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민의 한국전쟁 - 해외파병을 둘러싼 문제들
천자오빈 지음, 박철현 옮김 / 빨간소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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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 학계는 주로 중국공산당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정책 결정에 따른 초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 시민은 주로 수동적으로 그려져왔다. 한국 저자들이 쓴 한국전쟁 관련 책에서도 주로 중국(과 소련)은 정권 결정자 중심으로 그려져 왔는데 한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 나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시민을 전쟁의 주역으로 보고 그들의 언행에 주목한 것이 특징이다. 시기적으로는 중국이 참전을 시작한 1950년 11월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 4개월 남짓이 대상이다. 책에서는 참전한 군인들 뿐 아니라 다양한 일반 시민들의 동향(도시민, 농부, 문화예술인 등)을 담고 있는데 이는 『신화사통신』 기자들이 시민의 목소리를 수집하여 선택해 내놓은 1차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 재구성을 위해 중국 각지에서 얻은 자료를 조사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전쟁이 발발하자 베이징 시민들은 노조, 협회, 보습학교, 공산당위원회와 파출소, 세무소 등 다양한 전쟁 관련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했고 3차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이 경제에 다시 악수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전쟁 초기에는 대체로 3차 세계대전의 발발 여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대학생들의 진로 선택 문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푸단대학 4년생인 구제강의 조카딸 가오루이란은 진로 고민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나 삼촌을 돌보기 위해 본가에 가까운 곳에서 취업하기를 바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졸업 뒤 진로 결정에 큰 영향력을 가진 대학의 공산주의청년단이 그녀를 토지개혁 운동에 보내려 했지만, 가오루이란은 지주들의 거센 저항으로 신변이 위협받을까 주저했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으면 조선과 가까운 "둥베이 지역으로 가든가" 타이완 진공 작전을 담당하는 "제3야전군에 입대해야 한다. 모두 거절하고 싶지만, 그러면 장래는 없다"라는 딜레마에 빠졌다(P51). 기본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전쟁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시민들은 국공내전이 종결되면서 이제 겨우 평화를 얻었는데 또 다시 전쟁이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유지 등 기반이 있는 사람일수록 전쟁이 확대되면 지금의 지역을 떠나 시골로 피난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좌절했다. 둥베이 지역 사람들 같은 경우는 만주 사변 때 관동군의 폭격을 받은 경험이, 시난의 충칭 사람들의 경우도 충칭 폭격의 경험이 있어 폭격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어땠을까. 우선 1950년 당시 "지식분자"의 정의부터 보자. 1947년 3월에 수신청 등이 책임 편집한 《사해》(중화서국 출판)에서는 "지식분자"를 "광의로는 흔히 교육을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협의로는 고등교육을 받고 지식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 즉 정신적 노동계급인 사람을 가리킨다. ... 그러나 1949년 혁명을 기점으로 지식분자의 정의가 바뀌었다. 같은 해 10월 《신명사사전》에서 "지식분자"를 "흔히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그 10배에 해당하는 지면을 마오쩌둥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완전한 지식이라는 논의에 할애했다. 동시에 "반지식분자" 항목은 대학을 졸업하고 이론에 치우쳐 실천 지식을 갖지 않는 이를 가리켰다(P85~86). 지식인들은 정치 스펙트럼에 따라 붉은색에서 초록색까지, 나라를 위한 적극 참여에서 가벼운 관여, 미루기, 불관여,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주커전은 미핵 공격 가능성에 주목했다. 중국의 조선 참전이 공식화된 11월 중순이 되자 방사능 피해를 우려했다. 그러면서 중국 과학 내부의 후진성을 비판하고 더 나은 학문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주장했다. 한편 이때 교회 관계자나 기독 학교 교원 측에서는 친미 감정이 강했기에 교원과 학생 간 갈등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무거운 세금에 경영이 악화되자 도산 위기에 처한 상점들이 많아졌다. 이는 연구 환경에도 악영향을 주어 대학 등은 경영 압박을 받는 사례가 속출했다. 


상공업이 발달한 톈진, 상하이, 홍콩 지구는 어떤 모습이었나. 톈진과 상하이는 당시 중국 내 공장 수 1, 2위를 다투는 곳이었고 홍콩은 중국인들의 자본이 많이 진출한 장소였다. 이곳의 상공업자들은 원료가 부족해지고 조세 부담이 증가하며 무역이 단절되는 등 경제 여건의 악화가 우려되는 상황을 예견했다. 대체적으로는 정권을 불신하여 살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겼다. 따라서 예금을 인출하겠다며 대거 소동이 벌어졌고 암금융시장의 이자율이 급증하였으며 통제 물품을 사재기하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톈진 상공업자들이 공산당과 가까웠다면 상하이 상공업자들은 국민당과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이는 북양 정부 시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따라서 상하이 상공업자들이 더 정권의 정책에 회의적이었다.

노동자, 농가는 해외 파병, 후방 지원에 투입되었다. 이중 농민은 대체로 평화를 선호하고 전쟁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공산당의 선전과 교육이 잘 먹혀 들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일부 농민은 정권이 교체될지도 모른다며 토지개혁으로 얻은 땅을 처분하는 이들도 있었다(특히 한반도와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 그랬다고 한다). 후방 지원은 한반도와 인접한 둥베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기술직을 제외한 단순 작업에는 대부분 농민들이 투입되었다. 이중 토지개혁에 불만이 있었던 농민들일수록 후방지원에 회의적이었다. 


전쟁에 참전한 장병들 중 해방된지 얼마 안 된 지역에서 새로 입대한 이들의 경우 친미 감정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중일전쟁 때 대일협력군이나 국공내전 중 국민당군에서 귀순한 경우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파병에 소극적이었다고. 대다수의 장병들은 앞선 전쟁이 끝나고 이제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며 참전하기를 꺼렸다. 19병단에 조선 출동 명령이 내려진 것은 10월 초였다. 하지만 이미 8월 중순에 이 병단을 제13병단의 후속 부대로 가을 수확 뒤 산둥성과 허난성에 배치한다는 계획이 군 상층부에서 비밀리에 논의되고 있었다. 이 병단의 장병들은 조선에서의 전황에 다라 자신의 복원이 갑자기 중단될 수 있다고 직감했던 것 같다. 실제로 제13병단은 7월 중순에 복원 절차를 중지하고 복원 예정인 인원을 군에 붙잡아 두었다. 당시 장병들의 또 다른 관심사는 결혼 문제였다. 실제로 19병단의 복원 예정자들은 정치 학습 과정에서 1950년 5월 1일에 공포된 중화인민공화국혼인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혼인법 제19조는 인민해방군 "군인이 본 법률의 공포일로부터 기산해 가정과 2년간 소식 왕래가 없고 그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면 이혼을 허가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P302). 

장병의 사기는 승전과 패전에 따라 정반대로 갈린다 인민지원군 장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흥리 전투에서 이긴 부대에서는 "적이 패퇴한 사실을 듣고, 들판에 쓰러져 있는 적의 시체를 보고, 승리와 그 의미에 대한 선전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적극적으로 전투를 요구하면서, 일전을 벌이기도 전에 조선은 해방될 것이고 미군은 역시 약해서 국민당군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순조롭지 않고 사상자가 많은 부대에서는 "'미중 공멸'이나 '수지가 맞지 않는 전쟁이다', '승리의 구호는 들려오지만 그림자는 없지 않은가'"라는 얘기가 나왔다 "비행기나 포병을 보내 공동으로 작전하지 않은 것이나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시작한 것을 원망했고, 심지어 마오 주석까지 원망했다"(P328). 


중국 참전 후 전세가 전환되고 나자 시민들은 달라진 반응을 보인다. 평양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시장은 안정을 되잦았고 이전과는 달리 "해볼만하다!"며 적극적인 태도로 변한다. 1950년 12월 20일에 청간위안과 동급생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실린 수송학교 배정 비준 명단이 학교 게시판에 게시됐다. "군복을 입고 혁명의 전사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라고 느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다음 과제는 입대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가족의 반대를 넘는 일이었다 청간위안의 아버지는 국민정부 시절 난징시 교육국의 관료이자 중양대학 교육학부 교수 및 교무주임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에는 안후이성의 한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군사학교 지원 의사에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아 천박한 지식밖에 없는 사람이 '혁명'이라는 공론을 떠들어봤자 소용 없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청간위안은 더 이상 설득한 더 이상 설득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모집사무소에서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지 않도록 16세라고 신고해 입대 수속을 밟았다. 외아들이 작별 인사도 없이 입대한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들을 되찾기 위해 대학 시절 동급생이자 화둥구 당위원회 서기였던 커칭스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이 학업을 이어가도록 설득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자녀의 혁명 참여를 지지하라는 훈계뿐이었다(P474). 그러나 타이완과 가까운 지역이었던 푸저우나 칭다오는 국민당군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경제 제재는 계속 되어 물자 부족으로 인한 피해는 여전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 참전을 '미 제국주의의 불법적 북한 침공에 대항해 북한을 도운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한 종래의 지배적인 '국가 서사'에 대한 도전이자, 한국전쟁 참전과 건국 초기 중국의 국가 건설을 바라보는 기존 연구의 '위로부터의 시각'에 대한 도전이다. - P495


다만 책에 실린 다양한 사례는 모본이기에 실제 전쟁의 양상을 담고 있다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주목하지 않은 목소리(와 그에 따른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중국군의 파병이 결정되기까지의 과정, 그 이후의 양상을 시민의 목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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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꺼번에 모든 것이 됨으로써 동시성을 관통한다.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성, 우리의 외로움과 우리의 사회, 대담한 야망과 맹목적인 희망, 보답 받지 못한사랑과 부분적으로나마 보답 받은 사랑이다. 수평과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삶은 비선형적인 방식으로만 파악되며 "전기 biography"라는 직선의 그래프가 아닌 여러 측면과 여러 빛을 지닌 그림으로 나타난다. 삶이란 다른 삶 - P16

과 얽힐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의 직물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만 인생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답을 구할 수 있다. - P17

우리의 습관, 신념, 사상은 살아가는 동안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다.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사회적 환경 또한 변화한다. 우리 몸의 세포 또한 대부분 교체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으로 남는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은 과학의 발견을 통해조금씩 변화한다. 그 현실은 우리에게 오직 조각으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이해하고 분석하는 조각이 늘어날수록 그 조각으로 만든 모자이크는 한층 더 현실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모자이크, 현실의 대리일 뿐이다. 아름다울지언정 완벽하지 않고 완성되지 않은 상태, 끝없이 변화해야 하는 대상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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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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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도로 위에 있게 될 거야.˝ 10년 간 가지 못한,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 팔레스타인에서 요르단으로, 이라크에서 쿠웨이트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이 밀입국을 위해 길을 내딛는다. 이를 비롯해 여러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의 군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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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7-30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이라는 책도 나와서 관심이 가던데 이런 책도 나왔군요. 화가님 서재는 좋은 책이 보고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6-07-31 16:24   좋아요 0 | URL
2023년 이후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간 상황은 지지부진한데… 최근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이 중동으로 번지고 있는 것도 영향인 걸까요. 여기 저기 전쟁이 그치질 않으니 참 마음이 무겁습니다. 바람돌이 님께도 좋은 책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압록강은 흐른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
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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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2022년 '독립운동열전' 책에 언급된 덕분이었다. 확인해보니 2000년에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었고, 2010년에도 나왔으나 절판되었다. 내가 구입하려 했을 때는 이미 소설을 구할 수 없어서 아쉬워하던 찰나였다. 그러다 이번에 민음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 


과거 식민지 조선에서 1919년 3월 만세 운동이 벌어졌을 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사상 불온 등을 이유로 옥고를 겪었다. 한편으론 혐의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이 땅을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이미륵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여러 편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어린 시절부터 겪은 자신의 일상을 담담히 풀어내며 간접적으로 조선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시기가 참 교묘하다. 아주 어릴 때는 대한제국 시기를 겪었고 기억이 날 무렵에는 조국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이미륵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한학을 공부하며 여러 경전을 두루 읽었고 나중에는 서당에서 훈장님으로부터 심화 학습을 거쳤다. 아버지에 의해서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그는 그것을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11살이 되었을 때 그가 이미 중용과 맹자를 읽은 터였던 만큼 아버지는 한문 고전 공부는 그만하면 되었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는 신식 학교에서 서양 교육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기차를 만드는 방법, 달까지 거리를 추정하는 방법, 전력을 만드는 방법 등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시간도 얼마 가지는 못했다.


어느 샌가 시내에는 일본군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민가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마을은 흉흉했다. 곧 전쟁이 일어난다고도 하고 세계가 멸망한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우리의 임금님이 물러나셨다.” 왕의 옥새가 찍힌 고지문이 방에 붙어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었다는 왕의 편지가 이렇게 허망한 글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런데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고지문이 국권피탈 소식임을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 같긴 하다. 이미륵은 얼마 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게 되기도 했다. 


일제의 통치는 조선에 여러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911년이 되면 일제에 의해 새 교육령이 발표된 후 서당 교육은 구교육으로 치부되었고 신교육인 서양의 수학, 과학 교육 등을 배워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게다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아야 했으니 일본어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실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에게는 수학, 물리, 화학 등 모든 것이 명백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의 괴로움을 알고 신식 학교를 그만두라 이야기한다. 그는 한동안 농부의 집에서 지내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가출을 감행했던 적도 있다.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려 했던 것이다. 물론 후회하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방황을 끝내고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하면서 대학 입학 시험 준비를 위해 독학하며 열심히 매진한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지나간 일에 너무 괘념하지 말아라! 새로운 문화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고… 네가 그들로부터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마당이니, 네 온화한 성격을 늘 유지하고 그들의 거친 태도를 아울러 참아내도록 해라.” 그는 때늦은 공부에 열등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런 위로와 응원은 그에게 지지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 되었다. 경성의전은 당시 조선 최고 교육기관들 중 하나로 조선을 여행하는 사람은 그 학교를 방문할 정도로 유명했다. 다만 강의와 실습을 선택할 수 없는 등 여러 모로 규율이 강해서 학교라기보다는 군대 같았다고 한다. 


여섯째 학기가 지나고 있을 때 그는 친구로부터 시위 소식을 듣게 된다. 정부 직속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만큼 그는 가능한 정치적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친구는 민족과 관련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참여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야기한다. 고민하던 그는 친구와 같은 길을 가겠다 결심하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이 소식은 후에 어머니께도 알려진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불안해한다. 실제로 얼마 후 사태는 심상치 않게 전개되었다. 일제의 검거 작전이 시행되자 어머니는 어느 날 그에게 짐을 싸고 빨리 떠나라는 지령을 내린다. “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넌 네 갈길을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어. 나는 너를 신뢰한다. 부디 용기를 내렴!” 그때 이미륵은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면서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후회했다고 고백한다.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학교를 다니며 조선에 남아 어머니와 살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부랴부랴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책의 제목이자 소제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짐작하겠지만 이 내용은 그가 압록강을 건넌 뒤 어느 곳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읊는 감상이다. 

아득한 옛날 이래로 이 끝없는 만주 땅으로부터 내 고향을 분리하고 있는 그 국경의 강은 막을 길 없이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쪽은 모든 것이 크고 어둠침침하고 진지했고, 저 건너편은 모든 것이 작고 쾌활했다. 짚으로 지붕을 이은 밝은 집들이 언덕들 곁에 흩어져 있었다. 여러 굴뚝에서는 벌써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멀리 밝은 가을 하늘 아래에 한 무리의 연산들이 다른 연산들로 연이어지고 있었다. 산들은 석양을 받아 빛났고, 어스름 속에서 다시 한번 활짝 빛을 발했다가는 푸른 연무 속으로 서서히 잠겨 들었다. 나는 멀리 남쪽에서 골짜기들과 여울들을 거느린 수양산을 본 것 같았고, 어릴 적 매일 저녁 그 위에 앉아 저녁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하던 삼층 석탑도 내 두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나는 남쪽으로부터 바람처럼 날아온 것에 틀림없는 그 천상의 소리를 두 귀로 약여하게 듣는 듯했다. 압록강은 그칠 줄 모르고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P189~190). 

읽는 내내 정말이지 짠했다. 이 모습을 보며 발길이 제대로 떨어졌을지. 


이후 그는 기차를 타고 심양(묵덴)을 거쳐 산해관으로, 이후 난징까지 곧장 이동했다. 그리고는 상해에 도착해서 유학생을 대상으로 상담하는 조선인을 찾아간다. 망명을 위해서는 중국 여권이 필요했는데 여권이 나오기까지의 기다림은 지난했다. 이미륵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조선 학생들이 망명을 위해 같은 절차를 밟았던 것 같다.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기다림은 까마득하지 않았을까. 마침내 1920년 초가 되어 여권을 구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거대한 증기선을 타고 세계 곳곳을 돌며 마침내 그는 독일 땅에 닿았다.


한때 유럽을 가고 싶어 기차를 타고 싶어했지만 완전히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삶을 정착해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생활이 좀 정리되자 매일 그는 고향에서 돌아온 소식을 살펴보기 위해 우체국에 들르기를 수개월 동안 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소식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제대로 이별하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떠난 길이 마지막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런 삶을 경험했을까 싶어 마음이 먹먹하다. 


이미륵은 독일에 정착해서도 세계피압박 반제국주의의회에 유일하게 한국 대표로 참가할 정도로 조국을 위한 일을 놓지 않았다. 아무튼 마침내 읽고 싶었던 소설을 읽고 나니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론 여러 소회가 든다. 읽고 싶으셨던 분들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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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7-30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리뷰에서 이미륵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이 쫘악 펼쳐지는거 좋네요.

거리의화가 2026-07-31 16:20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소설 이미륵이 한국에 떠나기까지 인생을 담아놨더라구요. 참 좋았습니다.

책읽는나무 2026-07-3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화가 님도 압록강 책을 읽으셨군요?
저는 이번에 이미륵이란 작가도 처음 접했어요. 기회가 되면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6-07-31 16:22   좋아요 0 | URL
나무 님도 왠지 좋아하실 것 같은 소설이에요. 한국에서의 이미륵의 삶을 엿볼 수 있더라구요.

건수하 2026-08-0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에 가기 까지의 과정도 흥미롭고, 1920-30년대 독일 이민자의 삶도 녹록치 않았을 것 같네요.. 독일에 간 뒤 부분도 궁금해집니다.

거리의화가 2026-08-06 11:00   좋아요 1 | URL
흥미롭죠^^ 이 책은 이미륵이 독일에 가기까지의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독일 정착 이후의 행적은 학위를 딴 것 말고는 1927년 반제국주의 대회에 참여한 것 이외에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어 아쉬워요.

건수하 2026-08-06 11:29   좋아요 0 | URL
아, 그 부분이 없다니 정말 아쉽네요. 물론 앞부분만으로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지만요 ^^
 

"내가 눈을 다시 뜨게 된 것은순전히 네 효도에 감응한 것이다. 내가 정말 복이 많아서이런 효자를 낳았구나."
순은 아버지 말씀을 듣고 극구 사양했지만 마음만은기쁘기 짝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 순은 다시 아버지의 눈을 여러 번 핥아주었다. 그러자고수의 눈을 막고 있던 것이 완전히 사라져 눈이 깨끗이 나았다.
순은 요임금이 오래 기다릴까봐 부모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수산으로 향했다. 그때쯤 아들이 눈을 핥아주어 고수가 다시 눈 뜨게 된 일이 각지에 알려졌다. 순의 효심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순이 수산에 도착했을 때 마침 요임금 일행도 남쪽에서수산으로 왔다. 원래 요임금은 순의 집에서 나와 수산을 지나 하수와 낙수가로 갔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으로부터 고수가 시력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쁨을 금치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전에 고수에게 위로 삼아 두 눈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렇듯 곧 효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중화의 효성이 하늘을 움직여 효험을 보게 되었구나! - P326

오늘날 우리가 보면 무당은 신과 귀로 분장하고 사람들 대신 기도하는 사람이다. 사실 무술은 인류 문명이 일정 단계에 이른 뒤에 생겨난다. 무술이 생기는 원인은여러 가지고, 사회에 대한 기능도 다양하며 유익한 점도 있다. 한마디로 무사는최초로 머리를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그들의 행위에는 과학적인측면(약초를 캐고 의술을 행하며 별자리를 관측하는 일 등)도 있고 비과학적인측면(용춤을 추며 비를 구하고 주술로 재앙을 없애는 등)도 있다. 민중을 위해 일한 측면(생활 상식과 역사를 전수하고 문화를 전파하는 등)도 있지만 사람들을 제압하고 압박하는 측면(무사와 수령이 짜고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꾀하는 등)도 있었다. 영산 십무 중에 무함은 수석 무사다. 그들의 명칭으로 볼 때 무즉은 천둥치고 바람을 불게 한다. 무반은 무술의식중에 기구를 관리하거나 재물을 분배하는 일을 맡는다. 무팽은 몸집이 컸거나장수하는 선술을 깨친 자이다. 무고는 여성이었을 것이다. 무진은 신선이 되어 승천하는 능력이 있었고 무례는 무술의식을 기획했다. 무저는 의식의 안전을 책임졌으며 무사는 공적인 관계를 담당했다. 또 무라는 사람들을 소집하는 일을 맡았다. - P354

인생레 얼마나 많은 일들이 가정을 지키느라 희생되는지, 인생에 얼마나 많은 책임이 가정으로 인해 더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정의 맛은 처음에는 달지만 나중에는 쓰고, 부부의 맛은 처음에는 진하지만 나중에는 옅어지지요. 만약에 남녀의 구분이 없다면 부부관계도 없고 모든 근심이나 알력이나 고통도 전부 사라지니 어찌 오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이를 낳지 못해서 대가 끊기는 것이 걱정일 따름이오. 이제 우리는 혁명을 해서 이전의구법을 모두 없애고 우리 방법으로 바꾸려 하오. 아이를 낳는 일 또한 남녀가 결합할 필요 없이 혼자서 할 수 있소. 우리가 여러 번 해봐서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단 말이오. 천상에 여기씨(歧氏)라는 여신이 계시오. 그분은 남편 없이 아들 아홉을 낳았으니, 바로 우리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표본이라 할 수 있소. 우리는 여기씨를 초대해서 이 방법을 하계에 전파하려고 여자국을 세웠고, 고심 끝에 왕맹을 고립시켜 남자들이 애를 낳고 기를 수 있도록 장부국을 세워 긴 세월이 흘러 효과를 보았지요. - P355

황제는 헌원대에서 단약을 만들 때 산처럼 쌓아둔 땔나무 더미를 먼저 불태웠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모자라 점점 단약을만드는 누대 근처 나무들이 전부 땔나무로 사용되었다. 그래도 부족하자 황제는자신의 다리를 쭉 뻗어 불로 뛰어들어 스스로 땔나무가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사방에 금빛이 번쩍이면서 선단(仙丹)이 완성되었다. - P357

28숙은 ‘28사‘ 혹은 ‘28성(星)‘이라고도 한다. 황도와 적도 부근에 분포하면서 하늘의 28개 별을 일주한다. 중국 고대에 해와 달이 하늘에서 운행하는 것과 다른천문 현상을 예측하는 상대 지표를 선별하였다. 사방과 4가지 동물 이미지를 배합한 것이 ‘사상(四象)‘이다. 28숙은 북두칠성이 가리키는 뿔별을 기점으로 서에서 동으로 배열했는데 그 명칭과 사상의관계는 다음과 같다. 동방 청룡은 각(角), 항(亢), 저(氏), 방(房), 심(心), 미(尾), 기가 있다. 북방 현무는 두(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실(室), 벽(壁)이있다. 서방 백호는 규(奎), 누(婁), 위(胃), 묘(昴), 필(畢), 자, 삼(參)이다. 남방주작은 정(井), 귀(鬼), 유(柳), 성(星), 장(張), 익, 진(軫) 등이다. 28숙과 삼원(三垣)이 함께 수당(隋唐) 이후 천구(天區)를 가르는 표준이 되었다. - P398

이 아비가 수십년 수리사업을 하면서 스스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이한낱 종이에 그려본 헛된 이야기가 아니라 상당히 정확하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정작 실행에 옮겼더니 도처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결국에는 엄청난실수를 저지르게 되었구나! 더 큰 잘못이라면 상제(上帝)의 양을훔친 것이 나 혼자만의 비밀인 줄 알았으며, 식양을 사용해서 공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혹시 상제께서 내가 식양을 훔친 것을 노여워하시어 이런 벌을 내리시는 것일까?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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