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기원전 44년 질지라는 수령이 몽골리아에서 자기 조상들의 땅으로부터 쫓겨나 현재 카자흐 공화국이 있는 발하쉬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첫번째 분열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적으로 남게 될 몽골리아의 동흉노와 훈(앗틸라의 조상)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세계의 적이 될 발하쉬와아랄 초원의 서흉노가 갈라지게 된 것이다. 구에서 우리 외침의48년에는 동흉노 제국 자체가 분열되었는데, 오르콘 지역의 선우에게충성을 바치던 이들로부터 내몽골 내지는 남방에 있던 ‘여덟 개의 부락‘이떨어져 나왔다. 이렇게 해서 두 개의 구별되는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외몽골 오르콘의 북흉노와 만리장성 북방쪽 내몽골의 남흉노가 그것이다. 방금본 것처럼 155년에 북흉노는 만주의 변경에 있는 동몽골의 흥안령 지역에서 기원한 몽골계 집단인 선비에게 격파되었고, 선비는 당시 만주의 경계에서부터 하미와 바르쿨 입구에까지 이르는 몽골리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 P108

이제 완전히 한화되어버린 탁발은 궁정 내의 정변, 황족 간의 분란,
그리고 내전 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534년 이 나라는 하북·산서·산동·하남을 차지하고 업을 수도로 한 동위東魏(534-550)와, 섬서와 감숙을 차지하고 장안을 수도로 한 서위西(534-557)로 나뉘었다. 두 나라 모두 재상에게 황위가 찬탈되어,업에서 동위를 대체한 북제北(550-577)와 장안에서 서위를 대체한 북주北周 557-581)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 두 황실은 모두 한화되어버려서 더 이상 초원 역사의 일부가 되지 못했다.
ht그들이 역사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 초기 탁발 통치자에게 그렇게 특징적이었던 투르크적인 활력이 점차적으로 약화되고 희석되어 중국인 대중 속으로 흡수된 것이다. 이런 역사의 순환은 거란·여진·몽골·만주를 통해 수세기 동안 거듭해서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탁발인들이 약화되어가는 - P120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이후 원나라나 하의 몽골에게도작용했던 불교의 영향이다. 한번 보살(Bodhisattva)의 자비로운 손길에스친 이런 사나운 전사들은 승려(sramanas)의 인문주의적인 가르침에 너무나 감화되어 원초적인 호전성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방어마저 게을리하게 된 것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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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너무 빠르다. 이제 곧 12월이라니…

책은 한참 전에 샀는데 구매 사진은 이제야 올린다. 책탑 중에 커피만(!) 다 먹었다.

커피의 맛은 검증된 것이므로 이야기할 것이 없고 드립백으로 나왔길래 샀다(원두의 포장에 충격이 아직도…).
라시드 앗 딘의 집사 3권, 몽골 비사(중고의 가격이 신간과 별 차이가 없어서 그냥 신간 gox2)는 현재 몽골사 읽기에 연장이다.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대출하여 읽은 책이지만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하여 포함한 책이다.
모험인 책은 가장 밑에 있는 아시아 1945-1990 다. 신간이라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하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부피감도 있고 사실 내용이 당장 궁금했다. 과연 내용이 어떨지.

저 책들은 언제 다 읽나 싶은데 아무튼 아시아사부터 읽어보는 것으로 해야지.

요새는 춥기도 했고 낙엽도 다 떨어져서 찍을 만한 사진이 없었다. 어느 날 층층의 구름이 멋있길래 건진 사진 한 장 올려본다.


그동안 미친 듯이 바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 팀에서 한 명의 사람이 빠져나가고 인원은 충원이 안 되고 있다. 늘 충원하겠다는 말은 하지만 회사에서는 너무 짠 월급을 주고 뽑을 사람은 어느 정도 검증된 실력의 사람을 뽑을려고 하니 잘 안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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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9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전 알라딘에서 새로 나온 커피들이 다 그 삼각형 모양이라 다 패스하고..
계속 전에 나오던 브라질 산타 루시아만 사먹고 있어요.
최근에 나온 것 중 삼각 봉지 아닌 거로는 ‘콜롬비아 몬테 블랑코 퍼플 카투라‘가 있던데 이건 패션후르츠에 산딸기 어쩌고 그래서 그냥 패스....ㅠㅠ 라딘아 새 커피 좀... 5천원 쿠폰 주는 건 좋은데 말입니다...음


거리의화가 2023-11-29 14:49   좋아요 0 | URL
저도 알라딘에서 나온 원두 중 브라질 산타 루시아를 가장 많이 구입해서 마신 것 같아요. 고소한 원두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그게 가장 나았습니다. 알라딘 커피 요새 계속 산미 있는 것들만 나와서 아쉬워요ㅜㅜ

다락방 2023-11-29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사인은 최근거 다 사서 넣을게 없고 초콜렛도 너무 샀고 뭐가 좋을까 하다가 귀찮지만 드립백을 선택했거든요. 그래서 오늘 도착한 저 박스, 아직 뜯지 않은 박스 안에 저 드립백이 저도 들어있을 겁니다. 전 제가 마시진 않고 저 찾아 오는 직원들 하나씩 주려고요 ㅋㅋ

역시 다른 사람들 책 산 페이퍼가 제일 재미있어요! >.<

거리의화가 2023-11-29 15:04   좋아요 0 | URL
드립백은 아무래도 원두보다는 맛이 덜하지만 괜찮았어요. 고소한 원두로 최근 것중에는 선택지가 없기도 했고요^^; 직원분들 좋아하실겁니다.

저도 다른 분들 책탑 구경하는 것이 언제나 즐거워요^^

은오 2023-11-29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탑 맨 아래 저 책 두께감이 엄청나네요.... (벽돌책은 책등 감상하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 화가님이라면 저런 책도 잘 해치우시겠지만!! ㅋㅋㅋㅋㅋ
항상 하늘 사진까지 꼭꼭 챙겨서 올려주시는 화가님이 좋습니다!! 😆💕 화가님 좀 덜 바쁘셨음 좋겠따.......... 화가님 회사는 반성해라.....

거리의화가 2023-12-01 09:39   좋아요 1 | URL
벽돌책은 감상하는 맛도(!) 포함되는 것이겠죠?^^ 저도 저 책은 꽤나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넉넉잡고 2주는 잡아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ㅋㅋ 핸드폰 사진의 최소 반 이상이 하늘 사진입니다. 글 작성자의 의도를 잘 알아주는 은오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 12월에는 조금만 바쁘면 좋겠는데 그럴 것 같진 않네요!ㅎㅎ 그래도 잘 살아남아야죠^^ 12월 잘 시작하세요!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5 - 최초의 민족통일국가 고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5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이화 선생님의 한국사 이야기는 전집으로 우리 집 책장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다. 오래된 책이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정답고 미소를 짓게 하는 책이다. 선생님을 단 한 번 뿐이지만 민중사 강연 때 뵈었던 적이 있었는데 사진이나 동영상에서 본 모습보다 더 푸근한 인상이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물론 강의에서는 단호함이 묻어나셨지만!


이이화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 서술 방식의 특징은 민중의 힘을 강조하셨다는 점에 있다. 민중사가 이제는 대세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역사가 권력층의 입장에서 쓰여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책은 계속 소비되어야 하고 읽혀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사 이야기 5권은 고려라는 나라가 성립된 시기부터 거란이라는 나라를 만나서 관민이 힘을 합쳐 물리칠 때까지를 다룬다. 


고려의 역사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보았으나 항상 아쉬운 것은 사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특히 정사인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기에 작업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인의 입장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기록이 너무 소략한 경우가 많아서 아쉬움이 많다. 때문에 고려와 동시기에 존재했던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참고하거나 '야사'를 찾아봐야 하지만 그마저도 조선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숫자라서 슬프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위주로 적어보려한다.


때는 바야흐로 983년, 개경 거리에 술집 여섯 곳이 들어섰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설된 관영 술집이었다고. 11세기 말 숙종 시기 동전을 전파하기 위해서 민간인에게 주점을 맡기기 시작했고 그 뒤로 술집은 민간인이 경영하게 된 것이라 한다. 사극을 보면 주막을 보게 되는데 이 때가 시작이 아닐까.


또 무당을 찾아가는 일인 '당골'이라는 단어가 현재 우리가 쓰는 '단골'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절에서는 여러 시설을 만들었는데 그 중 민간에서 경영하는 최초의 여관이자 음식점을 이름하여 '원'이라고 불렀다. 스님들만 이곳에 가서 숙박을 하고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민간인들에게도 이것을 공유했다는 점이 특이했다.


아무래도 불교를 중시하던 국가여서 불교와 관련한 것이 많은데 승과가 존재하기도 했고 귀족들은 자제들을 출가를 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중의 사회적 위치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것의 폐해로 절이 부를 축적하고 나중에는 부패하면서 백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초기의 역사를 다루는 만큼 광종, 성종과 현종, 문종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4대 임금인 광종은 기존의 공신들의 힘을 낮추고 왕자들을 통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다지는 일에 힘을 썼다. 과거제 실시와 노비안검법 제정 공포는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노비안검법으로 노비의 신분을 풀어주자 귀족들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광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광종의 조치를 두고 정인지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에 노비가 있어 풍교(風敎)의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외를 엄히 하고 귀천을 매겨 예의가 행해지는 것이 여기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노비가 없으면 양반이나 사대부가 체면을 차리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유학자 출신인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정책을 비난하면서 광종의 다음 임금인 성종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성상께서는 깊이 지난 일을 거울삼아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능멸하지 못하게 하고, 노비와 주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잡아 처리하게 하소서. 대체로 벼슬이높은 자는 이치를 알아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경우가 적으며, 벼슬이 낮은 자일지라도 진실로 자기의 비위를 꾸밀 만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속임수로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궁원(院)과 공경들이 더러 위세를 빌려 비법을 저지르는 자가 있긴 하지만... 지난날 판결한 것을 다시 캐고 따져 세상을 어지럽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승로는 노비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우니 지난 일은 접어두고 노비 관계의 송사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였다. - P103

성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노비환천법을 공포하는데 이는 "무릇 도망해온 남의 노비를 숨겨 멋대로 차지한 자는 날을 따져 베 30자를 본주인에게 주고, 날수가 비록 많더라도 원래 값을 넘게 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려 노비주를 보호하였다.


광종이 힘들게 쌓아 올린 노비안검법을 후퇴시키는 조치라니 아쉽게 느껴진다. 게다가 성종은 "여종이 낳은 아이는 아비가 양반이더라도 종으로 삼는다"는 천자수모법을 시행하도록 하여 노비수가 증가하게 된다. 


강조의 정변이 빌미가 되어 거란이 2차 침입을 했을 때 강조는 스스로 도통사가 되어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에서 싸웠으나 결과적으로는 패배한다. 삼수채에서 선발대가 요군을 상대로 고려군이 승리를 할 때 더 조심하고 경계했어야 하는데 그는 자만하고 나태한 모습을 보인다. 

강조가 통주에서 삼수채를 설치하고 있을 때 요군의 선발대와 다시 맞부딪쳤다. 고려군은 칼을 꽂은 수레를 배치하여 요군을 공격하였다. 요군은 패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강조는 지장의 자질이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적을 물리친 뒤 적을 깔보며 진중에서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반격을 시도한 요군이 삼수채를 격파하고 밀려들어왔다. 이 보고를 받은 강조는 태연하게 큰소리쳤다.


입 안의 음식은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다. 많이 들어오게 내버려두어라.

요군이 물밀듯이 진중으로 쳐들어왔다. 그때서야 강조는 황급하게 일어나 싸울 채비를 차렸으나 어느새 들이닥친 요군이 강조를 꽁꽁 묶어버렸다. 강조의 몸은 북방에서 나는 털담요에 둘둘 말렸다. 함께 있던 고려의 장수들도 다 잡혔다. - P177

대체 왜? 현종까지 옹립해가며 정변을 일으켜서 거란과의 전쟁이 벌어졌다면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나중에 거란에 포로로 잡혀서 거란의 황제 앞에서는 끝내 고려의 장수로 절개를 지키지만 진작 좀 잘했으면 좋았을것을 하는 안타까움이 인다.


거란의 3차 침입에 대항한 리더는 강감찬이었다. 그런데 강감찬이 아니라 책에 강한찬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어 잘못 보았나했다. 

강한찬
한은 중국조(趙)나라 서울인 한단에서 처음생겨난 글자이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한단지몽‘ (邯鄲之夢)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 이를 ‘감‘으로 발음할 근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강감찬은 강한찬으로 고쳐불러야 한다. 이 책에서는 강한찬으로 통일하였다. - P169

강감찬이 익숙해서 영 입에 안 붙는 이름이다. 관련하여 기록을 좀 더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문종의 집권 시기 중국은 송나라가 들어서 있었다. 송은 신종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고려에 수교를 제의하자 문종이 화답하며 두 나라의 왕래가 시작되었다. 

송은 문종의 병이 깊어지자 여러 차례 명의를 보내주면서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문종은 "고려는 소중화입니다" 하며 엎드리는 자세로 송을 흠모하였다. 

문종은 어느 날 송의 수도 개봉을 돌아보는 꿈을 꾸고 시를지었다.

악업의 인연으로 거란과 가까워 1년의 조공만도 몇 번인지 모른다네.
이 몸 홀연히 개봉에 이르니한밤에 흐르는 눈물 애석하도다.
(명나라 사람이 지은 『요산당기』에 나옴)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소중화'를 표방하고 중국을 '동방 예의의 나라'로 칭송한 것은 자주국의 수장으로서 지나치게 허리를 굽힌 것이 아닌가하여 찜찜함이 남는다. 


이 책은 정사 이외에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독자에게 말을 하듯 전달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가 사건과 상황을 상상하여 이성과 감성에 기반한 판단을 요청한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답을 하며 책을 읽어나간다면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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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8 챕터까지 읽었다. 거의 반 정도 온 것 같은데(킨들로 확인해보면 45% 정도?) 쉬운 단어로만 되어 있는 문장이 해석이 안되는 경우 좌절감이 큰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어쩌겠나, 계속 쉬지 않고 읽어내려가는 방법뿐이겠지.


나쁜 일이 있어도 또 좋은 일을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Mia의 하루들을 보며 나도 힘이 될 때가 많다. '대견하다 대견해.' 하면서 읽고 있다. 아무튼 다음 달까지 읽어보겠다.



[ CH20 ]

모텔에 한 명의 이민자가 왔다. Uncle Li의 친구로 Aunt Ling이다. 그는 네일 살롱에서 일하는데 무척 푸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무척 굶주린 기색이라 엄마는 만두를 내어주시며 충분히 있으니 마음껏 먹으라 했다. 엄마의 친절에 그녀는 네일 서비스를 엄마에게 해준다. 그녀는 사장이 내쫓아서 밖에서 살고 있다며 머무는 것이 가능하냐 물었다. Yao씨가 모텔에 불쑥 찾아올수도 있어서 'old blue yankees baseball hat'을 가리키면 그가 있는 sign이고 아니면 없는 것으로 정했다.


[ CH21 ]

손님 Lorenz씨 차량(a green Ford Thunderbird)이 한밤중에 없어졌다. Mia는 노트에 "parking lot gate"를 추가했다. Yao씨는 모텔에 도착하여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냐며 부모님께 따진 뒤 경찰에 연락하고 모든 방의 손님을 깨웠다. 

Mr.Roberto는 키가 작고 수염이 나 있다.

Mrs.Robinson은 엄마보다 키가 약간 더 크고 어깨 너머까지 웨이브진 검은 긴머리를 가졌다.

검은 머리라고 하자마자 Yao씨는 나쁜 사람을 모텔에 손님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고 했다. "black people are dangerous." 라고... Mia는 기가 찼다. 

"we can't judge someone based on their skin colour. It isn't right. This is America." 아빠의 발언에 Yao씨는 더 날뛰었다. 

이때 경찰관들이 모텔에 도착했고 Yao씨는 상황을 부드러운 태도로 이야기했다. Yao씨는 Mrs.Robinson이 범인인 것 같다고 대놓고 지목했다. Mia가 하는 말은 무시되었고 경찰관들은 Yao씨의 말만 듣더니 장기 투숙객들을 심문한 뒤 Hank는 남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최근 돈을 빌린 적이 있느냐? 물건을 판 적이 있느냐 물었고 Mia는 그에게 수상한 점이 없었느냐 했을 때 "아니요." 했더니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한다. "Hank's a good guy!" Mia는 경찰관에게 소리쳤다. 

경찰관들은 확증도 없이 Hank를 끌고 가 취조를 하여 Mia는 분개했다. 정작 Lorenz씨는 보험 처리가 되어 조용히 청구 비용을 돌려받았다. 그제서야 Hank를 풀어줬지만 그럼에도 Mia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는데 Hank는 늘 당하던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이게 대수로운 일인가? 

I stared at the cookies and thought about the world of difference there was between the two colours.


[ CH22 ]

Jason이 Mia에게 학교 강당에서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Mia가 강당에 들어서자 Jason이 등 뒤에 민들레를 들고 있었다. "These are for you. I like you, Mia." 아니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람. 

그가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려 할수록 Mia는 혼란스러웠다. Mia는 그가 Yao씨에게 인종주의자임을 어필하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Jason은 이를 자신에 대한 감정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아무튼 지구상의 단 한 명의 남자가 있다고 해도 넌 절대 좋아할 일이 없다고 말한 뒤 둘은 찢어졌다. 


[ CH24 ]

Mia는 중국의 경찰은 기억이 좋았다고 하는데(중국의 공안과는 다른 것이라 믿으며) 미국은 경찰이 총을 소지하기 때문에 인상 자체가 좋을 수가 없나보다. 아무튼 포기하지 않고 Mia는 경찰에게 진범을 잡으라고 경찰에게 종용했다. 그러나 경찰은 자기 일을 방해하지 말라며 그녀를 방해꾼으로 보았다. 


[ CH25 ]

경찰관이 Hank가 일하던 주유소에서 배회하고 직원들을 인터뷰하는 등 일이 발생되자 그는 결국 마지막 급여를 받고 나서 주유소에서 해고됐다. Mia는 "You have to fight this!" 말했지만 그는 소용없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예전에도 이런 경우들이 많았겠지). 

Topaz Inn 사람이 찾아왔다. 그 모텔은 더 나은 환경이었고 방 개수도 많았지만 우리 모텔은 도로 들어가자마자 첫 번째 위치한 만큼 접근성이 좋았다. 두 모텔은 서로 앙숙 관계였는데 Topaz Inn에서 바퀴벌레가 가득하니 Calivista에 머물지 말아라. 간판을 내걸자 열받은 Yao씨가 계란 한판을 사서 간판에 냅다 던졌다. Topazz Inn 사람은 사고를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더니 주변 호텔들과 함께 Black Customers를 공유하면 어떻겠냐며 제안을 해왔다. 과연 검은 속내는 없는지?


[ CH26 ]

Hank는 수리공 일을 Mr.Yao에게 요청했지만 거부한다. "ma fan"이라는 말을 들은 Mia는 차마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중국어로 "ma fan"은 '귀찮다. 짜증난다.' 그런 류의 말이다.


[ CH 27 ]

Mia는 writing essay content test에서 C- 점수를 받고 충격을 받는다. Lupe는 자신이 미국에 와서 처음 받은 점수를 이야기하면 놀랄 것이라며 위로하지만 Mia는 잘 위로가 되지 않는 눈치다.


[ CH28 ]

우울해 있던 Mia는 모텔 투숙객 중 한 명에게 8달러의 팁을 받고 행복해한다. 그는 보답으로 감사 편지를 작성하기 위해 사전까지 빌려서 써서 보낸다. 그리고 Front Desk에 혼자만 업무를 보고 있을 때 쓸 tip jar를 만든다. 

커플이 사진 요청을 엄마에게 부탁했는데 표현을 정확히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떠난 뒤 우울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Mia는 자신의 시험 결과를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러면 엄마가 더 우울해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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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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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저자의 책이라도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20쇄를 넘게 찍을 정도로 현재도 판매되고 있는 책이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24쇄로 2020 년 판이었다. 앞서 읽은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는 저자가 뒤에 출판한 책이지만 절판이라 구입 불가다.

사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첫 날 바로 앞부분을 읽었는데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못 읽다가 주말에 마저 읽었다. 앞부분을 읽었을 때 좀 지루하고 감흥이 없다 생각했었는데 마지막까지 읽어보았지만 그 느낌을 아주 없애지는 못했던 것 같다.

 

두 권 중 나는 앞서 읽었던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책이 더 좋았다. 이유는 몽골 제국사의 대부분이 칭기스 칸의 영웅적 면모와 몽골군의 전투력, 승리사에 주목해서 기술하는데 이 책은 몽골 제국의 리더가 몽골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얻으려 했는가에 주목하기 때문이다(종교라는 테마에 맞추어). 결국 '합치'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을텐데 결과가 어떻든 리더의 노력과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가(어쩌면 그것이 기본일 것이다)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다만 기존에 내가 읽었던 몽골 제국사로 예상되는 이야기들의 나열이라 신선함은 떨어졌다. 아쉬움이 있었지만 어쨌든 장점이 많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한 권으로 20세기까지의 몽골 제국사를 만날 수 있고 저자의 글이 유려하여 잘 읽힌다. 내용은 <몽골 비사>와 집사를 기본으로 하여 인물과 사건에 대한 외부인의 기록을 함께 실어 단편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했다. 

그래도 몽골군들이 전투 시 철저할 정도로 잔혹하거나 무도했다는 기술들은 외부인들의 기록들이 덧붙여져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전달된 측면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지금도 그렇지만 편견을 깨부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또한 몽골이 민을 다스리기 위해 펼쳤던 다양한 정책들로 인해 아시아를 비롯한 유럽이 입은 혜택이 많다는 점도 인지하게 되었다.


몽골 제국은 정확한 명칭으로 ‘예케 몽골 울루스”라고 부른다고 한다. 제국의 시작점인 칭기스 칸의 탄생과 성장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의 역사를 연대별로 기술하여 한 눈에 보기 좋다. 


1부는 칭기스 칸의 성장 과정부터 몽골 제국의 성립(1206년)까지를 다룬다. 

당시 몽골 초원은 중앙에 케레이트족, 서쪽에 나이만족, 동쪽에는 타타르족, 이렇게 핵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테무진은 어린 시절에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성장했다.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가족들은 부족을 떠나 살아남아야 했고 16세에 아내인 보르테를 만났으나 메르키트족이 약탈해가는 바람에 케레이트족의 수장인 옹칸의 도움을 받아 되찾아와야했다.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와는 관계가 틀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자신의 작은 씨족의 지도자로 평생을 보내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부족들의 공격과 반격이 이어지는 주변의 어지러운 세계는 그런 목가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초원의 부족들은 서로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부족 내의 어느 한 가족이 피해를 입으면 그것이 복수의 근거가 되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상대를 습격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테무진의 집단이 아무리 조용히 있고 싶어도, 이 소란스러운 세계에서 아무런 접촉 없이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수가 없었다. - P76


주르킨 원정(1197), 타타르 원정(1202~1203)을 거치면서 그는 규칙을 정립해 나간다. 


몽골 부족 전체는 군대라는 수단에 의해 통일되었다. 아르반(십호)이라고 부르는 10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로 편성하여 분대원들끼리 서로 형제 역할을 하도록 했다. 분대 열이 모여 자군(백호)이라고 부르는 중대를 이루었다. 몽골의 중대 열이 모이면 1000명이 밍간(천호)이라고 부르는 연대를 이루었다. 밍간이 열 모이면 1만 명이 투멘(만호)이라고 부르는 사단을 이루었다. 

새로운 체제에서는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적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군인으로 복무할 수 없으면 일주일 중 하루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을 공적인 일이나 칸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했다. 여기에는 전사의 가축을 돌보고, 연료로 쓸 똥을 모으고, 조리를 하고, 모전을 만들고, 무기를 수리하는 일, 심지어 군대를 위해 노래를 하거나 연예활동을 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새로운 조직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뼈에 속했다. 이제 그의 무리는 모두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구성원이 되었다.
테무진이 십진법에 따른 조직을 채택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역사적 추측이 있다. 이전의 투르크 부족들 가운데도 십진법에 기초한 비슷한 군사조직을 갖춘 예가 있었다. 어쩌면 테무진은 그들에게서 이 체제를 빌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무진은 이 체제를 전쟁을 위한 군사전술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영구적인 구조로 채택했다. - P106

테무진은 군대를 재조직한 뒤 언뜻 작아 보이는 개혁을 한 가지 더 시행했다. 본영은 케룰렌 강변의 아바르가에 둔 채 성산 부르칸 칼둔 주위의 오논, 케룰렌, 툴라 강들의 원류에 자리잡은 몽골 부족의 고향-테무진이 메르키트로부터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ㅡ을 폐쇄 구역으로 설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도 세 강의 원류에는 설영을 하지 못하게 하라." 테무진은 그렇게 명령했다. 그 명령으로 몽골족의 고향은 왕실 바깥의 외부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왕실 구성원들은 200년 동안 이곳에 죽은 자들을 묻고, 가족 행사를 열고, 외부인들을 배제한 채 가족회의를 했다. 몽골족은 그 전에도 세 강의 발원지에있는 이 산을 그들의 고향으로 여겼지만, 새로운 법이 나오면서 이곳은훗날 몽골 제국의 은밀한 의식이 열리는 중심이 되었다. 부르칸 칼둔 주위의 땅은 이제 몽골족의 우주에서 공식적으로 신성한 장소의 자리를차지하여, 땅의 중심을 넘어서서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 P107


20년 정도 투쟁하면서 테무진은 몽골족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자무카(구르칸)과의 승부는 결정짓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테무진과 자무카의 대결에서 테무진은 옹칸의 군대를 흡수하고 자무카가 도망간 틈을 타서 몽골을 통일하고 칭기스 칸으로 즉위한다. 


2부는 몽골 제국의 확장 중 1261년 뭉케 칸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데 이 때가 몽골 제국이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을 때다.


1210년 황금 칸이 죽고 아들이 새 칸으로 즉위하면서 칭기스칸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주르첸 원정이 시작된다. 키타이 부족을 포섭하여 주르첸 내부를 분열시키면서 자연스레 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칭기스 칸이 죽기 전까지 함께 했던 재상 야율초재를 만나게 된다. 


초원지대를 다스리는 주르첸의 권력은 군사적인 힘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중국 전역의 작업장과 도시로부터 목자들에게 흘러드는 물자의 확고한 통제에서 나왔다. 초원지대의 칸의 지위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역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전장의 승리는 곧 패자의 재물을 약탈할 기회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능력은 보통 일치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모든 부족을 이기고 통일을 해내는 전례없는 업적을 이룩해내자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약탈은 끝이 났고 더불어 물자의 흐름도 막히게 되었다. 모든 제조품은 남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남부의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신종의 의무를 약속하고 봉신으로서 물자를 받거나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여 물자를 빼앗아야 했다. - P141~142


칭기스 칸이 주르첸을 얻으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인 이유도 있지만 결국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비단길을 확보하는 것은 실크로드의 물자가 오가는 길을 확보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어 중앙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의 원정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은 호라즘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은 이곳에서 나는 이국적인 상품들을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 이 머나먼 땅의 술탄과 교역 상대로서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 P171


이번에도 정치적인 욕심도 있겠지만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또 호라즘은 무슬림 이웃들과 좋지 않은 관계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페르시아인이나 타지크인들을 적극 이용했다고 한다. 또 주르첸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배웠던 기술과 경험들이 있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귀족들은 철저히 죽여 후환이 없도록 했다. 


이 시대의 연대기 기록자들은 칭기스 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하는데, 사실 믿기는 힘들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복하여 눈앞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타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이다. 그들에게 귀중한 사람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는 것이고, 그들의 부인과 딸을 품에 안는 것이다.” 그는 공포가 자신의 전사들의 행동이 아니라 서기나 학자의 펜을 통해 가장 빠르게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문이 나오기 이전 시대에는 지식인의 편지가 여론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군은 한 도시를 정복하면 다른 도시들로 대표단을 보냈다. 그러면 이들은 칭기스 칸 전사들이 거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저지른 전례 없는 잔혹행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 칭기스 칸이 승리를 거둘 때마다 새로운 선전물이 홍수처럼 퍼져나갔다. 더불어 칭기스 칸의 불패 신화도 퍼져나갔다. - P181


이 때는 이미 종이가 사용되고 있는 시기였던만큼 선전물이 유포되기 너무나 좋았다는 것이 몽골인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다. 


탕구트 원정에서 칭기스 칸이 사망하고 우구데이가 취임하면서 유럽 원정이 시작되었다.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에 궁궐을 지으면서 부족의 이동성이 정주성으로 바뀌고 술까지 좋아하여 부를 다 탕진하고 말았다. 정작 원정은 수베데이와 제베 주도 하에 이루어졌고 무거운 갑옷을 입은 유럽 기사들을 상대로 몽골군은 승리한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의 초원지대를 따라 이동했다. 초원이 끝나자 몽골군도 발을 멈추었다. 전사 한 명당 말이 다섯 마리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쓸 만한 목초지가 필요했다. 숲, 강, 작물과 도랑, 산 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있는경작지에서 장애물을 헤치며 느릿느릿 나아가야 하는 경우에는 속도, 기동성, 기습 능력이라는 그들의 장점이 모두 사라졌다. 부드러운 고랑은 말에게는 불안정한 바닥이었다. 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초원지대의 건조한 기후는 해안지대의 습한 기후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습기 때문에 몽골 활의 힘과 정확성이 사라졌다. - P238


기동성 확보가 안 되고 기후 문제도 겹치면서 더 이상 몽골군은 나아가지 않았다. 또 이 때 우구데이가 사망한 탓도 있었다. 그의 사망 후 10년 동안 대칸 즉위를 둘러싼 투쟁이 이어진다. 


마침내 몽케 칸이 즉위하였고 그는 송나라와 아랍국들을 위한 정복 기반을 다진다.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뭉케 이후에도 많은 칸들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다스렸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칭기스칸의 상속자로서 대한 칭호를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다른 분파나 가문 전체가 인정한 대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뭉케 칸은 제2차 몽골 세계대전을 시작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고 그냥 제풀에 사그라졌다. - P276~277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몽골과 만주에서는 늘 문제가발생했다. 킵착칸국(황금 오르도에 세운 나라)은 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훌레구와 그의 후손이 다스리는 땅은 ‘봉신의 제국‘을 뜻하는 일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간 아랍의 지배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다시 나타나면서 근대 이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인 몽골인은 중앙의 초원지대를 차지했다. 이곳은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북쪽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가로질러 남쪽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포말했다. 이 지역은 한동안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통치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 분할되었다. - P280


3부는 현대까지의 몽골의 이야기를 담았다.


쿠빌라이 치세가 되면 기존의 몽골 체제와는 다른 체제로 꾸려진다. 그는 중국을 정복하고 통일 과업을 이루었고  온건한 법을 통해 민심을 수습했다. 또 실용주의 노선을 통해 민중이 자신이 원하는 말과 글을 쓰도록 장려하였고 힘이 아닌(과거와의 단절) 교역과 외교를 통한 제국을 추구했다. 이 때 역법, 수학, 역사, 인쇄술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계기가 되었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 P333


다만 페스트가 확산되면서 운송 체제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국제 교역은 위축되면서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자연스레 인종을 비롯한 소수자 차별과 종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후 얼마 가지 않아서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제국은 붕괴되었고 킵착 칸국만이 400여 년간 유지되었다.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었으나 몽골의 역사를 빠르게 확인하기에 좋다고 생각하여 얼마 전 책을 구입하였다. 이런 책은 절판이 안 되고 유지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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