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은 가문과 지역의 영광이었고, 그에 따른 회고와 조사가 이뤄졌다. 또 천도교와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 영향력과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가 이뤄졌다. 폭력시위‘를 강조하는 연구는 주로 피의자나 판결문이 인정하지 않았던 ‘최대치의 폭력‘을 인용했다. 저마다의 진실을 감안하면, 모든 역사 연구가 그렇듯 사실을 온전히 복원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자료나 기존 기억과 연구를 검토하면서 발견한 사각지대‘를 말해보는 것, 그 사각지대를 시야에 넣고 전후 맥락에서 이 만세시위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 P152

‘협박‘과 ‘동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근세 일본민중사를 연구한 고故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는 잇키一接, 민중 봉기에서 보이는 ‘강제 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참가 강제는 잇키가 그 지역의 ‘대세‘가 되어, 지역공동체적 결속 차원에서 참가가 당연한 일이 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잇키에 참가했던 대다수 사람은 그 참가 책임을 첫째 강제된 사실에, 둘째 참가가 ‘대세‘ 였다는 사실에, 셋째촌락공동체에 돌릴 수 있었다. 따라서 참가 강제는 사람들이 쉽게 잇키에 참가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강제‘는 사람들의 봉기에 대한 의욕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이런 ‘동원‘을 자주성이나 주체성 결여로 보는 사람이있다면, 그것은 근대인의 기묘한 편견이다. 근세 민중의 능동성이나 수동성의 압도적 부분은 공동체적 규제와 관계의 매개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강제‘에 매개되는 것이 저들의 능동성과 활동성의 구체적인 존재형태일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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