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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박물관 - 이미지와 도상으로 읽는 문화사
김장호 지음 / 개마고원 / 2004년 7월
평점 :
도상학 1,
'도상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도상학은 언어가 잡아내지 못하는 인간의 추상적인 사념(思念)을 읽어내어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그 진실은 '비현실적인 낙원'이어서 아득하기만 하다(95쪽)
참 시적인 말이다. 난 도상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곰곰이 씹어 봅니다. "언어"가 잡아내지 못하는 "인간의 추상적인 사념"을 읽어낸다. 즉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밝혀 낸다. 하지만 그 진실은 우리에 대한 희망이라기보다 비극에 더 가까울런지 모른다. "비현실적인 낙원"은 한 가닥의 희망마저 빼앗아 가버리는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일런지..
헨리 다거. 1892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17살 부터 병원 청소부로 지냈지만, 그는 "20세기 아웃사이더 아트의 최고걸작이자 어쩌면 인류 미술사와 문학사를 다시 쓰게 할 지도 모를『비현실의 왕국에서』(89쪽)"를 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원과 정신박약아 수용시설에서 자랐으며, 정신지체였던 그가 쓴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비현실의 왕국에서』가 주목 받고 있는 것은 자유연상에 따른 서술과 정교한 시각적 환상에 의한 묘사(93쪽)"이다.
"장대한 전쟁서사시『비현실의 왕국에서』에는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 중에서도 「노마 캐서린의 대학살」은 압권이다. 그의 일기를 보면, 어느 날 그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린다. 그는 신에게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결국 찾지 못하자 마침내 분노에 휩싸였고, 신에게 중대한 사태가 있으리라고 일기 속에서 경고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그의 경고는 실현되어 '비현실의 왕국'에서 가공할 유혈사태가 벌어진다.(95쪽)"
자유연상에 따른 글쓰기를 지은이는, 헨리 다거의 내면에 잠재한 '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말합니다. 어떠한 경우로 인하여 그의 작품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었는지 몰라도, 그는 한 세기에 놀랄만한(?) 작품을 유고로 남겼습니다. 분명 헨리 다거의 작품을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비약이 가능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글쓰기는 "자유연상"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헨리 다거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볼 수 없는 감추어진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는 시선, 도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은이는 이러한 눈으로 작품을 읽어나가려고 했습니다.
아쉽습니다. 적어도 내 눈에 비친 그의 시선은 아쉽습니다. 분명 헨리 다거를 서술하는 부분은 날카롭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희미합니다. 그는 몇 개의 장으로 나누어 "이미지와 도상으로 문화"를 읽어내는『환상 박물관』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지만 문화에 대한 정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문화에 대한 정의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문화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는 내겐 숙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부분을 문화로 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항상 안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문화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잡지 않고 헤실바실 넘어 가는 듯 합니다.
이미지 2,
기억하고 있는 것, 또는 대상이 눈 앞에 없을 경우 등에 생각해 내서 다시 표현하는 것. 시각적·청각적·촉각적 이미지 등과 같이 지각대상(知覺對象)이 재생된 직관적인 상(像)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 구체적인 지각상(知覺像)과의 구별이 매우 어렵다. 단 이미지는 지각상보다는 막연하며 어떤 생각·태도·개념 등과 같이 한층 추상적인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기업이미지라고 할 때는 기업에 대한 태도·기대 및 전체적인 감정적 인상 등을 뜻한다. 특히 상품이미지의 경우는 소비행동에 대한 준비상태로 태도와는 달리 안정성이 없으며, 의식과도 달라 일관성이 없고 모호하며 정서적이기도 하다. 매우 복잡한 심적 특성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미지는 구체적·실증적인 지식에 따르기보다 직관적·감정적 인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막연하면서도 행동을 규정하는 힘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경험적 가설에 따르면 이미지(상품)로부터 행동(소비)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고 한다.(출처 :엠파스 백과사전)
①대상이 눈 앞에 없을 경우 등에 생각해 내서 다시 표현하는 것, ②구체적인 지각상과의 구별이 매우 어렵다. 즉 한번 그 이상을 본 것을 대상이 없는 경우에 단편적인 지각을 나타내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미지에 대한 정의는 나날이 다르게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엠파스 백과사전에서의 정의는 아주 원론적인 기준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상 매체와 다양한 디자인으로 인하여 텍스트가 아닌 단락의 이미지로 우리는 전체를 일반화하는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이러한 이미지의 리얼이즘에 대한 강간은 감각적인 그림을 흘려 보내는데, 여기에는 3가지의 색체가 그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현실의 모순을 왜곡하는 디자인이나 인상, 둘째 현실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그려내는 리얼리즘. 셋째 감각에 의한 자연(美) 구현. 이미지가 무엇을 담을 것인가는 위의 세 가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고대로 올라갈 수록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이감으로 셋째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의한 물질만능주의는 리얼리즘보다는 첫째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우리는 티비나 영화 등에서 보여지는 영상을 통해 이미지를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첫째의 이미지가 강할 수록 리얼리즘은 안으로 숨게 되며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가 있어서 일까요?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 이미지를 통해, 지은이의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은이가 보여주는 이미지에 대한 단상은 그림에 불과합니다. 고대와 현대를, 오늘과 미래를 읽는 문화로서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주제들을 모았는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소주제에 대한 글쓰기 역시 가볍다는 느낌입니다. 앞서서 말했지만 이미지에 대한 정의가 없으니, 깊이를 충분히 재어 볼 수 있다는 자만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아울러 상징성을 읽어내지 못하고 몇 몇의 지식 편린을 펼칠 뿐입니다. 흔히 말하는 상식, 어떤 사물에 대한 짧은 지식을 얻을 수가 있으니 상식을 갖출 수는 있지만 과연 한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보는 이미지와 도상은 아웃사이더입니다.『환상 박물관』에 모인 소장품들은 현실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로 침참해갑니다. '그들은 왜 현실로 나오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로 나아가는가? 자기만의 세계로 나아감에 구조적 모순은 없었는가? 자기만의 세계로 침참함에 그들은 과연 행복했는가? 그들과 우리와의 사이에는 강(江)이 없는가? 그들이 꿈꾼 세계는 우리 안의 섬(島)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이웃인가?'에 대한 자유연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환상박물관』에 놀러 가고 싶다면, 먼저 서점에 가셔서 잠시 살펴보세요. 여섯 개의 관(상상관, 예술관, 지역관, 종교관, 문화관)에 39개의 소장품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것을 먼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