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떤 광고 장면에서 ‘마이 어드레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순간, 광고에서 해석 없이 나올 영어 단어 같으면 아주 쉬운 걸텐데, 무슨 뜻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빨래를 널고 있는 친구를 불러 “야, ’마이 어드레스‘가 뭐꼬?”하고 물었더니, 친구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갑자기 널던 빨래를 제쳐두고는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되물었다. “정옥아, 니 농담 했는 거제?”

  아, 그때 난 속으로 ‘어드레스’만 물어 볼 걸 싶었다. ‘마이’는 아는데......


  친한 사람들은 내 영어 실력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때가 많다. 저러고도 대학을 졸업했다니... 사람들이 왜 영어 공부를 안 했느냐고 물을 때마다, “중학교 일 학년 때 영어공부 해 본 뒤로는 영어 몰라도 삶이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 그 시간에 책이나 읽지.”라고 대답하는데, 난 진심인데 잘 믿어 주지 않는다.

 

  근데, 그렇게 영어를 무시하고 살던 내가 영어 때문에 사는 게 힘들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마이 어드레스‘ 사건 뿐 아니라, 영어를 모르니까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영어공부를 할까?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지난 번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는 희망터의 호프 때였다. 여성장애인연대의 자리에 합석을 해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는데, 청각 장애우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하는데, 다른 분들은 수화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어서 내 얘기를 전해 주기도 하시고, 나랑 얘기도 했다. 그 순간에, 수화를 배워 둘 걸 싶었다. 진보적이란 딱지를 붙이고 있으니 그 쯤은 해야지 않겠느냐는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말 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또다른 누군가에게 소외를 느끼게 한다면,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누군가에게 소외당한다면, 그 상황이 너무 부끄러웠던 까닭이다.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라면 사실, 영어는 몰라도 일상적이지 않으니까 상관없지만 수화는 어떤 이들에게는 일상적인 말인데...

 

  돌아와서, 내가 지금 시간을 들인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어는 모르면 부끄럽고, 수화는 할 줄 몰라도 전혀 문제없는 세상을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았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잠이 안 왔다. 나를 찔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 찔림을 덮어 버리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의 기본일 텐데.

 

  돌아보게 된다. 내가 당연히 누리는 모든 것들이 누군가를 억압한 결과가 아닌지, 숨쉬고 걷고, 말하고, 먹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행여나 누구를 소외시키는 행위가 아닌지...

 

  입을 열어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를 말하기 전에, 앞서서 입을 열 용기를 주는 것이 진보적 삶을 선택한 사람들의 자세라면, 나는 이미 누군가가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는 권리에서 조차도 제품으로 나와 있는 것만 관심 가지는 자본주의적 인간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어서 찔리고 또 찔린다.

 

  그래서 고백한다. 나는 여성주의자가 되려고 하지만 그 이름을 얻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하지만 부끄럽지 않아도 되게 살려고 노력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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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5-12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화는 배우고 싶었는데, 잘 안되는 군요. 대학에서 배우고 있는 전공은 영어가 어느정도 필요한 것이라서, 영어기초 잡는데만 시간 다 가는 군요.

잘 읽고 갑니다.^^;

산딸나무 2007-05-13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께 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 지 물었습니다.
그때 그 분이 '영어 못하고도 대학 갈 줄 아느냐?'고 하신 말씀에
영어 공부를 손 놓았습니다.
헌데 그 분이 영어란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고 즐기는 통로라고 설명해주셨으면
영어공부를 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영어공부도 재미있게, 그리고 수화도 시간내서 배우시길 바래요^^
어차피 모든 공부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