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루스 공국은 10~12세기 당시 유럽의 대국으로 군림했고 훗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러한측면에서 보면 우크라이나는 동슬라브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몽골의 침략 등으로 키예프는 쇠퇴하고 말았고, 소위 분가에 해당되는 모스크바가 대두하여 슬라브의 중심은 여기로 옮겨졌다. 루스(러시아)라는 이름까지 모스크바에 빼앗겼다. 그래서 그들은자기 나라를 나타내기 위해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역사상으로도 키예프 루스 공국은 우크라이나인의 나라가 아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발상의 나라로 받아들이게 됐다. - P6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이 아시아 최초의 유목민이었으며,
아랄해 주변에 살던 마사게타이인에게 쫓겨나 키메리아인이 살던 현재의 땅으로 이주했다는 제3의 설을 가장 신뢰했다. - P22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한때 부크강 어귀의 올비아에 살았다. 초원의 민족인 스키타이인과 바다의 민족인 그리스인 사이에는 교역을 통한 보완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스키타이의 땅은 비옥했고 스키타이의 지배층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배하에 뒀다. 한편 그리스인의 주식은 빵이었지만 정작 그리스 본토에 밀이 부족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키타이의 땅은 그리스 본토의 ‘빵 바구니‘가 됐다. 기원전4세기에는 아테네의 수입 곡물의 절반이 아조프해 연안에서 들어온것이었다. 곡물 외에도 생선, 가축, 가죽, 벌꿀, 노예까지 그리스에팔렸다. 그 대신 스키타이는 그리스인에게 항아리 같은 가재도구,
물, 장식품, 포도주, 올리브유 등을 샀다. 스키타이의 지배층은 그리스와의 무역으로 상당히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됐다. 앞서 언급한 스키타이의 대규모 고분과 그곳에 보관된, 세련된 황금 부장품들이 그 결과물이다. - P35

공국公國 혹은 대공국이라 하면 왕국이 되기에는 부족한 소국의 이미지를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2장의 주제인 키예프 루스 공국은 중세 유럽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대국이었다. 전성기였던 볼로디미르성공聖公 시대에는 유럽 최대의 판도를 과시했고, 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현공賢公은 자신의 딸들을 프랑스, 노르웨이, 헝가리의 왕에게 시집보낼 만큼 권력을 장악하여 유럽의 장인‘으로 불릴 정도였다.
키예프 공국의 군주는 크냐지knya 라고 불렀다. 크냐지의 어원은영어로 ‘킹‘, 독일어로 쾨니히knig, 스웨덴어로 ‘코눙그Konung‘에 해당되는 단어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크냐지의 아들과 자손을 모두크냐지라 부르면서 그 가치는 왕자나 공작 수준으로 하락했다. 후세에 와서는 크냐지가 다스리는 국가라는 뜻으로, 키예프국도 한 단계 아래 등긎인 공국이라는 단어가 붙게 됐다. - P42

키예프를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하여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했으며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러시아가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임은 새삼스럽게 논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의 논리는 이렇다. 모스크바를 포함한 당시 키예프 루스 공국의 동북 지방은 민족도, 언어도 달랐고 16세기가 되어서야 핀어 대신에 슬라브어가 사용됐을 정도였다.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이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후계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가혹한 전제 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 · 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사회·문화는 몽골에 의한 키예프의 파괴 (1240) 이후에도 1세기에걸쳐 현재 서우크라이나 지역에 번성한 할리치나 볼린 공국으로 계승됐다. - P44

통설로는 슬라브인이원래 살던 곳이 남쪽으로 카르파티아산맥, 서쪽으로 오데르강, 북쪽으로 프리파티강, 동쪽으로 드네프르강에 둘러싸인 지역, 즉 현재의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로 추정한다. 슬라브인은 7세기 초의평화로운 시기부터 이 지역에서 서서히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게다가 그들은 여타 민족이 살던 곳을 떠나 이동한 것과 달리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세력을 확장했다. 여기에는 슬라브인이 유목과 수렵의 민족이 아닌 농경 중심의 민족이었던 요인이 크다.
슬라브인 중에서도 키예프 루스를 형성한 것은 동슬라브인이며 이들이 현재 현재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가 된다. - P45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 방식은 키예프 공(대공)이 아들들을 지방의 공(지사)으로 각지에 배속하고, 대공이 죽으면 장남이 아니라 대공의 다음 동생이 계승하는 형제 상속이 원칙이었다. 한편 동시에 부자 상속도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불완전한 계승 방식은 대가 바뀔 때마다 형제간, 친족 간의 싸움을 일으켰고 결국 이것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혼란과 쇠퇴를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됐다. - P55

몽골의 정복으로 그때까지 명목상 남아 있던 키예프 루스 대공국은 종언을 맞이하고 기나긴 몽골 지배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공국들이 곧바로 소멸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공국은 몽골의지배에 복종하여 세금을 바치는 대가로 존속을 인정받았다. 몽골의지배 아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다. - P69

할리치나 볼린 공국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서남부에 있는 할리치나(러시아어로 갈리치‘, 영어로 갈리샤‘ 또는 갈리치아) 공국과 볼린(러시아어로 ‘볼린‘, 영어로 ‘볼리니아‘) 공국이 병합하여 형성된 공국으로1240년 키예프 함락 후에도 한 세기 가까이 존속했다. 할리치나 볼린 공국에 대해서는 기존에 거의 회고된 적이 없지만 우크라이나에는 더없이 중요한 존재다. 이 장의 서두에서 서술했듯 우크라이나는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키예프 루스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에는 계승할 국가가 없었다는 러시아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할리치나-볼린 공국이다.
우크라이나의 역사가인 토마셰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인구 90퍼센트가 거주하는 지역을 지배했던 최전성기의 할리치나 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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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삼일운동 -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정병욱 지음 / 역사비평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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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삼일운동 103주년이다.

기념하여 눈에 띈 도서인 이 책을 부랴부랴 읽었다.


기존 연구나 매체 활용에서는 삼일운동에 참여한 인물들 중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엘리트들에 주목된 면이 있다.

참여 인구로 따지면 67% 정도로 민중의 비율이 높음에도 엘리트에 주목을 한 건 상대적으로 이들은 이름이 알려져 있기에 남아 있는 자료가 많고 그들에 대한 평가도 양에 있어서 많아서일 것이다.

민중들의 자료는 지역사에서 간혹 다루어지지만 이마저도 모두가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료로 이용되는 인터뷰나 구술도 100% 확신성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생각하고 접근해야 함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도 최근 들어 삼일운동에서 민중을 주목한 연구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맥락이자 줄거리인 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되면 사람을 놓치게 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챕터별로 다른 이야기라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각 챕터별 중심 인물들이 생소할 수 있고(몇몇 인물 제외) 주변 관계 인물은 더더욱 생소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은 했지만 그럼에도 낮설어서 인물의 관계를 정리하고 상황을 그려가면서 보지 않으면 사건이 잘 안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책의 분량은 적었는데 읽으면서 정리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그리고 책에 삼일운동 DB의 출처들이 나오지만 더 상세한 내용을 원한다면 직접 DB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고 사건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본문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를 꼽아본다.


2019년 개봉작 영화 항거에는 여성 만세 시위자들이 등장한다.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371로 등장하는데 이는 수인번호가 아니라 사진(문서)보존원판번호라고 말한다.

당시 삼일운동으로 검거된 많은 이들의 사진이 일제감시대상카드에 올라와 있는데 이를 비교해보고 검토한 결과이다.

조선감옥령시행규칙 18조(1912.3 제34호)에 따르면 입감자에게 번호를 부여하는데 번호표를 상의 옷깃이나 가슴에 부착한다고 되어 있다.

수인번호는 수인복에 부착된 번호, 보존번호는 사진 원판 뒷면에 쓰인 번호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임명애, 어윤희, 유관순 사진의 보존번호가 연속하는데 어윤희 수감사진이 4월 1일에 찍었다고 되어 있으나 해당 날짜에 유관순은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했으므로 같이 찍은 사진이 아니다. 따라서 후대에 보존번호를 부여하면서 여성참여자 일부의 보존번호를 모은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수안군 사건의 중심인물인 홍석정이 있다.

1919년 3월 3일 낮 12시 한병익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오후 4시경 출발하여 밤새 걸어 다음날 오전 5시쯤 곡산군 곡산면에 도착하여 오전 10시 시위에 참여했다.

두 곳의 직선거리는 약 27km인데 산길로는 90리쯤 된다. 

한병익이 그 정도 걸렸는데 54세인 홍석정(전 천도교 수안교구장)은 3월 2일 새벽 수안면을 출발하여 곡산면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돌아와서 3월 3일 오전 6시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해주 지방법원 검사는 그 시간에 90리 되는 길을 왕복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며 다른 사람일거라 의심했다.

홍석정은 하루 꼬박 180리 넘게 산길을 걸으면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길가는 이들에게 만세시위 참가를 역설했다.

당시 판결문에는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시위에 참여했다는 인물이 많이 보인다.

홍석정이 홍길동이 아니고서야 이는 말이 되지 않으므로 연락을 받은 이들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연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안 만세시위 사건은 1919년 하반기 해주 지방법원에서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는 내란죄로 다루기 위해서였다.

만세시위 후 수안 천도교인은 분열로 쪼개지며 시련을 맞이한다.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 현재는 화성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는 삼일운동을 대표하는 격렬한 시위로 그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지역이다. 폭력시위의 면에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우리는 보통 삼일운동 시위를 비폭력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가 많은데 이 시위가 대표적이다.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 주동세력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지역유지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의 하층민, 개간 노동자, 외지인 같은 농촌의 기층민중이었다.

전자는 조직을 통해 장안면 주민을 동원했고, 후자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과 동료를 모았다.

이렇게 위와 아래가 함께 만세시위를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니지만 장안면 우정면의 만세시위가 특별한 것은 기층민중이 주도권을 잡았고 이것이 시위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것일 것이다.

시위 참가가 대세로 흘러갔지만 이 과정에서 동원을 해석해야 한다.

피의자 대부분이 협박에 못 이겨 나갔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농촌에서 특히 많이 보였다고 하는데 이런 협박과 동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저자는 주목했다.

강제는 사람들의 봉기에 대한 의욕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다만 이런 동원을 자주성이나 주체성 결여로 보는 것은 근대인의 편견이라고 말한다. 

강제에 매개된 공동체적 규제, 관계성은 민중이 움직이는 힘에 의거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의 내용만큼 보론을 실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삼일운동의 사료에 대한 비판, 그리고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 사건에 대한 재구성,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


삼일운동의 사료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인 삼일운동 DB를 기억할 것이다.

2019년은 삼일운동 100주년으로 온라인 DB 구성 뿐 아니라 관련한 전시 등도 많았고 많은 저서들도 출간되었다.

DB 작업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나도 당시 사이트를 확인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삼일운동의 공식적인 온라인 DB가 생겼으니 이후에는 손쉽게 DB를 검색하여 1차 자료를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삼일운동 100주년 때 출간된 도서 중 여러 저서에서 사료를 사용한 것 중에 출처가 없거나 무분별적으로 수용한 것이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런 경우는 자주 있다. 

하지만 역사 연구자가 출처가 없는 사료를 그대로 가져다쓰는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연구자조차 검증을 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사료를 가져다 쓴다면 대부분의 역사책을 읽는 독자들이 검증을 거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오류 발생 가능성을 낳는다.

문제는 이런 독자가 늘면 늘수록 전방위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수안면 만세시위에 대한 기존 연구와 저자의 시각의 차이가 커서 기존 연구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고 저자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사건을 담은 논문을 실었다.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는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대책, 엘리트와 민중의 대응을 담은 글로 삼일운동 전후의 맥락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이다.


이제는 삼일운동도 어느덧 100년도 훌쩍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꾸준히 기록을 찾아내고 발굴하지 않으면 점점 더 잊혀질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기록조차 사라질 수 있기에 1차 자료를 꾸준히 발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해당 자료를 다양한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기에 반갑고 좋은 일이라 여겨진다.

물론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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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04 19: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벌써 3.1.운동이 103년전이네요.다르게 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듭니다. 알려지지 않은 민중에 대한 이야기여서 더 좋은거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3-04 20:01   좋아요 3 | URL
당시 사건을 직접 경험한 분들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세기가 흘렀다는 것이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는 생각도 들구요. 누구나 다 아는 독립운동가들이 아니라 실질적인 운동의 주체자인 민중들을 다루어주어 좋았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03-04 20: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고 있으니 정말 이분들이 안계셨더라면 우리의 독립이 제대로 이루어졌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세계대전의 종결로 인해 거저 얻어진 게 아닌, 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의 대가이지 않을까?싶어요.
벌써 103주년이라니~~

거리의화가 2022-03-04 22:42   좋아요 4 | URL
저는 당시 사람이었다면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종종 떠올리는데 그때마다 심정이 복잡하더라구요ㅠㅠ 21세기에도 버젓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씁쓸한 현실 앞에서 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달려들었을 선조들을 떠올려봅니다.

mini74 2022-03-05 21: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삼일운동시 잡힌 분들 사진 보는데 너무 어리더라고요. 그 분들 위해서라도 친일청산 제대로 되었어야 했는데 말이죠 ㅠㅠ

거리의화가 2022-03-05 22:45   좋아요 1 | URL
네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두고 두고 아쉬운 일이에요 이 때문에 현대사도 이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됐죠.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후손들의 삶도 여전히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삼일운동은 가문과 지역의 영광이었고, 그에 따른 회고와 조사가 이뤄졌다. 또 천도교와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 영향력과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가 이뤄졌다. 폭력시위‘를 강조하는 연구는 주로 피의자나 판결문이 인정하지 않았던 ‘최대치의 폭력‘을 인용했다. 저마다의 진실을 감안하면, 모든 역사 연구가 그렇듯 사실을 온전히 복원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자료나 기존 기억과 연구를 검토하면서 발견한 사각지대‘를 말해보는 것, 그 사각지대를 시야에 넣고 전후 맥락에서 이 만세시위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 P152

‘협박‘과 ‘동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근세 일본민중사를 연구한 고故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는 잇키一接, 민중 봉기에서 보이는 ‘강제 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참가 강제는 잇키가 그 지역의 ‘대세‘가 되어, 지역공동체적 결속 차원에서 참가가 당연한 일이 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잇키에 참가했던 대다수 사람은 그 참가 책임을 첫째 강제된 사실에, 둘째 참가가 ‘대세‘ 였다는 사실에, 셋째촌락공동체에 돌릴 수 있었다. 따라서 참가 강제는 사람들이 쉽게 잇키에 참가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강제‘는 사람들의 봉기에 대한 의욕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이런 ‘동원‘을 자주성이나 주체성 결여로 보는 사람이있다면, 그것은 근대인의 기묘한 편견이다. 근세 민중의 능동성이나 수동성의 압도적 부분은 공동체적 규제와 관계의 매개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강제‘에 매개되는 것이 저들의 능동성과 활동성의 구체적인 존재형태일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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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은 민중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다면 ‘33인 사건‘에 그쳤을 것이다. ‘부화뇌동‘ 이란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으로, 당시 식민권력이 만세 부른 민중과 삼일운동을 깎아내리기위해 종종 썼던 말이다. 뒤집어 보면 부화뇌동‘은 공감하고 연대할 줄아는 민중의 능력을 의미하며, 이것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삼일운동은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감하고 연대했던 민중이 주인공인 삼일운동의 역사를 써보자, 애초 이 책의 의도였다.‘ - P6

삼일운동의 주인공으로 볼 때 이런 질문이 살아난다. 민중이 ‘독립‘을 통해 바라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저항 엘리트는 그 바람을 ‘민족‘이나 ‘혁명‘에 담고자 했으며, 어느 쪽이든 그 그릇은 공화정이었다. 매년 3월 1일이 돌아오면 우리는 공화정이 오래되었음을 자랑한다. 그런데 공화정은 민중의 바람을 제대로 담아냈는가, 지금은 어떠한가? 어디까지나 엘리트 편향을 넘어서자는 것이지 반反엘리트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엘리트가 자기 이해관계에 갇히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 이 점은 조선왕조의 말로가 잘 보여준다. 엘리트야말로 엘리트 편향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바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욱이민중은 자주 엘리트를 매개로 능동성을 발휘하니, 엘리트는 중요하다. - P8

최재형의 갈등과 선택을 곱씹어볼 때마다 이주사 전문가 디르크 회르,
더(Dirk Hoerder)의 글이 생각난다. "도착지의 이주민들도 언어, 음식, 습관 그 밖의 일상적인 행위는 태생지 관례를 따랐지만, 황제 숭배, 계급적 위계, 그리고 여성일 경우에는 성별 위계에 대한 태생지 관례는 폐기처분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대해서는 문화적 친근감을 드러내고, 용납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냈다. 그들이 태생지에서 가져온 것은 국가 정체성이 아닌 문화적 경험과 ‘본국’에서는 실현 불가능했던 인생의 목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후 활동을 보건대 최재형에겐 회르더가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국가 정체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국가가 여전히 신분제가 작동하는 나라는 아니었다. - P18

이주는 근대국가를 만들기도 하지만 의심하게도 한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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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역사적 사실(인물의 경우도 포함하여)은 그것만을 따로 떼어 고립적으로 인식할 때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여하한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어떠한 계기에서 발생하였으며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하다가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갔는가 하는 역사적 관계 내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동시에 또 그것을 당시의 사회구조, 당시의 가치 규준에 조응시켜 당시의 사회구조가 갖는 필연적 한계를 늘 그것의 인식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P89

저는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하여야 사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P100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 하기에 앞서, 붓을 잡는 자세를 성실히 함으로써 먼저 뜻과 품성을 닦는, 오히려 ‘먼 길‘을 걸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과 품성이 비로소 훌륭한 글씨와 그림을 가능하게 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도(人道)는 예도(藝道)의 장엽(長葉)을 뻗는 심근(深根)인 것을, 예도는 인도의 대하로 향하는 시내인 것을, 그리하여 최고의 예술 작품은 결국 ‘훌륭한 인간‘, ‘훌륭한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 P113

역사책에서는 심지어 같은 책인 경우에도 매번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서 말 구슬처럼 많은 사실을 실에 꿰어 하나의 염주로 정돈할 수 있다면 좀처럼 사삼(史森)의 미아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P115

어느 특정기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과 계통적인 독서는 대부분의 독서가 실족하기 쉬운 그 파편성, 현학성을 제거해준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P132

자연을 적대적인 것으로, 또는 불편한 것, 미개한 것으로 파악하고 인간생활로부터 자연을 차단해온 성과가 문명의 내용이고, 차단된 자연으로부터의 거리가 문명의 척도가 되는 ‘도시의 물리‘, 철근 콘크리트의 벽과 벽 사이에서 없어도 되는 물건을 생산하기에 여념이 없는, 욕망과 갈증의 생산에 여념이 없는, 생산할수록 더욱 궁핍을 느끼게 하는 문명의 역리에 대하여, 야만과 미개의 대명사처럼 되어온 한 인디언의 편지가 이처럼 통렬한 문명비평이 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문명과 야만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옳다고 생각됩니다. - P155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릿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 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 출석부의 명단을 죄다 암기하고 교실에 들어간 교사라 하더라도 학생의 얼굴에 대하여 무지한 한, 단 한명의 학생도 맞출 수 없습니다. ‘이름‘은 나중에 붙는 것,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 믿습니다. - P164

글씨도 그 속에 인생이 들어 있는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어떤 때는 글씨의 어려움을 알기 이해서 글씨를 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 P223

영위하는 일상사와 지닌 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자연 생각이 공허해지게 마련이며 공허한 생각은 또한 일을 당함에 소용에 닿지 못하여 한낱 사변일 뿐이라 믿습니다. 저희들이 스스로를 통찰함에 특히 통렬해야 함이 바로 이런 것인즉, 속빈 생각의 껍질을 흡사 무엇인 양 챙겨두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 P226

창문보다는 역시 문이 더 낫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 조용히 서서 먼 곳에 착목하여 스스로의 생각을 여미는 창문이 귀중한 ‘명상의 양지‘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연히 문을 열고 온 몸이 나아가는 진보 그 자체와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230

서도는 그 성격상 토끼의 재능보다는 거북이의 끈기를 연마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글씨의 훌륭함이란 글자의 자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묵 속에 갈아 넣은 정성의 양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평가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아서 타고난 얼굴의 조형미보다는 그 사람의 지혜와 경험의 축적이 내밀한 인격이 되어 은은히 배어나는 아름다움이 더욱 높은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보는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첩경과 행운에 연연해하지 않고, 역경에서 오히려 정직하며, 기존과 권부에 몸 낮추지 않고, 진리와 사랑에 허심탄회한.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P242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 P298

역사현상은 그것이 개인이든 사건이든, 하나의 단절된 객체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여러 가지의 계기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변용의 가능한 방향에 긍하는 총합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더욱이 ‘고거‘란 완성되고 끝마쳐진 어떤 불변의 것이 아니며, 반대로 역사인식은 언제나 현재의 갈등과 관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에 투영된 현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계속 새롭게 씌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P302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그 즐거움은 놀이이며, 궁리는 학습이고, 만들어내는 행위는 곧 노동이 됩니다. 이렇나 생활 속의 즐거움이나 일거리와는 하등 인연도 없이 칠판에 백묵으로 적어놓은 것이나 종이에 인쇄된 것을 ‘진리‘라고 믿으라는 ‘요구‘는 심하게 표현한다면 어른들의 폭력이라 해야 합니다. 이런 무리한 요구에 억눌려 자라지 못하는 무수한 가능성의 싹들을 생각하면 시험과 성적과 모범 등, 이러한 학교의 도덕적 규준이 만들어내는 품성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 P330

관계를 맺음이 없이 길들이는 것이나 불평등한 관계 밑에서 길들여진 모든 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입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 개의 나무의자든, 높은 정신적 가치든, 무엇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창문 앞에 서는 공감을 의미하며,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P346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손으로 창조한 것을 자각케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관련을 갖는다, 그리고 자기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대되는가를 실감케 하는 부단한 계기를 생활의 현장, 그 경제적 기초 위에 창조해내는 운동이야말로 민중들의 합의된 결단을 이끌어내고 지연, 혈연 또는 작업장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뛰어넘어 ‘공동의 터전‘을 이룩하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갈 농촌도 없고 뿌리내릴 터전도 없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메마른 자세만을 꾸짖는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일 뿐 아니라 너무나 야박한 짓이라 생각됩니다. 많은 노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제가 젊은 사람들의 태도 중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젊은 사람들은 미운 사람이 시키는 일이나 별로 의미를 느낄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지극히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입니다. - P390

중요한 것은 소위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 P403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 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심한 한마디 말에서부터 피땀 어린 인생의 한 토막에 이르기까지 혹은 친구들의 마음속에, 혹은 한 뙈기의 전답 속에, 혹은 타락한 도시의 골목에, 혹은 역사의 너른 광장에, 저마다 묻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 P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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