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행복하다
길은정 / 자유문학사 / 1997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랑은 모든 것을 감싸고, 용서하게 하며, 베풀게 됐다"]

내 삶의 순간에 어느 한 부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있던가?
내 삶의 순간에 어느 한 부분 행복하지 않은 시간이 있던가?
모두가 소중하고, 행복인데... 앞길이 구만리라는 생각에, 지금 이 순간을 아무렇게나 보내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려운 혹은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바람이 분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며 옷깃을 여미는 적이 몇 번인가 있었습니다.

길은정,
길은정씨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노래를 엄첨 못 부르는 나이기 때문이 아니라, 요즘말로 코드가 맞지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보다 10여년은 더 산 사람입니다. 내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취할 때에, 그는 밤 열시 넘어서 추억으로 가는 노래편 등에 나와 "소중한 사람"을 부릅니다. 어쩌면 기찻길처럼 평행선을 달릴 수가 있었을터인데...

음을 음미하지 못하고, 노랫말을 음미하는 내게는 70~80년대의 노래는 감미롭습니다. 그렇기에 내 유년시절에 불려진 누나 형님들의 노래를 찾아 듣곤 합니다. 김학래의 "내가", 노고리지의 "찻잔", 이문세의 "나는 행복한 사람" 등을 좋아합니다. 문득 길은정씨가 진행하는 "노래하나 추억둘"(-지금은 윤세원님이라는 분이 하고 계십니다)을 듣었습니다. 하루의 지친 일에 대해 말끔하게 피로는 풀어주는 그의 목소리는 말랑말랑한게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곤 했습니다. 그는 암에 걸려서,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했지만 두 시간 동안 진행되는 방송에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누군가가 암에 걸렸다는게 사실이냐?라고 묻는 편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건 내가 붙이지 못한 잊고 있었던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너무나 밝은 그의 목소리에, 정말 암에 걸린 사람이 맞나라고 의심을 했답니다. 그가 밤에 잠을 못 자고 이를 깨물며 밤을 지샜다는 걸, 이 세상에서 웃음소리를 듣을 수 없을 때에 비로소 알았습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언니의 눈물이 그의 아픔을 말해 주는 듯 했습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스쳤습니다. 그렇게 아파하면서 죽는 날 까지 방송에 나와 웃음을 읽지 않던 그가 대단하며 한편으로는 그의 삶이 궁금햇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저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길은정씨는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해볼 만한 건 거의 다 해봤다.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해봤고, 결혼도 해봤고, 이혼도 해봤다.
아이도 낳아 봤고, 헤어짐도 겪었고, 공부도 해봤고, 상도 타봤고, 인기도 얻어봤고, 여행도 해봤다.
일본,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미국은 물론이고 몰디브제도까지도 가봤다.
말도 타봤고, 경비행기도 몰아 봤고, 스킨스쿠버 다이빙도 해봤고, 탁도 치고, 테니스도 치고, 컴퓨터 게임도 해봤고, 수영도 하고, 스키도 타봤다. 수상스키도 해보고, 노래도 해보고, 무용도 하고, 그림도 그렸고, 붓글씨도 썼다.
영어 공부도 하고, 일어 공부도 했다.
예쁜 옷도 많이 가져 봤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어 봤고, 영화도 많이 봤고, 운전도 했다.
암에도 걸려 보고, 수술도 해보고, 장애인도 되어 보고, 내 여성도 잃어 봤다.
이제는 여기 하와이에 와 살면서 글도 쓰고 있으니 이만하면 됐지 않은가.
그럼에도 내겐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아 있는 걸까?
늘 죽음을 꿈꾸면서도 오늘도 나는 화분에 물을 주고, 새잎이 돋아나는 게 사랑스러워 한참을 바라보면서 흐뭇해 한다.
"Are you storyteller(당신 이야기 작가예요)?"
내게 잠깐 말을 붙였던 로보르라는 미국인이 내 말을 믿지 않는다.(72쪽)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삶의 체험적 깊이와 넓이가 어디까지인가를 짐작하기에는 내겐 바다만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파도를 겹겹히 넘으면서 그가 느낀 감정은,

"내게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쥐도 아니고 뱀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 '사람'이다(172쪽)"

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밀어닥친 파도는 하늘이 보낸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건낸 삶의 피로였습니다. 그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많은 고통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지닌 가장 원초적인 '측은지심'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하와이에서 하루하루가 힘든 동포를 보면서, 하와이의 여유를 느끼지 못하고 일상의 무게에 눌린 그들을 보며 그는 "미국 생활에 지쳐있는 보이는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210쪽)"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이. 하지만 사람에 대한 따스한 마음을 결코 놓지 않았던 이. 한 사람의 마음에 차지 않을 듯한 두 감정이 공존을 하는데, 그의 마음이 두려움을 이기고 따스함을 드러냈다는 점에 대해서, 어쩌면 그는 내가 본받아야 할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 아름다움 꽃을 피울 수가 있었던 건, 천성적인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사랑의 깊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가져봅니다. 다만 아쉬운 건, 그를 보내고 나서야 그의 깊이를 가늠하는 내 모습입니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는 옛말이 그러지 않은가 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곁에 있는 사람에게 따스함을, 아무리 힘겨움이 밀려와도 용기를 잃지 않고 맞써 나아가야겠습니다.

이 책은 길은정씨가 대장암 수술을 하고 하와이에 잠시 머물면서, 자기의 일생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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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5-05-11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것처럼 사는게 중요하겠죠.
브라이언 트레이시도 목표를 설정할 때 내 생이 단 6개월 남았을 때 무엇을 하겠냐고 물으라 하더군요. 가장 소중하고 하고 싶던 것을 가장 먼저하려고 하다보면 허접한 일들은 점차 뒤로 밀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