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 노래
ㅡ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되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너희 사랑
ㅡ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 P6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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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서성이며 울고 있습니다
아아 천둥 번개 비바람 지난 뒤에도
당신 떠난 빈자리에
사람들은 숲이 되어 서 있습니다

정희성시집 [그리운 나무]중에서





다시 오월,
여전히 당신이 그립고, 그리운 ... 시절입니다.
당신이 떠난지 벌써 15년이라니요.
그립고 그리운 나의 대통령님~
세월호 아이들과 이태원의 젊은이들과 김용균과, 또 다른 김용균들을 잘 보듬어주세요. 신경림선생님과 세상 얘기를 나누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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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신경림

 

이쯤에서 돌아갈까보다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찻집도 기웃대고 술집도 들러야지
낯익은 얼굴들 나를 보고는
다들 외면하겠지
나는 노여워하지 않을 테다
너무 오래 혼자 달려왔으니까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다
내 손에 들린 가방이 텅 비었더라도
그동안 내가 모으고 쌓은 것이
한줌의 모래밖에 안된다고
새삼 알게 되더라도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중에서]

 

 

이쯤에서, 이쯤에서, 이쯤에서를 되뇌면
행간과 자간 사이의 여백이 강렬해집니다.
감히 노시인의 곡진한 삶과 생의 관조가 엿보여서
코끝이 찡하기도 합니다.
시집[사진관집 이층]은 겨우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 서서
한편, 한편 읽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오래 오지 않는 버스에 손발이 시리고
늦을까봐 마음 조리다가 슬그머니 각진 모서리들이 무뎌지던 경험을 하게했지요.
시는, 시인은
그리하여 우리를 세상 안에 살게 합니다.



2014년 7월에 포스팅했던 시집입니다.
˝농무˝ 이후 참 좋아했던 시집이기도 하구요.
‘이쯤에서‘ 돌아가기로 시인은 결정하셨나봅니다. 이렇게 존경하는 원로를 또 보냅니다. 폭폭한 세상에서 숨통을 트게 해주시던 고 신경림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더 자주, 더 많이 시를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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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꼍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뒤꼍에 밤낮 없이 열어 두는문이 하나씩 있다 언제나 예감은 불륜의 발자국처럼 그리로 드나들었다 기일게 개미 떼들이 서둘러 피신한 뒤내리는 소낙비에 그러나 나는 왜 번번이 노박이로 흠씬젖었을까 그해 겨울도 그랬다 순천 선암사 뒤꼍 줄로서 있는 홍매화들이 노구를 이끌고 이 엄동에도 꽃눈부풀어 만삭이라는, 통통하게 벌서고 있다는, 숨이 차다는 전갈을 그날 아침 받기도 하였지만 그런 뒤꼍일때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날 우리집 뒤꼍 간장독이새벽부터 캄캄하게 뒤집혔고 이윽고 한 채 꽃상여가 산모롱이를 돌아갔다 눈발 날렸다 어머니가 이승을 하직하셨다

마지막 가을


여름을 여름답게 들끓게 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가을이 왔다 모든 귀뚜라미들의 기인 더듬이가 밤새도록 짚은 울음으로도 울음으로도 다 가닿지 못한 어디가 따로이 있다는 게냐 사랑이 멍든 자죽도 없이 맞이하는 가을의 맨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른 새벽길 아직도떠나지 못하고 있는 바닷가 민박집 여자의 아침상도 오늘로 접어야 하리 늘 비가 내렸다 햇살들의 손톱 사이에낀 푸른곰팡이들이 아직도 축축하다 부끄럽다 이 손으로 따뜻한 네 손을 잡겠다 할 수는 없구나 딸이 늦은시집을 간다는 편지를 객지에서 받는다 노동의 지전을센다 마지막 그물을 거두었다 이러는 게 아니지 너무오래 혼자 있는 가을에 익숙해졌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리 왜 이토록 서성거리는 게냐 슬픔이 떠난 자리는 늘불안했다 낡은 입성으로 오는 마지막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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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위험한 모험

"내 직감은 그것을 단어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더욱 명백해진다." 이런 문장을 썼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착각이었다. 글을 쓸 때 직감은 어딘가에 붙거나 고착된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까 ㅡ 그것이 진심이라면, 단어의 힘으로 파괴되거나 자멸한다는 경고를 받을 수 있다. 수면 위로 절대떠오르지 않길 바랐던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다. 환경이 지옥 같아질 수도 있다. 직감이 통과하려면 심장은 순수해야 한다. 세상에, 언제 심장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순수한 것을 정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때로는 부정한 사랑 속에 몸과 영혼의모든 순수함이 있다. 성직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으로 축복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ㅡ본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직감을 가지고는 장난칠 수 없다. 쓰는 행위를 가지고는 장난칠 수 없다. 사냥감은 사냥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 P328

저항

수술한 손의 손가락 사이에 있던 실밥을 풀었을 때 비명을 질렀다. 나는 아프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는데, 통증이 온전한 육체를 침해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는 통증을 핑계로 과거와 현재의 분노를 내질렀던 것이다. 세상에, 미래의 분노도.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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