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동창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예전으로 돌아가서 시시콜콜한 기억들을 다 우려먹고 나니 이야기는 슬슬 현재로 돌아왔다. 30대 중반, 빠질 수 없는 것이 아이 키우는 이야기이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둔 남자 친구가 하는 말이, 요즘은 남자아이들 키우는 게 더 힘들단다. 자신이 아들이 짝인 여자아이 치마를 들추는 장난을 쳤는데 그 일로 여자아이 부모가 전화를 걸어와서 따졌다는 것이다. 그런 장난 한 두 번 안하고 자란 아이들이 누가 있겠냐며 여자아이 부모들이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라며 둘러 앉은 사람들의 동의를 구했다. 그 친구에게 나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봄소풍에 엄마가 만들어준 치마를 입고 갔는데 짓궂은 남자 아이가 내 치마를 들추며 놀려댔다. 그 뒤로 이상하게도 소풍 때 찍은 사진에 나는 늘 바지를 입고 있다. 서른이 훨씬 넘은 지금도 치마를 입은 날은 웬지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순간 유쾌한 장난인 추억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을 따라 다니는 악몽같은 기억일 수도 있다. 

 

  놀러간 바닷가에서 장난으로 빠트린 여학생이 죽음에 이른 기사를 보았다. 그 가슴아픈 사건은 어쩌면 예고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상대가 수영을 할 줄 알건 모르건 무조건 빠트리는 것이 놀이의 즐거움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에서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왕따 당하는 학생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데도 가해 학생들에게 그 일은 장난일 뿐이었다. 이라크 포로를 학대하는 미군병사의 사진을 보고 모두가 충격을 받았지만, 그 병사의 대답은 장난이었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많은 가학적 행위에서 쾌감을 찾기 시작했다. 그건 자기 속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인간들이 타인의 불행을 자기 기쁨의 거름으로 삼는 논리와 맞닿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내 삶이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폭력이 되었을까 두려워진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던 예수의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우리를 자유케 할 진리는 내가 아닌 타인의 현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었을까? 남성이라면 여성의 삶을, 가진 자라면 못 가진 자의 삶을, 비장애인이라면 장애인의 삶을, 이성애자라면 동성애자의 삶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 그것만이 폭력없는 사회로 가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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