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즈-로트렉 - 열화당미술문고 206
장소현 / 열화당 / 1995년 6월
평점 :
품절



["객관적 관찰자-천재적인 기질 혹은 인간적 성찰?"]

그는 몽마르트의 환락가나 창가(娼家)에서 생활하면서 그곳의 많은 인간들의 분위기를 꾸밈없이 그렸다. 그는 매우 개성적인 화가였다. (12쪽)

환락가라서, 가난하다고 사랑이 없거나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같이 숨쉬며, 얘기하고, 일상의 지친 어깨를 누이면서도 가슴에는 누구나 꿈 하나 품고 산다. 나는 성적인 호기심과 그네들이 나와는 다르지 않지만 왠지 가려진 베일과 신비함을 살짝 들쳐보고 싶어서...

로르텍은 냉혹할이만큼 꾸미없는 인간 표현을 통해 비극을 넘어서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포용한다. 인간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기에 그는 어떠한 비극이나 추악함 마저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다. 사랑함으로써 비극은 극복된다. 아니, 본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비극은 이미 비극이 아닌 것이다. 로르텍은 결코 현실을 미화(美化)시키지 않는다. 다만 참모습을 찾아내어 표현함으로써 현실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할 뿐이다.(13쪽)

로르텍은 두번의 사고로 인하여 다리 아래로는 컴이 멈춰버린다. 즉 배 아래 보다, 배 위가 더 큰 사람인 것이다. 배 아래 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중요할 것이다. 지은이는 로트텍에 대해 "어떠한 비극이나 추악함 마저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사회의 눈 초리 속에서, 스스로의 감정 속에서 스스로를 알을 깨고 나올 수가 있었을까?

아웃사이더
그는 아웃사이더로 머문다. 이는 신체적 아픔에 갇힌 자아가 더 나아가지 못해서가 아닐까? 그리고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밖으로 돌다가 그가 찾아드는 곳은 몽마르트 언덕이며, 그곳에서 그가 마음의 안식을 찾았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그는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 있지만... 지은이의 말을 빌리며, 비극이나 추악함 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 대한 카타르시스, 즉 스스로의 눈물을 통해 걸러내어짐이 있어야 한다. 이는 (극단적)자기 부정을 통해 서 있을 수도 있고, 스스로를 한 없이 낮추어 볼 수도 있다. 흔히 자살의 끝에서 발을 돌린 사람들이 마음이 편안한 이유는 스스로를 비웠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객관적 관찰자로 설 수가 있다. 이는 모든 현실 속 초월한 평상심을 유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설이나 야화를 담지 못하고 있다.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객관적 관찰자로 멈춰서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기 부정을 통하지 않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머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경우는 천재적 기질을 통해서이며, 천재적 기질이기에 인간적인 성찰이 결여된 기술로 밖에 표현되지 못할 수 있다.

로르텍의 객관적 관찰자가 수잔 손택이 칭찬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의 씌여짐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면 그는 분명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엄청난 슬픔을 안겨 주지만 그의 전작 『작은 목소리』에 비하여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은, 스스로를 정화(Katharsis-淨化)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은 목소리』가 슬픔 뒤에 오는 감정을 스스로 추스리고 적은 글이라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로르텍의 접근은 이러한 자기 관찰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 그의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자리가 천재적 기질인지 자기 부정을 통한 인간 사랑인지는....?

로트텍은 신체적 결함을 통해 아웃사이더로 머물고, 그는 현실에 다각지 못하고 객관적 관찰자로서 머물다 몽마르트 창가에서 그들을 그리곤 한다. 하지만 지은이도 말하듯이 그는 모든 그들을 그린 것이 아닌, 몇 명의 그들을 그렸다. 스스로 위안을 찾으로(?) 간 곳에서 조차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고 내 생각--
자기 고독은 연민이 아니다. 사랑이다. 이 사랑은 부족함이 없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밖에 내어본다. 하지만 가만히 한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뿐, 취하지(狂) 못한다. 그는 사람 속에 부대끼지 못하고 '냉철한 관찰자'로 남은 기록자이다. 즉 안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찾지 못하고, 밖에서도 사랑에 다가가지 못하니, 감성을 죽어버린 이성만 머리 속에 채우고 있다. '냉철한 관찰자'는 소녀의 음부까지 거칠게 묘사하지만 진정 소녀의 이야기를 담아냈을까르는 점에서는,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진다.

책이 너무 얇다 보니, 주제가 갇힌 듯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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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5-06-26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모가 눌려있기에 내면적으로 엄청 호색이었다더군요. 그래서 객관적 관찰가로 보다는 창부를 가깝게 더 잘 이해하는 내부자로 보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동성애, 성병 검사 받으러 치마 들고 서있는 여인들, 노쇠한 늙은 창부(한때 유명했던) 같은 주제는 여느 다른 화가에서 찾기 어려운 소재입니다. 그림이 오래 남을 수 있는 건 소재의 선택의 특이성 뿐 아니라 소재가 가지고 있는 생생한 내면이 살아있기 때문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