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영희를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나는 언제나 이처럼 우리 군부나 정보주나 극우.반공 .반통일적 전쟁주의자들이 몽매한 국민을 속여가며 그들의 정권 연장을 도모하고 민족의 화해를 거부하는 그들의 주장의 가면을 벗기기를 사명으로 여겼지. 대중에게 진실을 밝히고 깨우쳐주려고 했어요(646쪽)"

리영희를 처음 접한 것은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그의 저서에서 였습니다. 그 책에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말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 들려주었습니다. 그 충격을 통해 그의 책을 몇 권 보았습니다. 『새들은 좌.우의 날개로 난다』까지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가히 '전환시대의 논리'를 제공해 주었으며, 내가, 우리가 가진 미국관(--觀)에 대해 전혀 낯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그 깊이와 정세 분석,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낙동강 오리알 처럼,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든데라는 거짓말같다는 이야기뿐. 하지만 내가 그의 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가 말하는 논리가 사실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시대에 두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은 리영희를 아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리영희를 모르는 사람.

나는 ①리영희의 글쓰기가 무엇인가를 살핀 다음, 그 글쓰기에 비친 ②세계관을 담아보고, ③리영희라는 인간적인 존재④역사적인 물음, 더 나아가 ⑤우리가 지향해야 할 시대를 적어보겠습니다.

1. 리영희의 글쓰기
"취재기자는 세 가지 스타일이 있어. 발로 뛰는 기자, 남의 기사들을 모아서 쓰는 기자, 안건의연구를 통해서 접근하는 기자. 이 세가지에요. 나는 그 세번째의 연구.조사하는 방식이 주특기였기 때문에, 간사이면서 혼자 정보원을 만나는 그런 취재는 필요가 없었어요(315쪽)"

언제나 연구 조사하는 방식이 주특기이기에, 그는 무작정 찾아가서 '~꺼리'가 없느냐고 묻고 다니지 않습니다. 연구 조사를 통해 90% 이상의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진 다음, 나머지는 이에 대한 답변을 얻는 형식을 취합니다. 이런 지은이의 글쓰기는 삶을 관통하는 세계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일생 동안 '군부'나 '정보부'가 주는 정보만을 가지고 기사화했다면, 시대의 증인으로 우리곁에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정부에 의해 압박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에 다가가야 하는가를 지은이의 직업정신에서 읽어내려갑니다. 그의 글쓰기는 『모략』에서, 손자의 전략을 인용한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勝兵先勝而後求戰 敗兵先戰而後求勝
이기는 兵은 먼저 승리를 구하고 싸움을 한다. 패하는 兵은 먼저 싸우고 나서 승리를 구하려 한다.

2. 리영희가 바라보는 세상(세계관)
"공자의 『논어』에 「정언」(正言)편이 있어. 제자가 공자에게 "정의의 요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데 대해, 공자는 "사물의 이름(명칭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라고 답했어요. 다시 말하면, 검은 것은 희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검다고 해야 하고, 악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칭해야 하고, 사슴은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불러여 하고, 말은 사슴이 아니라 말이라고 칭해야 하고... 이처럼 모든 형태나 관계나 성격이나 형상의 본질을 정학하게 인식하고, 그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 상호간의 생존에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고의 주체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에요.(374쪽)"

"나는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조선침략과 합방, 그리고 식민지 문제들에 대한 법적.정치적 죄과에 대해서는 응분의 준엄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민족적 입장을 취하지요. 이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겁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는 한일 두 나라의 문제를 과거의 역사적 사실만을 강조하면서 일본인 또는 일본 민족에 대해 일방적 비난이나 규탄을 일삼는 배타적 민족주의의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아요. 19세기 말의 한민족이나 당시 우리 선조들이, 어느모로 보나 나라를 지키는 데 허물이 없었다면 모르지만, 실제로는 당시 우리 선조들의 책임도 컸어요. 이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하는 엄연한 진실이지요. 자기 민족의 허물은 비단 보자기로 덮어두고 상대방의 행위만을 극악하게 그려내는 것을 나는 반대해요.(585쪽)"


지은이는 공자의 말을 빌려서,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나 세계관은 이 '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물은 현실과 같습니다. 그는 현실 또한 객관적인 눈으로 옳은 것은 옳고, 그런 것은 그러다고 말할 때 긴실을 볼 수 있고,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노신을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그럴 감싸는 것도 '정의'에 먼저 다가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3. 내가 믿는 사랑이...
가장 추한 모습으로 다가 올 때에 너는 그 사랑을 두 손 열고 맞이할 수 있느냐?

혁명을하든가, 민중 운동을 하든가, 역사적 진보를 믿는다면서, 가진자보다 못 가진자, 조금 더 힘들여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건냅니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사랑으로 화답하지 않고 시기, 질투, 배반 등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진정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광주 교도소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알고, 그 기쁨을 같은 재소자에게 알린 댓가가, "22일 벌방형". 작은 광한만 곳에 가만히 누운 채 있어야 하는 곳, 빛 마저 들어오지 않고, 온통 새까많게 칠해진 먹방 같은 공간에 화장실이 나란이 누워 있는 곳. 그곳에서 낯 모를 사람에게 '빵'과 '우유'를 얻어먹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런가?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육체적 경험을 가장 낮은 장소에서 온몸을 겪습니다. 과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갈 수가 있을까? 지은이는 "난 머리가 혼란해졌어요"라고 인간적인 고뇌를 이야기 합니다. 그는 신(神)이 아니며, 또한 성인(聖人)도 아닌, 우리곁에 숨쉬는 이웃이였습니다. 이웃이기에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세상이란 엉뚱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는 반면, 같은 국민에게 밀고를 당하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기도 하는 그런 것인지. 난 머리가 혼란해졌어요.(499쪽)”

세상이 어지러운 날, 미륵이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내려옵니다. 그리고 온 사람들에게 바르게, 착하게 살아라, 내 말을 듣고 극락을 누려라, 너희가 그토록 바라던 이, 내가 미륵이다.라고 했는데, 혼탁한 세상에서 돌아온 답은 '니가 미륵이면, 나도 미륵이고, 저 강아지도 미륵이다'라는 암상뿐이다. 미륵은 수 없이 이야기를 하고, 수 없이 같은 말을 되로 받는다. 하지만 끝끝내 사람을 저버리지 못하고, 그가 한 행동은...(소설 토정비결』 참조)

감옥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할 때에, 나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떠올립니다. 수 많은 색과 국제 정세 분석의 능력과 대학교수라는 상당한 인텔리겐차이면서, 사람 앞에서 '머리가 혼란'스러워하는 인간 리영희. 그도 나와 같이 숨쉬는 사람이란걸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하지만 동질감보다 내가 평생을 따라도 모자랄 듯한 선생(先生)인 동시에 스승입니다.

4. 계속 되풀이 되는 역사?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남한의 청녀들이 돈덜이를 위해서 미국의 용병으로 파견되었을 때에, 한국정부와 극우 반공주의 언론들은 마치 전 세계 국가와 민족들이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줄로 착각했어.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군대를 파견해, 그 따위의 범죄적인 전쟁에 협력한 나라는 남한 이외에 필리핀, 타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세 나라밖에 없어요. 한국에서 상시 5만 명의 전투부대를 보낸 것과 달리, 이들 나라에서 보낸 병력은 포병, 공병, 병참 등, 천 명 내지는 최고 3천 명 정도였어오. 그밖의 다른 국가들은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거절했어. 영국은 혈연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미국의 전쟁협력자가 아닐 수 없는 처지인데도, 마지못해 '유니온 잭'(영국 국기)을 앞세운 의장대 6명만을 파견했어. 600명도 6천 명도 아닌 단 6명이오! 사이공 공항에서 외국 귀빈을 맞이하는 의장대요. 수없임낳ㅇ느 국제법 위반과 정치적 관례와 상식을 뒤엎는 행위들이 많았어. 나는 베트남전쟁 기간 중에 오로지 미국 지배집단의 이 같은 범죄적 행위를 연구하고, 우리 한국의 극우 반공적 언론 통제의 쇠살을 뜷?진실의 편린이나마 전달하고자 무진장 애를 썼어요.(357쪽)"

우리 민족성을 평화를 상징하는, 남의 나라를 한번도 침범하지 않은 나라라고 더 이상 말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 5만명이라는 젊은 사람을 보냈고, 그곳에서 '라이따이한'이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켰고, 나몰라라 합니다. 아무런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에 세계 3위의 강력한 군사력을 드높였습니다. 과연 우리나라가 주권국가로서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미국과 관계에서 형님 동생으로 지내거나, 한 배를 탄 민족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이 없으면 안되는 나라. 미국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나라. 과연 한 국가로서의 존엄성과 자부심을 가질 수가 있는가? 미군이 빠져나가면 그 국방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우리 누나가 동생이 미군에게 처참히 짓밟혀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이 분노를 타국에 가서 그대로 행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마저 듭니다? 미군없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해방, 한국 전쟁을 그치는 동안 꾸준히 준비하였다면, 적어도 국방비에 얽매혀 한 국가의 존엄성을 남의 나라에 그냥 던져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미국이 부르면 언제나, 어디든지 달려가는 총알바지 군인을 키우는 나라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악순환의 고리 끊기와 국제 관계 속에서의 자리매김을 언제할 것인가? 미군없는 한국을 준비하여 주체성과 내 나리에대한 자부심과 타나라에 대한 이해와 겸손을 지닌 국가로 거듭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나는 베트남전쟁 끝에 하나의 확고한 의견을 갖게 됩니다. 미국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정치.군사.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확신이에요. 베트남전쟁이 그노골적인 본보기이지만, 이미 그때에는 라틴아메리카의 10여 개 약소국을 잇달아 군사적으로 침범.점령했고, 약소후진국들이 조금이라도 민주적 복지와 자립적 경제정의를 추구하려고 하면 그런 정권들은 미국이 뒷받침하는 반동적이며 미국에 예속된 군부로 하여금 쿠테타를 읽으켜서 전복시켰 왔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쿠바와 카스트로 정권타도 공격이고, 니카라과에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부패.타락한 미국 예속정권을 혁명으로 쓰려뜨리고 참신한 민중적 정치혁신을 하려던 산디니스타 정권을 그런 방식으로 타도했어요(197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깨끗하고,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사회주의정권을 세운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의 정권에 대해 미국은 역시 같은 음모적 수법으로 대통령을 사살하고 미국 예속 군부쿠테타를 조장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킵니다(1973). 아르헨티나 군부쿠테타(1976), 볼리비아(1980), 콰테말라(1983), 아이티(1988), 파나마(1989), 콜롬비아(1989) 등 열거하면 끝이 없어. 이것이 민주주의.정의.자유를 내세우는 '미국이라는 나라'요, 나는 한국인의 미신인 미국(美國)이라는 국가의 지배적 본성의 추악함으로 깨우치는 노력을 나의 임무의 중요한 항목으로 삼았지. 오늘의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전쟁을 보시오. 이것이 나의 연구와 집필의 주요 동기였어. 이 모든 추악한 행위의 근본 동기는 미국 자본주의의 투자와 시장확보와 미국 기업의 무한정적인 경제력 장악을 위한 것이지. 미국 자본주의의 목적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걸거나 자주적이고자 하는 인민과 정권을 미국 자본주의는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다구.(361~362쪽)"


지은이는 수 없이 미국이라는 실체를 해부함으로써, 우리가 존경하거나 동지애를 가질 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줍니다. 과연 '극우.반공. 반통일적 전쟁주의자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우상화할 때에 굳굳히 맞서 싸운 이가 리영희입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미국이라는 실체를 이야기하면서, 민족의 주체성을 제기합니다. 만약 리영희가 없었다면 우리가 가진 미국관은, CNN이 내보내는 영상만을 진실이라고 믿지 않았을까 합니다.

5. 시대를 읽는 힘.
우리는 내부적으로 보는 시선에서, 외부적으로 보는 시선으로 돌려야 합니다.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영구 집권만 생각하는어리석음, 박정희의 유혈 독재의 지속이나 높은 경제 성장이라는 단편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지구촌이라는 울타리에서 벌어이지는 힘찬 움직임과 그 속에 우리가 나아갈 지향점과 희망을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광범위하고 선구적인 시점을 심어준 사람은 리영희입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보여준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정부의 극비문서(펜타곤 페이퍼)'를 통해 "세계적 변화가 머지 않아 한반도와 남한애 광명의 햇살을 비춰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대했어. 이것이국내의 질식할 것만 같은 반죽음의 상태를 참을 수 있게 하는 활력소(424쪽)"였다고 회고합니다. 즉 국내에서 암울한 통치가 이어지고 있을 때, 그는 세계적 정세를 통해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짐작합니다. 우리는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땅 위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국과 우리나라만 존재하는 마냥, 좁은 세계관만 존재합니다.

이제 인터넷을 통한 시.공간의 동시성이 열렸습니다. 마우스 클릭(click) 한번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수가 있으며, 미국의 일방적인 언론에서 벗어나 이슬람을 대변하는 알자지라 방송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상호 연관성에서 놓여 있으며, 같이 일을 쉽게 꾸밀 수가 있습니다. 몇 몇 지상파나 언론이 전해주는 정보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변화가 기계적인 변화에 인간이 대응하면서 깨닫는 것이라면, 온몸으로 부딪혀 세계적인 흐름을 읽어냔 사람은 리영희입니다. 스스로 열린 생각으로, 역사의 진보를 믿고, 인류애적 사랑을 추구한다면 커다란 파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한 세대 먼저 탐구하고, 노력한 사람 - 그는 역사적 중심에 서서 살아있는 기록이자, 그의말을 빌려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제공한 선구자입니다.

리영희의 글쓰기는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의 탐구는 "연구.조사"가 주특기입니다. 연구.조사를 통한 폭넓은 시야는 내가 보지 못하고나 못 본 것에 대한 쿠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즉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세우지 않았다면, 리영희는 시대의 선구자로 남아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원칙론적 자세가 시대의 증언자이자 선구자로 우리곁에 두었습니다. 분명 우리시대는 두 분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리영희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높을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 자리는 높습니다.

덧붙임--
리영희의 대화는 그 이전 저서, 『역정』이라는 자서전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새들은 좌.우로 난다』등 몇 권의 저서를 읽지 않고 접근할 때에, 얼마나 대단한 인물일까라는 의문은 기대만큼의 선물을 주지 않을 듯 합니다. 즉 『대화』에는 인간적인 리영희가 있고, 그의 저서에는 사회적 리영희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부언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