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신경림
이쯤에서 돌아갈까보다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찻집도 기웃대고 술집도 들러야지
낯익은 얼굴들 나를 보고는
다들 외면하겠지
나는 노여워하지 않을 테다
너무 오래 혼자 달려왔으니까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다
내 손에 들린 가방이 텅 비었더라도
그동안 내가 모으고 쌓은 것이
한줌의 모래밖에 안된다고
새삼 알게 되더라도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중에서]
이쯤에서, 이쯤에서, 이쯤에서를 되뇌면
행간과 자간 사이의 여백이 강렬해집니다.
감히 노시인의 곡진한 삶과 생의 관조가 엿보여서
코끝이 찡하기도 합니다.
시집[사진관집 이층]은 겨우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 서서
한편, 한편 읽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오래 오지 않는 버스에 손발이 시리고
늦을까봐 마음 조리다가 슬그머니 각진 모서리들이 무뎌지던 경험을 하게했지요.
시는, 시인은
그리하여 우리를 세상 안에 살게 합니다.
2014년 7월에 포스팅했던 시집입니다.
˝농무˝ 이후 참 좋아했던 시집이기도 하구요.
‘이쯤에서‘ 돌아가기로 시인은 결정하셨나봅니다. 이렇게 존경하는 원로를 또 보냅니다. 폭폭한 세상에서 숨통을 트게 해주시던 고 신경림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더 자주, 더 많이 시를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