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 페미니스트 크리틱 3
권은선 외 지음, 김은실 엮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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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는 그것이 발생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얼마나 피해자들의 증언이 정확한가, 당시의 법이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거나 위반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현실을 다른 맥락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 혹은 질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이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 담론에 대한 쟁점을 들여다보고 위안부 문제를 탈식민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저자는 '위안부 연구'와 관하여 이브 세즈윅의 '편집증적 읽기와 회복적 읽기'를 가져와 제시한다. 편집증적 읽기는 글을 읽기 전에 이미 텍스트에 대한 의심을 전제하며 그것을 문제제기하는 의심의 방법론이다. 반면 회복적 읽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단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선언적 지식에서 벗어나는 앎의 형태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편집증적 읽기보다 열려있는 관점이다. 당연히 저자는 후자의 읽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간단하게는 책을 읽는 방식이지만 사회적으로 다양한 상황의 복잡한 문제에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주목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정대협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인식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민족주의, 보편주의 관점에서.

두 번째,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은 없었는가? 램지어가 주장하는 대로 계약에 따른 경제적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것인가.

세 번째, 소녀상에 설정된 고정 이미지는 어떻게 볼 것인가. 위안부 관련 판매 굿즈에 돈을 내는 사람들의 심리는? 

네 번째, 영화 귀향에서처럼 피해자를 두둔하는 방식이 결국 가해자들의 방식대로 재현된다면 이는 또 하나의 폭력 방식이 되는 것이 아닌가.


1. 정대협은 1990년대 초 위안부 피해자들의 대책 마련과 후원을 위해서 탄생한 민간 단체다. 몇 년전 정대협 기금 논란이 터진 이후에는 그 성격이 . 고노 담화 이후 정대협은 자신들이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문제를 노출시켰는데 정대협이 발표한 내용은 조선인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성 노예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으나 일본인 위안부는 공창 출신이 많았기에 동일한 성격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학자 야마시타 영애는 이는 잘못된 인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대협의 관점은 민족주의적 인식이 농후한 인식이었다 생각된다. 

야마시타 영에는 또 위안부 피해 보상에 대한 국민기금 정책에서도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고 국민기금에서 피해자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라 하여 거절한 것에 대해 불편을 느꼈다고 한다. 정작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은 반영된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같은 피해자라고 해서 다 같은 대응을 원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2. 박유하가 한참 논란이 될 때가 있었는데 램지어의 논문 발표 이후에는 그 파장도 그렇고 논란이 저물 줄을 모른다는 생각이다. 램지어는 <태평양전쟁기 섹스 계약> 논문에서 '모든 인간은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경제적 이유를 들어 위안부 여성들이 합리적 계약에 의한 선택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생각에 계층 간 권력 관계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이들에게 적용될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면 다 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기존의 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그의 논문은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성 매매 산업조차도 옹호하고 있는 것이 문제적으로 보인다. 여전히 '반일'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좌초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3. 소녀상은 늘 정형화된 모습이다. 단발 머리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댄 모습. 이런 소녀상의 모습이 위안부가 할머니에서 소녀로 이미지화되는 데 한몫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녀상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면 마치 피해자의 신체가 훼손된 것처럼 대응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해외 각국에 전시 성폭력 문제의 해결 촉구를 위해 소녀상이 세워지고 있다. 이를 철거하려는 일이 발생할 때마다 현지에서도 그렇고 국내 정치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된다. 소녀상은 어느새 소비되는 물체처럼 되어 버렸다. 

과거 나는 위안부를 상징하는 나비,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이 담긴 에코백이나 노트 등 여러 굿즈 물품을 산 이력이 있다. 내 생각은 그랬다. 직접 위안부 할머니를 대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산 물품이 그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고,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식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은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 문제 자체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은 없이 말이다. 


4. 영화 <귀향>은 역사적 사건, 폭력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으나 책에서 언급하는 장면의 내용, 카메라 워크 등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힘겨웠다. 재현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비단 현재에 노출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영화의 내용과 구성에는 주관적인 입장이 들어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취하고 뺄 것인가에 따라 영화의 내용은 달라진다. 하물며 같은 내용을 조감도로 보느냐 투시도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비춰지기도 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감독 및 스탭진이 여러 개의 장치를 두었으리라 짐작할 만하지만 거기에 과연 피해자들의 입장은 고려되었는가 하는 것은 의문점이 있다. 주체성이 부정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는 일은 현재도 역시나 불편하다.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성폭력을 포르노그래피적으로 표현한 설정은 문제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5. 일본 제국주의와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대응으로 인해 이슈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이로써 위안부는 글로벌화된 피해자 또는 희생자가 되어 보편 인권의 문제에서 다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인권과 보편성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에 부족함은 없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어느 제국주의든 전시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있었다. 다만 상황은 지역적으로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를 보편적으로 정리가 가능하냐 하는 문제다. 반대로 지역과 맥락을 고려하면 보편 인권과 폭력에 대한 피해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모으지 못한다는 단점이 생긴다. 글로벌 보편적 관점은 좋으나 차별되고 배제되는 소수자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필진의 말에 공감했다. 


향후 위안부 담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이제 정말 다양한 시각에서 고민해볼 때가 되었다.  


1991년 이전 ‘위안부‘ 담론은 당사자가 드러나지 않은채 주로 재현/표상(re-presentation)으로만 존재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재현/표상은 어떤 실재를 다시 (re, 再) 앞에 존재하게(presentation, 現)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표상은 문체, 수사적 표현법, 설명의 기교, 관습, 제도 등 역사적·사회적 여러 조건에 기반을 둔 표상 체계를 통해 생산되고 인식 주체의 위치성과 이데올로기에 연루되기 때문에,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것으로 나타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변형된 것‘으로서의 표상이 실재하는 대상을 배제하고 표상 기술에 의존해 하나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위안부‘ 문제야말로 표상이 존재를 대체한 가장 명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참전 군인의 회고 속에 등장한 ‘위안부‘나 이를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번역한 ‘위안부‘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재현 주체의 욕망과 당대 사회의 성차별적 표상 체계에 연루된 것이며, 그러한 욕망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 · 증식되어 왔다. - P388~389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encière)는 끔찍한 일을 이미지로 만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 즉 인간성이 부정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한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함으로써 ‘본래의‘ 말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사건의 감각적 직조를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게 만드는 형상이다. 따라서 형상화된 것은 사건의 ‘있는 그대로의 현존‘일 수없다. 그러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의 재현에 대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은 ‘가시적인 것을 분배하는 방식 내에 희생자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절대 홀로 작동하지 않으며, 가시성의 장치(apparatus of visuality)에 속한다. 이미지로 재현된 신체의 지위와 그 신체가 받아야 하는 주의) 유형은 그것을 규제하는 가시성의 장치 속에서 만들어진다. - P108

일본군 ‘위안부‘ 운동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거나 후원 물품을 구매하는 데에는 ‘돕는다‘는 술어가 사용된다. 사회적 약자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금전적·정서적 지원을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선한 의도‘는 소녀상을 방문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굿즈를 구매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자신의 작은 일상적 행동이 ‘우리 할머니‘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시민됨과 주체성을 확인하는 데 따른 효용감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단체가 생활 지원 외에 다른 사업을 하고 있다든가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생활 지원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보다, ‘우리 할머니‘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선한다. - P168

램지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약이라는 합리적 경제행위에 참여한다는 주장을 게임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그는 게임이론이라는 이론적 틀을 표방하고 있을 뿐, 논문에서 어떤 수학적 계산도 내놓지 않는다. 그가 표방하는 게임이론은 업소와 여성 간 "신뢰할 수 있는 약속(credible commitment)"에 기반한 게임적 상황을 전제하는 도구로 소환된다. 이러한 경제 논리는 게임의 규칙과 질서를 지정하고 공유한 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의존하고 있다.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모형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분석할 때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이 생산될뿐 아니라, 지배적 권력관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모델은 인간의 본성을 동질화하고 일반화하려는 본질주의적 보편주의에 근거해 사람들 간의 차이를 배제와 차별의 이유로 자연화하고 정당화하는 원리로 사용된다. - P286

리지웨이에 따르면, 성에 대한 공통된 문화적 믿음으로서의 성별 고정관념은 사회에서 성별 관계의 물질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암묵적인 문화적 규칙, 다시 말해 공유 지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공유 지식이 다시금 사회적 관계와 게임적 규칙을 만들어내는 원리로 작동하면서 성별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다는것이 그의 주장이다.
마이클 최에 따르면, "공유 지식은 집단적 조정을 도울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적 정체성, ‘상상된 공동체(imaginedcommunity)‘를 창출할 수도 있다." 램지어 논문의 주장은 일본 우익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역사 수정주의 집단과 결합하고 강화"되어 자신들의 입장을 집단화하고 있다. - P296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한 상황은 현재 한계에 다다랐다. 우선 신고와 등록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승인받는 권위적일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형식이다. 국민기금부터 근래의 정의기억연대 논란에 이르기까지, 법적 등록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사회적 맥락에 따른 다양한 입장의 표현을 억누르고 단일한 대응을 강제하는 물적 토대로 작용했음을 부인할수 없다." 또한 이는 ‘위안부‘ 운동의 대중화를 자극했던 문학/영화 텍스트의 서사 양식을 지배하는 형식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꼭 정부에 등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에 국적이라는 경계를 부여해 고통과 의미의 경중을 달리하는 인식의 형성에 부지중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P418

민족주의와 젠더가 맺는 관계는 상황적이다. 그것은 로컬의 역사적 맥락과 해당 공동체 구성원의 행위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 P462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는 이제 관련 당사자나 ‘귀속국‘을 떠나 국제적인 지평에서 논의되고 있다. 캐럴 글럭은 ‘이동하는 비유‘로서 글로벌 기억 경관에 등장한 일본군 ‘위안부‘에 주목했다. 그는 ‘위안부‘가 홀로코스트 희생자처럼 ‘상징 권력‘을 가진 ‘글로벌 희생자‘로 보편화되는 순간, 그것은 일본이나 아시아인의 손을 떠난 문제가 된다고 했다. 또한 미국에서 ‘위안부‘ 연구를 이끈 마거릿 스테츠는 미국 대학에서 초국적 텍스트로셔 ‘위안부‘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을 제기하며 ‘위안부‘학의 가능성을 전망했다. 이것은 ‘위안부‘ 역사가 국제사회의 인정 체계 안으로 편입돼 글로벌 기억 장소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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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25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기 시작햇는데 화가님처럼 저 첫문장에 확 꽂혔어요. ^^

거리의화가 2024-09-29 18:26   좋아요 1 | URL
저 문장 좋죠? 역사를 역사로만 평가해야 하는가. 그러기에는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역사라 현실로 소환되면서 정치화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바람돌이 님은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해집니다.
 
화교 이야기 - 중국과 동남아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 경계에서 중국을 보다 2
김종호 지음 / 너머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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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화교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가. 두 사항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겠다. '화교'는 낯설지 않은 단어였지만 정작 화교의 기원과 역사를 자세하게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화교인은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타이완 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많이 진출해 있다는 정도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화교'라는 용어가 무얼 말하는 것이고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역사를 따져 보면 다음과 같다. 

1909년 청 제국이 선포한 국적법에 등장한 용어가 바로 ‘화‘다. ‘화‘는 중화를 의미하고, ‘교‘는 위진남북조 시기부터 쓰인 용어로서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한다. 즉 ‘화교‘는 중화인으로 다양한 목적에서) 해외에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교라고 지칭되는 이들은 귀향 혹은 귀국을 담보로, 잠시 머무르기 위해 동남아시아 및 홍콩으로 진출하여 무역과 노동에 종사하는 중국계 이주자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 청 제국 출신의 해외 거주 중국인은 민난인, 광둥인, 차오저우潮인, 하이난인 커지아인으로 그 출신 지역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거나, 혹은 화상, 화공, 쿨리 등으로 그 직업에 따라 불려왔는데, 이들을 모두 화교라는 용어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후 화교 가운데에도 다양한 부류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학계에서는 해외에 영구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의 경우 ‘화인으로, 그들의 2세대, 3세대 후손을 ‘화‘라고 지칭하고 있다. - P43~44

'교'라는 의미가 '잠시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이미 화교는 그 역사적 시기가 꽤나 지나 3세대는 기본이고 4~5세대 정도까지는 진행되었으리라 본다. 


화교는 근대 시기 민난 이민을 시작으로 고향을 떠나 근로 계약 또는 불법 이민을 통해 타국으로 넘어갔다. 힘든 노동으로 식민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한 아편을 달고 살았고 어려움을 함께 할 동향 조직의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화교는 지역, 방언에 기반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고 한다. 막연히 나는 푸젠성에서 넘어간 사람들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민난과 푸젠 말고도 다양한 지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림 삽입]

천복궁은 푸젠 지역 사람들이 주로 모여 푸젠 회관을 만들었고, 민난 지역 사람들이 모인 곳은 진지앙 회관이었다. 이 둘이 나중에 합쳐져 중화총상회 또는 중화회관으로 통합되었다.


화교 네트워크는 이민, 무역, 송금이라는 핵심 구조로 돌아갔다. 화교인들은 일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하고 일부는 국내 투자를 하는 형식으로 교비를 사용했다. 교비를 위해서 화교인들은 교비국을 만들었는데 은행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자체적으로 송금 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비국의 형태는 초기에 사람 역할을 하는 귀요핀 같은 수객이나 객두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객잔이나 상업기구 내에 맡기는 형태가 되었다. 


화교의 송금은 기본적으로 외국의 화폐를 국내로 보내는 것이어서 그 중간에서 태환, 즉 환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다만 20세기 이전 수객과 교비국의 주요 태환 방식이 화폐-상품-화폐였다면, 20세기들어 그 방식이 ‘환어음‘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환어음 방식은 주로 송금 방법 중 표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비 의뢰를 받은 교비국은 환어음을 구입하여 수신자 개인에게, 혹은 분국이나 연호에 보내는데, 그 환어음의 출처가 바로 은행이었다.

화교 송금 네트워크에서 은행의 역할은 외국 화폐인 화교의 송금을 국내 화폐로 태환해 주는 것이었다. - P88~89


인도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화교 상인은 화상으로 불렸다. 

피식민인으로서 인도 상인은 ‘대영제국‘의 제국민이라는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활용하여 아시아에서 그 상업적 영역을 확장했고, 일본 상인의 경우 본국의 제국적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아시아 시장에 진출했다. 두 상인 집단 모두 근대 시기 ‘제국‘이라는 초국적, 초지역적 정치체제의 보호 아래 비교적 쉽게 아시아 시장에서 나름의 영역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두 그룹은 때로는 화상과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21세기 현재까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 깊게 뿌리내려 ‘아시아의 유대인‘이라 불리며 초국적 네트워크를 유지한 이들은 화상이 유일하다. - P114

이들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한 화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 또는 협력했다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들 중 일부는 같은 친일을 했지만 서로 다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링분컹은 평가에서 살아남았으나 오분호는 살아남지 못했다.  

인종, 문화, 종교, 공동체에의 소속감 등은 흔히 인류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상에게 이러한 가치들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한 지역에서 수 세대에 걸쳐 공동체를 형성한 화상의 경우에는 본국의 지원 없이, 심지어 돌아갈 수도 없는상황에서 낯선 타국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였다. 또 여러 지역에 초국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근대 화상의 경우 여러 정치체에 동시에 ‘협력‘해야 한다는 생존 조건으로 인해 형성된 화상만의 특징이다. - P120


탄카키는 애국주의자였지만 친공 활동으로 다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탄카키가 1946년에 보낸 전보의 수신인은 각각 대통령 트루먼, 마셜 장군, 주중대사 레이턴이었다. 그는 스스로 화교지원기금조직Overseas Chinese Relief Fund Organization의 회장이라고 칭하면서 동남아시아 전체 화교overseas Chinese in Southeast Asia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였다. 그 핵심 내용은 미국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개입하는 것은 주권의 침입이니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 특히 영국령 말라야, 해협식민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화교공동체에서 지도자 격의 존경을 받고 있던 탄카키의 전보는 그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지역의 화교를 순식간에 ‘친공산당파‘와 ‘친국민당파‘로 갈라서게 만듦으로써 항일전쟁을 거치면서 동남아 화교 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의 불씨를 당긴 사건이었다. - P154


화교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포르투갈, 스페인까지 나아가면서 인종 간 결합으로 많은 혼혈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비단 화교만의 일은 아니고 제국주의 세력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흐름들이 나타났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정되지 않고 차별이나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거나 충돌까지 나아가는 양상에 이른다는 것이다. 지배 세력이 있으면 피지배 세력이 생기고 이것은 반복될 수 없는 문제인가 여러 가지로 고민을 낳게 한다.


스페인령 필리핀 사회의 중국계 메스티조 그룹과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 중국계 페라나칸 그룹의 탄생과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중국 상인의 동남아 진출과 적응, 현지화의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화교의 상업 네트워크와 동남아 현지 사회를 링크시켜 주는 역할과 서구 식민 세력의 현지 통치를 용이하게 해 주는 역할 모두 ‘훌륭하게‘ 소화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사회가 ‘중국인-동남아 현지 사회-서구 제국‘이라는 삼각 구도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다만 이러한 중국계 혼혈의 적극적 활동은 근본적으로 동남아시아 현지 주민에 대한 서구 세력의 가혹한 착취를 대리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P196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숍하우스' 부분이다. 타이완에 놀러갈 때마다 익숙하게 보았던 건물의 양식(1층은 여러 개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고 베란다 복도를 가지며 건물 1층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햇빛을 막아주는 형태...)이었는데 그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 숍하우스의 기원이 정확히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찌 됐든 중국 상인이나 노동자가 동남아시아 등지로 진출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해당 양식은 기후적으로는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어 서늘함을 유지시켜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디자인적으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미관 양식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숍하우스의 기원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뚜렷하여 그 진위를 밝혀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근거가 확실한 부분들을 종합하여 재구성해 볼 수는 있다. 송대 이후 명·청 시기까지 중국 동남 연해 지역의 주요 항구도시에는 ‘점옥‘ 형태의 주상복합의 건축양식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건축양식은 푸젠과 광둥 출신 중국 상인 및 노동자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외부로 전파되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자바섬의 주요 항구도시에 형성된 중국인 거주지와 시장에는 비슷한 형태의 건축양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영국 식민제국이 말레이반도에 진출하면서 19세기 초기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도시 개발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가져온 벙갈로우 건축양식을 도입하였고, 동시에 중국의 주상복합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동남아시아 특유의 식민지 도시건축문화, 즉 숍하우스 건축문화를 형성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 P212~213


싱가포르는 전 인구의 75%가 화교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진출해 있는 국가다. 그래서 이 책에도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해 싱가포르의 화교 정착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1965년 독립하여 싱가포르 공화국으로 탄생했는데 현재는 다인종 다민족 국가로 작지만 알맹이가 튼실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독립할 때 말레이 정부의 경계로 우여 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리콴유의 힘도 경계한 것이겠지만 말레이 정부가 무엇보다 다인종 다민족에 대한 공존을 경계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실제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말레이 연방 중앙정계에까지 영향을 행사할 의도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말레이 중앙정부가 경계했다는 것이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말레이 주요 정당들은 1964년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말레이 연방의 보통선거에 뛰어들 것을 결정한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추구하는 사회의 구조가 다인종들 사이의 공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말레이 무슬림 위주의 중앙집권적 국가의 수립을 계획하고 있던 말레이시아 중앙정계의 반감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 P288


동남아시아를 전체적으로 다룬 역사책도 몇 권 없으니, 화교만을 주제로 다룬 책은 더욱 드물다 해야겠다. 그렇기에 이 책은 출간 자체에 의의를 가진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연구를 목적으로 접하든 나처럼 교양으로 접근하든 어느 정도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보다 잘 읽혔고 관심을 가질 만한 역사적 요소가 많아 흥미롭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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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2>
영국의 찰스1세의 폭정에 의회는 권리청원을 내세웠으나 이를 강제로 무마하려다 결국 체포되어 반역죄로 처형되는 결말을 맞는다.
찰스1세 사후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지만 크롬웰이 집권하면서 또 다른 폭정이 시작되어 국민들은 분노하게 된다. 그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영국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다.

<CH13>
루이14세는 신을 대표한다며 태양왕이라는 별칭을 가졌다. 베르사유 궁전을 지으며 화려하게 치장하면서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높게 매겨 후반부로 갈수록 백성들의 화가 치솟는다.

<CH14>
독일의 제후국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왕국을 다스리던 프리드리히 1세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군대를 파병해 신성 로마 제국을 도운 대가로 1701년에 황제로부터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를 허락받는다. 그는 여러 차례 종교 전쟁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며 군사력을 강화해 18세기에 독일 제후국들을 이끄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CH15>
메사추세츠에 정착한 영국인들과 현지 부족민인 왐피노그족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이어졌다. 그 결과 왐피노그족 추장은 살해되고 부족민들은 쫓겨나야 했다.
뉴프랑스 지역의 휴런족이 약해진 사이 현지 부족민인 이로쿼이 족이 공격하여 뉴프랑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영국 해군 제독의 아들인 윌리엄 펜은 퀘이커 교도로 아버지에게 쫓겨나고 결국 퀘이커 교도를 이끌고 미국의 펜실베니아에 가게 된다.

<CH16>
윌리엄 펜은 모든 이가 평등한 세계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곳이 자신의 국가가 아니라 결국 다른 땅을 점령하여 만들어지는 식민지라는 것이 함정!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넘고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넘어 아이작 뉴턴이 중력을 발견하는 과정은 언제 읽어도 참 흥미롭다. 존 로크가 이야기한 평등과 민주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친다. Western Ideas? 계몽이란 단어가 껄끄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영국은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업 발전을 이룬다.

<CH17>
표트르(영어로는 Peter) 1세는 누나인 소피아와 권력을 경쟁하다 군대가 자신 편에 서면서 오롯이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 차르에 오른 그는 영국의 배와 해군을 부러워해 서쪽으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부동항 밖에 없어 아조브 항구를 얻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를 넘어설 수 없어 결국 유럽을 여행하며 서쪽의 문화를 배운다. 수염을 깎고 옷을 그쪽 방식으로 입으라고 가위를 가지고 따라 다녔다는 것이 포인트!!!

<CH18>
아흐메트 3세 하의 오스만투르크는 서양의 영향을 받았고, 그는 튤립왕으로 불렸다.

<CH19>
벵골 태수인 시라지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불만이 있었다. 영국인이 윌리엄 요새 보강을 명령하자 대군을 동원해 체포하라 명령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지역 군이 맞서며 플라시 전투가 벌어졌으나 영국군이 승리하며 벵골은 영국 식민지가 된다. 영국은 인도 전역에 지배권을 강화한다.

<CH20>
청의 건륭제는 천하의 모든 책을 수집해 정리한다는 명령 하에 사고전서를 짓게 하고 보관을 위해 문연각을 세운다.
1750년대부터 시작된 정복 활동으로 주변 지역인 중가르, 위구르 등 서역, 베트남, 미얀마, 타이완에 손을 뻗친다.

<CH21>
북미를 두고 벌어진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이 세 차례 일어났다.
슐레지엔 지역 영유권을 두고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프로이센과 영국이 승리하여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는 동안 미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이 벌어졌다(영국이 승리).

<CH22>
비록 미국으로 건너가기는 했지만 영국인들은 본토와 같은 권리를 받기를 원했던 영국인. 차별적인 차 관세으로 말미암아 보스턴 차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에서 식민지인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영국 정부는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군대를 보냈다. 영국 정부의 의도를 간파한 식민지인들은 전쟁에 대비해 무장을 하기 시작하고 이는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고 아메리카 식민지는 독립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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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9-23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정말 엄청 성실하시네요. 하기로 한 건 또 반드시 해내시고요. 꾸준히 읽고 싶은 책도 읽으시면서 또 꾸준히 함께 읽는 책들도 읽어내시고 정말 멋져요!!

거리의화가 2024-09-23 07:5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 저는 다락방 님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지 않잖아요. 조카랑 놀아주고 요리도 하시고 가족, 친구와 시간도 보내시고 달리기랑 요가도 꾸준히 하시니^^ 그게 얼마나 에너지가 필요한지 알기에 저는 그저 감탄만 합니다.
저 이번주부터 피티 운동 시작하거든요. 몸이 저질이라 걱정입니다ㅠㅠ 건강을 위해 포기하지 말고 이어가봐야겠어요.
다락방 님 한주 화이팅입니다!

건수하 2024-09-30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글로 복습-예습중입니다 ^^ 피티 시작하시는 군요. 화이팅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4-09-29 18:21   좋아요 1 | URL
수하 님 제 글로 복습, 예습을 하시다니 민망하면서도 감사합니다^^
필라테스 욕심내지 않고 꾸준히 해보려고 합니다. 응원 감사드려요.
 
신장의 역사 - 유라시아의 교차로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2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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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의 역사를 읽으면서 위구르 문화 연구가 중국이 신장 자치구를 설정한 이후 본격화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신장 관련 이야기는 논픽션인 <갑골문자>나 근현대 중국사 관련 책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읽은 바 있었으나 신장 자체만을 다룬 역사를 읽지는 못했는데 이제는 묵혀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싶어 주저없이 집어 들었다.


신장은 1500년 동안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영토였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 중국의 지배 하에 있던 곳이다. 신장은 과거에 ‘중국령 투르키스탄’, ‘투르키스탄’으로 불렸다. 과거 이 지역의 용어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투르키스탄’은 1930년대와 1940년대 각각 생겼다가 단명한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있어 구분이 되지 않는다. 둘째, 중국과 글로벌 지구는 ‘신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반면 신장을 중국이 강제로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위구르 민족주의자들도 ‘중국령 투르키스탄’을 쓰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장이라는 용어를 결국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고대 시기 이 지역은 흉노, 쿠차(월지), 유연, 돌궐, 위구르가 거쳐갔다. 


흉노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 동쪽에는 한나라가 자리했다. 한나라는 흉노와 ‘중가리아’라고 불리는 신장 북부 지역을 두고 계속 투쟁했으나 전반적으로 흉노에 밀려 거점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흉노가 타림분지와 투루판 분지를 이용하여 식량을 얻고 세수를 거둬 들이려 한 반면 한은 유목 세력의 자원을 빼앗고 힘을 억제하고자 서쪽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처럼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쿠차는 3~4세기 거대한 불교 도시였는데 3중으로 된 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천 개의 불교 사원과 불탑이 있었을 정도였다. 쿠차는 한 번쯤 들어봤을 승려 ‘구마라습(쿠마라지바)’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쿠차 인근에는 석굴을 비롯한 많은 불교 사원과 성소가 있었다. 현지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은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화나 불경을 제작하는 일에 후원을 많이 했다 한다.

4세기 중반 이후 유연이 흉노 세력을 뚫고 중가리아를 점령한다. 그러나 한 세기 후 유연은 북위의 공격을 받아 에프탈에게 그 자리를 넘겨준다. 돌궐은 유연의 지배 아래 있다가 국가를 건립했는데 중국의 수와 당 왕조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부침을 겪는다. 


9~10세기 무렵 세력이 재편된다. 위구르는 돌궐의 뒤를 이었다. 코초 위구르가 ‘고창 위구르’, ‘위구리스탄’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동북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면 카라한 조는 중가리아 서부를 책임졌고, 탕구트는 (동)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소그드인 네트워크는 중가리아를 중심으로 서부와 동부를 왔다 갔다하며 상업 흐름을 장악했다. 

중국과 신장 및 서역의 일부 지역사이에서 교역을 하던 상인들은 대부분 소그드인이었는데 이들은 신장뿐만 아니라 북중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도 상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의 상인들은 755년까지 당의 사료에서 "놀라울 정도로 부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P83

소그드인들은 소그드 문자와 마니교 종교를 믿었다. 위구르인들은 소그드 문자를 이용해 위구르 문자를 만들었고 뵈귀 카간 시절에 마니교 개종을 하기도 했다. 카라한조는 투르크의 이슬람화를 이끌었다. 


어느 경우이건 9세기와 10세기 투르크 부족의 정체성(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학문적으로 격렬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이다)에 대해 얼버무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날 중국의 위구르 민족의 정체성과 신장지역에 대한 이들의 역사적인 ‘권리주장‘을 현대의 민족주의자들이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호도된 것처럼 보인다. 코초 위구르와 카라한조 정권 모두 외부의 정복 엘리트들에 의해 수립되었는데, 이 엘리트 집단은 토하라인과 이란인을, 경우에 따라서는 인도인을 그리고 코초에서는 중국인 주민들을 지배했으며 이들과 통혼했다. 유전학적 유산 이외에도 이 제국의 궁정은 정치적,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유산을 이지역과 자신들이 지배한 백성들에게 남겼다. 정복 부족이 어떠한 이름으로 알려졌건 간에 카라한조의 경우는 후일 역사가들이 부여한 명칭이다-이러한 유산 모두가 후일 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과 함께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 P104~105


17세기에 이르러 신장 지역은 이슬람화되었다. 이로서 신장 지역은 문화적으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페르시아 지역과 연결되는 동시에 몽골 이후 북중국 지역의 문화와도 역학 관계로 연결된다. 

청은 러시아가 동진하면서 갈등에 놓이고 영국령 동인도회사가 북진하면서 글로벌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1853년에 이르러서는 청 중앙 정부의 국고가 바닥났으며, 각 성의 조세 기반이 반란, 특히 중국의 곡창이자 비단 산업의 중심지인 풍요로운 양쯔 강 중남부의 성들이 태평천국운동으로 인해 황폐해졌다는 점이다. 이해부터 신장에 지급되는 은 보조금은 연체되었으며 곧 지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신장의 청 당국은 처음으로 비축해 놓은 재원을 사용하고 전당포 주인들에게 이자를 붙여서 자금을 투자했으며 위구르 노동자들을 귀금속채굴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한족과 위구르인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벡들도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관직은 최고 입찰자에게 판매되었고 이들은 이후 자신들의 투자금을 회수하기위해 관할 하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했다. 벡들은 청 당국에 뇌물을 제공한 대가로 자유로이 권력을 휘둘렀다. 이와 동시에, 타림분지의 주민들이 점차 동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장 북부와 남부의 청 팔기군은 노쇠해졌으며 질병과 기아, 아편 중독으로 인해 병력이 손실되고 사기도 떨어졌다. - P183~184


청은 무너져 가는 제국의 힘을 짜내어 1876년 신장을 수복하고 1884년 신장 성을 건설한 이후 현지의 한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신장은 이슬람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서부의 지역들과 문화적으로 더 밀접했다. 1920년대 이후 민족주의와 근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등장,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중국은 양쩡신, 진수런, 마중잉, 성스차이, 장즈중 등 다양한 군벌이 군림하였다. 


1944년 신장 북부의 3개 지구에서 발생한 반란과 뒤이어 생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정부는 지역의 반중국적 정서와 (‘범투르크적‘이지 않은) 투르크 민족주의적 정서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이 운동은 정치단체를 돕고 주요 지도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군수물자와 군사훈련, 고문들을 제공한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소련에 의해 가능해졌으며 또한 통제되었다. 소련은 신장의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및 다른 민족들 사이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후원하고 이용했으며, 1945년 9월에는 동투르키스탄 민족주의자들의 희망보다는 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전략적 목표와 관련된 이유로 인해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제지했다. - P327


중국은 토지 개혁 운동 이후 통치를 확립하고 사회주의 이행을 진행하였으며 신장 지역에 자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5년 신장위구르자치구가 들어서면서 신장이 중국의 통제 하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을 지나 중국에 개혁개방 바람이 불었으나 신장 지역은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90년대 이후가 되면 교육과 의료, 기간 시설에 투자가 이루어지며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일어난다. 개발 붐이 일어나며 이주를 통해 인구가 급증한 것이다. 이로 인한 개발로 인한 환경의 문제, 중국의 지배력과 탄압에 의한 인권 문제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다.


‘엄중 처벌‘ 캠페인 아래 범죄자들과 분리주의 집단들을 체포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는 것에 더해, 1996년의 7호 문건은 1990년대 신장 소수민족들 사이의 문화 영역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집대성했다. 이러한 통제는 종교와 교육 문제에서 특히 명백했다. - P468


2000년대 초 당의 이론가들은 이미 이와 동일한 방향으로 민족 체제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수정하고 있었다. 이를 보여 주는 징후 중 하나가 공식적 영역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변화였는데, 스탈린식 민족 이론과 정책을 반영하는 ‘nationality‘라는 기존의 번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자료들은 ‘ethnic‘이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일례로 ‘Nationalities Affairs Commission‘ ‘Ethnic Affairs Commission‘]되었으며, 2005년 2월 발표된 백서는 ‘중국 소수 민족을 위한 지역 자치Regional Autonomy’s for Ethnic Minorities in China‘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처럼 사장된 스탈린식 민족 정책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중국은 일거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성가신 ‘다국적 국가multi-national state‘로부터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multi-ethnic state‘로 변모했다. 본래의 중국어 용어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새로운 영어 번역은 사실상 위구르인과 티베트인 및 다른 민족들을 (영어에서는 자결권과 아마도 국민 국가를 암시하는 ‘국민‘의 지위로부터 민족 (그리고 국가에 포함된 sub-national) 집단의 지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1990년대 폭력 사건의 여파 속에서 자치와 민족에 대한 재해석은 카슈가르로의 철로 확장만큼이나 명백히 신장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합주의적 접근법을 잘 보여 준다. - P473~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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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9-21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nationality 와 ethnic

거리의화가 2024-09-23 07:58   좋아요 1 | URL
지난달부터 국가, 민족, 인종 이런 개념들에 관한 책들을 좀 읽었거든요. 알고 보니 이 책에도 그런 내용들이 나와서 인상적이었어요^^
 

성폭행은 범죄 행위로 다루어지는 형법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이는 자기 사건의 증인이기도 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발하면, 가해자에 대한 형사 재판에서 국가(검사)가 원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고인은 보통 개인으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 헌법상 권리를 인정된다. 양형 거래가 없는 한, 유무죄는 합리적 의심기준에 따라 재판을 통해 결정된다.
반면 성희롱은 1964년 민권법 ‘타이틀 세븐‘에 근거한 민사 범죄다. ‘타이틀 세븐‘은 일반적인 시민의 평등권에 대한 것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법규다. 성희롱은 인종차별처럼 성별에 기반을유해한 차별 범주로 인식되어 왔다. - P120

페미니스트 비판의 압박하에 강간법은 매우 크게 바뀌었다.
(1) 여성의 ‘싫다‘는 그녀가 동의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그녀가 ‘은근넘어가려 하거나 ‘청하는 게 아니라는 점, (2) 그녀의 성적 이력은 특정한 경우에 대한 동의의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등의 통찰을 크게 반영했다. 피고인의 정당한 법적 절차를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진정으로 여성의 평등한 자율성을 보호하고 그들의 온전한 허구의 투영에 반하는) 주체적 소망과 느낌들을 보호하는 법적 문화를 생성해나가는 과정에서 변화는 느렸고, 풀어야 할 문제점들은 많았다. - P139

1964년 민권법은 고용 환경의 차별에 대해 길고 자세한 절을포함하고 있다. 일부만 읽어 보면 이러하다. "어떤 고용주든 고용이라는 광범위한 맥락에서 한 개인을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국가로 차별한다면, 이는 불법적인 고용 관행이다." (이 법령은시 시대적 특징을 보여 준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보호로부터 노골적으로 제외되었다.) "성별 때문에"와 "성별에 기반한"이라는 구절은 임신과 출산을 포함하는 (그러나 거기에 국한되지 않은 것으로 규정되고 있는데, 바로 뒤이어 모체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고용주가 임신중절 비용을 지불할 의무는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고용주들의 임신중절 비용 지불을 제한하지도 않는다. 이 조항은 보호받는 집단에 ‘불평등 효과‘를미치는 관행들을 금지하는데, 이 관행들이 "사업적 필요와는 무관하고, 아직 논의 중인 직위와 관련"이 없을 때 한해서만 그렇다. 이법령은 또한 법을 집행할 사명을 지닌 평등고용추진위원회(Equal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 EEOC)라는 행정 부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 P160

‘차이‘ 이론은, 두 당사자가 비슷하다면 두 당사자 모두 비슷하게 대우받아야 하지만 다르면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 P175

평등 이론은 차이 이론의 모호한 지점에서 좀 더 깊이 있고 분명한 규범적 논지를 제공한다. 주어진 상황이 차별적인가 아닌가를 묻는 데 있어 (혹은 헌법적인 맥락 속에서 평등 보호 조항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 데 있어) 우리가 보다 더 큰 사회의 권력 구조라든가 그들의 역사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P177

(1) ‘타이틀 세븐‘은 집단이 아닌 개인에 대한 것이며, 그러므로집단 차별의 양상을 보일 필요는 없다. (2) 성별이라는 요인은 고용 결정에 있어서 유일한 혹은 주요한 요인일 필요가 없고 ‘하지만(but/for)‘으로 시작하는 원인이 없었다면 고용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요소다. 사실 고용주는 자신이 완전히 다른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고 믿을 수 있다. ‘어머니인 경우‘라거나 ‘통계적인 기대수명‘과 같은 것 말이다. (3) 고용주가 통과해야 할 시험은 이것이다. 피고용인과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생물학적으로 반대 성별인사람도 같은 대우를 받겠는가? - P194

정치인은 문 앞에서 아우성치는 후임자들이 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스타운동선수나 희소한 예술가, 제도적 이유에 따라 영향력 있는 연방법원 판사들은 그렇지 않다. - P225

존 로버츠는 2017년 연말 보고서에서 "사법부는 2018년을 부적절한 행위를 조사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행동 수칙 및 그 절차가 모든 판사및 모든 법정 근무자를 위해 모범을 보일 만한 근무처를 보장하기적합한지를 신중하게 평가하는 일로 시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해당 수칙을 연구하고 변화를 권고하기 위한 양당 위원회를 설립했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성희롱에만 제한해서 분석한 것은 아니었으나 보고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강조 지점은 성희롱이었다. 사법부라는업무 현장 특성상 축소 신고를 장려하고 있음을 지적하였고, 특히판사와 서기관들의 비대칭적 관계 및 서기관들이 판사에게 사실상삶 전반을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서기관직의 짧은 재임 기간이 있다. 위원회는 직장의 임기가 길어질수록 직원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데 더 편안함을 느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세 가지 영역에서 개정을 권고했는데,
(1) 실질 기준, (2)항의 절차, (3) 괴롭힘을 예방하는 차원의 사전 - P255

교육 등이었다. 첫 번째 영역에 있어서는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 국가, 나이, 장애 유무,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등에 기반한 그어떤 형태의 괴롭힘에 해당하는 행위 및 발언들을 그 어떤 경우에도 만들지도, 용인하지도 않을 것이 판사의 의무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 P256

문화예술계 전체가 분야마다 경계 없는 하나의 거대한 일터가 된다. 이는 막대한 권력과 재력을 지닌 특정한 사람들이 거의모두의 기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지금 당장은와인스타인에게 고용되어 있지 않고 그의 제작사에 고용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처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당신은 늘 고용을 원하는 상태이며 언제 그러한 재력과 권력과 막강한 영향력을 - P274

가진 사람의 선의를 필요로 하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P275

프로 스포츠계에도 성희롱이나 가정 폭력 같은 문제들이 있지만 이 문제들은 예술계와 유사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경계, 강한 조합, 경영진의 철저한 관리 감독, 고발에 진지하게 주목하는것. 반면 대학 스포츠계의 D-I은 전체 구조 자체에 뼛속 깊은 문제가 있다. 바로 집단 행동과 외부 기업의 영향력이다. 이 업계 전체를 좀먹는 성적 부패와 학계의 부패는 고칠 수도 없다. - P319

남성들의 프로 스포츠 세계에 여성들이 편입됨에 따라 미국프로 스포츠 리그 또한 성폭행과 가정 폭력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정책의 필요성을 직시해 왔다. 직장 내 연애는 물론 선수의 ‘가정사‘에 대한 행동 강령이 계약 조항에 명시되었다. 메이저 스포츠의메이저 선수는 전부 이 정책하에 출장 정지를 당해 왔다. 일관적이지는 않았지만. - P327

운동선수들은 불법 약물의 사용이나 판매, 절도, 다른 재산 범죄 및 음주 운전 등 잠재적 형사 범죄들을 많이 저지른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상은 젊은 남성들이다. 이들은 열 살쯤부터 자신들은 피 끓는 남성성의 아이콘이기 때문에법은 자기들보다 못한 남성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고 여기며 자랐다. 그러니 많은 선수들이 성폭행, 성희롱, 스토킹 등 성범죄를저지르는 것이다. 구조상 TV 방송의 승패가 인재 한두 명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 인재들은 성범죄 혐의로부터 열성적인 비호를 받게되며, 경찰, 기소 검사, 판사인 학교 동문들까지 여기에 동참한다. - P339

문제는 더 있다. 이에 가담하는 모든 메이저 스포츠 학교에는지역 팀의 성공에 많은 재정적 지분을 담당하는 기업체가 연계되어있다. 이 결합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 P340

만약 법에 동등한 존중과 비(非)대상화를 지향하는 가치가 적절히 반영되고, 좋은 법이 집행된다면 선한 사람들은 이 진 빠지는 투쟁을 개인적으로 벌일유가 없다. 법은 우리 각자의 분투 속에서 방어벽이 되어 주기문이다. 물론 법은 이상적이지 않고 가끔은 구멍이 나지만, 직장 내성희롱이 단순히 개인적이고 불운했던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불법이기도 하다는 단순한 인식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그 차이는굉장했다. - P379

교만이라는 악에 맞서는 미덕은 자기 자신을 타인보다 낮게생각하는 흄이 말한 겸손 같은 것이 아니다. 그 미덕은 존중에 가까우며, 우위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차단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목소리를 들으려는 의지를 수반한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엄과 가치중심을 보는 것, 나아가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가려지고 황폐해진 변화와 성장의 잠재성을 보는 것이다. 행위와 그 너머의 사람 사이에 아주 강력한 구분선을 그어야 한다. 행위는 강력하게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항상 잠재력과 변화 가능성이 있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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