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새 만나는 친구들이 모두 하나같이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영화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게 속 시원하고 재미있더라고. 또 평일 조조 영화임에도 아줌마들이 얼마나 많은지 부녀회나 계모임 같은 데서 버스 대절해서 단체관람 온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란다. 왜 그리 여성관객들에게 인기가 많을까, 궁금해 했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또 결혼하고 싶은 아내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겠지?”
그 말에 낄낄대며 웃다가 ‘아내’는 아니지만 혼자서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는 참 재미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력, 극적 긴장,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영화였다. 기분 좋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 혼자, 영화 평을 한 줄로 정리했다.
“아내는 결혼할 수 없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내 결론은 그것이다. 그러나 결론만 듣고 함부로 오해마시길. 어떻게 감히 여자가 두 남자를 거느리고 산다는 천벌 받을 상상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 아니니까. (지금껏 남자는 버젓이 두 여자를 거느리고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 그 정도의 상상이 뭐 그리 대단한 사건이라고.) 내 말은 두 남자를 거느리고 살든, 세 남자를 모시고 살든 아무 상관없지만, ‘아내’라는 명함을 가진 여자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아내’라는 명함은 제도에 진입한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명함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함께 오래 살아도 제도가 내어준 허가증이 없는 여자는 기껏해야 ‘동거녀’라는 이름을 얻을 뿐이다.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 그것이 바로 ‘아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제도다.
이 현실에서 선택은 늘 양자택일이다. 제도를 선택해서 아내라는 이름을 얻든가, 그 이름을 버리고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든가. 그러니, 아내라는 이름으로 일부일처제에 반하는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바람피우는 남자들을 싫어한다. 아니, 솔직히 경멸한다. 나 같은 비혼주의자에게 자유롭게 연애하자며 접근하는 유부남들이 가끔 있다. 그들의 논리는 한 사람에게 구속당하는 사랑 따위는 너무 구식이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랑, 자유로운 관계가 트렌드래나, 뭐래나…….
그들에게 “저는 아무리 남자가 궁해도 유부남하고는 연애하지 않는데요.”라고 점잖게 일러주면 내가 말로만 자유를 얘기하는 ‘얼치기 자유주의자’라고 충고까지 한다. 이쯤 되면 속된 말로 머리에 스팀 들어온다.
“야! 그렇게 자유연애가 하고 싶으면 결혼은 왜 했냐? 자유를 얻기 위해 제도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내 삶이 니 눈엔 장난으로 보이냐? 결혼제도에 진입해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지 아내 등쳐먹고, 거기다가 나 같은 여자랑 자유연애까지 하겠다는 니 욕심에 장단맞춰줄 생각 없으니, 좀 꺼져 줄래?”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 어떤 자유도 대가없이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제도, 폭력, 편견, 이념과의 처절한 싸움 끝에 얻어내는 것이 진정한 자유다. 일부일처제에 동의하지 않는 자유로운 성과 사랑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억압과 치열하게 투쟁할 때만 얻어낼 수 있는 것이지, 유부남들이 바람 피울 때 써 먹는 논리가 아니란 거다.
아내는 결혼할 수 없다. 그 말은 곧바로 남편도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연이어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에 동의한 사람들은 자유로운 성과 사랑을 얘기할 자격이 없다는 거다. 그러면 당신들은 또 묻겠지? 너무 늦게 찾아온 사랑은 어찌하냐고.
쳇, 그걸 왜 나한테 묻나? 그런 피곤한 상황 만들기 싫어서 결혼제도를 거부하고 사는 내가 왜 당신들의 그런 상황까지 고민해줘야 하나, 내 고민만으로도 머리 아픈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