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왕자의 특권
아멜리 노통브 지음, 허지은 옮김 / 문학세계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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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단잠의 기쁨…

p.13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두는 것보다 더 굉장한 휴가가 있을까?

p.53

뜨거운 물에 몸이 노글노글해졌다. 행복했다. 팔팔 끓는 국물 속에 퐁 빠진 말린 버섯의 심정이 바로 이렇겠지. 왕년의 부피를 되찾는다는 건 아주 유쾌한 일이다. 나는 늘 저온 건조시킨 채소들을 불쌍히 여겨왔다. 몸의 수분을 죄다 잃었는데,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포장지를 읽어보면 말린 채소에도 고유의 특성이 모두 보존된다고 씌어 있다. 뻣뻣한 마분지 같은 채소들에게 물어보라지. 보나마나 얘기가 다를걸? 썩지 않는다니, 지겨워서 어떻게 하라고!

p.81

"왜 여자들은 적게 먹는 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왜 남자들은 여자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p.108

엄마는 계속 감탄을 하며 나의 ‘소감’을 물었다. 나는 아무 느낌도 받지 못했다. 단지 나로서는 끊임없이 절정에 오르는 엄마의 쾌감을 결코 흉내내지 못하리라는 점, 더군다나 그런 느낌을 받을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그냥 ‘아름다워.’라고 대답해 버렸는데, 하필 그 때 우리 가족은 인신공양(人身供養)의 장면을 복원해 놓은 전시대 앞에 있었고 나는 설명이 새겨진 판 옆에 서 있었다. 어쨌거나 부모님은 나의 의견이 몹시 흡족한 모양이었다.…아무튼, 만약 박물관이 그저 지루하기만 했다면 박물관을 혐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루한 건 괜찮다. 하지만 관심을 표현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면서 지루해하는 괴로움이란!

p.112

은행들은 어마어마한 빚을 진 고객에게도 백만장자 고객에 버금가는 집착을 보인다. 특히 그빚이 크면 클수록 더 그렇다. 은행 간부들은 한때 굉장한 재력을 자랑하던 사람이라면 곧 재기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빚을 지는 이유는 투자를 했기 때문일 뿐, 자기들의 용감한 고객은 미래를 내다본다고 굳게 믿는다.

p.175

지그리드는 백색의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그 백색은 내가 막 끝낸 책의 첫 페이지였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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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선화
김이설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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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이야기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을 끝내 외면하고 ‘적당한 선’을 갈구하는 모습에서 저자가 지닌 사유의 한계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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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상처가 있다.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굳고 딱지가 내려앉고, 딱지가 떨어진 자리에 솟은 새살이 바로 상처를 반추하게 하는 흉터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흉터를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어쩌다 그랬을까 상상하기도 하고, 아물기까지 얼마나 걸릴 지 혼자 추측해보기도 했다. 때로 커다란 흉터나, 흉하게 일그러진 흉터를 보면 나도 모르게 안도가 되기도 했다. 세상에 나만 흉터가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p.14

나는, 내가 만든 꽃이 예쁘다고 해서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예쁜 꽃다발은 원래 꽃이 예뻐서이거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규칙을 잘 지켜 묶었기 때문이었다.

p.16

매달 월세와 생활비를 대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는 졸았고, 젊은 교수의 농담에는 함께 따라 웃지 못했다. 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들과 제대로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나는 늘 피로했다. 학자금대출을 받았지만 그것은 미래를 담보 잡힌 빚이었다. 몇 번의 휴학을 거쳐 대여섯 아래의 학번들과 함께 졸업했다.

p.26

엄마는 왜 꽃을 좋아해? 엄마가 아주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꽃은 아무 말을 안 하니까. 나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입을 꾹 다물었다.

p.40

"키우던 식물을 죽이기도 하나요?"
"그럼요."
"공들여 키우셨을 텐데, 그렇게 죽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겠어요."
"물 때를 놓치거나, 처음부터 건강하지 못했던 애거나. 둘 중 하나인 거죠.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쓰면 이 일 못해요."
영흠이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하루 종일 꽃과 있으니, 좋은 직업이네요."
작업대를 치우는 나에게 영흠이 말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좋기만 하겠어요. 게다가 아무리 좋아하던 것도 일이 되면 그냥 일처럼 하는 거죠."
영흠이 끄덕였다. 다육식물들의 잎을 조심스럽게 건드려보고,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결국 꽃냉장고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죽일 것 같아요."
"그럼 꽃으로 하시겠어요?"
"그러죠. 저 꽃은 장미인가요?"

p.57

저것들은 두툼한 잎에 수분을 저장해 스스로의 생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육식물이 좋았다. 선인장처럼 가시의 위협이 없으면서도 관심두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제 생을 연명해가는 기특하고 똑똑한 것들이었다.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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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 폴리팩스 부인 1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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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더 늦기 전에 “원통을 한 번 빙글 돌리기만 하면 조그만 색유리 조각들이 흔들려 새로운 모양을 만드는” 이 만화경 같은 세상을 더없이 즐겨볼 것을 권한다. 맞는 말이다. 예순 먹은 노인도 하는 일을 갖가지 핑계로 미루다가 후회하지 말고 방구석을 벗어나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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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 폴리팩스 부인 1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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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생이란 원래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무엇을 선택하든 알 수 없는 것에 도박을 거는 일이지요.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우리가 인간인 거고요. 우리에겐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인생이란 지도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방향도, 경로도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니까요."

p.362

세상이 꼭 만화경 같다고 부인은 생각했다. 원통을 한 번 빙글 돌리기만 하면 조그만 색유리 조각들이 흔들려 새로운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p.410

폴리팩스 부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하츠혼 여사님, 슬라이드는 없답니다." 하츠혼 여사는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슬라이드가 없다고요? 사진이 안 나왔나요?" 여사의 눈빛이 꾸짖는 것만 같았다. "제가 드린 설명서를 안 읽으셨군요?" ‘에밀리, 원주율이 뭔지 또 잊어버렸구나.’ 폴리팩스 부인은 한 번 웃고 부드럽게 말했다. "사진을 안 찍었어요, 너무 바빴거든요." "너무 바빴다니요?" 하츠혼 여사는 아예 겁에 질린 것만 같았다. "그래요, 너무 바빴답니다. 정말, 제가 얼마나 바빴는지 알면 여사님도 깜짝 놀라실 거예요." 부인은 힘주어 덧붙였다.

p.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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