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은 과거에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남성과 여성의 몸을 전혀 다른 개체로 분리시켰다. 이 변화는 생물 - P78

학적인 성적 차이가 사회적으로 해석되는 과정, 혹은 거꾸로 사회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한 성적 차이가 생물학적으로 정당화되는 과정이다. 같은 맥락에서 남녀간의 신체적 차이뿐만 아니라 계층간의 몸과 인종간의 차이의 근거가 생물학적으로 설정되고 해석되었다. - P79

몸을 읽는다는 것은 몸을 둘러싼 사회적 코드를 읽는 것이다. 몸은 결국 보이는 외모를 통해 가치를 인식하는 표상이다. 그리고 이 - P91

표상은 다양한 권력 속에서 만들어지고, 인지되며, 해석된다. 따라서 타자의 몸에 대한 담론은 결국 그 몸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이수반하는 가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유추하고, 추출하여 정립하기 위해 한 시대의 합리적 방식, 즉 이른바 <과학적 방법들이 적용되었다. 여기서 19세기의 <과학>이 <타자의 몸>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목적>을 띤 가치를 몸에 투영하기위해 당시의 과학을 <동원>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 P92

사라바트만의 명성은 제국주의의 남성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는 이상화된 제국주의적 남성성의 상대적 극단을 형성하는 정수였고, 여기서 만인 앞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어야하는 당위성이 발생한다. 검은 피부와 기형적으로 커다란 엉덩이와소음순을 가진 그녀의 벌거벗은 몸은 수많은 관찰과 응시를 힘없이받아내야 하는 대상이다. 그녀의 <몸>은 <절제>와 <균형>으로 무장하고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던 19세기 영국의 남성성과 가장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것으로서, 제국주의가 낳은 지극히 전형적인 <타자>의 표상이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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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밑줄

오, 잘 있거라 나의 꿈들이여! 나의 20년이여! Alea jactaest(주사위는 던져졌도다).

나는 재산이 있는 러시아 사람들이 왜 계속 외국으로 쏟아져 나가고, 매

년 그 수가 점점 더 증가하는지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건 그냥 본능입니다. 만약 배가 가라앉는다면, 가장 먼저 쥐들이 그곳에서 빠져나오거든요. 신성한 루시, 이것은 목조로빈곤한...... 그리고 위험한 나라이고, 상류 계급에는 허영심 강한 거지들로 가득 찬 나라이며, 대다수 국민은 닭다리 오두막에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 나라는 어떠한 출구라도좋아할 테니 설명만 해주면 됩니다. 정부만은 아직 저항하고싶어 하는데, 그래 봤자 어둠 속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다가 자기 사람들만 때리게 되지요. 이곳에서는 모든 운명이 결정되고 선고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러시아에는 미래가 없어요.

알겠지만, 우리나라의 사회주의는 주로 감상성에서 퍼져나온 것이거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곤란한 점은 바로 저물어뜯기 좋아하는 육군 소위 같은 작자들이야. 가끔씩 이런작자들과 부딪친단 말이야. 그다음에는 진짜 사기꾼들이 있지. 이자들은 대개 좋은 무리이고 가끔씩은 아주 쓸모가 있지만, 시간을 너무 많이 쏟아야 하고 부단한 감시가 필요하다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결합시키는 시멘트와 같은 가장 강력한 힘, 그것은 자신의 견해에 대한 수치심이네. 이거야말로 강력한 힘이지!

개인은 전체에 속해 있고, 전체는 개인에 속해 있다. 모든 사람은 노예이며, 노예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중상과 살인도 가능하지만, 중요한 것은 평등이다. 우선 할 일은 교육과 학문, 재능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다. 높은 수준의 학문과 재능은 고도의 능력을가진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데, 그런 고도의 능력은 필요 없다!
고도의 능력은 항상 권력을 장악하고 전제군주가 되어 왔다.
고도의 능력은 전제 군주가 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익을 주기보다는 항상 더 많은 타락을 가져왔다. 그래서 그들은 쫓겨나거나 처형당한다.

우리는 거세파 교도들보다 전설을 더 잘 퍼뜨릴 거야. 그는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본 적이 없다. 오, 얼마나 멋진 전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새로운 힘이 다가오고 있다는것일세. 바로 그 힘이 필요하며, 사람들은 그 힘을 그리워하며눈물 흘리고 있네. 그런데 사회주의는 어떤가? 낡은 힘을 파괴했지만, 새로운 힘을 들여오지는 못했네. 하지만 우리에게는 힘이, 그것도 전대미문의 엄청난 힘이 있다네!

그는 이미위대한 유럽의 지성들을 능가했다. 그들은 모두 그의 말장난을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사상을 가져다가거기에 대립구를 덧붙인다. 그러면 말장난이 준비되는 것이다. 범죄는 존재한다.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은 없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무신론, 다윈주의, 모스크바의 종(鐘)등……………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이미 모스크바의 종을 믿지 않는다. 로마, 월계관..... 그러나 그는 월계관조차 믿지 않는다....... 여기에 바이런적 우수의 상투적인 발작, 하이네에게서가져온 찡그림, 페초린에게서 가져온 무언가도 있다." 그렇게기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하지만 칭찬해 주십시오, 칭찬해 주십시오. 나는 그것을 엄청 좋아하니까요. 내가 펜을 내려놓겠다고 한 것은 그냥 해본 말입니다. 잠깐만요, 나는 당신들을 3백 배는 더 귀찮게 하겠습니다.
내 글을 읽느라 지치도록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셰익스피어와 라파엘로는농노해방보다 높고, 민족성보다 높고, 사회주의보다 높고, 젊은 세대보다 높고, 화학보다 높고, 거의 모든 인류보다 높다는것을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실, 즉 모든 인류의 결실이며, 아마도 존재할 수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결실일 것이기때문입니다! 이미 달성된 미의 형식, 그러한 달성이 없다면 나는 아마 살아가는 것조차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방화다! 이것은 허무주의다! 만약 무언가 타오르고 있다면, 그것은 허무주의다!」

당신들 각자는 최고의 보고를 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있습니다. 당신들은 정체되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낡아 빠진 것들을 쇄신해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용기를북돋기 위해 항상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재 당신들이 나아갈 길은 일체의 파괴, 즉 국가도, 국가의 도덕성도 모두 파괴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인수하도록 미리 예정되어 있던 우리만이 남을 것입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을 올라타고 나아갑시다. 당신들은 이것에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게 하려면 한 세대 전체를 재교육해야 합니다. 아직도 수천 명의 샤토프가 앞을 가로막을 겁니다. 우리는 나아갈 방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결성된 것입니다. 하는 일 없이 누워서 우리를 보며 입이나 벌리고 있는 자들을 끌어내지 않는다면, 그건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은 불행해, 왜냐하면 자의지를 천명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인간은 자의지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천명하는 것이 두려워서 어린 학생처럼 한쪽 구석에서 제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다보니 지금까지 불행하고 비참했던 거야. 나는 지독하게 두렵기 때문에 지독히도 불행해. 공포는 인간에게 저주야....... 그러나 나는 자의지를 천명하겠어. 나는 내가 믿고 있지 않다는것을 믿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지. 내가 시작하고, 내가 끝맺고, 내가 문을 열어 주겠어. 그리고 구원해 주겠어.

<마침 그곳 산기슭에는 놓아기르는 돼지 떼가 우글거리고있었는데 악령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락으로 도망쳐 가서 사람들에게알려 주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악령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집이 났다.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악령 들렸던 사람

이 낫게 된 경위를 알려 주었다.>

「악령은 틀림없이 존재합니다만, 그에 대한 이해는 정말로다양하겠지요.」

내 인생에서 일어나곤 했던 모든 종류의 지극히 수치스럽고, 극도로 굴욕적이며, 비열하고, 무엇보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내게 항상 극단적인 분노와 더불어 믿기 어려울 정도의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범죄의 순간에도, 목숨에 위험을 느끼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내가 뭔가를 훔친다면, 절도를 행하면서 나의 깊은 비열함을 인식하고 환희를 느낄 것이다. 나는 비열함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이때 나의 이성은 전적으로 완전하다), 야비함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에서 야기된 환희가 마음에 드는 것이다. 결투선에 서서 상대의 일발을기다릴 때면 매번 똑같이 가장 수치스럽고 광포한 느낌을 받곤 했는데, 한번은 그 느낌이 너무나 강렬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것을 자주 찾아다녔다.

저는 저 자신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목적입니다. 제 목적의 전부입니다! 바로 그때야 이 환영이 사라지리라는 것을 전 알고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저는 끝없는 수난을 구하고 있는겁니다. 제 스스로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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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시작했다.

이는 루이 알튀세르의 저작인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읽기 위한 사전 작업이자 다른 저작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근대 역사의 정치, 경제, 사회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인물이라 어떤 책이나 자료를 읽더라도 빠짐없이 거론된다.

한때 세계를 뒤흔들었던 마르크시즘은 이제 낡은 것으로 치부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후대 마르크스를 비판하고 나선 이들의 사상도 사실상 이해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아주 오래 전 공산당 선언을 읽은(읽은 것이 맞나?) 뒤로 사실상 마르크스 본저를 제대로 읽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자본론>을 읽기 전 마르크스가 내놓은 저작을 출간순으로 읽어보고자 해서 그 중 <임금노동과 자본>, <공산당 선언>을 순서대로 읽었다. 두 저작보다 앞서 나온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말 그대로 포이어바흐(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의 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을 짤막하게 기록한 것이라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자기소외(세계가 종교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 이중화된다)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성’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분석한 추상적 개인이 사실은 일정한 사회형태에 속해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는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Mystizism)로 유도하는 모든 신비는 인간적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개념적 파악 속에서 그 합리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이 중 특히 마지막 문장이 많이 언급되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실증적 태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읽은 <임금노동과 자본>은 범우사 판으로 오래 전 전자책으로 사놓은 것이다. 

해당 판본은 1891년 엥겔스가 1847년 마르크스의 경제학 강연을 바탕으로 한 논문을 수정하여 발간한 것이라고 한다(아마 대부분의 번역본이 엥겔스가 수정해서 내놓은 판본이 아닐까한다). 시간차가 꽤 있는데 주목을 해야 하는데 1891년이면 마르크스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엥겔스가 수정 작업을 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리라 보인다. 게다가 그동안 러시아에서는 농민 혁명이 있는 등 세계적으로 급변하는 흐름들도 엥겔스의 수정 방향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엥겔스가 수정을 가한 것은 ‘노동’과 ‘노동력’이라는 말을 확실히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노동력이란 부를 생산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능력, 즉 노동하는 힘 전체이다. ‘노동’이란 이 노동력을 실제로 사용하고 발휘해 부를 생산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노동력’은 인간에게 깃들여 있는 일하는 힘이고, ‘노동’은 그 힘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력은 엄연히 다른데 마르크스는 이 말을 섞어서 썼다라고 엥겔스는 보았다. 원본에는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임금을 받고 그의 ‘노동’을 파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가 파는 것은 그의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1848년 2월 프랑스에서는 1789년의 혁명을 뒤엎고 보수 체제가 붕괴되었다. 3월 독일에서도 혁명이 시작되었으나 결론적으로 원했던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이는 산업 시민 계급이 노동자 등이 주도한 혁명세력를 경계하면서 봉건세력과 타협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겪으면서 노동자 계급은 부르주아지와의 계급 투쟁을 넘어서 민주주의를 일궈내고 나아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들이 계급 투쟁을 해야 하는 이유와 자본주의 사회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을 담아내고, <임금 노동과 자본>에서는 같은 내용을 경제적인 측면으로 분석했다. 


<임금노동과 자본>에서 주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품의 ‘가격’은 사는 사람들과 파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에 의해, 수요와 공급, 욕구와 제공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상품 가격이 변동함에 따라 임금도 변동한다. ‘그러나 이 변동의 범위 내에서 노동의 가격은 생산비에 의해, 즉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력의 생산비란? 노동자를 노동자로 유지시키기 위해, 또 노동자를 노동자로 길러 내는 데 필요한 비용이다.’ 

그러니까 핵심은 노동력은 상품이고 노동력에는 노동자로 만들어지는 데 생산유지비가 든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들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원료나 기계나 도구,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노동력을 살 수 있게 해주는 돈의 소유자의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은 자신이 만들어 낸 전체 생산물 가운데서 임금 등 일부분만 돌려받도록 되어 있다.

자본은 임금 노동을 전제로 하고, 임금 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 양자는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는 가능한 노동자에게서 적은 돈을 투자하고 이윤을 얻고 싶어한다. 그래서 임금과 이윤은 서로 반비례한다. 


<공산당 선언>은 '선언'답게 자본주의 이론적 배경을 채우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한 구호적 성격이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되겠다. 


공산주의자들은 도처에서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상태에 대항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했다. 이 모든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소유 문제를, 그 발전 정도와 상관없이 운동의 근본 문제로 내세웠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모든 국가의 민주 정당들의 연합과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 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그렇다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는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① 벌써 모든 문명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모든 생활 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원료와 도구(기계, 공장)를 소유하고 있는 대자본가 계급. 이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 또는 부르주아지이다. ② 생계에 필요한 식료품을 얻기 위해 부르주아에게 노동을 파는 일에 의지하는 완전한 무산자 계급. 이 계급을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트라 한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이제까지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임을 선언하며 현재도 억압 계급과 피억압 계급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비단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구별 뿐 아니라 성별, 인종 간의 구별로까지 확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놀랍다. 다만 지금 보기에는 그만큼 차별적 요소들이 여럿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수공 노동이 숙련성과 힘의 과시를 덜 요구할수록, 다시 말해 현대 산업이 발전할수록, 그만큼 더 남성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에 밀려난다. 성별과 연령 차이는 노동 계급에게 어떤 사회적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나이와 성에 따라 드는 비용이 달라지는 노동 도구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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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은 숙련된 노동을 하고 여성은 숙련되지 않은 노동을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사적 관계는 오로지 관련 당사자들만의 문제이며 사회는 그것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 사회 질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아동들을 공동으로 교육하며, 이를 통해 종래의 혼인을 지탱했던 두 토대, 즉 사유재산을 수단으로 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과 부모에 대한 아동의 의존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시민적 결혼은 실제로 아내를 공유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비난할 수 있는 점은 기껏해야 위선적으로 감춰진 부인 공유제Weibergemeinschaft 대신 공식적이고 공명정대하게 부인 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현재의 생산 관계를 철폐하면서 여기서 파생된 부인 공유제, 즉 공식적 · 비공식적인 매춘도 사라질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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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라는 것이 결국 사적 소유 기반을 폐지한다는 개념은 알겠으나 과연 감춰진 부인 공유제와 공명정대한 부인 공유제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부인 공유제를 한다고 해서 매춘이 사라지나? 솔직히 헛웃음만 나왔다.


또한 지금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구절들도 많다.


민족들이 국가로 분리되어 대립하는 현상은 이미 부르주아지의 발전과 함께 상업의 자유, 세계 시장과 함께 그리고 산업 생산과 이에 일치하는 생활 관계의 획일성과 함께 점점 소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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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족과 국가의 개념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유럽도 그렇고 미국, 중국도 국가적인 장벽을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말로만 글로벌이 아닌지... 자본의 흐름은 국경을 넘나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공고해진 것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현실을 바꾸고 개혁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의 역사가 대체로 ‘이념 속에서 현실’을 탐구하는 이상주의의 줄기와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는 현실주의의 줄기로 나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마르크스의 철학은 철학의 커다란 한 줄기를 대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이념과 현실의 화해를 시도했다.


주요 저작은 <자본론>이나 두꺼운 분량은 물론이고 이해 자체가 쉽지 않을 거라 여겨져서 고민이다. <임금노동과 자본>, <공산당 선언>을 접함으로써 <자본론>을 요약 예습한 셈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덧)

자본론으로 검색을 하니 낯설지 않은 책이 나왔다. 오래 전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책을 읽었었다. 그런데... 왜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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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5-01-13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 저도 저거저거조거쪼거ㅠ읽고 싶은데 마음만 …. ㅠㅠ 미리미리 많이 읽어놔주새요!!! ㅋㅋㅋ 헤헷!!!
마르크스는 언젠가는 도전헤야하능 책인 거 같아요!
새해에도 멋진 독서생활로 제게 자극을 주시옵고!!! 화가님의 마르크스를 기대합니당 😍

거리의화가 2025-01-17 10:58   좋아요 0 | URL
쟝 님도 눈독들이고 계신 책일거라 짐작했죠^^ 맞아요. 마르크스 계속 외면할 수가 없더라구요ㅠㅠ 자본론은 잠시 뒤로 미루고 알튀세르를 먼저 간볼까 싶습니다. 이해 안되면 자본론 다시 가야죠뭐^^;
저는 늘 쟝 님의 현실 인식과 독서의 실천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새해에도 즐독 이어가시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한해가 되어보아요^^

수이 2025-01-14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책만 봐도 두근두근입니다. 원래 책이라는 게 읽고 다 까먹는 게 정상인 거 같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고 갑니다. 새해에도 좋은 책 소개 많이 해주세요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5-01-17 11:0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읽었다는 것이 기억나는 것이 다행이라 하지 않을까. 저 책 당시 기준으로는 꽤나 괜찮았던 책이었던 것만 기억나요ㅋㅋ
모쩌럭 올해도 수이 님의 멋진 삶과 즐독을 응원합니다^^ 종종 자극을 준 책을 만나면 소개할게요.

단발머리 2025-01-14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벽두에 마르크스라니.... 너무 멋진 거 아니네요, 거리의화가님!
오늘 페이퍼 읽으며 화가님의 진지한 공부 자세에 다시 한 번 감동 받습니다. 알튀세르 책 읽기 전에 마르크스 읽어야지~~ 하시고, 이렇게 촥촥촥 책을 펼쳐가시는 모습이 너무 근사합니다. 저도 알튀세르 저 책이 마음에 있는데 말이지요 ㅋㅋㅋㅋㅋㅋ 가능할까요?

거리의화가 2025-01-17 11:05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 저야말로 늘 배우는데 무슨 말씀을...ㅠㅠ
요즘은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지라 이렇게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어요. 글을 써야 하는데 자꾸 게을러져서 글쓸 시기를 놓쳐버리고 맙니다.
공부하는 방법은 결국 어떤 분야든 어떻게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가느냐인 것 같아요. 그 과정이 오래 걸리더라도 outline이 있어야 해나갈 수 있더라구요. 단발머리 님은 알튀세르 분명 가능하실 거라봅니다. 함께 읽어요^^ 아자아자!!!
 








<가난한 사람들>, <백치>에 이어 <악령>을 읽기 시작했다.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서 당시 러시아 사회에 팽배해 있던 허무주의, 무신론에 대한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이상한 우정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두 친구가 한평생 서로 거의 잡아먹을 듯이 살면서도, 결국 헤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 말이다.

가끔은 사소한 것이 예외적으로 오랫동안 주의를 끌기도 한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현실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감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측면, 즉 그것의 종교적 뉘앙스나 시적인 성향이라네.

오늘은 당신과 악수를 나누었던 사람이, 내일이면 당신이 환영해준 것에 대한 대가로 밑도 끝도 없이 정직한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뺨을 때립니다. 단지 그래보고 싶었다는 이유로요. 부족함 없이 자라온 탓이겠지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성이지요!

선생께서는 내가 유언비어를 터뜨린다고 하시지만, 온 도시가 떠들고 있으니 저도 큰 소리로 말한 것뿐입니다. 저야 맞장구쳤을 따름이지요. 맞장구치는 것이 금지되어있진 않으니까요.

나는 <타인의 죄>와 결혼할 수는 없네!

하나의 삶이 지나가면 또 다른 삶이 시작되고, 그 삶이 지나가면 세번째 삶이 시작되고, 끝없이 계속되네요. 모든 끝은 정확히 가위로 자른 것 같아요.

삶은 현재 고통과 공포를 대가로 주어진 것이며, 이것이 바로 기만이라는 겁니다. 현재의 인간은 아직 진정한 인간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당당한 새로운 인간이 나타날 것입니다. 살아있건 살아있지 않건 상관없는 인간, 그들이 새로운 인간이 될 것입니다. 고통과 공포를 이겨내는 인간, 그가 스스로 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신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최고의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감히 자신을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감히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기만의 비밀을 간파한 사람입니다.

의심할 바 없는 진짜 슬픔은 보기 드물 정도로 정확한 사람조차 가끔은 아주 잠깐이나마 견고하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진정한 진짜 슬픔으로 인해 바보들도 물론 잠시이긴 하지만 영리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슬픔의 속성이다.

참된 진실이란 항상 진실 같지 않아 보인다네. 진실이 보다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필히 그것에 거짓을 섞어야만 하지.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행동해왔네.

모든 것이, 인간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거야. 단지 그 때문이네. 그것 뿐이야. 그것뿐! 그걸 깨닫는 사람은 바로 그때, 그순간 행복해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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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1-14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절반 읽으셨군요~!! 도스토예프스키 악령 재미납니다~!!
전 이 세트는 아니고 다른 세트인데 소장용 느낌이 나서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습니다 ㅋㅋ
 

마르크스가 1847년 말 독일인 노동자 협회에서 노동자를 위해 한 경제학 강연을 바탕으로 쓴 논문이 <임금 노동과 자본>이다. 이후 단행본으로 발간된 것을 엥겔스가 1891년 마르크스 사후 내용을 수정하였다.

엥겔스가 수정을 가한 것은 ‘노동’과 ‘노동력‘이라는 말을 확실히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노동력이란 부를 생산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 즉 노동하는 힘 전체이다. ’노동‘이란 이 노동력을 실제로 사용하고 발휘해 부를 생산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단순 노동력의 생산비는 ‘노동자의 생존 및 번식비’와 같다. 이렇게 결정된 임금은 ‘최저 임금’으로 불린다. 이 최저 임금은 ‘개개의 개인’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종족’에만 해당된다. 개개의 노동자, 수백만 명의 노동자는 살아가며 번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벌지 못한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전체의 임금’은 그 변동의 범위 안에서 평균화되며 이 최저 한도에 이른다.

자본은 임금 노동을 전제로 하고, 임금 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 양자는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조건으로 하고 있다. 양자는 서로를 낳고 있다.

임금과 이윤은 반비례한다. 이윤은 임금이 하락한 만큼 증가하고 임금이 오른 만큼 줄어든다.

자본이 급속히 증대되면 노동자들 간의 경쟁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증대된다. 즉 노동자 계급의 고용 수단, 생활 수단이 비례하여 그만큼 감소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증대는 임금 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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