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또박또박!! "]
1. 멈춤 없는 걸음걸이. 정수일, 어느 열화 소년 주인공처럼.... 난 매일 목욕하는 여자를 창문 뒤에 숨어서 훔쳐 보듯, 그의 편지를 읽어갑니다. 아마 소년은 이쁜 아가씨를 본 것이 아니라 아줌마를 훔쳐본 게 분명하다. 정수일의 편지는-구구절절한 애간장을 녹이는 '님아~' 대신에 '지금 조선人으로 산다는 건'식이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 다시 나에게 다가와서, 호통을 치는 듯하다.
정수일의 편지를 읽어가다 보면 그의 마음이 얼마나 초초한지 나는 느낀다. 우보천리, 실상은 느릿느릿 걷는다고 하지만 그의 목표는 길가에 핀 민들레나 제비꽃에 대한 꽃잎을 셀 시간을 주지 않는다. 갈길이 멀기 때문이다. 저 멀리, 저~ 멀리 가려면 부지런히 걸어야한다.
조국에 대한 위상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 중국 정부의 만류도 뿌리치고 고국을 택한 그에게는 오직 안타까움이 구만리다.
비단길, 교과서 몇 줄에 적힌 글자가 아닌, 역사적 사실에 의한 재조명을 통해 국가적 위상을 재고, 이는 단순한 국수주의에 취한 얼뜨기 사학자의 우국충정에 의한 술주정이 아니다. 우리는 『한단고기』나 일만 년의 역사라 했을 때 그들을 국수주의로 몰았으며, 『대쥬신제국사 』로 역사 문화를 복원하였더래도 비싼 책값으로 인해, 김성호씨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기원』이나 장보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시 했을때에도 한결같았다. 이는 동이족(東夷族)을 중화 변방에 살고 있는 오랑캐로 스스로 낯추는 웃지 못할 민족에 대한 서글픔이 아닐까?
비단길. 이에 대한 규명이 이루어진다면, 지은이의 편지 속에 녹아든 집념처럼, 조선은 "은자의 나라"가 아니라 세계와 동등하게 교류하며, 스스로 근대화를 내재해온 민족임에 틀림이 없다. 단순히 비단길을 지도 위에 금(線)을 긋는 행위가 아니라 민족의 주체성을 살리는 길임을 지은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은이는 나에게 들려준다. 비단길에 대한 연구의 어려움을...
"일찍부터 이러한 난점과 한계성을 간파한 나는 그나마도 나에게 이러한 난점과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여건이 어느정도 마련되어 있다고 자부하였기에 감히 이 새로운 국제적 학문의 개척과 정립에 자신있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오. 지난 40여년간의 연규과정은 이러한 나 자신으 시험하는 과정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부단한 도전에 응전하면서 '해야 한다'는 사명과 '해볼 만하다'는 전망, 그리고 '힐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소.(224쪽)"
"나는 민족우선주의를 지향하면서 "민족이 계급이나 이념, 권력에 우선하고, 남북간의 화해를 가능케 하는 접점과 공통분모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일체성이며, 통일은 어디까지나 겨레 모두가 공생공영하는 범민족적 문제"라거 법정진술에서 엄숙히 밝힌 바 있고. 그렇소 우리에게 '우리는 한핏줄'이라는 겨레의식이 약동하는 한, 우리의 다시 하나됨은 어김없을 것이고, 이러한 의식이 빛과 열을 발하는 만큼 그날은 앞당겨질 것이오(242쪽)"
오직 겨레에 대한 애절함을 풀어가는 편지. 아무런 싫음없이 받아주는 아내. 정수일의 자리는 홀로 된 것이 아니라 뒤에서 내조하는 그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옥에서 자기 몸 보다 학문, 조국에 대한 열정이 앞서는 그를 말 없이 받아주는 아내, 정수일의 학문과 조국에 대한 열정은 보이지 않는 아내의 손에 의해 완성되어진다.
아내에게 붙힌 편지이지만, 어쩌면 그 울림이 나에게 전해짐은 왜일까?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지은이의 모습은 여러해에 걸쳐 있다. 그의 대학원생과 제자들에 대한 미안함은 귀가 따갑도록 들려준다. 제자에 대한 미안함은 스승과 제자사이, 그리고 민족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2. 예술지상주의를 넘어서다.
"학문에서 추미주의는 침체와 허무만을 결과하는 것이오. 지난 2백년간 우리의 암둔으로 인해 자초된 이러한 침체와 허무의 공백을 메우고 새 백년에 비상하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분발뿐이오. '분발, 분발, 또 분발', 이것이야말로 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지성인들에게 내려진 지상의 명령인 것이오. 지난날에 허물이 있었다고 해서 미래에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패배주의요. 우리는 찬란한 문화전통을 창조하고 이어받은 개병하고 명석한 민족이오. 다시 의지만 가다듬으면 못해 낼 일이 없을 것이오.(314쪽)"
지은이가 그토록 열심히 매달리는 것 자체가 추미주의에 얽매히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이다. 그는 역사학자이자 문화학자로서 역사적 굴레의 방향을 잘 기억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시선은 밤하늘의 별만큼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넓다. 또한 생태적 체험에 의한 일제시대의, 일인(日人)의 만행에 대한 각인 등이 그가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에 목을 매는 이다.
3, 청년아 나를 딛고 일어서라. 한사람의 생태적 체험이 나에게 얼마나 큰 자산인가를 이 책에서 잘 말해줍니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을 듯한 지은이가 중국의 회유를 뿌리치고 조국을 택한 일, 그리고 감옥에서 열정적으로 매달린 이슬람 문명과 비단길. 그는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몫을 매다는 것일까? 아침에 일어나 티비를 켜는 내 일상과 지은이의 일상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은이는 나에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라"고 말합니다. 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또박또박!! 과연 내 가슴에는 무슨 열정, 꿈이 있어 소걸음을 내딛딜까? 밤하늘 별을 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 이런 학문적 글만 담긴 편지를 말없이 받아주는 아내는 어떤 분일까라는 엉뚱한 생각이 별똥별이 되어 스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