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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들이 딱히 아름답다고 할 수는없었지만, 이 진지에 다른 소대의 남자 병사들이 접근하는 것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 오른쪽으로 5백 미터 거리에는 통일사회당 진지가 있었다. 알쿠비에레로 향하는 도로가 휘어지는 지점이었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도로의 주인이 바뀌었다. 밤이면 우리의 보급 물자를 싣고 알쿠비에레로부터 구불거리며다가오는 화물 트럭의 불빛이 보였다. 사라고사로부터 오는 파시스트 화물 트럭의 불빛도 동시에 보였다. 남서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사라고사도 보였다. 불을 켠 배의 현창들처럼 불빛들이 가는 띠를 이루고 있었다. 정부군은 1936년 8월부터 그 거리에서 사라고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 P55

우리는 스페인 병사 한 명(윌리엄스의 처남 라몬이었다)을 포함하여 서른 명 정도였다. 우리 외에 스페인 기관총 사수도 여남은 명 있었다. 언제나 끼어들기 마련인 짜증 나는 사람 한두명을 제외하면 —— 모두가 알다시피 전쟁에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꾀기 마련이니까 영국인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예외적일 만큼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아마 보브 스마일리였을 것이다. 그는 광부들의 유명한 지도자의 손자였는데, 나중에 발렌시아에서 덧없이 참혹하게 죽고 말았다.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영국 병사들과 스페인병사들이 늘 잘 지낸 것을 보면, 스페인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알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 누구나 영어 표현 두 가지씩은 알고 있었다. 하나는 「오케이, 베이비였고 또 하나는 바르셀로나의 창녀들이 영국인 선원들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아마 그말을 이 글에 올린다 해도 식자공이 인쇄해 주지 않을 것이다. - P55

날씨는 대체로 맑았지만 추웠다. 한낮에는 가끔 해가 환하게빛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추웠다. 산기슭 여기저기에 부리처럼생긴 야생 크로커스의 녹색 열매가 보이기도 했고, 붓꽃이 머리를 내밀기도 했다. 분명 봄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게 왔다. 밤은 평소보다 추웠다. 새벽에 경계 근무를 끝내면, 취사실에서 불을 때고 남은 것을 긁어모아 발갛고 뜨거운 깜부기불 앞에 서 있곤 했다. 군화에는 좋지 않았지만 발을 녹일 수 있어좋았다. 때로는 봉우리들 사이로 동트는 것을 보기 위해, 이른시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산을 싫어한다. 좋은 위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산들조차 싫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 뒤편 봉우리들 뒤로 동이 트면서 가느다란 황금색 빛줄기들이 검처럼 어둠을 가르고, 이어빛이 밝아지면서 가없이 펼쳐진 구름 바다가 붉게 물들 때, 그광경은 설사 밤을 꼬박 새고 난 뒤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앞으로 세 시간은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우울해질 때라도, 한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짧은전쟁 기간 동안에, 인생의 나머지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일출을 보았다. 바라건대는, 앞으로 살아야 할 세월 동안 보아야 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본 것이면 좋겠다. - P57

전선에 투입되고 나서 처음 서너 달 동안에는 잠 한숨 못 자고 24시간을 버틴 적이 여남은 번을 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푹 자본 밤도 여남은 번을넘지는 않았다. 일주일에 총 스무 시간 내지 서른 시간을 자면지극히 정상이었다. 이로 인한 결과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머리가 매우 멍해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 되레 어려워지긴했지만 몸은 건강했고 늘 배가 고팠다. 맙소사,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 모든 음식이 맛있게 느껴졌다. 심지어 스페인에 있는모든 사람이 보기도 싫어했던, 그 어딜 가나 빠지지 않던 강낭콩조차도. 얼마 안 되는 물은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노새나 심하게 부려먹는 작은 당나귀에 실어 왔다. 왠지 모르지만아라곤 농부들은 노새한테는 잘해 주었지만 당나귀는 구박을했다. 당나귀가 움직이지 않으려 하면 불알을 걷어차기 일쑤였다. 초 보급은 중단되었다. 성냥도 줄어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연유깡통, 탄약클립, 걸레조각으로 올리브유 램프를 만드는법을 가르쳐주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행여 올리브 기름이라도 생기게 되면, 램프 기름으로 사용했다. 램프의 불꽃은 깜빡거리며 연기를 내뿜었다. 밝기는 촛불의 4분의 1쯤 되는것 같았다. 옆에 있는 소총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 P58

어둠 속에서 총알들이 우리 주위를 날아가며땅ㅡ핑ㅡ땅 하는 소리를 냈다. 포탄 몇 개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 근처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대부분은 터지지도 않았는데, 이 전쟁에서는 보통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후방의 봉우리에서 또 한 정의 기관총이 불을뿜는 순간, 나는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 사실은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올라온 기관총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가 완전히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기관총은 금세 망가졌다. 그형편없는 총알 때문에 늘 그 모양이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 탄약 꽂을대는 찾을 수도 없었다. 그냥 가만히서서 총알을 맞는 것 외에는 달리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스페인기관총 사수들은 숨는 것을 경멸했다. 사실 그들은 일부러 몸을노출했다. 나도 그렇게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찮은 일이었지만, 이런 경험은 매우 흥미진진했다. 총탄 사례를 받았다고 할만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무지하게겁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총알이 빗발칠 때는 늘 똑같은느낌이었던 것 같다. 총알에 맞는 것 자체가 무섭다기보다는,
디에 맞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총알이 도대체 어디에 박힐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몸 전체가어불쾌할 정도로 예민해진다. - P62

처음에 나는 전쟁의 정치적 측면은 무시했다. 그러나 이 무렵이 되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혹시 정당 정치의 소름끼치는 측면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이 부분은 건너뛰기 바란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정치적인 부분은 별도의 장으로 다루려 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전쟁을순전히 군사적인 각도에서만 쓴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전쟁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전쟁이었다. 어쨌든 정부 방어선 뒤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당 내부의 투쟁을 파악하지 못하면 첫해 동안에 이 전쟁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 P66

그러나 정당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포세로 산에서 병사들이 우리 왼쪽 진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쪽은 사회주의자들이야(통일사회당이라는 의미였다)」나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 아니야?」나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정당에 속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내 태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왜 다들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치적인 짓거리를 그만두고전쟁이나 잘하지 못하는 거야?」물론 이것은 올바른「반파시스트」적 태도였다. 또한 영국 신문들이 주도면밀하게 퍼뜨리는 태도이기도 했다. 그런 태도를 퍼뜨리는 주된 목적은 사람들이 이투쟁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특히 카탈로니아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막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또 유지하지도 않았다. 암만 내키지 않아도 모두가 조만간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했다. 아무리 정당과그들의 모순되는 「노선」에 관심이 없다 해도, 자신의 운명이 그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의용병으로서 프랑코와 싸웠다. 그러나 병사들은두 개의 정치적 이론을 놓고 벌어지는 거대한 투쟁의 볼모이기도 했다.  - P67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프랑코의 실질적인 적은 인민전선 정부라기보다는 노동조합들이었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시의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응대했다. 이어 공공 무기고에 가서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투쟁 끝에 얻어냈다. 만일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다소간 독립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프랑코는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일에는 확실한 답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는 있다. 인민전선 정부는 반란을미리 막으려는 노력을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았다. 반란은 오래전부터 예측되어 오던 것이었다. 막상 문제가 터지자 정부는주저하는 유약한 태도를 보였다. 수상이 하루에 두 번 바뀌었을정도이다. 게다가 눈앞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노동자의 무장을 한참 머뭇거리다가 강력한 대중적 요구에못 이겨 마지못해 허용했다. 결국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나누어주게 되었다.  - P69

실제로는 모든 곳의 교회가 약탈당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들 스페인 교회가 자본주의적인 돈벌이의 일부라는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여섯 달을 있으면서 내가 본 교회들 가운데 파괴되지 않은 것은 딱 두 개였다.
그리고 1937년 7월까지는 교회가 다시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는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마드리드에 있는 개신교 교회 한두 개만예외였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혁명의 시작에 불과했지 혁명의 완성은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그럴 힘이 있었음에도――카탈로니아에서는 분명히 그랬고, 아마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정부를 전복하거나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프랑코가대문을 망치로 두드리고 중간 계급의 일부 계층들이 그들 편에있는 상황에서는 물론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일반적인 자본주의 공화국으로갈 수도 있는 과도기 상태였다. 대부분의 땅은 농민이 가졌다.
프랑코가 승리하지 않는 한 농민들이 그 땅을 그대로 가지게 될가능성이 높았다. 큰 공장들은 모두 집산화가 이루어졌지만, 그런 상태를 유지할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재도입될지는 어떤 그룹이 통제하느냐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될 문제였다.  - P73

카탈로니아에서는 한동안, 노동조합들의 대표단이 다수를 이루는 반파시스트 방어 위원회"가 헤네랄리테를 대신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중앙정부는 개편될 때마다 우익 쪽으로 움직여갔다. 처음에는통일노동자당이 헤네랄리테에서 쫓겨났다. 여섯 달 뒤에는 카발례로가 물러나고, 우익 사회주의자 네그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직후 전국노동자연맹이 정부에서 쫓겨났다. 그 다음에는 노동자총연합이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전국노동자연맹이 헤네랄리테에서 쫓겨났다. 전쟁과 혁명 발발 1년 뒤, 결국중앙정부에는 우익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만 남게 되었다.
우익으로의 전환은 1936년 10월, 11월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은 정부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권력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서 공산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멕시코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도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친절을 보여주지 않았다. 멕시코야 물론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없었다. - P74

정부는 러시아정부가 직접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모든 나라의 공산당은 러시아의 정책을 이행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통일노동자당에 반대했고 나중에는 무정부주의자들과 카발례로의 사회주의일파에 반대했으며, 혁명적 정책 전반에 대해서 반대했던 주동자가 공산당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련이 개입한 이상 공산당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었다. 우선 공산주의자들의 위신이 크게 올라갔다. 그것은 무기 공급에 대해 러시아에감사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고, 특히 <국제 여단>의 도착 이후 공산당이 전쟁에서 승리할 능력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 P75

그러나 의용군을 노동조합의직접적인 통제하에 두면서 좀더 능률적으로 재조직하는 방법도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용군 해체의 주목적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의용군의 민주적 분위기 때문에 혁명적 사상들이 양성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시행하고 있는 모든 계급 간의 평등 보수 원칙을 쉴새없이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 결과 전체적인 〈부르주아화〉, 즉 혁명 초기 몇 달 간 이루어졌던 평등 정신의 고의적 파괴가 일어났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바람에 몇 달 간격으로 스페인을 다시 찾은사람들은 같은 나라에 온 것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스페인은 잠깐이지만 언뜻 노동자 국가로 보였다. 그러나 노동자국가는 눈앞에서 평범한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바뀌어 갔다. 이제 그곳에는 부자와 빈자라는 일반적인 구분이 존재했다. 1937년가을이 되면 <사회주의자> 네그린이 대중 연설에서 <우리는 사적 소유를 존중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 P77

스페인의다른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형식적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관점과 우익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은 어디에서나 똑같다고 볼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통일사회당은 U.G.T. (Unión General deTrqbqjqdores, 노동자총연합), 즉 사회주의 노동조합들의 정치적기관이다. 스페인 전역에 걸쳐 이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이제 약백오십만에 이른다. 여기에는 많은 계층의 육체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이후 중간 계급으로부터 유입된사람들이 그들을 삼켜버렸다. <혁명> 초기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노동자총연합(U.G.T.)이나 전국노동자연맹(C.N.T.)에 가입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원들은양 조직에 이중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중에서 전국노동자연맹이 단연 노동 계급을 대표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통일사회당은 일부의 노동자와 일부의 프티부르주아지 상점 주인, 공무원, 부유한 농민로 이루어진정당이었다.  - P81

스페인 사람들 모두가그렇듯이 무정부주의연합의 모든 구성원들도 어느 정도 무정부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반드시 순수한 의미에서의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전쟁 초기 이후 그들은일반적인 사회주의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상황 때문에 중앙 집권적 행정부에 참여했고, 심지어 모든 원칙을 어기고 정부에 들어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통일노동자당과 마찬가지로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노동자들의 통제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는 통일동자당의 구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통일노동자당보다는 덜 교조적이었다.  - P84

그러나 혁명 정당들이 상황을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초기에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는 해묵은 반목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인 통일노동자당은 무정부주의에 회의적이었다.
반면 순수한 무정부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통일노동자당의〈트로츠키주의>가 공산주의자들의 <스탈린주의>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 때문에 두 정당은 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5월에 통일노동자당이 바르셀로나에서 시가전에 뛰어들어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것도 전국노동자연맹을 지지해야 한다는 본능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나중에 통일노동자당이 탄압을 당했을 때, 대담하게도 그들을 옹호하여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은 무정부주의자들뿐이었다.
따라서 대략적인 세력 배치는 이렇다. 한쪽에서는 전국노동자연맹-무정부주의자연합,통일노동자당, 사회주의자들 일부가 노동자들의 통제를 지지한다. 다른 쪽에서는 우익 사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이 중앙 집권적 정부와 정규군을 지지한다. - P85

당시에 내가 왜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을 통일노동자당의 관점보다 더 좋아했는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분명한 실질적 정책이 있었다. 겨우 몇 달 앞만을 내다보는 상식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이 분명 더 나은 정책이었다. 확실히통일노동자당의 일상적인 정책, 선전 등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훨씬 더 많은 대중이 그들을따랐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종결지은 것은 우리와 무정부주의자들이 가만히 서 있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에 발맞추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또한이것이 당시의 일반적 느낌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얻고 또 그 당원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그들이 혁명가들에반대하여 중간 계급에게 호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 P86

어쨌든 이것이 그들이 우리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우리는트로츠키주의자,파시스트, 반역자, 살인자, 겁쟁이, 간첩 등등이었다. 솔직히 기분 나쁜 일이다. 특히 그런 일을 자행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들것에 실려 전선을 내려오며 모포사이로 눈부신 듯 바깥을 내다보는 하얀 얼굴의 열다섯 살짜리스페인 소년을 보면서, 이 소년이 위장한 파시스트임을 증명하는 팸플릿을 쓰고 있는 런던이나 파리의 말쑥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 P88

기자들이 보여준 모습으로만 본다면, 이 전쟁은 다른 모든전쟁들과 마찬가지로 말잔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기자들은 보통 가장 지독한 욕설은 적을 위해 아껴두기 마련인데, 이번 전쟁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노동자당이 서로에 대해 파시스트들보다 더 심하게 비난하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당간 불화는 짜증 나고 역겹기까지 했지만, 내눈에는 사소한 집안 싸움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뭔가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둘 사이에 정말로 양립할 수 없는 정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의 진전에 강력히 저항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이 혁명을 후퇴시킬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 P90

장군과 사병, 농민과의용군은 여전히 평등한 자격으로 만났다. 모두가 똑같은 보수를받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를〈당신>이나 〈동지〉라고 불렀다. 고용주 계급도 없었고, 하인 계급도없었고, 거지도 없었고, 창녀도 없었고, 변호사도 없었고, 사제도 없었고, 아침도 없었고, 모자에 손을 대는 인사도 없었다. 나는 평등의 공기를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기가 스페인 전역에 퍼져 있다고 상상할 정도로 순진했다. 대체로 우연때문에 나는 내가 스페인 노동 계급의 가장 혁명적인 일파 속에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적인 교육을 많이 받은 동지들이 나에게 순수하게 군사적인 태도로만 전쟁을 바라볼 수 없다거나, 선택은 혁명과 파시즘 사이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냥웃어 넘기곤 했다. 대체적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에는 혁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통일노동자당의 관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은 <전진 아니면 후퇴뿐이다〉로 요약되었다. 후에 통일노동자당이 옳다고, 어쨌든 공산주의자들보다는옳다고 판단한 것은 전적으로 이론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 P91

먼저 <민주주의는 사기다>라고 말한 다음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전술이 아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엄청난 위세를 등에 업고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민주적 스페인>이 아닌 <혁명적 스페인〉의 이름으로 호소했다면 아마 큰 호응을 얻어낼 수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혁명적 정책으로 프랑코의후방을 공격하는 것이 어려운――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일이었다. 1937년 여름, 프랑코는 정부와 비슷한 규모의군대로 정부보다 더 많은 인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식민지의 주민들까지 헤아리면 훨씬 더 많은 숫자였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후방에 적대적인 주민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의 통신 시설을지키고 파업을 진압하는 등의 일을 해야만 전방의 군대도 유지할 수가 있다. 따라서 프랑코의 후방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 운동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프랑코의 영토 내에 있는 인민, 적어도 도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이 프랑코를 좋아했다거나 그를 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가계속 우익 쪽으로 움직여가면서 정부의 우월성은 점점 빛을 잃었다. - P94

프랑코는 악명 높은독재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무어인들은 실제로 인민전선 정부보다 프랑코를 더 좋아했다! 명백한 사실은 모로코에서는 반란을 선동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전쟁에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어인들에게 인민전선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기 위한 우선적인 조치는 바로 모로코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는프랑스와 영국을 회유하려는 헛된 희망 때문에 전쟁에서 가장좋은 전략적 기회를 날려보내고 말았다.  - P95

공산주의 정책의 전체적 경향은 이 전쟁을 평범하고 비혁명적인 전쟁으로 축소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전쟁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가 극도로 불리했다. 그런 종류의 전쟁은 기계적 수단, 즉 궁극적으로무제한의 무기 공급에 의해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주된 무기 지원국인 소련은 이탈리아나 독일과비교해 볼 때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내건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라는 구호가 언뜻 보기보다 덜 환상적이었는지도모른다.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반혁명 정책이 틀렸다고 생각하는내 나름의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내 판단이 옳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이시 내 판단이 틀리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나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민전선 정부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바란다.
그러나 물론 어떻게 될지 아직 말할 수는 없다. 정부가 다시 좌경화할 수도 있다.  - P95

그러나 1937년 2월에 나는 상황을 이런 관점에서 보지 못했다. 아라곤 전선에서의 교착 상태가 지겨웠다. 나는 주로 내가싸울 만큼 싸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모병포스터를 자주 생각했다. 그 포스터는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질책하듯이 묻고 있었다.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식량만 축냈습니다.> 나는 의용군에 입대하면서 파시스트 한 명은 죽이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우리 각자가 하나씩 죽이면 파시스트들은 곧 소멸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나는 마드리드로 가고 싶었다. 군대 내의 모든 사람들이정치적 견해에 관계없이 마드리드로 가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려면 국제군으로 들어가야 했다. 통일노동자당은 이제 마드리드 주둔 부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자들도 이제그곳에 전처럼 많은 부대를 주둔시키지 않았다. - P96

하루하루, 특별히 밤마다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경계근무, 정찰 근무, 땅파기. 그리고 진창, 비, 잉잉거리는 바람, 가끔 내리는 눈. 밤에도 따뜻한 기운이 분명하게 느껴진 것은 4월에 접어들고도 한참을 지나서였다. 이곳 고지대의 3월은영국의 3월과 아주 비슷했다.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바람은 끈질겼다. 겨울 보리가 두 뼘 가량 올라왔고, 벚나무의 진홍색 봉오리들이 영글었다(이곳의 방어선은 버려진 과수원과 밭들을 관통했다). 도랑을 뒤져보면 제비꽃이나 블루벨 가운데서도 볼품없는 쪽에 속하는 야생 히야신스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방어선 바로 뒤로는 물거품이 보글거리는 상쾌한 녹색의 내가 흘렀다. 전선에 온 뒤로 처음 보는 투명한 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이를 악물고 물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여섯 주 만의 첫 목욕이었다. 대충 몸만 담그고 나온 꼴이었다.  - P98

이 무렵 우리 몸에는 이가 들끓었다. 여전히 추운 날씨였지만 이가 슬 만큼은 따뜻했다. 나는 몸에 기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벌레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만큼 지독한 벌레는 없었다. 가령 모기 같은 다른 곤충들도 사람을 괴롭히긴 하지만적어도 몸에 상주하진 않는다. 이는 작은 가재를 연상시키는데, 주로 바지 안에 산다. 옷가지를 모두 태우는 것 외에는 이를 없앨 방법이 없다. 이는 바지의 솔기에 반짝거리는 하얀 알을 낳는다. 마치 작은 쌀알갱이 같다. 이 알들이 부화하여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기 식구들을 불려나간다. 평화주의자들은이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확대하여 팸플릿에 실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영광이다! 전쟁에서는 모든 병사의 몸에 이가 들끓는다날씨만 어느 정도 따뜻하면.
베르덩, 워털루, 플로든, 센락, 테르모필레 등지에서 싸운 모든 병사들의 사타구니에는 이들이 기어다녔다. 우리는 알을 태우고 가능한 한 자주 목욕을 함으로써 그 지겨운 놈들의 수를어느 정도는 줄일 수 있었다. 이만 아니었다면 나는 얼음처럼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 P103

날씨가 푹해지자 농부들은봄갈이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스페인의 토지 개혁은 그 내용이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의 땅이 집산화된것인지, 아니면 농민이 자기들끼리 땅을 나누어 가진 것인지도분명히 알 수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집산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주들은 사라졌고, 농민들 밭을 경작했다. 농민들은 만족하는 것 같았다. 농민이 우리에게 친절했기때문에 나는 늘 놀라곤 하였다. 일부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전쟁 때문에 모든 물자가부족했고, 모든 사람이 우울하고 따분한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농민들은 아무리 좋은 시절이라도 군부대가 자기들 마을에 주둔하는 것을 싫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변함없이 친절하였다. 우리가 다른 무리한 짓을 하더라도, 과거의지주가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란이란 묘한 것이다. 우에스카까지의거리는 8킬로미터도 안 되었다. 그곳의 시장은 이 농민들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모두들 그곳에 친척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평생 닭도 팔고 채소도 팔았다. 그런데 이제 여덟 달 동안이나 기관총과 뚫을 수 없는 철조망의 장벽이 그 사이에 가로놓여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따금씩 장벽을 잊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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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은 슬픔을 희망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를 막무가내로 진창에 떠밀었을 적에도, 그는 누굴탓하기보다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강함으로 몰지각한 ‘맹금류‘와 거침없이 맞서 싸워냈다. 여전히 그는 왜곡에 대항해역사와 민중 앞에 놓인 ‘덫‘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있다.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화인(火印)」)라고말하는 도종환 시인은 시와 몸을 따로 두는 사람이 아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다. 몰염치에 맞서 떳떳하고 용기 있는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우리에게 이렇듯 서정의 깊이와격과 감동을 더한 시집을 들고 왔으니, 시집 갈피에서 전나무와 삼나무 냄새가 난다. 감자 잎과 도요새가 몸을 펴는소리 들린다. 사과 익어가는 내가 손에 묻고, 오르간 음이귀에 닿아 젖는다. 마른 가슴에 들어온 눈물이 격렬한 희망‘ 되어 온몸으로 퍼진다. ˝어디서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받을 수 있으랴˝ (「해장국」). 시인이 말아 내미는 한그릇 국밥은 뜨겁고도 든든하다. 사무치는 위로가 있는 매혹적인시집이다.


박성우 시인




내소사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능가산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꽃등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包)  하나가 채워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몇백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희망의 이유


떡갈나무 잎을 들추고 도토리를 파묻는
다람쥐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라
그대도나도 가을까지 왔다
숲의 정강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기계톱의 질주에
우리의 안락한 정원이 있다고 믿지 말라
우리의 미래는
불에 탄 나무에서 다시 솟는 연둣빛 새순
하늘 꼭대기에서 거기까지
햇살의 화살 한개를 쏘고 있는
태양의 따스한 손길에 있다
국경을 넘어와 땅속 깊이 감춰진 벽을 뚫어버리는
가공할 폭탄의 힘에 한 시대의 가능성을 걸지 말라
밤의 거리에서 평화를 구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촛불과
그 불을 받쳐든 어린 두 손에 희망이 있다
이웃나라를 손쉽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부러워하지 말라
만년을 녹지 않는 히말라야 숫눈처럼
빛나는 순백의 영혼

오체투지로 낮아지고 가난해져서
다시 일어서는 정신에
영원한 미래의 날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잔인하게 쓰러뜨린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
승리의 포만감으로 가득한 식탁과 살찐 육신은
우리가 죽이고 짓밟은 것들의 묘지를 이루고 있나니
오래오래 주류로 살아온 이들이 잘 차려놓은화려한 연회장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고 손가락질하는 소수가
소박하고 정결하게 차린 두레반에 미래가 있다
어미 잃은 어린 짐승을 감싸안으며 눈물겨워하는
모성과 연민과 자비 아니면 희망 아니다
새 한마리의 목숨과 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도 그대는 일주문 밖이다
속도와 경쟁과 승리의 갈망에 휘둘리지 말고그만 내려서라
댓잎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의 속도
낙화 이후의 긴긴 날을 걸어가는
꽃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면

그대가 달려가는 속도의 끝은 반드시 벼랑이다
증오의 말을 가르치지 말라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경전 같은 말들이 있음을 가르치되
시인의 음성으로 하라
나약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은 목소리로
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라
거기 희망이 있다 그들이 희망이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 오래도록 희망이다 

나머지 날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고
겨울에는 뒷산에 눈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고니가 떠다니는 호수는 바라지 않지만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면 좋겠네아침기도가 끝나면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고못다 읽은 책을 읽으면 좋겠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음의 물결에서 벗어나적막이 들판처럼 펼쳐진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고
민들레꽃과도 말이 통하면 좋겠네
다람쥐 고라니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네
낮에는 씨감자를 심거나 남새밭을 일구고 
남은 시간에 코스모스 모종과 구근을 심겠네


고요에서 한계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단풍 드는 잎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나무들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곳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면 좋겠네
울타리 밑에 구절초 피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굽은 길이면 좋겠네
추녀 밑에서 울리는 먼 풍경소리 들으며
천천히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


짐을 조금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네
밤에는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등불 옆에 있으면 좋겠네
하현달이 그믐달이 되어도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듯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묻지 않으며
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이 나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벽난로의 연기가 굴뚝으로 사라지는 밤하늘과
나뭇가지 사이에 뜬 별을 오래 바라보겠네

어느 저녁


끓어오르며 소용돌이치던 것들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던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일어서기 전에 듣고 싶어하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오늘 처음 붓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그이의 발소리를 붙잡지도 못하였습니다
밤에도 검은등뻐꾸기는 울고
북두칠성 일곱 별은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몸을 틀며 별자리를 조금씩 옮기고
아까시꽃이 향기의 긴 꼬리를 그으며
별자리 뒤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불빛 하나 고개를 넘어가다 잠깐 눈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지고 난 뒤 사방은 더 어두워졌고
호랑지빠귀가 한숨을 길게 쉬는 듯한 울음을 내뱉는 걸
숲은 다 듣고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들국화


들국화 꽃잎에 가을 햇볕이 앉아 있다
얇고 여린 피부에서 윤이 난다
내게 들국화는 들국화 이상이다
이 세상 모든 꽃이 저마다 빛나는 얼굴을 지녔고
하나의 성기와 몇개의 꽃술을 갖고 있지만
나는 들국화만 그걸 갖고 있는 것 같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꽃이 아니에요라고
들국화는 말하지만 나는
들국화에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다
꽃이파리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꽃잎의 표정을 과장하여 해석하는 걸 보면서느티나무는 내가 들국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망을 들국화라 부르는 거라고 말한다그러나 들국화를 보면 마음이 끌리고
연한 빛깔 위에 내린 햇살 곁에 나란히 있고 싶고
작고 투명한 모습에서 위안을 받는다
내 팔에 기댄 채 들국화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그의 몸에서 번져오는 맑은 기운이 내 몸의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구석구석 따스하게 번져나가고

내 영혼의 물줄기가 그에게 흘러가
그의 뿌리를 적실 때도 있다
오늘도 들국화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고들국화 곁에서도 문득 들국화가 궁금해진다특별할 것 없는 들국화의 소박한 나날과
꽃잎의 흔들리는 머리칼과
짙은 녹색의 이파리와 이파리 밑에 감춰진 그늘과
가을까지 오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짐승들과상처와 빗줄기까지 사랑한다는 걸
들국화가 믿어주길 바란다
사랑이 왜 편애일 수밖에 없는지 알기에
가을 햇볕도 들국화 꽃잎 위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리라

들국화 2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정경
할슈타트에서


아름다운 정경은 사람을 선하게 한다
풍경의 전신을 대하는 순간
짧은 탄성이 저절로 새어나오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니다
탄성이 물무늬처럼 미소로 바뀌어 번져나가고
마음은 천천히 선한 빛깔로 물들게 된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예쁜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도 그렇다
사막에 별들이 하얗게 떴을 때도 그러하다
설산 기슭 순백의 눈을 볼 때도 그러하다
마음을 선하게 하는 초저녁 성당의
성가야말로 좋은 노래다
천천히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오래된 영화가 좋은 영화다
할슈타트 호수에 저녁빛이 내리고 있다
그대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그러하다

사과꽃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피었습니다
보고 싶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피었습니다
하얀사과꽃 속에 숨은 분홍은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살면서 가졌던 꿈은
그리 큰 게 아니었지요
사과꽃같이 피어만 있어도 좋은
꿈이었지요
그 꿈을 못 이루고 갈 것만 같은
늦은 봄
간절하였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지고 있습니다

저녁노을


눈이 그쳤는데 그는 이제 아프지 않을까
지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내 아팠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동안
내 안에 저녁노을처럼 번지는 통증을 그는 알까 
그리움 때문에 아프다는 걸
그리움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그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그리움은 혼자 남아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눈은 내리다 그쳤는데
눈발처럼 쏟아지던 그리움은
허공을 헤매다 내 곁에 내린다 아프다

업연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멈추자 멈추어야 한다 하면서
오늘도 다리를 건넜다
잘 드는 칼로 끊어버린 날도 많았다
달맞이꽃도 밤별도 알고 있으리라
바보같이 천치같이를 되풀이하며
회초리로 나를 때리며 새운 밤도 많았다
오늘도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오늘도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면서

노란 잎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
몸을 지나가는 오후의 햇살에도
파르르 떨리는 마음
저녁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저 노란 잎의 황홀한 적막을 보라
은행나무도
우리도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난중일기


새벽에 안개비 뿌리다가 늦게 개었다
잘 죽을 일을 생각하자
치유불능인 걸 알면서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하루하루는 치욕
죽도록 일하고 죽도록 박해받는 날들이 너무 길다
오늘도 열순의 활을 쏘고
찬술을 마시고
저녁엔 여진이와 잤다고
붓 들어 거짓 없이 쓰자
살아 있는 동안은 전선을 떠날 수 없는데
우린 늘 중과부적
이길 수 있다고 과신하지 말고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물살치는 두려움의 복판으로 배를 저어나가자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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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허연은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가 있다.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을 수상했다.


허연을 읽을 때 우리는 마치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머나먼이국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말을 나누는 연인을 만나듯,
경계에서 새어 나오는 삶의 내밀함을 캐내게 된다. 달력의날짜와는 다른 시간을 지금에 새기고 싶어지고, 서 있는곳과는 다른 공기의 밀도를 입고 싶어진다. 그것은 시인이종래의 공화국의 소속이 아니기 때문. 오지 않은 자멸에대해 먼저 생각하고, 남겨질 잔해에 대해 앞서 생각하는,
자신만의 공화국의 시원(始原)이기 때문이다.


구름은 신비스러운 사상이다
구름의 이름을 지은 사람
자신보다 구름이 주목받기를 원한 사람
구름을 가져다 이야기를 만든 그 사람 생각을 해봤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무한할 수 있었고
학습되지 않았으므로 소멸하지 않았던 말
그 말을 꺼내고 싶었다

시인의 말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2016년 겨울
허연

아나키스트 트럭 1


슬픈 사람들이 트럭을 탄다. 트럭은 정체에 걸릴때마다 힘겹게 멈췄다. 정체가 풀리면 트럭은 부식된 하체 어디선가 슬픔을 흘리며 느리게 움직였다.


트럭에 올라탄 사람들이 두 손으로 신을 그려보지만 이내 슬픔이 신을 덮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에겐 이상하게 어깨가 없다.


찌그러지고 때 묻은 트럭은 세월을 등에 업고 생의 마지막 질주를 했다. 낙오한 사람들은 어느새 세월의 등에 올라타 있었고.


도시는 어두웠고 트럭은 주저앉았다.


낙오자들은 뿔뿔이 골판지 같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주저앉은 트럭은 도시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밤이 왔다. 이미 어두웠지만 트럭은 어두워지지않았다. 안녕, 트럭.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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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소리에 대꾸하지 마라. 너도 같은 사람이 되리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래야 지혜로운 체하지 못한다.
소리엔 같은 말로 대꾸해 주어라. 
잠언 26:4-5

의용군에 입대하기 전날이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레닌 병영에서 장교 탁자 앞에 서 있는 한 이탈리아인 의용병과 마주쳤다.
스물대여섯 살의 강인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금발은 붉은색이 감돌았고 어깨는 단단했다. 챙이 있는 가죽모자를 밑으로 세게 잡아당겨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나와는 직각 방향으로서 있었는데, 고개를 숙인 채 찌푸린 얼굴로 어떤 장교가 탁자에 펼쳐놓은 지도를 곤혹스러운 듯 살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풍기는 어떤 분위기가 나를 강하게 끌었다. 친구를 위해서라면살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내던질 사람의 얼굴이었다. ㅡ무정부주의자에게서 기대해볼 만한 얼굴. 물론 그는 - P9

공산주의자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얼굴에는 정직함과 잔인함이 공존했다. 그에게는 무식한 사람들이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감상적인 존경심도 있었다. 그는지도에서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강인지도 가릴 줄 모를 터였다.
지도를 읽으려면 엄청난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여길 터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보자마자 이토록 마음이 끌리는 사람―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을 거의 만난 적이 없다. - P10

밖으로 나가는데 그가 가로질러 오더니 내 손을 아주 강하게움켜쥐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 수도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이 언어와 관습의 간극을뛰어넘어 순간적으로 완전히 밀착된 것 같았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그도 나를 좋아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대한 첫인상을 유지하려면 두번 다시 그를 만나서는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물론 나는 그를 다시 보지 않았다. 스페인에서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만나고 헤어질 수 있었다.
이 이탈리아인 의용병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가 내 기억에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남루한 군복과 사나우면서도 애처로워 보이는 얼굴은 당시의 특별한 분위기를 상징하는것 같다. 그는 그 전쟁과 관련한 내 모든 기억과 얽혀 있다. 바 - P10

르셀로나의 적기(赤旗), 초라해 보이는 병사들을 가득 태우고전선으로 기어가던 가늘고 긴 기차, 전선 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나오는 전쟁에 찌든 잿빛 소도시, 질퍽질퍽하면서도 얼음속처럼 추운 산속 참호.
1936년 12월 말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으로부터 불과일곱 달 전이다. 그럼에도 이미 엄청난 거리 밖으로 멀어져버린시기이다. 뒤에 일어난 사건들이 그 시기를 지워버렸다. 1935년이나 1905년을 지운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나는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12월이나 1월에 들어서면서 이미 혁명기가 끝나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막 건너온 사람에게는 바르셀로나의 상황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 P11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나로서는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은 도시에 들어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좀 크다 싶은 건물은 거의예외 없이 노동자들이 장악했다. 건물마다 빨간색 깃발이나,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무정부주의자들의 깃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담벼락마다 소련 국기나 혁명 정당들의 머리글자를 휘갈겨놓았다. 교회는 내부가 거의 다 박살났고, 성상들은 불에 탔다.
노동자 무리들은 여기저기서 조직적으로 교회를 철거했다. 상점과 카페마다 집산화(集産化)되었다는 글이 붙어 있었다. 심지어 상자 같은 구두닦이들의 점포조차 집산화되어,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 P11

자가용은 없었다. 모두 징발되었다. 모든 전차와 택시, 그리고 다른교통 수단도 대부분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해 놓았다. 도처에혁명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선명한 포스터들은 벽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몇 개 남지 않은 다른광고물들은 서툴고 하찮게 보였다. 도시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람블라스 거리는 언제나 사람들의 이동이 많은 곳이었다. 그거리를 따라 낮 동안은 물론이고 밤늦게까지 확성기에서 혁명가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가장 신기한 것은 군중의 모습이었다. 겉으로 볼 때 그 도시는 부유한 계급이 실질적으로 사라진곳이었다. 소수의 여자와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옷을 차려입은>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거의 모두가 노동 계급의 거칠거칠한 옷을 입었다. 또는 파란 작업복을 입거나, 의용군 군복을 약간 고쳐서 입었다. 이 모든 것이 신기했고, 또 감동적이었다. - P12

이 모든 것과 더불어 전쟁 특유의 흉흉한 분위기도 얼마간느껴졌다. 도시는 을씨년스럽고 깔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도로와 건물은 보수가 안 돼 있었다. 공습을 염려하여 밤거리의가로등은 침침했다. 상점들은 대부분 초라하고 진열대의 반은비었다. 고기는 귀했다. 우유는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석탄,설탕, 석유는 부족했다. 그 가운데도 빵 부족은 정말 심각했다.
이 시기에도 빵을 구하려는 줄은 종종 수백 미터씩 늘어서곤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람들은 만족해했고 희망이 넘쳤다. 실업은 없었다. 생활비는 여전히 매우 낮았다. 눈에 띄게 해보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집시를 제외하면 거지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혁명과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갑자기평등과 자유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느낌이 있었다. 인간은 자본주의 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 P13

우리를 보러 나온 우호적인 군중이거리를 가득 메웠다. 여자들은 창문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때는그 모든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워 보였는지! 그런데 지금은 왜그것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고, 비현실적인 일로 느껴지는지!
기차에는 병사들이 꽉꽉 들어차, 좌석은커녕 바닥에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기차가 떠나기 직전 윌리엄스의 부인이 플랫폼으로 달려오더니 포도주 한 병과 어른 팔뚝만한 붉은색 소시지를주었다. 설사를 일으키곤 하는, 비누 냄새가 나는 소시지였다.
기차는 전시의 평상 속도인 시속 20킬로미터 이하로 카탈로니아를 천천히 빠져나가더니, 이윽고 아라곤 고원 지대로 다가갔다. - P24

바르바스트로는 전선에서 먼 곳이었다. 그런데도 박살이 난듯 황량해 보였다. 허름한 제복을 입은 의용병 무리는 추위를이기려고 거리를 따라 어슬렁거렸다. 거의 무너져내린 벽에는지난해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몇 월 며칠에 투우장에서<멋진 황소 여섯 마리>를 죽일 것이라는 광고였다. 포스터의 바랜 빛깔이 어찌나 처량해 보이던지! 그 멋진 황소들과 멋진 투우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즈음에는 바르셀로나에서조차 투우 경기가 거의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훌륭한 투우사들은 전부 파시스트들이었다.
우리 소대는 화물차를 타고 시에타모로 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서쪽 알쿠비에레로 갈 예정이었다. 알쿠비에레는 사라고사를 마주 보는 전선 바로 뒤쪽에 있는 도시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무려 세 번의 전투 끝에 10월에 시에타모를 점령했다.  - P25

이틀이 지났는데도 소총은 지급되지 않았다. 코미테 데 게라에 가서 벽에 뚫린 구멍들을 살펴보았다면, 알쿠비에레의 전모를 다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구멍들은 소총 일제사격때 뚫린 것으로, 파시스트들이 처형된 흔적이다. 전선은 매우 고요했다. 부상자들이 이송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가장 흥분되는일은 파시스트 탈주병이 건너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감시를 받으며 전선으로부터 알쿠비에레로 후송되었다. 이쪽 전선 건너편에 있는 병사들 가운데 다수는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그들은전쟁이 발발했을 때 때마침 병역을 때우고 있던 불쌍한 징집병들이었다. 따라서 어서 도망 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이따금씩 그들 가운데 몇 명이 무리를 지어 우리 쪽으로 건너오는모험을 감행했다. 만일 파시스트 지역에 사는 가족만 없었다면더 많은 병사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을 것이다. 이 탈주병들이내가 처음으로 본 <진짜> 파시스트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와 별다를 것이 없다는 데 놀랐다. 카키색 바지를 입었다는 것만 달랐다.  - P27

5월에는 잠시 상사 대리로서른 명 정도를 지휘해 보았다. 영국 사람도 있었고, 스페인 사람도 있었다. 우리 모두 몇 달 동안 포화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나는 명령을 따르게 하거나, 위험한 일의 자원자를 얻는 데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혁명적〉 규율은 정치적 의식에달려 있다. 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정치적 의식을 확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연병장에서 사람을 자동인형으로 조련하는 데도 시간이걸리기는 마찬가지다. 의용군 체제를 비웃는 기자들은 인민군이 후방에서 훈련을 하는 동안 의용군은 전선을 지탱해야 했다.
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사실 의용군이 전장에 그대
‘로 남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 규율의 힘 덕분이다. - P42

처음 한동안 나는 무질서한 상황, 전반적인 훈련 부족, 명령 하나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때때로 5분 동안 논쟁을벌여야 했던 일 등 때문에 경악했고 또 격분했다. 영국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페인 의용군은 영국군과는달랐다. 그러나 상황을 고려할 때, 그들은 예상보다 뛰어난 군대였다.
한편, 땔감 늘 땔감이 문제였다. 그 기간 동안 내 일기장에서 땔감이 언급되지 않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땔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언급했다고 해야겠다.
우리는 해발 6백 미터에서 9백 미터 사이에 있었다. 한겨울이었다. 추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기온이 그렇게 낫지는 않았다. 얼음이 얼지 않은 밤도 많았다. 낮이면 겨울 해가한 시간 정도 비추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그리 춥지는않았으나, 꼭 그렇게 추운 것 같았다. 때때로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 모자가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 P43

우리는 특별한 생활을 했다. 그것을 전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전쟁을 하는 특별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의용병들모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화가 나 있었다. 왜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지 알고 싶어 늘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적이 먼저 도발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오랫동안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것은 매우 분명했다. 조르쥐 콥은 정기적인 검열 때면 우리에게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오」 그는말하곤 했다. 이따금씩 사람이 죽어나가는 희가극이오 사실아라곤 전선의 교착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나는 당시에는그것을 몰랐다. 그러나 순수하게 군사적인 어려움―지원병부족은 별도로 하고라도 역시 누구의 눈에나 분명해 보였다.
우선 그 지역의 자연이 문제였다. 우리의 전선과 파시스트의전선 모두 천혜의 요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보통 한쪽으로만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고지는 참호만 몇 군데 파놓으면, 압도적 숫자가 아닌 한 보병만으로는 점령할 수 없다.  - P47

간헐적으로 소총소리가 땅땅 메아리쳤다. 이괴상한 전쟁에 조금이라도 생기를, 아니 죽음의 기운을 불어넣어 줄 만한 일이 과연 일어날까 궁금해졌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점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인간이아니라 폐렴이었다. 참호들이 서로 5백 미터 이상 떨어져 있을때는 우연이 아니고서야 총알에 맞지 않는다. 물론 부상자는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스스로 입은 부상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내가 처음으로 스페인에서 본 다섯 명의 부상자는 모두 자기 무기에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고 의도적이었다는 뜻은아니다. 사고나 부주의 때문이었다. 우리의 낡은 소총은 그 자체가 위험물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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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조지 오웰









우크라이나판 서문


나는 『동물농장』의 우크라이나판에 서문을 써달라는부탁을 받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지만, 어쩌면 독자들 또한 나에 대해 알 기회가 전혀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내가 이 서문에서 『동물농장』을 어떻게 쓰게되었는지에 대해 몇 마디 하기를 기대할 테지만, 우선은내 개인적인 이야기와 나의 정치적 견해를 형성시켜 준경험에 대해 말하고싶다.
나는 1903년에 인도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영국 행정부 소속 공무원이었으며, 나의 가정은 군인,
성직자, 공무원, 교사, 법률가, 의사 등의 가정처럼 평범한중산층에 속했다. 나는 영국 사립학교들 가운데 학비가 가 - P7

장 비싸고 속물적인 이튼 스쿨에 다녔다. 그리고 거기서장학금을 받아 그런대로 편안히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장학금을 받지 못했더라면 아버지는 이런 학교에나를 보낼 엄두도 내지 못했을것이다.
이튼 스쿨을 졸업한 직후(졸업할 당시 나는 완전히 스무살이 되지 않았다) 나는 버마로가 <인도 제국주의 경찰이 되었다. 당시 <인도 제국주의 경찰>은 스페인의 경찰대나 프랑스의 기동 헌병대와 흡사한 일종의 헌병대인 무장경찰이었다. 나는 5년 동안 그런 일을 했다. 비록 그 당시버마에는 민족주의 감정이 뚜렷이 일고 있지도 않고 영국인들과 버마인들 사이의 관계도 특별히 나쁘지 않았지만,
그 직업은 나에게 맞지 않았고나로 하여금 제국주의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 P8

그리하여 나는 1927년에 휴가를 얻어영국으로 건너와서 미련 없이 경찰직을 그만두고 성공할보장도 없는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1928년과1929년 사이에 파리에 살면서 단편 이야기와 소설들을 썼지만 아무도 그것들을 출판해 주려 하지 않았다(그때 쓴원고는 몽땅 불살라버렸다). 그다음 여러 해 동안 나는 입에 풀칠만 할 정도로 가난에 허덕였다. 1934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여러달씩 빈민가에서 하층민들이나 범죄자 비슷한 사람들과어울려 지냈고, 거리로 나가 남의 물건을 훔치고 구걸하며 - P8

생활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돈이 없어서 그들과 어울려생활했지만, 나중에는 그들의 생활 방식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국의 북부 지방에 몇 개월씩 머물며 광부들의 생활 환경을 조사하기도 했다.
1930년까지만 해도 나는 대체로 나 자신을 사회주의자로는 여기지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정치적 입장을 아직 뚜렷이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친(親)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이론적으로 계획 사회에 찬동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산업 노동자들이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것이 싫었기때문이다.
나는 1936년에 결혼을 했다. 결혼한 그 주에 스페인에서 전쟁이 터졌다. 아내와 나는 스페인으로 가서 스페인정부를 위해 싸우고 싶었다. 6개월 후, 내가 쓰고 있던 책이 마무리되자마자 우리는 스페인으로 갈 준비를 했다. 스페인의 아라곤 전선에서 6개월을 보내고 있을 무렵, 나는어느 파시스트 저격병이 쏜 총에 맞아 목에 심한 관통상을입었다. - P9

전쟁 초반에 외국인들은 대체로 스페인 정부군을 지지하는 다양한 정치 집단들 사이에 내부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 외국인들로 구성된 국제 여단에 소속하지 않고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만든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Partido Obrero de Unificación Marxista에 가입하여 - P9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중반 공산주의자들이 스페인 정부를(정치적으로) 조종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을 때 아내와 나도 당국에 체포되어 희생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다행히 우리는 붙잡히지 않고 스페인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친구들이 사살되었고 오랫동안 감옥에 감금되거나 소리 없이 사라졌다.
스페인에서의 이러한 인간사냥은 소련에서의 대숙청‘
과 거의 같은 시기에 자행되었고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시아와 스페인에서 자행된 그러한 고발들(죄목은 프랑코일당과의 공모였다)은 같았지만 그곳(스페인)에서만큼은분명히 불법이었다. 이러한 모든 경험들은 나에게 실로 값진 현장 교육이었다. 나는 이 값진 체험들을 통해 <전체주의 선전이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문명인들의 의견을얼마나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 P10

아내와 나는 죄 없는 사람들이 단지 신조가 다르고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투옥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영국으로 돌아올 무렵 우리는 의식 있고 나름대로는 정확한소식을 접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스크바 재판‘에 대해 언론이 보도하는 공모, 반역, 사보타주와 같은 - P10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소련의 신화가 서구사회주의 운동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소련 정권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밝히겠다.
나는 소련을 방문해 본적도 없고 소련에 대한 나의 지식도기껏해야 책과 신문을 통해 얻은 것이 고작이다. 설령 내게 힘이 있다 해도 나는 소련의 국내 문제에 간섭하지도,
야만적이고 비민주적 행위를 했다고 해서 스탈린과 그의추종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은 그곳을 지배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분명 달리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1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서유럽 사람들은 소비에트 정권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1930년 이후 나는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한 쪽으로 발전하고있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배자들이 어떤 권력층보다도 더 확고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급사회로 변모하는 분명한 조짐을 보았다. 더구나 영국과같은 나라의 노동자와 지식인 계급은 오늘날 소련이1917년의 상황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소련의 실체를 알고 싶어 하 - P11

지 않는데도 있고(그들은 어딘가에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막연히 믿고 싶어 한다), 또 부분적으로는 공적 생활에서 상대적인 자유와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어 <전체주의>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데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국이란 나라도 완전히 민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영국은 또한 커다란 계급적 차별이있고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전쟁이 끝난 오늘날조차도) 부의 분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자본주의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수백 년 동안내전이 없었고, 법률이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소식들과 통계 자료들이 믿을만하고, 사람들이 소수 의견을 내거나 그것을 지지해도 치명적 위험에 처하지 않는 국가이다.  - P12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중들은 포로수용소, 강제 추방, 재판없는 투옥, 언론검열 등을 진정으로이해하지 못한다. 소련과 같은 국가에 대해 대중이 읽을수 있는 모든 것들은 자동적으로 영국의 관점으로 해석되어 그들은 <전체주의> 선전의 거짓말을 순진하게 다 받아들인다. 1939년까지 대다수의 영국 사람들은 독일 나치정권의 실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고 오늘날의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서도 여전히 과거와 똑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영국 사회주의운동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며 - P12

영국의 해외 정책에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내가생각하기에 사실,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지도자들의 모든 행동은 우리가 그것을 모방하지만 않는다면 용서될 수 있다는 믿음만큼 사회주의의 근본 이념을 타락시키는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과거 10년 동안,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운동의 부활을 원한다면 소비에트 신화는 반드시 파괴해야한다고 확신해 왔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나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있고 다른 언어로도 쉽게 번역될 수 있는 이야기로 소비에트 신화를 한번 폭로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P13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상당기간동안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시 나는 조그만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다) 나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느 꼬마가 커다란 달구지 말을 몰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꼬마는 굽은 길을 돌 때마다 말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만약 저런 동물들이 자기들의 힘을 인식한다면 우리 인간들은 저들을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없을것이며, 또한 인간들이 동물들을 부려먹는 것은 부자들이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동물들의 관점에서 분석하기시작했다. 인간들은 동물들을 착취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 P13

단결하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계급투쟁의 개념은 분명히 동물들에게는 전적으로 환상에 불과했다. 이러한 출발점에서 동물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른 작품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없어 1943년까지는 이 동물 소설을 마무리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동물 소설을 쓰던 중에 일어난 테헤란 회담‘과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소설에 집어넣어야 했다. 그래서 동물 소설의 윤곽은 내가 본격적으로 쓰기 전까지 6년 동안내 머릿속에만들어 있었다. - P14

이 소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만약 소설 자체로 말할 수 없다면 이것은 실패한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만은 분명히 해야겠다. 첫째, 비록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러시아 혁명의 실제 역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도식적으로 다루어져 있으며 연대순도 바뀌어 있다. 이야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둘째, 내가 충분히 강조하지 않아서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독자들은 이소설이 돼지들과 인간들이 서로 완벽한 화해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나의 의도가아니다. 오히려 나는 돼지들과 인간들이 서로 의견이 맞지 - P14

않아 언성을 높이며 입씨름하는 것으로 이 소설의 결말을계획했다. 모든사람들이 테헤란 회담이 소련과 서구 세계사이의 최선의 관계를 이끌어 냈다고 생각하던 직후에 이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련과 서구 세계사이에서 좋은 관계가 오래 지속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사건들이 증명해 보여 주듯이 내 생각은 크게틀리지 않았다. - P15

매너‘ 농장의 존스 씨는 그날 저녁 닭장 문은 자물쇠로채웠지만 너무술에 취한 탓에 작은 구멍 닫는 것은 잊어버렸다. 그는 마당을 가로질러 비틀비틀 걸어갔는데 손에 들린 등불의 둥그런 불빛도 그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따라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그는 집 뒷문으로 들어가 장화를휙 벗어던지고 주방으로 가더니 술통에서 맥주를 따라 마지막으로 한잔 쭉 들이켠 다음 2층 침실로 올라갔다. 존스부인은 벌써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침실의 불이 꺼지자마자 농장 건물 전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날개 퍼덕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미들 화이트 상을 받은 수퇘지 메이저 영감이 간밤에 이상한 꿈을꾸었는데, 그 꿈 이야기를 다른 동물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전언이 그날 낮에 돌았기 때문이다.  - P17

하지만 이것이 단지 자연의 섭리일까요? 아니면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 이 나라에 살고 있는사람들에게 여유로운 생활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동지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영국은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온화해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동물들보다 훨씬 많은수의 동물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습니다. 우리 농장의 경우에도 열두 마리의 말과 스무마리의 암소와 수백 마리의 양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현재 우리 모두가 상상할 수 없을정도로 안락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처럼 비참한 상태를 여전히 면치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노동으로 생산한 거의 모든 것들을 인간들이 다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동지 여러분,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우리의 유일한 적입니다. 인간을 여기서 몰아냅시다.
그러면 배고픔과 과로의 근원이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 P21

인간은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그들은 젖도 만들지 못하고 알도 낳지 못합니다. 그들은 몸이 너무 약해 쟁기도 못 끌고, 토끼를 잡을 만큼 빨리달리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동물의 왕입니다.
그들은 동물들을 부려먹고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만 동물들에게 돌려줍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몽땅 자기들이 차지합니다. 우리는 힘겹게 땅을 갈고 분뇨로 땅을비옥하게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벌거벗은 가죽을 빼고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내 앞에 계신 암소 여러분, 여러분이 이번 1년 동안 생산한 우유가 도대체몇천 리터입니까? 그런데 송아지를 튼튼하게 기르는 데쓰여야 할 그 우유가 다 어디로 갔습니까?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우리 적들의 목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 P22

그리고 우리는 이 비참한 생활이라도 누리며 천수(天壽)를 다할 수 없습니다. 내 경우를 말하면, 나는 대체로 운이 좋아 불만은 없습니다. 나는 열두 살이고 자식들도 4백마리가 넘습니다. 이것이 돼지의 본래 삶입니다. 그러나어떤 동물도 결국에 가서는 잔인한 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식용 돼지 여러분, 여러분도 모두1년 안에 도살대에서 비명을 지르며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암소와 돼지와 암탉과 양 모두가 말입니다. 말이나 개라고 해서 더 나은 운명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복서, 당신도 그 엄청난 근육이 힘을 잃게 되는 순간, 존스가 폐마 도축업자에게 팔아넘길 것이고, 그는 당신의 목을 잘라 삶아서 사냥개의 먹이로 쓸 것입니다. 개도 나이가 들어 이빨이 빠지면 존스가 목에 벽돌을 매달아 가까운 연못에 빠뜨려 죽일 것입니다. - P23

다만 다시 한번 말하건대, 인간과 인간의 모든 방식에 적개심을 갖는 게 여러분의 의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두 다리로 걷는 자는 모두 적이고, 네 다리나 날개를 가진 자는 모두 친구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싸울 때 그들을 닮아서는 안된다는사실을또한 명심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인간을 정복할 때에도그들의 악습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어떤 동물도 집에서살거나 침대에서 자거나 옷을 입거나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돈을 만지거나 장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습관은 모두 나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동물이든 서로를 탄압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약하든강하든, 현명하든 우둔하든 우리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어떤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합니다. - P25

그것은 3월 초순의 일이었다. 그 뒤 3개월 동안 많은 활동들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메이저의 연설은 농장에서똑똑한 동물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삶의 가치관을 심어 주었다. 그들은 메이저가 예언한 반란이 언제 일어날지 몰랐고, 또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른 동물들을 가르치고 조직하는 일은 당연히 농장에서 가장 총명하다고 알려진 돼지들의 임무가 되어 버렸다. 돼지들 중에서도 존스씨가 팔아먹기 위해 기르고 있던 두 마리의 어린 수퇘지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가장 탁월했다. - P30

그들은 건초용 풀을 거둬들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흘리며 일했던가! 하지만 수확은 기대보다 훨씬 큰 성공을거두었고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때로 일이 힘들기도 했다. 농기구들은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동물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뒷다리에 얹도록 되어 있는 농기구는 하나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큰문제였다. 그러나 돼지들은 영리해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말들은 풀밭을 샅샅이알고 있었고, 사실 풀을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에 대해서는존스와 그의 일꾼들보다 훨씬 잘 파악하고 있었다. 돼지들은 실제로 일은 하지 않고 다른 동물들을 지휘하고 감독하기만 했다. 그들은 훌륭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감독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 P42

그해 여름 내내 농장의 일은 별 어려움 없이 돌아갔다.
동물들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행복했다. 인색한주인이 그들에게 나누어 준 먹이가 아니라 동물들 자신이직접 수확한 식량이었으므로, 그것을 한입 먹을 때마다 그들은 벅차오르는 기쁨을 만끽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기생충 같은 인간이 없어지자 각자가 먹을 음식은 더 많아졌다. 아직 실제로 즐겨본 적은 없지만 여가시간도 많이생겼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해가 저물 무렵 곡식을 거둬들일 때 농장에 탈곡기가없어서 옛날 방식으로 발로 밟아 곡식을 털어 내고 입으로불어 겨를 날려 보내야 했다. 그러나 돼지들은 머리를 쓰고 복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해 항상 그런 고난을 극복했다. 복서는 모든 동물들로부터칭찬을 받았다. - P43

이제 동물들이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한가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도 존스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다는점이었다. 스컬러가 이런 식으로 설명하자 그들은 더 이상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돼지들의 건강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은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그래서 우유와 떨어진 사과(그리고 다 익었을 때 수확한 사과는 물론이고)를 돼지들을 위해 보관해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따지는 일 없이 통과되었다. - P51

개들이 다시 그의 뒤까지따라붙었다. 그중 한마리가 스노볼의 꼬리를 날카로운 이빨로 거의 물어뜯을 뻔했지만 스노볼은 꼬리를 홱 흔들어위험을 가까스로 모면했다. 그는 이제 마지막 있는 힘을다해 뛰었고 개들과 불과 간발의 차이를 두고 울타리 구멍을 빠져나가자취를 감추었다.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동물들은 창고로 다시들어왔다. 개들도 재빨리 뛰어들었다. 처음엔이 개들이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의문은 곧 풀렸다. 그들은새끼 때 나폴레옹이 어미로부터 떼내 개인적으로 길러 왔던 바로 그 강아지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완전히 자라진않았지만 거대한 덩치에 늑대처럼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폴레옹 옆에 바싹 붙어 다른 개들이 존스씨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그를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 P68

동물들은 스노볼이 추방된 데서 받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발표를 듣고 당황했다. 정당한 이의라도 생각났더라면 몇몇 동물들은 항의를 했을 것이다. 복서조차도 막연히 걱정이 되었다. 그는 귀를 뒤로 젖히고 몇 번이나 앞머리를 흔들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몇 돼지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뚜렷한 생각을 말했다. 앞줄에 앉아있던 어린 식용 돼지 네 마리가 찬성할 수 없다며 날카로운소리를 꽥 지르더니 재빨리 벌떡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폴레옹을 둘러싸고 있던 개들이 위협적으로 낮게 으르렁거렸고, 돼지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그 자리에 앉아 버렸다.  - P69

그는나폴레옹이 풍차 계획에 반대하는 척한 것은 동물들에게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던 위험 인물인 스노볼을 제거하기위한 술책의 일환이었다고 말했다. 이제 스노볼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계획은 그의 방해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게 이른바 전술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꼬리를 털기도 하면서 <전술입니다, 동지들, 전술입니다!>라고 여러번 반복해서 말했다. 동물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스컬러가 워낙 설득력 있게 설명했고, 또 함께 있던 세 마리의 개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기 때문에 동물들은 더 이상 아무 질문도 못하고 그의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P73

그해에 동물들은 줄곧 노예처럼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일을 즐겼다.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 자신과 후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빈둥빈둥 놀면서 도둑질이나 일삼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수고나 희생이 따르더라도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봄과 여름 내내 동물들은 1주일에 40시간씩 일을 했고,
8월이 되자 나폴레옹은 일요일 오후에도 일이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지만 참여하지 않는 동물은 누구든지 식량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일을 했는데도 어떤 일은 끝내 완수하지 못한 채 남겨두어야 했다. 수확은 지난해에 비해 다소 줄어들었고,
초여름에 근채류의 씨를 뿌렸어야 할 두 밭에는 쟁기질을제때에 못해 아직 씨도 뿌리지 못했다. 다가올 겨울이 고달프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해 볼 수 있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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