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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날의 벗 ㅣ 태학산문선 101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 / 태학사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놓았다가 어떤 미련 때문에 다시 든다.
박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가 실학자이며 중국에 취해 [북학의]를 적었다고 했을 때, 시험문제 정답을 하나 더 맞추기 위해 외우는 정도였지, 그 알맹이에 대한 궁금증은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참이 지난 다음, 나는 그의 글을 읽었고 그의 진언을 들었다. [북학의]는 단순히 중국에 경도 된 이들의 중국예찬이 아니라 답답한 현실에 대한 젊은 선비의 직언이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사념과 세계관을 쫓았다. 그리고 다시, [궁핍한 날의 벗]이라는 산문선을 읽는다. 앞서보다 집중도는 떨어지는 듯 하지만 그의 일관된 세계관은 시 쓰기에 대한-다양한 견해를 읽을 수 있어 좋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내가 생각하는 세계관과 크게 엇나가지 않아 동음중복되는 듯해 건성건성 읽는 듯 했는대, '개혁의 방안'에서는 두 눈 부릎뜨고 읽는다.
정조 10년에, 임금은 아랫사람에게 '진언'을 청했다. 이에 박제가는 나라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가난'이며 이를 극복할 대안을 '무역'으로 내어 놓는다. 그가 생각하는 무역은 '가진 것을 다른데로 옮기고, 없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160)'이라 말하고, 서양사람들이 비록 천주교를 믿지만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학문과 기술에 정통(162)'하기에 초빙을 건의한다. 그의 사고관은 근본을 흔드는 일이다. 일일이 앉아서 적었다면 어찌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으며, 시야가 어찌 이렇게 넓을 수가 있을까? 실로 읽고 읽고 또 읽지만 그저 감탄뿐이다. 나라를 걱정함에 있어, 누구보다 깊은 충정이 드러나고 넓은 세계관에 옷깃을 가다듬는다. 실로 나라에 이런 이가 맞지 않고, 천리마가 있어도 백락(伯樂)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박제가는 새치혀로, 그의 논의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견해까지 내어놓는다.
'저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큰 좀벌레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이유는
사족이 날로 번성하는데 있습니다.(164쪽)'
놀고 먹는 자들에 대하늑의 경고에는 날이 서 있다. 진언을 청하고, 직언을 할 수 있는 시대. 나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내 시선은 얼마만큼 열려 있는지 박제가를 통해 나를 뒤돌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