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편지
강은교


엄마, 여긴 추워요
엄마, 여긴 진흙이 너무 많아요
진흙이 내 팔을 휘감고 있어요
진흙이 내 입술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어요

엄마, 오빠의 차가운 팔이 나를 움켜잡고 있어요
오빠의 가슴 위로 진흙이 달려와요

아, 나를 진흙이 먹고 있어요
숨을 쉴 수가 없네요

진흙이 내 머리칼을 딱딱하게 해요
엄마가 황홀히 쓰다듬으며 땋아주던 머리칼
‘참 탐스럽기도 하지‘
엄마의 웃음소리 검은 물 위로 떠가요

버려진 심장 가득한 바다의 저 방 - P13

어둠의 보따리들 사이로 둥둥 떠다니는 
피톨들
물의 검은 터널 속, 터널의 검은 입속
허우적이는, 미처 눈 못 감은 피톨들

어른들은 기다리래요
어른들은 춤추면서, 우리들의 바다를 밟아대면서
기다리래요, 기다리고 또 기다리래요

이젠 안 돼요,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을래요

어른들은 나를 두고 가버렸어요
이제 나는 떠나가요
나는 지금 어둠 속에 눈 꼭 감고 있어요
파도에 결박되어

평화란 이런 것인가 봐요, 아무도 없는 것,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진흙들만 살아서 나를 먹어버리는 것, 진흙의 거품이 되는 것 - P14

나는 어른들이 평화를 접시 위에 놓고 맛있게 입맛 다시는 것을
평화의 쌈을 싸는 것을 보고 있어요
그래요, 엄마, 난 어젯밤엔 배추가 되는 꿈을 꿨어요
배추가 되어 엄마의 손길에 쓰다듬어지는 
꿈을
방방곡곡 맛있게 적시는 꿈을
엄마의 향기 피어오르는 평화의 소금간이 되는 꿈을

그래요, 엄마, 나는 노오란 꽃잎 배추가 되어 엄마의 뜰에 누울 거예요
노오란 꽃잎 배추가 되어 엄마의 부드러운 주름에 누울거예요
소금간이 되어 엄마의 혀끝에 앉을 거예요

노오란 종이배들이 떠와요 - P15

파도 가득 노오란 리본들이 달려와요
나는 그 종이배를 타려 하지만
나는 그 노오란 리본들을 잡으려 하지만
선생님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호야, 저 노오란 리본, 잊지 마, 잊지 마, 저 노오란 너희들의 날개를‘
선생님은 지금도 뱃머리에서 소리치고 계시지만

아, 이 진흙을 치워주세요
저 노오란 종이배를 타고 싶어요
엄마의 뜰 송이송이 노오란 리본의 나무 아래 서고 싶어요
저 ‘노오란 리본의 정원‘ 거닐고 싶어요

엄마, 빛의 젖꼭지를 주세요
엄마, 평화의 눈을 주세요
엄마, 천국의 뺨을 주세요

엄마, 나를 꼭 껴안아주세요 - P16

저 배의 날개 일어설 때까지

안녕
안녕 - P17

반도의 자화상
곽재구


개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리
천마리
만마리
.
.
.
끝없이
걸어가고 있다

한 손에 국화꽃을 들고
옷깃에 노란 리본을 꽂고
낑낑대며
끙끙거리며 - P30

눈물 콧물 범벅 속 쭈그리고 앉아
세상 어디 떠날 곳도 기약할 곳도 없는
노란 절망의 종이배를 접고 있다

생각하면두 발로 꼿꼿이 서서
자유와 정의와 노동의 참해방을 부르짖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의 시절이 
있었다

오천만 마리의 개가 아닌
오천만의 따뜻한 피를 지닌 인간으로 서서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절규하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 P31

퍼렇게 멍든 몸뚱이로
수배당한 대학생이 물 위에 떠오르고
스무 살의 풋풋한 아들이 욕조의 물고문에 숨을 거둘 때해도
스무 살의 아름다운 딸이 코스모스 씨앗을 뿌려달라며 분신하던
그 암울한 시절에도 우리에게 불같은 희망은 있었다
페퍼포그와 지랄탄의 향연 속에서 우리들은 매일매일
우리의 아들딸에게 물려줄 꽃 같은 대한민국을 꿈꾸었다

개의 이름으로 묻노니
언제부터 당신은 개가 되었는가?
50층 펜트하우스에 살며 연봉을 수십 억 받는다고 해서 개가 아닌가?
눈과 코와 귀를 지폐로 쑤셔 막고
바닷가재 식사를 하고 로열 발레를 보고 나스닥 시세를 점검하고 - P32

먼 나라 섬의 은행에 이름 없는 통장을 개설하고
그림 같은 이국에 별장 몇 채를 지녔다고 해서 개가 아닌가?
이 뉴스를 싣지 마세요, 라고 사장이 말하면 살살 꼬리를 흔들고
최저임금이며 비정규직이며 전세금을 날린 이웃들의 절망과 슬픔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내 땅값 내 아파트값 한푼 더 준다는 노인 연금에 매달리는
당신은 어느 나라의 잡종견인가?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절 다 지났다고 하하 웃는
당신의 공화국은 당신의 어린 자식에게 물려줄 고향이 되었는가?

슬픈 눈동자의 개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끝없이 반도의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다 - P33

흰 국화꽃 한 송이를 들었다고 해서
갈 곳 없는 노란 종이배를 하나 접었다고 해서 우리가 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진짜 개는
주인과 함께 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멧돼지와 싸우다 죽는다
온갖 탐욕과 부조리와 헛된 명예를 거부하며
농장 안의 염소와 토끼
어린 닭들과
새로 피어날 아침의 나팔꽃을 위해
피침 흘리는 멧돼지와 싸우다 죽는다. - P34

적폐가 아니라 지폐
김사인

꼴좋다 나여 아큐여
으스대던 그 잘난 나라여
반만년이라더냐 조상의 빛난 얼이라더냐
오냐 민족중흥이겠구나
오냐 나라여 오냐 나여

세월은 잘 간다
가는 세월 원통하구나
제가 떠난 것이냐 누가 떠민 것이냐
세월은 가고 세월만 가고
더럽게 남았구나 나는 비겁하게도 남았구나 주머니 속 지전 몇 장에 팔려 세월 가는 줄 
몰랐구나
세월인지 네월인지 안중에 없었구나
더러운 거러지로구나
싸구려 허풍쟁이 똥걸레로구나
백주 대낮에눈 뜬 채 코를 잃었으니 - P41

모가지를 털렸으니
이 우스꽝스러운 피칠갑을 아무도 동정하지 않겠구나
세상은 낄낄 웃겠구나
손톱 젖혀지고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할퀴어 잡으며 세월가는 동안
공포와 비명으로 흘러가는 동안
물에 젖은 오만 원짜리 석장이여
꼴좋다 나 죽지도 살지도 못한 나여
아직도 꼭 쥐고 있구나

국민소득이 어쨌다고? 집값이 어쨌다고?
똥개야 조느니 차라리 나라도 물어라
이 따위를 시랍시고 적는 내 손목을 물어라
종이나 울려라 개 떼처럼 왕왕왕
입춘대길 만사형통때
늦은 입춘방이나 하나 그려
이마빡에 여덟 팔자로 붙여주마 - P42

오냐 나여 그래도 잠은 또 오겠구나
배는 또 고파지겠구나 버러지처럼 - P43

이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선우

믿기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들려온 그 아침만 해도
구조될 줄 알았다. 어디 먼 망망한 대양도 아니고
여기는 코앞의 우리 바다.
어리고 푸른 봄들이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생명을 보듬을 진심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사방에서 자동인형처럼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하라, 지시를 기다리라.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욕되고 부끄럽다. 이 참담한 땅의 어른이라는 것이.
만족을 모르는 자본과 가식에 찌든 권력,
가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무능과 오만이 참혹하다.
미안하다. 반성 없이 미쳐가는 얼음 나라,
너희가 못 쉬는 숨을 여기서 쉰다.
너희가 못 먹는 밥을 여기서 먹는다.
환멸과 분노 사이에서 울음이 터지다가 - P44

길 잃은 울음을 그러모아 다시 생각한다.
기억하겠다. 너희가 못 피운 꽃을.
잊지 않겠다. 이 욕됨과 슬픔을.
환멸에 기울어 무능한 땅을 냉담하기엔
이 땅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죄가 너무 크다.
너희에게 갚아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마지막까지 너희는 이 땅의 어른들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차갑게 식은 봄을 안고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운다.
잠들지 마라, 부디 친구들과 손잡고 있어라.
돌아올 때까지 너희의 이름을 부르겠다.
살아 있으라, 제발 살아 있으라. - P45

화인(火印)
도종환

비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드득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 P67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처럼 찍혀 평생 남아 있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 P68

백일홍
박성우

박새가 이팝나무 아래 우체통에 둥지를 틀었다
하얀 이팝나무꽃이 고봉으로 퍼질 무렵, 박새는 알을 낳았다

희망촛불에서 받아 온 ‘희망 씨앗‘을 심는다
벽화동우회 ‘새봄‘ 식구들이
정읍우체국 앞에서 나눠주던 씨앗, 박새네 집 옆에 심는다

초췌한 얼굴이었다 눈에는
투명한 물방울이 아슬아슬 맺혀 있었다 가까스로
서 있는 유가족의 다리는 위태로워 보였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은 입은 차라리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다

앙다문 입을 가린 흰 마스크가
흘러내리는 물을 빨아들였다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린 물은 분명 피눈물이었으나,
핏기 없는 낯빛에서 나오는 물이기에 탁할 수조차 없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안쪽, - P75

깜장 치마에 깜장 양말 깜장 구두 신고 조문 온
앞줄의 여자아이가 울었다 엄마 아빠 손잡고 울었다
사내아이의 거침없는 울음소리도 두어 줄 뒤쪽에서 보태졌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갔다

부디 백일 천일 살아 있으라
여러 꽃씨 중 고심 끝에 골라보던 백일홍,
우체국 앞에서 받아 온 씨앗을 우체통 옆에 심는다
아이들아 분홍 하양 노랑 주훙 피어나렴,
안산에 조문 갔을 때 따라온 ‘노란 나비‘가
이팝나무 아래 빨간 우체통에 매달려 꽃을 기다린다

거름 한 줌 보태고 일어서는 나와 눈 마주친 어미 박새,
까만 눈조차 끔쩍이지 않고 알을 품는다 - P76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송경동

돌려 말하지 마라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이 세월호다
자본과 권력은 이미 우리들의 모든 삶에서
평형수를 덜어냈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규적 일자리를 덜어내고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성을 주입했다
그렇게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노동자 세월호에 태워진 이들이 900만 명이다
사회의 모든 곳에서
‘안전‘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어야 할 곳들을 덜어내고
그곳에 ‘무한 이윤‘이라는 탐욕을 채워 넣었다 이런 자본의 재해 속에서
오늘도 하루 일곱 명씩 산재라는 이름으로
착실히 침몰하고 있다
생계 비관이라는 이름으로
그간 수많은 노동자 민중들이 알아서 좌초해가야 했다 - P89

그렇게 수없이 많은 이들이 지하 선실에 가두어진
이 참혹한 세월의 너른 갑판 위에서
자본만이 무한히 안전하고 배부른 세상이었다
그들의 안전만을 위한 구조 변경은
언제나 법으로 보장되었다
무한한 자본의 안전을 위해
정리해고 비정규직화가 법제화되었다
돈이 되지 않는 모든 안전의 업무가
평화의 업무가 평등의 업무가 외주화되었다 경영상의 위기 시 선장인 자본가들의 탈출은 언제나 합법이었고
함께 살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구조 신호는 외면당했고
불법으로 매도되고 탄압당했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자본의 이동은 언제나 자유로운 합법이었고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만 전가되었다
그런 자본의 무한한 축적을 위해 - P90

세상 전체가 기울고 있고 침몰해가고 있다
그 잔혹한 생존의 난바다 속에서
사람들의 생목숨이 수장당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돌려 말하지 마라
이 구조 전체가 단죄받아야 한다
사회 전체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이 처참한 세월호에서 다시 그들만 탈출하려는
이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위험한 세월호의
선장으로 기관장으로 갑판원으로 조타수로 나서야 한다.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평형수로 에어포켓으로다이빙벨로 긴급히 나서야 한다
이 세월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이 자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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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날 좋다 햇빛 알갱이 다 보이네
하늘에서 해가 내려 알을 슬어놓은 듯
볕 바랜 이불호청해 냄새 난다
꺄르르 가시나들 웃음소리에
울밑에 봉선화도 발돋움하겠네

희망공부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희망공부‘라는 제목과 노랫말의 첫행은 백낙청 선생의 글에서 따왔고, ‘희망함이 적다‘는 표현은 전태일 열사의 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여자


돈도
남편도 없지
자식만 둘 있는

가진 게 너무나 많은
그 여자

슬픔 때문에
허리띠가 남아도는




*어느 젊은 시인의 시에서 보았다는, 이진명 시인의 시구를 다시 인용함.

허수아비


참새가 참새인 것은
제가 참새인 줄 모르기 때문

허수아비가 허수아비인 것은
제 머리에 새가 앉아도 가만 있기 때문

허수아비 주인이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것은
허수아비가 참새를 쫓아줄 거라 믿기 때문

이 땅의 농부가 농부인 것은
그런 줄 알면서도 벼 익는 들판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우여어 우여어 허공에 헛손질하기 때문

태백산행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홀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이 좋은 봄날에


봄이 오면 대지가 입덧을 한다고
어떤 시인은 노래하는데
이 좋은 봄날에
미국이 기어이 전쟁을 하려나봐요
바그다드에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려와요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지요
다리 다친 봄의 신음소리에
우리나라 산수유나무 새싹도 망가지겠어요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태백 하늘에 떠도는 눈발처럼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사북 지나 고한 장성광업소
철암역두 선탄장(選炭場)
석탄더미에 내리는 눈발처럼
차라리 탄압이나 받았으면
어느 시인 말마따나
바람부리에 몰려다니는 눈발처럼
반짝이며 글썽이는 눈발처럼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제가 울고 싶으니까 나더러
웃어봐!

새로운 세기의 노래


지나간 세기의 끝은 2000년
이제 새로운 시대로 들어섰지요
수수만년 쌓아올린 인류의 꿈은
지금 어느 별에 닿았는가요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그리며
땀 흘려 일하고
시인들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랑노래 하는데
새로운 세기가 밝아오는 대지 위에
야만의 그림자가 서성이고 있네요
지나간 세기의 끝은 2000년
이제 세상도 새롭게 바뀌어야지요

시인의 말


세상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누구의 말이던가.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나는 병이 없는데도 앓는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세상이 병들지 않았다면 내가 혼자 아픈 것이다.
스스로 세상 밖에 나앉았다고 생각했으나진실로 세상일을 잊은 적이 없다.
세상을 잊다니! 세상이 먼저 나를 잊겠지.
일탈을 꿈꾸지만 나는 늘 제자리걸음이다.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는 이 막막함이란 ‘거울나라의 엘리스‘만 겪는 고통이 아닐 것이다.
2008년 여름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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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ㅡ장엄한 일이었다ㅡ말했다
만일 신이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면ㅡ 하얗게ㅡ되는ㅡ 여자가ㅡ
그녀의 흠 잡을 데 없는 신비를ㅡ입는다는 것이ㅡ

성스러운 일ㅡ한 인생을
자줏빛 샘에 빠뜨리는 것은ㅡ
다림추도 없이ㅡ그것은 돌려준다ㅡ
영원을ㅡ 내가 숙고할 때까지ㅡ

축복이 어떤 모습일까ㅡ
그것은 자만심을 가질까?ㅡ
안개 속에서ㅡ떠다니는 것으로ㅡ 보이는
그것을 내가 손으로 잡았을 때ㅡ

그리고 그때ㅡ 이 ‘작은‘ 삶의 크기는ㅡ
현자들은ㅡ 그것을 작다고 말하지만ㅡ나의 조끼 속에서ㅡ 수평선처럼ㅡ 부풀어올랐다ㅡ
나는 조롱했다ㅡ가만히ㅡ ‘작다고!‘
[J271편] - P1036

오늘날 애머스트역사학회는 디킨슨이 입었던 드레스(또는 적어도 ‘눈으로 만든 옷‘ 중 하나)를 보관용 비닐 자루에 담아 그녀의 집 벽장에 걸어두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녀의 자의식을 의식하며 옷이 작으리라고 기대하겠지만, 아름답게 주름잡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옷은 기대보다 크다. 그리하여 그 드레스는 디킨슨의 집을 방문하는 학자들에게 그녀의 핵심적 은유에 담긴 지속적인 수수께끼를 상기시킨다. 반면 좀 더 실용적인 방문객들은 그런 옷을 같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숨을 멈출 정도로 놀라며 경외심을 드러낸다.
이 옷의 흰색은 실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보여주는 걸까? 흰 드레스는 지적인 여자로 하여금 실용적인 차원의 어떤 어려움도 견디도록 어떤 보답을 주는 건가? 윌리엄셔우드는 흰 물건에 대한 디킨슨의 강박증을 멜빌의 강박증과 비교하면서, ‘그녀는 기독교적 수수께끼가 아니라 기독교적 신비를, [...] 소생을 수반하는 세속적 죽음의 역설을 [...] 알리겠다는 결심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 P1037

누군가가 법으로
나의 재산을 빼앗는다면
그 법령은 나의 박식한 친구이리라
그러나 불법에 대한 어떤 보상도 없네
여기에서도 그곳에서도
그러하니 공평치 않아라ㅡ
시간과 정신의 절도
낮의 골수의 절도
거미에 의한,
아니면 그것을 금지시키소서 주여
내가 명세서에 기입하는 것을.
[J1167편]


죽음을 향한 ‘미끄러짐‘처럼, ‘충돌의 법칙‘인 ‘파멸‘처럼, 디킨슨의 거미는 여기에서 자연의 과정, 또는 인간의 법령이 저항할 수 없는 법칙을 나타낸다. 게다가 거미는 ‘흰옷을 입은 여자‘의 삶에 난 틈새의 거주자로서 ‘운명의 총아였던 괴물 같은아이/분신과 유사하다. 동시에 거미들은 특히 여성의 운명 (처녀의 순백이 강요하는 대가인 불임의 운명)의 전령들이다. - P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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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속에서


빛 안에 어둠이 있었네
불을 끄자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네
집은 조용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상 밖에 나앉아나는 쓸쓸했네

흔적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 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주민세 납부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가을날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달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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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낸 이후 십삼 년이 지났다.
힘겹게 다시 한 권의 시집을 묶으며 무언가 한마디 없을수 없겠는데, 의외로 담담해진다. 문득 밤낚시를 드리우던 기억이 난다. 가슴이 철렁하도록 찌가 한 번 솟구쳐오르기를 기다리다가 날이 샜다. 생각하건대 내가 시를 써온 일이 이와 같았다. 작은 움직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고 그것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시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욕심이었다. 80년대의 처음부터 너무 큰 충격을 받아왔던 탓일까.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고, 감각의 촉수는 그만큼 무뎌져 있었다. 살아오면서 모서리가닳고 뻔뻔스러워진 탓도 없지 않으리라. 입술을 깨물면서나는 다시 시의 날을 버린다. 일상을 그냥 일상으로 치부해버리는 한 거기에 시는 없다. 일상 속에서 심상치 않은인생의 기미를 발견해내는 일이야말로 지금 나에게 맡겨진 몫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외친다. 나의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지 않고 당신들의 당신들의 당신들의 가슴을 울리기를 기대하면서.

1991년 3월정희성

그리움 가는 길 어디메쯤


오월 어느날 그 길가
설운 세상 살던 사람 쓰러져
아지랑이 펴오르고
이상도 해라
웬일로 눈시울 붉은
꽃잎 하나 지고 있다
나의 사람아
그리움 가는 길 어디메쯤
더러는 피어 있는
진달래도 있어
피맺힌 너의 넋을 만나도 보리

4월 북한산에 올라


지나간 사월을 그리워 말자
사월이 가면 오월이 오는 법
황사 휘몰아치는 산정에 서서
보라, 때가 되면 모진 바람 속에서도
진달래 흐드러져 피지 않더냐
사일구는 사월에 오지 않아도
이 땅의 오월에 다시 찾아오고
눈물 어룽진 남녘 땅에
봄이 오는 소리 들리지 않더냐
그러나 이제는 냉정해지자
피 흘려 쓰러진 벗들 앞에서
속절없는 다짐을 하지는 말아야지
흙바람을 맞으며
아아 성난 불의 마음으로
가슴 깊이 응어리진 얼음의 마음으로
사월은 사월에 오지 않아도
한겨울 눈 속에 꽃맹아리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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