴의 시구가 자꾸 떠오르고야 말았습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나무들까지도 알고 있네. _앤 섹스턴, 「애도 Lament」 중에서 - P97
이런 죽음들을 겪을 때마다 여전히 무엇을 어디에 놔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제 몸과 마음부터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울다가, 오늘의 세번째 하리보 봉지를 뜯어 초록색 젤리를 골라먹는 데에 몰두하다가 잠들기 위해 수면제 한 알을 입에 넣다가, 관련된 건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찾아 읽다가, 관련된건 하나도 보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책이나 드라마 속으로 도망치다가, 문득문득 어리둥절해집니다. 이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때로는 이보다는 더 고통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날에는 슬픔에 휘둘려 아무것도 못하는 제가 나약하게 느껴졌다가 어떤 날에는 변함없이 일상을 꾸려나가는 제가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온전히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이고, 그래야 한다고 학습된 슬픔인지헷갈리기도 합니다. - P100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느끼는 고통에 대해충분히 말하고 귀 기울이며 서로에게 ‘고통의 곁‘이 되어주어야 개별적 슬픔이 모여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을 믿으면서도, 상담 선생님께 힘든 마음을 털어놓다가 이런 시기에 감히 고통이라는 단어의 주어 자리에 제가잠깐이라도 앉는 게 가당키나 한지 부끄러움이 몰려와 갑 - P100
자기 상담을 끊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 달째 완전히 멈춰있는 제 SNS를 보고 괜찮은지 걱정돼서 보낸다는 온-오프 친구들의 안부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드는 죄책감과비슷합니다. 이 일로 걱정의 목적어가 되는 건 고통의 주어일 때보다 몇 배 더 무언가를 훔쳐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래도 될까?‘라는, 슬픔 속에서 어떤 유의 당위나 윤리를 가늠하려는 감정들이야말로 제가 이 커다란 비극의 중심에서 실질적으로는 거리가 먼,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가 유가족이었을 때 느꼈던 슬픔은가늠의 여지조차 없는 슬픔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요. 바깥의 사람이라는 이 거리는 온전한 공감을 불가능하게하겠지만, 이 거리가 가능하게 해주는 일을 하나씩 찾는게 애도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퍼만 하는 시간에서 벗어나서요.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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