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병사가 포로를 구타했는데 나는 그 짓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말렸죠. 그 병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어요. 그건 그의 영혼에서 터져나오는 아우성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 병사는 나와 아는 사이였고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나한테 욕을 퍼붓더군요. 하지만 더이상 포로를 때리지는 않았어요. 대신 나한테 있는 욕 없는 욕, 욕이란 욕은 다 해댔죠. "이년이. 벌써 잊어버렸냐! 저놈들이 한 짓을 벌써 잊어버렸냐고, 이 쌍년." 어떻게 잊어요. 당연히 하나도 안 잊었죠. 문득 군화가 떠오르더군요. 독일군이 자기들 참호 앞에 줄줄이 세워놓았던, 다리는 잘려나가고 발목만 남은 발이 그대로 들어 있던 군화들. 그 추운 겨울에 마치 말뚝을 박아놓은 것처럼 줄지어 서 있었죠. 그 군화들. 그리고 놈들이 우리 전우들한테 저지른 그 모든 짓들. 그 처참한 광경들.
- P287
한번은 해병들이 지원군으로 왔는데. 엄청나게 큰 지뢰밭을 만나는 바람에 상당수가 지뢰를 밟고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그렇게 죽은 해병들은 한참을 방치돼 있었어요.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시신들이 금세 부풀어올랐고 해군용 속셔츠 때문에 수박처럼 보였죠. 드넓은 들판에 커다란 수박들. 아니 거대한 수박들.
잊은 게 아니에요. 아무것도 잊지 않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포로를 때릴 순 없었어요. 어쨌든 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니까. 그렇게 우리는 각자 자기 행동을 결정해야 했고, 그건 중요한 일이었어요.
- P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