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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 여시아문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차분하다, 모든것을 내려놓은 듯 하면서 견성을 쫓기 위해 몸부림 치는 스님은 해탈할 듯 하면서 스스로 '견성'을 이루지 못하여 고뇌하니, 죽비소리가 깨달음으로 이르는 지름길로 삼고, 선방에 머무르는 이들을 '화두'로 삼는다.
겨울밤, 군불을 때는 아궁이 앞에 고구마 몇 개를 넣고서는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가, 고구마가 탈까봐 얼릉 꺼내 손을 호호 불며 안방으로 들어가, 이미 가져온 김치 한 줄을 올린다. 신문지에는 검정이 내려 앉고 손톱 마디마디는 새까맣게 익어가는지도 모른 체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고, 지허스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스님은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차분하게, 차분하게 들려주신다.
십리를 달려왔다느 어느 노장 스님, '스님들 스님들, 저 시래기 좀 붙잡아 주고가오, 늙은이가 시래기를 놓쳐 십 리를 쫓아오는 길이라오' 시래기를 쫓아 십리를 달려오는 우직함과 그 하나 조차 버리지 못하는 마음 씀씀이가 하늘처럼 높아 보이는데, 미리 짐작하고 선을 긋는 납자의 발걸음에서 내가 보여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원하다' '영원성을 불신함은 중생의 고집 때문이요, 영원성을 확신함은 불타의 열반 때문이다'라는 화두를 견성하지 못한 우매한 나는 몇 번이고 되내인다.
선객의 바랑, 끝내 견성하지 않으면서 절간에서 머무른다면, 생의 모독자라는 자기 검열은 준엄하다. 그저 무위도식하는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견성을 위해, 몸 받치며 자아를 찾는 스님의 모습은 준열하다. 그리고 두 동자승의 장난은 내 유년시절의 소꿉장난이며, 스님들의 뒷방 이야기는 스님도 사람이구나하는 마음을 심어주면서 한편으로는 스님이면, 나 보다 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자세 또한 그러했으면 하는 바람과 억지를 품어본다.
나는 들었다. 스님은 어느 절 주지를 지내시고, 이제는 조그마한 선방에서 차(茶)를 키우신다고, 어쩜 내가 스님의 글을 찾게 된 것도 그 이야기를 듣고 부터이다. 예순을 넘는 노장 스님과 지천명에 이른 납자가 한 방에 앉아 세 시간 동안 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여기에는 속세의 먼지가 들지 못하고, 선계의 바람 만이 머무를 뿐이다. 그리고 납자-내게는 높은 선생님-가 스님을 뵈온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차잎이 날 때 쯤에 선생님을 졸라 스님을 뵈러갔다오면 참 좋겠다. 오늘 일은 책에서와 선생님이 본 스님의 모습이 한결같이 느껴짐은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정신과 마음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