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기 동안 계속된 식민 지배와 반식민 저항운동의 역사는 계급과 젠더 정치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해방 후 냉전 구도 속에서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진행된 남한의 민족국가 건설 과정은계급과 젠더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사회적 협상의 불안정성을 증폭시켰다. 이 같은 격동하는 정치 지형에서 노동자와 여성을사회·경제적으로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는 20세기 내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중차대한 문제였다. - P13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여명기인 1920년대초 조선인 기업가들은 적어도 수사학적으로는 노동자와 가부장적관계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고, 산업 노동자의 조직화 노력에 기꺼이동참하는 사례도 종종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민족자본가적 관점에서 - P41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조선인 기업에좋은 것이 곧 조선인에게 좋은 것‘이라는 이들의 민족자본주의적 논리는 더 나은 임금과 인간적 대우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정당성의 위기를 맞게 된다. - P42

1920년대에 서울·평양·부산의 고무공장에서는 많은 노동쟁의가 있었다.전세계적 대공황의 여파가 식민지 조선에도 밀어닥치면서 파업은 더욱 격렬하게 일어났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평양에서는 1930년의 연대 파업을 비롯해 1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서울에서는 4건, 부산에서는 3건의 고무 파업이 있었다. 1931년 평원고무 파업은 이런 파업 물결에 이어지는 것이었는데, 평양은 평원고무 파업 이후에도 그해 후반에 세 차례, 그리고 1933년 열 차례의 고무 파업을 겪었다. 1933년 이후부터는 건수가 줄어들지만, 이들 도시에서 고무 파업은 193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고무 파업들 중에서 1930년 8월에 일어난 평양 고무 노동자들의 23일간의 연대 파업은 노동자와 조선인 자본가간의 가장 큰 충돌이었다. - P49

1923년경부터 인도주의에 기반을 둔 기독교 민족주의 이념은 사회주의 활동가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 세력이 주도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친미적이고 점진주의적이며 자강 지향적인 프로그램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과 같은 일부 자강 노력이 실은 자본가계급에게만 유리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 운동이 불붙어 1920년대 중반 절정에 달했고, 이에 대응해일부 기독교 활동가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일정 부분 수용할 가능성을고려하게 되었다. 1925년 무렵 일본의 기독교사회주의자 가가와도요히코의 저작이 국내에 유통되기 시작했고, 그가 주창한 ‘애‘의 원리가 일부 기독교인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 P66

코민테른은 전 세계 노동운동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조율하기 위해 1921년 프로핀테른을 설립했고, 프로핀테른은 1927년 5월 중국 한커우에서 아시아-태평양 좌익노동조합대회를소집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범태평양노동조합(태로) 사무국이 상하이에 설치되었다. 프로핀테른과 태로 사무국은 활동가를 파견하고, 자금을 지원하고, 현장 활동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침을 발표하는 등 아시아 지역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 P83

김수진은1920, 30년대 민족주의 지식인층이 여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분석해 조선 신여성의 의미가 ‘신여자, 모던 걸, 양처‘라는 상징적 하위 범주 세 가지로 분화되었다고 말한다. ‘신여자‘는 남성 지식인의 지도 아래 아직 근대적 여성성을 갖추지못한 ‘구성‘을 계몽하는 근대적 주체로 상정되었다. ‘모던 걸‘은 식민지 조선에서 대체로 실체가 결여된 미디어적 구성물에 머물렀고, 서구화·근대화를 좇는나쁜 주체로 배치되었다. 마지막으로 ‘양처‘ 타입의 신여성은 근대적 과학 지식으로 무장한 현모양처로 근대화의 바람직한 주체로 간주되었다(김수진 2009). - P94

"여성의 교육, 경제적 자립, 성적 자율성"을 강조한 식민지 조선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빠르게 산업화되어 가는사회에서 노동문제를 다루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여성참정권 운동이나 법 개혁 요구를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식민지라는 조건 때문에 손발이 묶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더해 노동계급 여성의 조직화와 계급 혁명을 통한여성해방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강력한대안으로 떠올랐다. - P100

전반적으로 볼 때 부르주아 민족주의 언론은 동정심을 자극하는울부짖는 여성의 이미지와 적색 ‘배후‘에 대한 공포를 결합하는 데서부르주아 민족경제론에 도전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급진성을 희석할 수 있는 효과적인 공식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부장의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빈곤 여성의 이미지와 "노우처럼 돌진하는 실제 여성 투사사이의 틈새는 봉합이 쉽지 않았다. 이를 위해 민족주의 언론이 사용한서사 전략은 강주룡을 비롯한 여성 파업 지도자들을 예외적인 인물로격상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여공의 전투성이라는 불편한 현실에 눈감으며 예외적인 개인과 평범한 노동자들 사이에 안전한 거리를확보하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 P142

아나키즘 운동에서는 식민지기 내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중심으로 한 아나코-코뮤니즘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아나코-생디칼 - P161

리즘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나코-코뮤니스트와 아나코-생디칼리스트는 혁명 전략, 특히노동조합운동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입장이 달랐다. 아나코-생디칼리스트는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을 사회혁명의 기반으로 우선시했다.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은 "경제적 직접행동에 의해 사회혁명을 달성"하는 전략을 따라 민주적 구조와 생산의 자기 관리를 확립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아나코-코뮤니스트는 산업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계급투쟁에 아나키스트가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의심의눈초리로 보았다. 그들에게 노동운동은 전체 혁명운동의 여러 부문 중하나일 뿐이었다. - P162

1930년 부산의 조방 파업은 1930년대 초반 급진적 운동이 고조되는 흐름의 일부였고, 공산주의 적색 노조 운동에 영향을 받은 평양의고무 파업 등 동시대 다른 파업들과 여러 가지 성격을 공유했다. 1930년대 초 부산의 고무 노동자들도 섬유노동자들과 맞먹는 수준의 투쟁성을 보였다. 특히 1933년 10월에 25일간 지속된 연대 파업은 7개 회사고무 여공 700여 명이 오랫동안 치밀하게 파업을 계획했으며 회사가 고용한 깡패들의 잔인한 폭력, 해고, 경찰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몇주 동안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역량을 분명하게보여 주었다.[12]조방 파업과 평양 고무 파업에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 존재한다. 조방 파업 지도부의 핵심에는 1929년 11월, 남성 직공112명이 외형상 친목 단체로 출범시킨 ‘중락회‘가 있었다. 조방의여성 노동자는 대개 농촌에서 모집돼 기숙사 생활을 하는 젊은 여성들이었던 반면, 고무 노동자 중에는 좀 더 나이가 많고 기혼인 여성이 많았다. 조선인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중소기업인 평양의 고무공장들과 - P183

달리 조방이 일본인 소유의 대공장이었다는 사실도 파업 노동자에 대한 정재계의 대응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 P184

여성 노동자들은 형사와 관리자들의 눈을 피해 통신망을 조직하고 주야간 교대 근무자들에게 비밀 암호를 전파하는 등 비밀리에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파업의 시작 시점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손에는 손수건을 들고 여공이 작업장을 순회하며 알리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 무렵이면 노조 간부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해고되고 무장경찰 병력으로 포위된 공장 근처로 접근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또사복형사들은 공장 내 전략적 위치에 배치되어 노동자들을 감시하고있었다. 강일매와 경찰은 노조의 지휘 체계를 사실상 무너뜨렸기 때문에 파업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3월 12일 오전 8시, 주야근무가 교차하는 시간, 6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공장 정문으로 쏟아져 나와 경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해고된 노조 위원장이자조방 대한노총 노조의 설립자 안종우는 단 하루 만에 파업을 조직하는 어려운 임무를 "치밀하고 민첩하게 수행해 낸 이외선 등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 P209

1960년대에 노조들은 임금 인상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정부나 한국은행이 생산하거나 노조가 설문 조사를 통해 얻은일련의 통계 데이터를 회사에 대한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안에 첨부하는 것이 상례였다. 생계 부양자인 노동자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위해 현재의 임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이런 자료에는 전국 도소매 물가지수, 주요 생필품 가격, 조합원 가구(1960년대동안 평균 5~6인이었다)의 월평균 생활비에 대한 노조원 설문 조사 등이포함되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1960년대 중반 대부분의 노조들에는 남성 생계 부양자의 필요에 맞춰 임금을 책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자리 잡았고, 이는 극심한 성별 임금격차를 가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1968년 「매일경제는 독자들에게 한국의 임금체계는 "능률급"이 아니라 "생활급"이고 생활급 방식이란 "인습적으로 가정의 부양을 책임지고 있는 남성 근로자에게 보다 많은 임금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있다. - P242

급속한 도시화, 농촌인구의 대도시 유입과 함께 신흥 중산층 가정의 등장과 소비사회의 도래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낳았다. 1960년대 중반에는 ‘중산층‘이나 ‘대중‘ 같은 새로운 개념에 대한 논쟁이 처음언론에 등장한다. 보수적인 젠더 관념이 지속되는 가운데 개발 국가의경제정책과 성장 제일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돈벌이와 소비에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급격하게 변화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 약속이 계층 상승을 지향하는 중산층의 상당 부분에서 현실화되면서, 지난 수십 년간 평등을 지향하는 ‘균‘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었던 하층민에 대한 동정적 인식은 물질적 부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신분의식으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계급 차별 문화는 자신의가치와 존엄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육체노동자들의 열망과충돌하며 갈등을 낳기 시작했다. - P251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민주노조 운동을 규정하게 된 반면, 1962년 김 양의 죽음은 왜 잊혔을까? 현존하는 노동 관련 아카이브에서 ‘김 양‘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전태일과 달리 김 양은 자신의생각을 글로 남기지 않았고 두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도 상당히 달랐다.
두 자살 항거의 또 다른 두드러진 차이점은 남성 노동자 전태일이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반면, 김 양은 동료 여성노동 - P274

자들 사이에서 싸우다 그들을 위해 죽었다는 점이다. 이후 불타오른 피복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지배적인 세력을 이룬 것은 전태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남성 지식인 활동가들과 남성 동료 노동자들이었고, 여성조합원들은 적극적 참여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김 양의 죽음에 영감을받은 광주 JOC의 여성 노동자들은 자율적인 풀뿌리 운동을 발전시켰고,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성들이 합류해 활기찬 기독교 노동운동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세대의 여성 노조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 P275

여성 노조지부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2년 5월 동일방직에서다. 동일방직 주길자의 당선은 기존의 젠더 관계에 따른 노동운동의 권력 구조에 균열을 낸 사건으로 한국 노조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 당시 전국섬유노조 조합원의 83.2퍼센트가 여성이었으며, 동일방직의 경우 생산직 노동자 1383명 중 1214명이 여성이었다. - P289

노조 활동가들은 성폭력에 대한 위협과 실제 성폭력에 시달렸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부산 신발 산업 파업 노동자들의 가장우선적인 요구는 구사대 폭력 근절과 ‘구사 운동‘ 중단이었다. 이 시기신발 회사들이 사용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는 노동자들 사이에분열을 일으켜 사측이 가한 폭력을 노동자 내부 갈등의 결과로 돌리는것이었다. 공장폐쇄나 다운사이징의 위협, 또는 그와 관련한 소문은 종종 이런 노동자 간 분열로 이어졌다. 실제 공장이 문을 닫고 임금이 체불되는 사례도 점점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 P321

1980년대 초중반의 노동운동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부정적 인식 아래 이 같은 대규모 노학 연대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1970년대의 운동은 1980년대 운동 진영이 절대 따라서는 안 되는 모델로 비난 받았다. 비판의 초점은 여성 노동자들이 명백한 정치적 목표를위해 싸우는 대신 노조 강화와 현장 활동을 우선시하는 ‘경제적 조합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1970년대 기업 단위로 활동한민주노조가 하나씩 해체되어 가는 것을 가능케 한 요인으로 연대 활동부족이 큰 문제점으로 지목되었다. - P325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대표였던 이철순은 2000년대 초반의 증언에서 "보통 40대가 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당시 여성 노동자의 3퍼센트가 비정규직이었다)이 "20년, 30년 전에는 어느 공장에선가미싱을 타고, 전자 부품을 조립하던 그 여성 노동자들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정곡을 찌른다. - P332

전체 고용에서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남녀 모두에서 증가했다. 하지만 성별 분절이 극심한 한국의 노동시장 시스템에서 고용 기간이나 수당 등의 법적·제도적 보호 규정, 사회보험제공 의무, 노조 등의 부담 요인을 안고 있는 정규직 고용을 아예 없애려는 신경영전략의 공세를 가장 앞에서 마주한 것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가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해고 통지를 받았고, 남성 노조원들은 자신의일자리를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 속에서 여성 노조원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사측의 계획에 동의하는 입장을 취했다. 악명높은 초기 사례로는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일어난 일을 들 수 있는데,
1998년 비정규직화에 항의하는 파업에서 노조는 남성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여성 구내식당 노동자 144명의 희생에 동의한다. 상대적으로연배가 높은 이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자 남성 파업노동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하며 파업을 열렬히 지지한 동료들이었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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