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이은희 지음 / 궁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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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하라... 참 좋은 의미를 지닌 이름이라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은 어머니나 아버지가의 바람대로 이름을 짓습니다. 이런 이름 속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이나 바람이 아닌 타자가 주체인냥 자리를 잡게 되며, 스스로에 대한 매듭을 짓습니다. 하지만 진정 내가 원한 이름인가라고 되물어면 분명,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을 하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불려지다 보니 자기의 정체성을 다듬어가는 것입니다.

정체성? 이 정체성이라는 괴물을 저는 좋아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떠나서 내가 선 이 자리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를 이끄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리하라"-인도신화의 두신, 창조와 생명의 신이니 비슈누와 종말과 파괴의 신 시바, 그 두 신의결합이 바로 하리하라라고 하네요. 정말 그의 학력과 직업을 들여다보면 왜 이런 이름을 짓게 되었는가에 대해 큰 의문은 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정체성은? 저는... 계속 생물학 카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는 또다른 신이 되어 이 세상에 존재를 합니다. 물론 그가 초등학교 때, 돈 주고 산 병아리가 큰 닭이 되어 도둑 고양이한테 죽음을 당한 경험을 끔찍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처럼... 그런 그에게 과연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라는 형이상학적인 고민을 던져 주었다면 철학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지만 지금 그가 선 자리는 또다른 "신적인 존재"입니다. 신은 아니지만 타자가 볼 때에는 신과 대등한 관계를 가진 듯한 존재, 분명 신적인 존재로 굴림하고 있습니다. 대학원 재학 시절에 동물해부학을 했기에 "직접 죽인" 동물들도 많다고 합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사람이 아니기에 함부로 죽여도 된다는 묵시적 동의? 혹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최소한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 그는 이런 논리보다는 "힘의 논리"를 좋아하는 듯합니다.

제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너무나 많이 회자되기에, 그렇다면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한 줌의 호기심입니다. 하지만 내 호기심을 채우기에는 가뭄에 콩 나는 격이였습니다.

그도 인지하고 있지만 인테넛에 올린 글이라 깊이 보다는 "단순히 잡기장 수준의 끄적거림"일지라도 3년이라는 세월동안의 경험과 탁견이 쌓이고 좋은 출판사(?)를 만났어 책을 내게 되었다면, 더 아름답게 혹은 멋지게 만들 수가 없었을까라는 안타까움이 맴돕니다. 우선 그는 3년이라는 세월이 지니는 시간적 축적을 믿었나 봅니다. 3년, 당연히 길지 않은 시간동안 인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재미와 지식이 충족되었다는 의미였을것이며, 책으로 출판하기에는 조금은 부족한 듯 하니, 인도신화는 저 멀리 두고 그리스로마 신화를 가지고 옵니다. 물론 그리스로마 신화가 지니는 재미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인도신화로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그리스로마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은 엇나간 듯한데, 결정적으로 신화가 생물학과 철길 마냥 평행선을 달린다는 것입니다. 생물학 속에 신화 이야기가 잘 조화를 이루었더라면 분명 신화와 생물학을 둘 다 잡을 수가 있었을 텐데... 적어도 제가 볼 때에는 분명 불협화음입니다. 어설픈 무늬를 덮어 씌우기한 위장에 불가해보입니다.

책을 계속 읽어내려가면서 느끼는 것이, 이 바닥이 보이는 글읽기를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갈등입니다. 36가지의 재미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 하더라도 너무나 둘러갑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알맹이를 보여주긴 하는데... 갈 수록 그 깊이마저도 드러나 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책을 읽으가면서 몇 가지의 생물학 지식을 얻는 기쁨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또하나 지은이는 적자생존, 힘의 논리를 숭배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니 정체성이 없다는 말이 맞을 듯합니다.

"아직은 세포덩어리인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해서 태반을 형성하여 모체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흡수하기 위해 모체와 티격태격 벌이는 군비 경쟁, 모체의 거부반응과의 투쟁 등은 조금 과장하면 체험 수가 '난 이렇게 살아남았다' 수준입니다.(27쪽)"

"서로를 자신의 몸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세상이 '모든 것을 표준화시키려는 눈'으로 그들을 가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41쪽)" -쌈쌍둥이를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눈이 왜 이렇게 거북스럽고 멍청한 구조로 진화되었는지는 모릅니다.(102쪽)"

그가 보는 생물학적 의미는 군비 전쟁 그 이상입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 남아 후대에 자기의 계보를 있는 것이 당연지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이야기 할 때에는 가장 선 한 눈으로 "표준화"시키려는 숨은 무리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언뜻 드러면 그럴 듯한 말이지만 그의 잠재의식 속에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의 구조가 멍청해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난 과학이 얼마만큼 우리의 생명 구조를 알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가 모른다고 하여, 거북스럽고 멍청하다는 결론은 조금 성급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이것 역시 적자생존의 가치관에 바라보면, 내가 인지하는 것만이 힘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버려야 할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억측일까요?

"우리의 혀는 이런 음식을 아주 좋아하는 한편, 우리의 몸은 게으르게 늘어지는 것 또한 언제나 환영합니다. 이런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살이 안 찔래야 안 찔 수가 없죠. 하지만, 이 정도쯤은 애교로 봐줄수 있는데도 '살'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뚱뚱한 몸을 죄악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입니다(79쪽)"

과연 누가 죄악시한다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난 여름 바닷가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입기 위해 봄 부터 흘린 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지만 너무 과장되게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겠지만... 제가 위의 글을 인용한 이유는 "우리의 몸은 게으르게 늘어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 때문입니다. 우리 뒷집의 할머니는 내일이면 아흔을 바라보지만 하루도 쉬시지 않고 종종 걸음을 걸으면서 밭에 나가 풀을 메기도 하고 씨앗을 뿌립니다. 저 또한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도 일요일 저녁에 두 시간 정도 방에서 티비를 보면서 뒹굴었지만 하도 심심하여 도서관에 나가 책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날을 지새우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쉽게 알거라 생각이 되는데, 지은이는 왜 이런 표현을 하였는지 의문입니다. 생물학적 근거라면 저는 생활 습관으로 충분히 고쳐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난자 판매는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가난한 여대생들에게 금단의 과실처럼 다가왔지요.(127쪽)"
"미녀 모델들의 난자는 매우 비싼 값에 팔립니다. 결구 이 사회에서는 미(美)란 우성형질이며, 그들의 난자만을 선별하는 것은 일종의 적극적인 우생학이 될 수 있습니다.(129쪽)"

그는 분명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여대생이라 했지, 가난하지만 이쁜 미모의 모델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어깨너머로 듣은 지식을 스펀지처럼 무조건 빨아들인, 고뇌하지 않은 글쟁이의 글이라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어깨 너머로 듣은 지식이 고정화되어 버린 다음에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닌 볼려고 하는 것만 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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