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민의 한국전쟁 - 해외파병을 둘러싼 문제들
천자오빈 지음, 박철현 옮김 / 빨간소금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 학계는 주로 중국공산당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정책 결정에 따른 초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 시민은 주로 수동적으로 그려져왔다. 한국 저자들이 쓴 한국전쟁 관련 책에서도 주로 중국(과 소련)은 정권 결정자 중심으로 그려져 왔는데 한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 나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시민을 전쟁의 주역으로 보고 그들의 언행에 주목한 것이 특징이다. 시기적으로는 중국이 참전을 시작한 1950년 11월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 4개월 남짓이 대상이다. 책에서는 참전한 군인들 뿐 아니라 다양한 일반 시민들의 동향(도시민, 농부, 문화예술인 등)을 담고 있는데 이는 『신화사통신』 기자들이 시민의 목소리를 수집하여 선택해 내놓은 1차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 재구성을 위해 중국 각지에서 얻은 자료를 조사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전쟁이 발발하자 베이징 시민들은 노조, 협회, 보습학교, 공산당위원회와 파출소, 세무소 등 다양한 전쟁 관련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했고 3차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이 경제에 다시 악수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전쟁 초기에는 대체로 3차 세계대전의 발발 여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대학생들의 진로 선택 문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푸단대학 4년생인 구제강의 조카딸 가오루이란은 진로 고민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나 삼촌을 돌보기 위해 본가에 가까운 곳에서 취업하기를 바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졸업 뒤 진로 결정에 큰 영향력을 가진 대학의 공산주의청년단이 그녀를 토지개혁 운동에 보내려 했지만, 가오루이란은 지주들의 거센 저항으로 신변이 위협받을까 주저했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으면 조선과 가까운 "둥베이 지역으로 가든가" 타이완 진공 작전을 담당하는 "제3야전군에 입대해야 한다. 모두 거절하고 싶지만, 그러면 장래는 없다"라는 딜레마에 빠졌다(P51). 기본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전쟁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시민들은 국공내전이 종결되면서 이제 겨우 평화를 얻었는데 또 다시 전쟁이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유지 등 기반이 있는 사람일수록 전쟁이 확대되면 지금의 지역을 떠나 시골로 피난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좌절했다. 둥베이 지역 사람들 같은 경우는 만주 사변 때 관동군의 폭격을 받은 경험이, 시난의 충칭 사람들의 경우도 충칭 폭격의 경험이 있어 폭격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어땠을까. 우선 1950년 당시 "지식분자"의 정의부터 보자. 1947년 3월에 수신청 등이 책임 편집한 《사해》(중화서국 출판)에서는 "지식분자"를 "광의로는 흔히 교육을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협의로는 고등교육을 받고 지식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 즉 정신적 노동계급인 사람을 가리킨다. ... 그러나 1949년 혁명을 기점으로 지식분자의 정의가 바뀌었다. 같은 해 10월 《신명사사전》에서 "지식분자"를 "흔히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그 10배에 해당하는 지면을 마오쩌둥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완전한 지식이라는 논의에 할애했다. 동시에 "반지식분자" 항목은 대학을 졸업하고 이론에 치우쳐 실천 지식을 갖지 않는 이를 가리켰다(P85~86). 지식인들은 정치 스펙트럼에 따라 붉은색에서 초록색까지, 나라를 위한 적극 참여에서 가벼운 관여, 미루기, 불관여,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주커전은 미핵 공격 가능성에 주목했다. 중국의 조선 참전이 공식화된 11월 중순이 되자 방사능 피해를 우려했다. 그러면서 중국 과학 내부의 후진성을 비판하고 더 나은 학문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주장했다. 한편 이때 교회 관계자나 기독 학교 교원 측에서는 친미 감정이 강했기에 교원과 학생 간 갈등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무거운 세금에 경영이 악화되자 도산 위기에 처한 상점들이 많아졌다. 이는 연구 환경에도 악영향을 주어 대학 등은 경영 압박을 받는 사례가 속출했다. 


상공업이 발달한 톈진, 상하이, 홍콩 지구는 어떤 모습이었나. 톈진과 상하이는 당시 중국 내 공장 수 1, 2위를 다투는 곳이었고 홍콩은 중국인들의 자본이 많이 진출한 장소였다. 이곳의 상공업자들은 원료가 부족해지고 조세 부담이 증가하며 무역이 단절되는 등 경제 여건의 악화가 우려되는 상황을 예견했다. 대체적으로는 정권을 불신하여 살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겼다. 따라서 예금을 인출하겠다며 대거 소동이 벌어졌고 암금융시장의 이자율이 급증하였으며 통제 물품을 사재기하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톈진 상공업자들이 공산당과 가까웠다면 상하이 상공업자들은 국민당과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이는 북양 정부 시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따라서 상하이 상공업자들이 더 정권의 정책에 회의적이었다.

노동자, 농가는 해외 파병, 후방 지원에 투입되었다. 이중 농민은 대체로 평화를 선호하고 전쟁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공산당의 선전과 교육이 잘 먹혀 들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일부 농민은 정권이 교체될지도 모른다며 토지개혁으로 얻은 땅을 처분하는 이들도 있었다(특히 한반도와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 그랬다고 한다). 후방 지원은 한반도와 인접한 둥베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기술직을 제외한 단순 작업에는 대부분 농민들이 투입되었다. 이중 토지개혁에 불만이 있었던 농민들일수록 후방지원에 회의적이었다. 


전쟁에 참전한 장병들 중 해방된지 얼마 안 된 지역에서 새로 입대한 이들의 경우 친미 감정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중일전쟁 때 대일협력군이나 국공내전 중 국민당군에서 귀순한 경우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파병에 소극적이었다고. 대다수의 장병들은 앞선 전쟁이 끝나고 이제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며 참전하기를 꺼렸다. 19병단에 조선 출동 명령이 내려진 것은 10월 초였다. 하지만 이미 8월 중순에 이 병단을 제13병단의 후속 부대로 가을 수확 뒤 산둥성과 허난성에 배치한다는 계획이 군 상층부에서 비밀리에 논의되고 있었다. 이 병단의 장병들은 조선에서의 전황에 다라 자신의 복원이 갑자기 중단될 수 있다고 직감했던 것 같다. 실제로 제13병단은 7월 중순에 복원 절차를 중지하고 복원 예정인 인원을 군에 붙잡아 두었다. 당시 장병들의 또 다른 관심사는 결혼 문제였다. 실제로 19병단의 복원 예정자들은 정치 학습 과정에서 1950년 5월 1일에 공포된 중화인민공화국혼인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혼인법 제19조는 인민해방군 "군인이 본 법률의 공포일로부터 기산해 가정과 2년간 소식 왕래가 없고 그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면 이혼을 허가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P302). 

장병의 사기는 승전과 패전에 따라 정반대로 갈린다 인민지원군 장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흥리 전투에서 이긴 부대에서는 "적이 패퇴한 사실을 듣고, 들판에 쓰러져 있는 적의 시체를 보고, 승리와 그 의미에 대한 선전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적극적으로 전투를 요구하면서, 일전을 벌이기도 전에 조선은 해방될 것이고 미군은 역시 약해서 국민당군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순조롭지 않고 사상자가 많은 부대에서는 "'미중 공멸'이나 '수지가 맞지 않는 전쟁이다', '승리의 구호는 들려오지만 그림자는 없지 않은가'"라는 얘기가 나왔다 "비행기나 포병을 보내 공동으로 작전하지 않은 것이나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시작한 것을 원망했고, 심지어 마오 주석까지 원망했다"(P328). 


중국 참전 후 전세가 전환되고 나자 시민들은 달라진 반응을 보인다. 평양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시장은 안정을 되잦았고 이전과는 달리 "해볼만하다!"며 적극적인 태도로 변한다. 1950년 12월 20일에 청간위안과 동급생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실린 수송학교 배정 비준 명단이 학교 게시판에 게시됐다. "군복을 입고 혁명의 전사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라고 느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다음 과제는 입대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가족의 반대를 넘는 일이었다 청간위안의 아버지는 국민정부 시절 난징시 교육국의 관료이자 중양대학 교육학부 교수 및 교무주임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에는 안후이성의 한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군사학교 지원 의사에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아 천박한 지식밖에 없는 사람이 '혁명'이라는 공론을 떠들어봤자 소용 없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청간위안은 더 이상 설득한 더 이상 설득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모집사무소에서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지 않도록 16세라고 신고해 입대 수속을 밟았다. 외아들이 작별 인사도 없이 입대한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들을 되찾기 위해 대학 시절 동급생이자 화둥구 당위원회 서기였던 커칭스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이 학업을 이어가도록 설득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자녀의 혁명 참여를 지지하라는 훈계뿐이었다(P474). 그러나 타이완과 가까운 지역이었던 푸저우나 칭다오는 국민당군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경제 제재는 계속 되어 물자 부족으로 인한 피해는 여전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 참전을 '미 제국주의의 불법적 북한 침공에 대항해 북한을 도운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한 종래의 지배적인 '국가 서사'에 대한 도전이자, 한국전쟁 참전과 건국 초기 중국의 국가 건설을 바라보는 기존 연구의 '위로부터의 시각'에 대한 도전이다. - P495


다만 책에 실린 다양한 사례는 모본이기에 실제 전쟁의 양상을 담고 있다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주목하지 않은 목소리(와 그에 따른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중국군의 파병이 결정되기까지의 과정, 그 이후의 양상을 시민의 목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