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만으로 사는 당신, 행복한가요?

리디아의 정원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13
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그림, 이복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4월

  나는 아이가 없다. 하지만 우리 집 서재 아래 칸엔 그림책들이 가득 쌓여있다. 내가 읽기 위해 사 모은 책이다. 이 그림책들은 내 노후를 위한 보험이다. 내 삶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인 책읽기가 언젠가는 힘들어지는 날이 오겠지. 눈도 어두워지고 집중력도 떨어지고,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든 그런 날. 그 때가 되면, 이 그림책들을 꺼내서 날마다 읽고 또 읽을 요량이다.

 그림책은 글보다는 그림으로 말하는 책이다. 그림은 활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백 번, 천 번을 봐도 볼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읽는 느낌일 테니 평생 소장할 가치가 있는 책으로 치자면 그림책이 으뜸 아닐까?

 ‘리디아의 정원’은 그 중에서도 단연 손꼽을 만한 그림책이다. 책을 펼 때마다 늘 새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림들이 건네는 이야기들에서부터 저네들끼리 소곤거리는 속삼임까지 무궁무진하다. 셀 수 없이 읽었어도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넘친다.

  데이비드 스몰의 부드러운 그림은 언제 봐도 포근하다. 부인인 사라 스튜어트의 글은 또 얼마나 정겨운가. 두 사람은 꽃 가꾸기를 좋아하는 한 여자아이가 맞닥뜨린 작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전해준다.

 시골에서 할머니, 부모님과 살던 리디아는 아빠의 실직으로 잠시 도시에 있는 외삼촌 집에 가서 살게 된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낯 선 곳으로 살러 떠나는 어린 여자아이의 마음이 오죽할까? 모두가 잠든 기차 안에서 혼자 눈 떠 창밖을 바라보는 리디아의 모습에서 새어나오는 불안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장에서 진회색 빛으로 가득한 기차역에서 혼자 오도카니 서서 외삼촌을 기다리고 있는 리디아의 모습은 정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첫 장에서 할머니와 함께 토마토를 따면서 웃음 짓는 리디아의 뒤에는 보드라운 연두 빛이 가득 펼쳐져 있었는데... 아이의 두려움이 읽는 이에게 고스란히 다가온다.

 하지만 리디아는 외삼촌네 버려진 옥상에 꽃을 가꾸면서 이웃들과 함께 웃고 행복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결국엔 외삼촌의 무뚝뚝한 얼굴에도 웃음을 찾아주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인공은 리디아도, 외삼촌도, 할머니도 아닌 바로 외삼촌네 까만 고양이이다. 처음 봤을 땐 있는 줄도 몰랐던 이 주인공은 완벽한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설거지통에서 빈 접시를 핥는 것을 좋아하고, 수선화 줄기에 살고 있는 귀뚜라미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기도 한다. 또 우체부 아저씨 품에 안겨 가르릉거리는 걸 너무도 행복해하고. 늘 리디아의 뒤를 좇아다니다가 결국엔 리디아를 따라서 시골집으로 내려간다. 이 많은 사연들을 이 책을 열 번쯤 읽고서야 알아냈다.

 내가 새롭게 알아낸 이야기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리디아의 꽃은 외삼촌의 웃음을 찾아준 것만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결정적 장면이 있었다.

 외삼촌의 빵집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리디아가 가꾼 꽃들을 보면서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이 있다. 그런데 그 장면의 제일 왼쪽 아래 귀퉁이에 한 남루한 복장의 남자가 있다. 그는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일까, 저녁상에 놓을 감자를 사러 나온 가난한 아버지일까... 그의 손엔 꽃 한 송이가 들려있고 그 꽃의 향기를 맡는 듯한 그의 얼굴엔 편안한 웃음이 번진다.

 ‘빵과 장미’란 말이 있듯이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꽃은 바로 빵과 함께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생각이 이 즈음에 이르자 갑자기 외삼촌의 직업이 빵 만드는 사람인 것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어쩌면 작가는 리디아의 정원을 통해서 ‘빵’의 가치가 전부인양 착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꽃’의 의미를 일깨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도시에서 ‘빵’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당신, 정말 행복한가요?”

 작가의 소리 없는 물음이 들린다.

 내가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어서 이 책을 다시 펼칠 때 리디아의 정원에는 또 못 보던 꽃들이 피어 있겠지? 그 때쯤엔 그 꽃의 향기를 맡을 수도 있을까? 두렵지만 그 만큼 또 설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