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단잠의 기쁨…
p.13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두는 것보다 더 굉장한 휴가가 있을까?
p.53
뜨거운 물에 몸이 노글노글해졌다. 행복했다. 팔팔 끓는 국물 속에 퐁 빠진 말린 버섯의 심정이 바로 이렇겠지. 왕년의 부피를 되찾는다는 건 아주 유쾌한 일이다. 나는 늘 저온 건조시킨 채소들을 불쌍히 여겨왔다. 몸의 수분을 죄다 잃었는데,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포장지를 읽어보면 말린 채소에도 고유의 특성이 모두 보존된다고 씌어 있다. 뻣뻣한 마분지 같은 채소들에게 물어보라지. 보나마나 얘기가 다를걸? 썩지 않는다니, 지겨워서 어떻게 하라고!
p.81
"왜 여자들은 적게 먹는 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왜 남자들은 여자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p.108
엄마는 계속 감탄을 하며 나의 ‘소감’을 물었다. 나는 아무 느낌도 받지 못했다. 단지 나로서는 끊임없이 절정에 오르는 엄마의 쾌감을 결코 흉내내지 못하리라는 점, 더군다나 그런 느낌을 받을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그냥 ‘아름다워.’라고 대답해 버렸는데, 하필 그 때 우리 가족은 인신공양(人身供養)의 장면을 복원해 놓은 전시대 앞에 있었고 나는 설명이 새겨진 판 옆에 서 있었다. 어쨌거나 부모님은 나의 의견이 몹시 흡족한 모양이었다.…아무튼, 만약 박물관이 그저 지루하기만 했다면 박물관을 혐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루한 건 괜찮다. 하지만 관심을 표현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면서 지루해하는 괴로움이란!
p.112
은행들은 어마어마한 빚을 진 고객에게도 백만장자 고객에 버금가는 집착을 보인다. 특히 그빚이 크면 클수록 더 그렇다. 은행 간부들은 한때 굉장한 재력을 자랑하던 사람이라면 곧 재기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빚을 지는 이유는 투자를 했기 때문일 뿐, 자기들의 용감한 고객은 미래를 내다본다고 굳게 믿는다.
p.175
지그리드는 백색의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그 백색은 내가 막 끝낸 책의 첫 페이지였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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