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와 전기 묵가

1. 묵자에 관한 고증
2. 「경」, 「경설」, 「대취」, 「소취」 6편의 시대
3. 조직단체로서의 묵학도
4. 공리주의의 묵자 철학
5. 무엇이 인민의 큰 이익인가?
6. 겸애
7. 종교적 제재
8. 정치적 제재

오늘날에도 겸애의 정신은 곱씹어볼만한 지점이 많다.

구설(舊說)은 묵자의 성은 묵(墨), 이름은 적(翟)이라고 했다. 근래에 이르러 "고대에 이른바 묵(墨)은 성씨가 아니라 학술에 대한지칭이었다"고도 하고, 또 묵이란 고대 형벌의 하나로서 그 형을받은 무리 즉 노역하는 부류였다고도 한다. 묵자의 절용(節用), 단상(短喪 : 복상기간의 단축), 비악(非樂 : 음악 반대) 등의 견해는 모두 극단적이어서, 당시의 대부나 군자들의 생활양식(行事)과는 상반되었고, 그의 생활은 검소하여 노동자와 한가지였다. 따라서 그의 학설을 추종하는 이들을 당시에 묵자(墨者)라고 일컬은 것은 형을 받은 무리로서 노역하는 부류라는 뜻일 뿐이었다. - P133

묵자는 귀족을 반대했고 나아가 귀족이 의지하고 있는 주제(周制:주의 문물제도)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의 학설은 주제를 반대한 주장이 많은데, 주제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유가가 주(周)를본받을 것을 제창했기 때문에, 묵자는 자신의 학설은 하(夏)를 본받는다고 주장하여 유가에 맞섰다. - P134

『묵자』내의「경(經)」[상·하] 및「경설(經說)」[상·하] 등의 편은전국시대 후기 묵학도(墨者:墨子의 추종자)의 저작이다. 전국시대후기는 유학(遊學)의 풍토가 극성하여 암송 및 학습용 죽간(책)을간단하고 암기하기 쉽도록 만들 필요가 있어서 각 학파마다 "경(經)"을 제작했다. - P135

첫째, 묵자의 비공(非攻)은 본래 모든 공격전쟁을 반대하는 것이고, 겸애의 주장은 본래 모든 나라를 다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폭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음에도, 묵자가 공격당하는 국가를 실제로 구제하고 보호한 경우는 다만 이 경우만 전해지니, 이 역시 아마도 묵자가 송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둘째, 묵학도는 하나의 조직단체였기 때문에 송을 구제하는 거사에 조직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 P136

묵자의 제자들은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등의 행동을 할 때 모두 묵자의 지휘를 받았다. 제자가 벼슬에 나아간후, 만약 섬기는 군주로 하여금 묵가의 진언을 실행하게 하지 못할경우 스스로 사직해야 했는데, 고석자의 경우가 그것이다. 만약 제자가 벼슬에 나아가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면 묵자는 해당 군주에게 "주청하여" "퇴임시키도록 했는데", 승작의 경우가 그것이다. 제자들은 벼슬로 인해서 얻는 수입은 나누어 묵학도의 소용으로 제공해야 했는데, 경주자의 경우가 그것이다. - P138

상검(尙儉) 및 절용(節用)과 겸애(兼愛) 및 비공(非攻)은 비록 그당시에 원래 있던 주장이었지만, 묵자는 그것을 실행했을 뿐더러이론적 근거를 부여하여 일관된 체계를 세웠다. 이것이 묵자의 철학적 공헌이다. - P141

"공(功 : 성과)"과 "이(利 : 이익)"는 곧 묵가 철학의 근본 관념이다. - P143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은 바로 묵자가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표준이다. 모든 사물은 반드시 쓸모가 있고, 주장(言論 : 학설)은 반드시 행할 수 있어야만 가치가 있게 된다. - P144

모든 사물은 반드시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에 부합해야 비로소가치가 있다.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은 바로 인민의 "부(富)"와
"인구증가(庶)"를 말한다. - P145

묵자는 결코 "재화의 소비"를 반대한 것이 아니고, 다만 "인민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 재화의 소비"를 금해야 한다고 했을 뿐이다. - P148

일등 선비의 치상(操喪:治喪)은 필히 부축을 받아야만 일어설 수 있고 지팡이를 짚어야만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상태로 3년을 계속한다. 그들의 주장을 본받고 그런 도를 실천하는 일을, 왕공대인(王公大人)이 행한다면 반드시 아침 일찍 조회할 수 없을 것이고, 농부가 행한다면 반드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농사일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각종 공인들이 행한다면 반드시 배나 수레 또는 그릇 등을 만들 수 없을 것이고, 부녀자들이 행한다면 반드시 숙흥야매(風興夜寐) 실을 잣고 베를 짤 수는 없을 것이다. 후장(厚葬:후사이[ 한 장례)은 애써 벌은 재물을 매장하는 짓이요, 구상(久喪 : 오랜 치상)은 오래도록 생업에의 종사를 방해하는 짓이다. - P148

현재 대국이 소국을 공략하고, 대가(大家)가 소가(小家)를 침벌하며, 강자가 약자를 강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학대하고, 교활한 자가 우직한 자를 속이고, 귀인이 천인을 업신여기고, 외적, 내란자, 도적 떼가 일제히 일어나도제압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도대체 큰 종 치고 북 두드리고 거문고 타고 피리 불며 검무나 추고 있어도, 천하의 혼란은 다스려질 수 있다는말인가? 내 생각에는 반드시 불가능할 것 같다. 따라서 묵자는 말했다.
"만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들여 큰 종, 북, 거문고, 피리 등을 연주하는 행위는, 천하의 이익을 조성하고 천하의 해악을 제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까닭에 묵자는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는 그르다"고 했다. - P150

기쁨, 노여움, 즐거움, 슬픔, 사랑, 미움 등은 모두 정감의 측면에 속하므로, 묵자는 "여섯 가지 병폐"로 여겨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반드시 스스로 "침묵할 때는 항상 사색하고, 말할 때는 항상 가르치고, 움직일 때는 항상 일하도록" 하여, 우리의 모든 일거일동이이지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상태 속에 있게끔 해야 한다. 이것이 묵자의 정감배제 명문(明文)이다. - P152

겸애의 도는 타인에게 유리할 뿐더러겸애의 도를 행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유리하다. 즉 "타인에게 이로울" 뿐더러 "자신에게도 이롭다." 즉 순전히 공리적인 측면에서 겸애의 필요성을 증명했다. 이것이 묵가의 겸애설이 유가가 주장한 인(仁)과 다른 까닭이다.
천하의 큰 이익은 사람들이 겸애하는 데에 있고, 천하의 큰 해악은 사람들이 서로 투쟁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을 배격해야 한다. - P157

묵자는 전쟁을 배격했고, 맹자도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묵자가 전쟁을 배격한 것은 전쟁이 이롭지 못한 때문이었고, 맹자가 전쟁을 반대한 것은 전쟁이 의롭지 못한 때문이었다. - P159

묵자는 인성(人性)을 흰 실로 여겨, 인성의 선악은 전적으로 "무엇에 물들여지느냐(所染)"에 달려 있다고 했다. 우리는 진실로 겸애의 도로써 남을 물들여 서로 이익을 도모해야지, 서로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소견이 매우 좁아서 겸애의이익과 "상호 차별"의 해악을 간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묵자는 각종 제재(制裁)>를 강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끔했다.
묵자는 종교적인 제재를 중시하여, 천상의 하느님(上)이 서로겸애하는 자는 상을 주고 서로 차별하여 증오하는 자는 벌을 준다고 여겼다. - P160

묵자는 이미 각종 제재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다 함께 서로 사랑하고 서로 차별하지 말도록 한 만큼, 따라서 숙명론을 부정한다(非命). 하느님과 귀신 혹은 국가로부터의 상벌(賞罰)은 개인의 행위가 자초한 결과이지 숙명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 P165

종교적 제재 외에 묵자는 정치적 제재도 강조했다. 그는 세계의 <평화와 인민의 안락을 위해서는 천상에도 하느님이 존재해야 할 뿐더러, 세상에도 또 하나의 하느님이 존재해야 한다고 여겼다. - P167

국가의 정치조직(刑政)이 존재하기 전에는 시비기준이 정해지지않았기 때문에 큰 혼란이 발생했다. 따라서 이미 국가가 수립된 이상 천자의 호령이 당연히 절대적인 시비기준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기준이 또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정치적 제재 외에 사회적제재가 다시 있을 수 없다. - P168

‘천자는 위로 하늘과 화동한다‘는 묵자의 설에 따르면, 하느님과 주권자의 의지는 완전히 일치하여 다시 충돌하지 않으니, 그가말한 천자는 군주 겸 교황이었다고 하겠다. - P171

묵자는 살아서는 고생이요, 죽어서는박장이어서, 그의 도는 너무나 각박하여 사람을 근심하고 슬프게 했고, 정말로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필경 성인의 도라고는 할 수없을 것 같다. 인지상정과 상반되기(反天下之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한다. 비록 묵자 자신은 감내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 세상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세상의 인심과 동떨어진 이상, 왕도(王道]로부터도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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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병사가 포로를 구타했는데 나는 그 짓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말렸죠. 그 병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어요. 그건 그의 영혼에서 터져나오는 아우성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 병사는 나와 아는 사이였고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나한테 욕을 퍼붓더군요. 하지만 더이상 포로를 때리지는 않았어요. 대신 나한테 있는 욕 없는 욕, 욕이란 욕은 다 해댔죠. "이년이. 벌써 잊어버렸냐! 저놈들이 한 짓을 벌써 잊어버렸냐고, 이 쌍년." 어떻게 잊어요. 당연히 하나도 안 잊었죠. 문득 군화가 떠오르더군요. 독일군이 자기들 참호 앞에 줄줄이 세워놓았던, 다리는 잘려나가고 발목만 남은 발이 그대로 들어 있던 군화들. 그 추운 겨울에 마치 말뚝을 박아놓은 것처럼 줄지어 서 있었죠. 그 군화들. 그리고 놈들이 우리 전우들한테 저지른 그 모든 짓들. 그 처참한 광경들. 

- P287

한번은 해병들이 지원군으로 왔는데. 엄청나게 큰 지뢰밭을 만나는 바람에 상당수가 지뢰를 밟고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그렇게 죽은 해병들은 한참을 방치돼 있었어요.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시신들이 금세 부풀어올랐고 해군용 속셔츠 때문에 수박처럼 보였죠. 드넓은 들판에 커다란 수박들. 아니 거대한 수박들.

잊은 게 아니에요. 아무것도 잊지 않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포로를 때릴 순 없었어요. 어쨌든 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니까. 그렇게 우리는 각자 자기 행동을 결정해야 했고, 그건 중요한 일이었어요.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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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7-16 0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적이 포로가 되면 어떨까 싶기도 하네요 적이니 원망스런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만, 뭔가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뭔가를 한 게 아니어도 적이니 미울 것 같기도 합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18 15:40   좋아요 0 | URL
전쟁이 발생하면 포로가 생기기 마련이죠. 적이 포로가 되었을 때 심정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증오가 복수심으로 불타오를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이어진다면 끔찍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이성은 사치이고 감정만 난무하는 곳인듯도 해서ㅠㅠ
 

공자와 유자의 흥기

- 정명론
- 계술을 통한 창작자로서의 공자
- 직 인 충 서
- 의 리 성

각각의 이름들은 그 정의가 있으며, 그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그 이름이 지칭하는 그 사물이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물인 까닭 즉 그 사물이 본질 혹은 개념(이데아)이다. 만약 군, 신, 부, 자가 그 정의에 부합한다면 모두 각자의 도를 다하는 것이고 그러면 "천하에 도가 서게 된다." -> 정명론의 정의 - P103

공자는 당시에 이름이 바르지 못해서 어리저뤄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름을 바룸으로써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했다. -> 정명론이 나온 배경 - P103

춘추가 "선을 북돋우고 악을 물리치게 하며", 난신적자를 단죄하고, "춘추로써 명분(본분)을 계도했다"는 말에 공자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공자가 정명론을 주장하여 춘추를 지었다는 전통적 설명과는 달리, 공자가 춘추 등의 책에서 의를 취해서 정명론을 주장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 대의만은 공자가 "은밀히 체납했다"는 맹자의 말이 그것이다. -> 춘추가 교육용 교재로 쓰인 배경 - P107

중국문화에 대한 공자의 공헌은 바로 원래의 제도를 이론화하고 이론적인 근거를 부여하는 시도를 개시했다는 데에 있다. - P107

의례는 본래부터 있던 것이지만 유가가 계술했고, 예기는 유가가 창작한 것이다. 그러나 예기의 사상사적 가치는 의례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경은 모두 사(역사)이고 공자는 계술했을 뿐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고문학파의 주장도 물론 틀린 말이 아니고, 공자가 창작했지 계술한 것이 아니라는 금문학파의 주장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닌 것이다. - P111

중국역사상 한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그냥 주역이 아니라 계사, 문언 등이 곁들어진 주역이었으며, 그냥 춘추가 아니라 공양전 등이 곁들어진 춘추였으며, 그냥 의례가 아니라 예기를 근거로 한 의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금문학파가 공자를 지성선사라고 했을 때, 그들이 말한 공자는 이미 역사상의 공자가 아니라 바로 이상적인 공자 즉 유가의 이상적인 대표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P112

정직이란 안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고 밖으로 남을 기만하지 않고, 심중의 좋고 싫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P113

인이란 우리 마음의 진실되고도 예에 맞는 발로로서, 동정심을 바탕으로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 P117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통하고 싶으면 남도 통해주는 것"이니 곧 충이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니 곧 서이다. 충과 서를 실행한다고 함은 인을 실행한다는 말이다. - P121

공자는 다섯 가지를 세상에 실천할 수 있으면 인이다고 했는데, 공손하면 남에게 모욕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미더우면 남의 신임을 받고, 기민하면 공을 이룰 수 있고, 은혜로우면 남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 P124

"군자가 벼슬함은 자기의 의를 행하는 것일 따름인즉", "그 옳은 도리를 바룰 따름"이며, "그 도를 밝힐 따름"이다. 도가 과연 행해질지의 여부는 결과로서, "이익"이고 "공(성과)"이니, 반드시 "꾀하고" 반드시 "계산할" 필요는 없다. - P127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
이것이 공자와 맹자의 일관된 주장이고 묵가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공자의 철학은 인간의 심리(마음의 도리와 이치) 측면을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후 유가는 모두 심리학을 중시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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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삶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놓은 비축물이나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틈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한참을 속이 빈 암석을 공들여 벗겨내고, 함께 사소한 기억의 퇴적물을 헤집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짝반짝 모습을 드러낸다! 선물처럼 찾아온다! - P170

누구도 우리 위에 있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 아래 있지 않았어. 우리 중에 양탄자나 고급 식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도.…하지만 우리는 행복했어. 정말 행복했지.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남았으니까.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었으니까. 마음껏 거리를 돌아다니고.. - P222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평범하다. 나 역시 목격자가 되어간다.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는지, 어떻게 기억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또 무엇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기억의 저 깊은 구석으로 밀쳐버리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장막을 쳐버리고 싶어하는지를 보고 듣는 목격자. 적절한 말을찾지 못해 절망하면서도,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온전한 표현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과거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본다. 그때는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얼마나 보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는지를. - P255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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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유가의 흥기

1. 중국 역사상 공자의 위치
2. 전통적 제도와 신앙에 대한 공자의 태도

공자는 육예를 일반인에게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공자의 강학은 그후의 다른 제자백가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학설만을 중시했는데, 이를테면『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서 보여지듯이 묵가의 제자들은 『묵경(墨經)』을 암송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교육가였다. 그의 강학목적은 "인재(人)" 양성에 있었다. 특히 국가를 위해서 일할 인재를 양성했지, 어떤 한 학파(一家)의 학자를 양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각종 서적을 읽게 했고, 각종 과목을 가르쳤다. - P83

공자는 이미 있던 책을 가지고 교육했는데, 가르칠 때 다소 취사선택을 가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렇듯 수시로 취사선택하여 강해한 사실을 두고 "육경을 산정(刪正)했다"고 한다면, 공자가 "산정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산정"이란 사실 아무런 비상한 의미가 없다. 그후 유가는 관습대로 여전히 계속해서 육예를 교재로 사용한 반면, 다른 학파에서는 오직 자기들의 새로운 학설만을 강할 뿐 옛 서적은 강하지 않았던 까닭에, 육예는 마침내 유가의 전유물처럼 되어 공자가 제작한 것처럼 여겨졌고, 산정(산정을 했다면) 역시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인 양 여겨졌던 것이다. - P84

공자는 한 교육가였다. "계술만 하고 창작하지 않았으며, 신념을 가지고 옛것에 심취했으며"," "학문에 싫증을 낸 적이 없었고, 인재교육에 게으른 적이 없었다"는 말은 바로 공자가 자신에게 내린 평어(考語:評語)였다.
이로써 보건대 공자는 단지 한 "선생님(老敎書匠)이었지만, 중국역사상 여전히 지극히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 P85

전국시대에 학문이 있으면서도 벼슬하지 않고 직접 노동을 해서먹고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허행(許行)은 "그의 추종자가 수십 인이었는데, 모두가 갈옷을 입었으며 짚신을 삼고 자리를짜서 생계를 유지했고, 진중자(陳仲子)는 "몸소 짚신을 삼고 처는 길쌈해서 "살아갔다. 그러나 맹자는 그렇지 않았다. 맹자 자신은 "뒤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에 시종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제후에게서 자고 먹었는데", 이를 두고 그의 제자인 팽경(彭更)이 "너무 지나치다(泰)"고 여겼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의 비평이야 더 말할나위도 없다. - P89

선비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봉양만 기대했다. 이런 선비계급은 공자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이전의 소위 사(士)란 주로 대부·사(大夫士)의 사였거나 혹은 남자 병사의 칭호였지 후세의 소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는 아니었다. 이들 선비계급은 오직 벼슬살이와 강학이라는 두 종류의 일만 할수 있었다. - P90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흡사했다. 소크라테스도 원래 "소피스트였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고 지식을 팔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귀납법으로써 정의(定義)를 구했고,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공자 역시 정명(正名)을 주장했고, 명(名)에 대한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했다. 공자도 인간의 "인(仁)"이
"정치담당(從政)"능력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 P92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의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양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공자의 학파도 맹자와 순자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국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 P93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례(周禮)를 입증할 문헌이 충분했기 때문에, 공자는 주례에 대해서 깊이 알았고 간절히 사모했다. 그래서말했다.
주는 이전의 두 왕조를 조망하여 거울삼았으니, 그 문화가 찬란하다! 나는주(周 : 즉, 주의 문화, 周禮)를 추종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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