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보여주지 않고, 포스터만 보다"]
김추자, 게다가 선데이 서울 긴급조치.
모두가 낯설다. 김추자가 누구이며 선데이 서울, 긴급조치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험적 영상기를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닌, 텍스트에 적힌 글자나 티비화면으로 보여진 추억의 이미지를 되새김질 해야한다. 하지만 아무리 명확한 정의이고 코옆의 점을 잡아낸 티비 영상이라지만 내가 느끼는 공간은 티비화면으로 들어갈 수 없듯이 금(線)이 긋어져 있다.
김추자를 기억하며, 게다가 선데이 서울을 떠올리며,긴급조치를 기억하는 지은이는, 그가 감내해온 세월에 대해서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80년대 의식화 학습과정에는 전형적인 커리쿨럼이 있었다. '시각교정'용으로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성과 이성] 등이 선택되었고 혹은 광민사에서 발행한 [노동의 역사]나 [노동의 철학] 등에서 출발하기도 했다. 좀 더 나중인 80년대 중반에는 [철학에세이]에서 시작하여 소비에트 철학교과서로 넘어갔다. 생각해 보면 우리 세대가 거친 성 학습의 이력에도 일종의 자생적인 '커리큘럼'이 있었던 듯싶다. 백과사전에서 시작하여 다음 단계는 여성지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이다. 70년대 초의 <<여성중앙>>이나 <<여성동아>>등 여성지 중간에는 왕왕 파란색 혹은 빨간색 페이지가 봉?되어 있었다.(90쪽)"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건, 문화적 계층이 달라서도 찹살떡 하면, 아~하는 그 시절 처럼 그들만의 문화적 향수를 공유하게 된다. 즉 지은이와 같이 성학습을 하였다면 자아성찰적 회고담은 우리를 키운 문화적 울타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읏 라인에 선 나와 우리 또래는 동경 내지는 협오감으로 다갈 수 있다. 즉 지은이가 스스로 느껴지는 문화적 거름이 과연 나에게 무엇인가는 "나 스스로에게" 다시 묻어야 한다.
지은이의 문제가 유쾌통쾌상쾌한 반면, 그의 내재적 지식에서 줄줄이 사탕처럼 엮인 축구 선수의 이름은 내게 너무 낯설다.이런 내 낯설음과는 다르게 지은이는,
"그런유년의 놀이들은 한 개인의 체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체험 속에서 우리 세대들은 그 시대 혹은 이전 시대가 당시의 풍경으로 응결 되어 부유하던 , 이를테면 남루하고 간난 많던 시대의 정경 그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연과 연결되면서 확대 체험을 하게 된다. 오리 키우는 술주정뱅이 아저씨, 넝마주이들, 농촌에서 돈 벌러 나온 식모누나들, '하꼬방'에서 살며 국수로 삼시 세끼 때우는 이웃집, 여인네들 머리카락 사러 다니는 아저씨, 빨래줄에 걸린 옷가지 훔쳐가는 좀도둑들, 그들을 그토록 살게 만든 한 시대의 풍전은 그 속의 사연을 우리 몸에 기억하게 했으며 그들로부터 배운 이러저러한 놀이는 또한 그들의 생의 체험을 우리들이 연장하는 것이기도 했다.(110쪽)"
그의, 그들의 놀이가 문화적 체험을 넘어 역사적 기록이자 자아 형성의 감수성 버팀목이 되어, 지금의 내게 무엇이 되었는가느 중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를 키운건 8할의 바람'일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며, 고국의 바다 통영만 생각해도 행복에 잠기며, 어머니 손잡고 밤길을 걷던 어느 소설가의 체험이 그의 꿈길에 얼마나 큰 거름이 되었는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정보와 현란한 색대비 속에서 또다른 문신인 아바타를 사는 나와 자연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생태적 체험을 한 지은이 사이에는 커다란 층위가 존재함은 분명하다. 지은이는 생태적 체험을 통해 감성의 부(副)와 추억이라는 행복을 거두었으며, 아직 추억의 축적기에 있는 나는 지금의 내가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두고보기로 한다.
그의 책을 읽어가면 문화적 충격 보고서, 철지난 추억거리로 혹은 불혹을 넘기 어느 비평가의 감성덩어리... 나와 다른 세계를 사는 지은의 추억은 분명 새롭고 향수를 자아낸다. 아마도 농촌에서 태어나서 자란 내게, 수구지심에 의한 향수병이 묻어있기 때문이라라.
지은이는 글쓰기는 김추자 등, 앞에서 풀어내는 글쓰기는 유려(流麗)하지만 지난 시절에 대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드라마일뿐이다. 푸코식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접근 아직 힘겹다. 즉 '성의 계약'에서 보여지는 푸코식의 글쓰기와 "~쇼쇼쇼"에서 보여지는 글쓰기는 다르다. 문체가 다르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푸코의 글쓰기아 '아하~, 그렇구나'라면, 지은이의 글쓰기는 '그래서...어쨋단 말인가?' 사회과학서적 예닐곱 읽으면 종합될 듯한 이야기를 자기의 추억을 묻혀 다시 꺼내놓은 것은 아닌가?
지은이는 '분석'이라는 말을 통해 <구보씨의 일일>에 대한 비평을 가합니다. 그의 이러한 분석은 징검다리마냥 띄엄띄엄 놓여져 있습니다. <희미한 예사랑의 그림>에서 날카로운 분서은 <한국 대중문화 100년의 계보학>에서는 묻디어져 무를 썰지 못합니다. 즉 구보씨의 잣대는 부메랑이 되어 지은이의 글쓰기에 똑같이 그려질 것입니다.
"금기의 역사를 지배의 역사로 번여할 수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가족 단위의 조직을 비롯해 국가 같은 거대 조직에 이르기까지 금기는 그 조직의 지배성을 지속적으로 가동하고 부드럽게 재생산하기 위해 발명된다. 그 역할을 위해 금기는 일종의 권위와 공포의 권능이라는 완장을 부여받고 그것은 또한 사회저긍로 인준되고 통용된다. 개인에게 있어 금기를 인정하다는 것은 그래서 그 조직 혹은 사회의 지속성에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일이며 그 인정이 있어야만 개인에게 시민권이 발급되는 것이다. 때문에 금기는 한 사회에서 각 개인들을 통일적으로 봉합하는 강력접착제 역할을 한다.(250쪽)"
금기를 사회적 문화적 맥락의 잣대로 이해하는 지은이의 눈높이는 지난 시절에 대한 억매임 내지는 본질에의 접근에 대한 어려움 때문이리라. 금기와 억압이 잣대가 된다면, 이는 부분적 고찰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푸코가 말했듯, 광장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면서 제도적으로 안정한 장치를 마련한다. 즉 한 사회의 척도는 숨은 지배자들의헤게모르를 어디까지 파악하는가이지 지난 시의 금기와 사회를 척도하는 것은, 더욱 교활해지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피상적 관찰, 지난 시절에 대한 어처구니 없음의 웃음(失笑), 앞 시대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의 효율적 관리를 부추기게 할 것이다.
지은이는 지난 시절에 대한 회상을 통해, 자아적 원형을 찾아가고 있지만 그가 본 피상적 관찰은 대중에게 머물렀습니다. 우리 아버지 되시는 분들은 지은이의 이야기를 듣으면서 '맞아, 그땐 그랬지~'라며 맞장구를 치겠지만 내게는 어설프다.
잠시 동안 무엇인가를 찾을것인가, 70년대를 돌아다녔지만, 나는 영화를 보지 못하고 포스터만 ?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