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당한 20대 여성이 사흘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성폭행 피해자들의 자살 소식은 이제 더 이상 낮선 얘기가 아님에도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의 슬픔을 가누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슬픔의 감정 뒤에는 항상 주체하기 힘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성폭행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전문가들은 그들을 피해자란 이름보다는 ‘생존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이름은 죽음을 선택한 피해자들 덕분에 얻어낸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의 죽음이 또 다른 어떤 이들을 생존자로 바라보게 하는 사회적 눈을 준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오늘 문득,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생존자들이 존재하는지 깨닫습니다.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초등학생의 죽음은, 학원가방을 메고 뛰어 다니는 어린 아이들이 생존자임을 알게 합니다. 카드빚에 몰려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 어머니를 만나면서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모두 생존자임을 알겠습니다. 동성애자인 한 젊은이의 죽음은 뒤 늦게나마 성적소수자들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사투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죽어가는 농촌과 더불어 죽음을 택하는 농민들과,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파업에서 분신하는 노동자들. 결국 우리 모두가 이 사회의 생존자입니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슬픔의 감정 다음에 만나는 것은 분노입니다. 가해자들을 향한 적절한 분노는 생존자들을 치유하기 위한 가장 좋은 치료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수많은 생존자들은 그 치유를 위한 분노를 표출할 수 없기에 제 2, 제 3의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해자들은 늘,  정치, 법, 공권력, 안정, 경제라는 논리로 생존자들의 분노를 폭력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만으로 세상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분노의 에너지가 사회를 변화시키고 우리 스스로를 인간답게 치유하는 중요한 근원입니다. 생존자들의 분노는 무질서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들이 죽어야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이 이해 받을 수 있을지, 그들의 분노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지 답답합니다. 하지만 아직 살아남은 한 사람의 분노가 다른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린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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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남성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한편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진 것이 아니냐는 은근한 반론이 이어진다.

  여성들이 다시 호주제, 취업문제, 결혼제도 등을 들먹이면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면, ‘그래도’라면서 또 다시 반론이 시작된다. 이 때,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근거들로 등장하는 것이 주로 가사노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사회는 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집 안에서는 이미 여성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집안일을 얼마나 잘 도와주는지 아느냐고 하면서 자기 집에서만큼은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는 남성들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남성들은 캐물을 것도 없이 가사분담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도와준다? 집안 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기본 노동이다. 그런데 자기 몫의 일을 하는 것을 ‘도와 준다’고 말한다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이미 ‘가사노동’은 여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런 남성들의 인식을 수치로 보여주는 보고서가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통계청에서 그저께 펴낸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보고서에 따르면 초혼연령이 높아지고 동갑·여성 연상 부부도 늘어나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여성의 상당수는 여전히 가사에 대한 남녀 공평 부담을 원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가사를 부인이 주도하는 가정은 2002년 88.9%에 달한 반면 공평하게 분담하고 있다는 가정은 8.1%에 그쳐 과거와 비교할 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기 몫이 가사노동을 자기가 알아서 하는 남성이 열에 하나도 안 된다는 말인데, 그럼 나머지 아홉은 아이에서 자라기를 멈춘 피터팬들인가? 우리나라가 네버랜드도 아닌데, 피터팬들이 이렇게 넘쳐나다니, 안타깝다.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는다고 성인이 저절로 되는 건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돈을 잘 번다고 성인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성인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땅의 남성들이 피터팬신드롬에서 깨어나, 진정한 성인이 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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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동창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예전으로 돌아가서 시시콜콜한 기억들을 다 우려먹고 나니 이야기는 슬슬 현재로 돌아왔다. 30대 중반, 빠질 수 없는 것이 아이 키우는 이야기이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둔 남자 친구가 하는 말이, 요즘은 남자아이들 키우는 게 더 힘들단다. 자신이 아들이 짝인 여자아이 치마를 들추는 장난을 쳤는데 그 일로 여자아이 부모가 전화를 걸어와서 따졌다는 것이다. 그런 장난 한 두 번 안하고 자란 아이들이 누가 있겠냐며 여자아이 부모들이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라며 둘러 앉은 사람들의 동의를 구했다. 그 친구에게 나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봄소풍에 엄마가 만들어준 치마를 입고 갔는데 짓궂은 남자 아이가 내 치마를 들추며 놀려댔다. 그 뒤로 이상하게도 소풍 때 찍은 사진에 나는 늘 바지를 입고 있다. 서른이 훨씬 넘은 지금도 치마를 입은 날은 웬지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순간 유쾌한 장난인 추억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을 따라 다니는 악몽같은 기억일 수도 있다. 

 

  놀러간 바닷가에서 장난으로 빠트린 여학생이 죽음에 이른 기사를 보았다. 그 가슴아픈 사건은 어쩌면 예고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상대가 수영을 할 줄 알건 모르건 무조건 빠트리는 것이 놀이의 즐거움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에서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왕따 당하는 학생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데도 가해 학생들에게 그 일은 장난일 뿐이었다. 이라크 포로를 학대하는 미군병사의 사진을 보고 모두가 충격을 받았지만, 그 병사의 대답은 장난이었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많은 가학적 행위에서 쾌감을 찾기 시작했다. 그건 자기 속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인간들이 타인의 불행을 자기 기쁨의 거름으로 삼는 논리와 맞닿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내 삶이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폭력이 되었을까 두려워진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던 예수의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우리를 자유케 할 진리는 내가 아닌 타인의 현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었을까? 남성이라면 여성의 삶을, 가진 자라면 못 가진 자의 삶을, 비장애인이라면 장애인의 삶을, 이성애자라면 동성애자의 삶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 그것만이 폭력없는 사회로 가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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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에 책을 사러 들렀다가 책방 한 귀퉁이에서 팔고 있는 그림 액자를 보았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냥 그림이 아니라 퍼즐이었다. 판매하시는 분의 설명이  퍼즐을 사서 맞추어 액자에 넣은 것이라고 한다. 갑자기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책 살 돈을 반 뚝 잘라서 그 퍼즐을 사고야 말았다. 그것도  조각이 천 개나 되는 가장 큰 것으로.

 

  그날부터 그놈의 퍼즐 맞추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근데, 이게 정말 만만한 작업이 아니어서 일요일 하루를 종일 그 조각들과 씨름을 했는데도, 웬걸, 반도 채 못 맞췄다. 허리도 아프고 눈도 시큰거리고……. 내가 사서 고생하는구나 싶어서 혼자 투덜거리면서도 눈은 조각이 들어갈 자리를 찾느라고 그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 일도 요령이 생겨서 좀더 쉽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중간에 위치한 인물은 옷이나 손에 든 물건 따위들이 알아보기 쉬운 색깔이기 때문에 먼저 맞추고, 배경 화면은 주로 자연 풍광이 되다 보니 온통 푸른 빛 투성이어서 나중에 천천히 맞추어야 했다. 가운데 위치한 인물들을 후딱 맞추고 나니 나머지 배경은 푸른색과 짙푸른색, 검푸른색, 연푸른색들의 미묘한 차이를 눈으로 알아내느라 애를 먹었다.

 

  결국은 일주일만에 퍼즐을 완성했다.

 거실 벽에 그 그림을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보니 완성된 그 그림보다 맞추느라 끙끙댄 일주일이 더 소중한 시간들이었단 걸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퍼즐맞추기에 골몰해 있던 지난 일주일이 내인생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인생도 저런 것이려니. 알록달록 현란한 것들은 늘 쉽게 맞출 수 있지만 정작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풍경은 맞추기 힘들 듯이 돈과 명예처럼 쉽게 눈에 띄는 것을 쉽게 얻는 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내 삶의 여백을 채워주는 저 그득한 푸른 빛들인데 저걸 제대로 맞춘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젠 돈벌이의 당위성에 치여 죽어버린 내 꿈, 바쁘다는 핑계로 소식 끊고 사는 친구들, 이웃에 대한 열린 사랑, 보람, 베품, 충만함, 마음의 여유, 공동체의 가치……. 그 푸른 조각들을 나는 얼마나 잘 맞추고 살고 있는지 돌아본다.

 

  내가 미처 맞추지 못한 조각이 무얼까? 어쩌면 나는 영영 그 조각들을 잃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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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소설책, 시집, 인문학 서적, 사회과학 서적, 자연과학 서적 등. 하지만 책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어른들만의 특권인 듯 하다. 아이들의 책은 딱 두 가지만 존재한다. ‘공부에 도움되는 책’과 ‘도움 안 되는 책’.

 

  아이들이 만화책을 읽고 있으면 부모들은 ‘쓸데없는 책 그만 보고 공부나 하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가 ‘엄마. 이거 학습만화야.’하고 대답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만화도 다 같은 만화가 아니라 ‘학습에 도움되는 만화’와 ‘도움 안 되는 만화’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소설이든, 시든, 동화든, 판타지든, 공부에 도움된다는 판단만 서면 인정되고 그렇지 않은 책은 몹쓸 책으로 치부된다. 게다가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책은 일단 의심을 받는다. 아마 어른들의 사고방식에는 ‘공부’란 재미없는 것이고, 공부에 도움되는 책 역시 재미없는 게 당연한 것이어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보는 책이란 다 쓸모없는 책이란 논리가 박혀 있기 때문이리라.

 

  사정이 이쯤되고 보니, 도대체 책이란 게 뭔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우습게도 아이들에게 책을 왜 읽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입을 맞춘 듯이 하는 대답이 있다.

  “지식을 쌓게 해 주잖아요.”

  ‘공부에 도움되잖아요.’라는 말을 조금 그럴 듯하게 옮긴 말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책을 좋아한다. 누가 나에게 책을 왜 읽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정해져있다.

  “재미있잖아.”

  그렇다. 책은 재미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다. 아무리 글자가 깨알같아도, 아무리 두꺼워도 재미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그런데 그 ‘재미’를 주는 책들이 의심받고 비난받는 세상이라니…….

 

  아이들에게 책을 돌려주자. 정말 재미있게 푹 빠져서 상상하고, 깔깔거리고, 그러다가 눈물도 찔끔거리는 그런 소중한 시간들을 돌려주자. 감성과 즐거움조차도 공부의 범위 안에서 키워지는 세상은 너무도 끔찍하다.

 

  아이들의 책에 여전히 두 가지 구분만을 해야한다면 차라리 ‘재미있는 책’과 ‘재미없는 책’으로 나누자, 그래서 재미없는 책은 만들지도, 팔지도, 사지도 말자. 너무 위험한 상상이라고? 그렇다면 공평하게 어른인 우리도 재미없는 책만 읽자. 아니, 어른인 우리는 이미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책을 읽을 까닭이 없는데…….그러면 도대체 왜 책을 읽자고 그렇게 떠들어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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