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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년 전에 시내 팬시점에서 시계를 하나 샀다. 금속성 줄은 차가운 느낌이 싫어서 가죽으로 된 줄을 골라서 한해 동안 잘 차고 다녔다. 근데 최근에 줄이 너무 낡아 떨어져 버려 그 팬시점으로 줄을 바꾸러 갔었다. 근데 가게 점원이 하는 말이

  “손님, 이 시계는 너무 오래된 거라서 본사에 이 종류의 줄이 남아 있을 지 모르겠네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날 시계를 맡겨두고 돌아와서 ‘너무 오래된……’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던 그 말을 계속 되뇌어 보았다. 산 지 일년 된 시계가 너무 오래되었다면 도대체 시계를 몇 달만에 하나씩 갈아야 한다는 걸까? 그 생각을 골똘하게 하고 있자니, 갑자기 내가 ‘도대체 이 노무 세상이 미친기지 시푸다.’고  투덜대시던 칠순의 우리 어머니 심정을 이해할 듯도 하다.

 

  그러고 보니 조카녀석들이나 주위에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필통이나, 가방, 바지 따위가 낡은 걸 본 적이 없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쓰는 건 이미 옛날 사고 방식이 되어버렸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모양이나, 색깔이 나오면 겨우 몇 달 전에 열광하고 매달렸던 그 물건은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 버리는 세상이다.

 

  권정생 선생의 동화 ‘또야 너구리가 기운바지를 입었어요’에, 엉덩이를 기운 바지를 입기 싫어하는 또야 너구리에게 엄마너구리가 하는 말이 있다.

  “또야가 이 기운 바지를 입으며 산에 들에 꽃들이 더 예쁘게 핀단다. 그리고 시냇물에 고기들도 더 많이 살고, 하늘에 별님들도 더 예쁘게 반짝거린단다.”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들이 누구로부터 빼앗아오는 것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 순박한 자연에게서 착취해 오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자라는 아이들에게 소비가 미덕이고 유행을 좇아가는 게 개성이라고 가르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황금과 물질의 신이 유일신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소박함과 더불어 인간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비웃고 이단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아직도 인간임을 완전히 잊지 않았다면 소비하는 즐거움이 누구의 배를 불리고 누구를 억압하는 결과인지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값비싼 것을 가지고 걸친 사람들의 호사스러움 뒤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자연들이 어떻게 유린되고 있는 지 한번만 돌아봐 주자. 우리가 광고의 유혹에 사흘이 멀다하고 바꾸어대는 소비재들 너머로 죽어가는 자연을 한번만 떠올려 보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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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별 2007-10-0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남긴건 첨인데... 항상 불만이었던 하지만 내주위의 누구하나 의식하지 못해 이런생각하는 내가 미친건가 하고 고민했었는데... 이런생각을 가진분이 있어 반가워 추천 누르고 갑니다

산딸나무 2007-10-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저 역시 제 생각에 공감하시는 분을 만나서 참말 기쁩니다.
 

   어느날, 아이들과 동화수업을 하다가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나누어 보게 되었다. 짐작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가 싫어하는 것’이 다섯 배는 더 많았다. 급식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더 많이 주는 아이, 선도랍시고 마구 이름 적는 형아, 시험 성적이 떨어졌다고 때리는 선생님 …….

 

얘기를 마친 다음에 아이들에게 자기가 쓴 것들 가운데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누어 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들 가운데 옳지 않은 것을 찾아서 바람직한 가치관을 세우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데, 아이들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없어요!’라고 한다.

 

“선생님이 시험 못 쳤다고 때리는 게 싫다며? 선생님이 성적이 나쁜 아이들을 때리는 게 옳을까? 옳지 않을까?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맞을 까닭이 있나?”

“그래도 공부 못 하는 애들은 때려야죠. 안 때리면 더 안 하잖아요.”

“그래도 니가 맞는 건 싫다며?”

“그럼요, 내가 맞는 건 싫죠.”

“…….”

 

싫은 것은 있으나 옳지 않다는 가치 판단은 없는 아이들……. 결국은 어른들의 책임이겠지. 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불의도 나한테 피해만 없으면 별 상관 없다는, 그러나 내가 피해를 입으면 싫다는 식의 모습들을 아이들은 그대로 배우고 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울려면 세상의 모든 일을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좋고, 싫고를 넘어서서 정의와 불의가 존재하고, 정의롭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이 더 아름답다는 진리.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빈정댄다.

“그런 원칙대로 살면야 좋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현실과 이상은 다른 거라구.”

 현실과 이상이라는 이분법을 누가 가르쳤을까? 누가 현실은 이상과는 다른 거라고 얘기했을까? 이상이 없는 현실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 현실이 없는 이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안다면 현실과 이상을 나누는 일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으로, 그른 것은 그른 것으로 존재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옳은 것을 택했을 때 당당하고, 그른 것을 택했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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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다. 거리를 나서면 원숙한 가을바람이 머리칼을 기분 좋게 간지럽힌다. 이 갑갑한 도시의 한 가운데까지 불어와서 대지가 살아있음을 일깨워 주고 더불어, 나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바람... 세심하고 너그러운 그 바람에 오감을 열고 있노라면 ‘가을은 바람의 계절이다’라고 정의 내리고 싶어진다.

 

  그런데, 가을이란 계절을 이야기하면 빠뜨리지 않는 정의가 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좋은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은 ‘책’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오해들 때문이겠다.

 

  인간은 책의 친구가 되기 위해 책을 창조했지, 책의 노예가 되기 위해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책을 ‘우러러’보는 지 갑갑하다. 나도 직업 때문에 어쩔 수없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면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남의 생각’인 책에 파묻혀서 그것들을 들어주느라고 내 생각을 제대로 풍부하게 다듬을 시간이 없어서 고민이다. 게임에 빠져 사는 아이들을 걱정해야 하듯이, 나처럼 남의 생각 읽는 재미에만 빠져 사는 사람 역시 문제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떠올릴 때, ‘많이 읽기’, ‘빨리 읽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일 거이다. 그러나 진정한 독서는 자기의 생각과 삶을 위해 존재하는 독서이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광고, 평론가, 그 어떤 누가 권해도 자기에게 맞지 않고 재미없는 책은 덮어 버린다. 그리곤 능청스레, ‘재미없다’를 연발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꼭 맞는 책을 발견했을 때는 그 재미에 푹 빠져 든다. 그리고 그 감동을 오래오래 느끼기 위해 한동안 다른 책을 잡지 않는다. 정말 책의 친구가 될 만한지 않나.

 

  그 친구를 보고 있노라면 공자의 저 유명한 말이 딱 어울린다.

知之者는 不如好之者요, 好之者는 不如樂之者니라.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 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 하니라

 

  가을이다. 내가 마음을 송두리째 바쳐 기꺼이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 해 보자. 그게 책 읽기라면 좋은 책 한 권 드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아쉽지 않나, 저 바람...

  오늘만은 책을 덮고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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