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루스 공국은 10~12세기 당시 유럽의 대국으로 군림했고 훗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러한측면에서 보면 우크라이나는 동슬라브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몽골의 침략 등으로 키예프는 쇠퇴하고 말았고, 소위 분가에 해당되는 모스크바가 대두하여 슬라브의 중심은 여기로 옮겨졌다. 루스(러시아)라는 이름까지 모스크바에 빼앗겼다. 그래서 그들은자기 나라를 나타내기 위해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역사상으로도 키예프 루스 공국은 우크라이나인의 나라가 아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발상의 나라로 받아들이게 됐다. - P6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이 아시아 최초의 유목민이었으며,
아랄해 주변에 살던 마사게타이인에게 쫓겨나 키메리아인이 살던 현재의 땅으로 이주했다는 제3의 설을 가장 신뢰했다. - P22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한때 부크강 어귀의 올비아에 살았다. 초원의 민족인 스키타이인과 바다의 민족인 그리스인 사이에는 교역을 통한 보완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스키타이의 땅은 비옥했고 스키타이의 지배층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배하에 뒀다. 한편 그리스인의 주식은 빵이었지만 정작 그리스 본토에 밀이 부족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키타이의 땅은 그리스 본토의 ‘빵 바구니‘가 됐다. 기원전4세기에는 아테네의 수입 곡물의 절반이 아조프해 연안에서 들어온것이었다. 곡물 외에도 생선, 가축, 가죽, 벌꿀, 노예까지 그리스에팔렸다. 그 대신 스키타이는 그리스인에게 항아리 같은 가재도구,
물, 장식품, 포도주, 올리브유 등을 샀다. 스키타이의 지배층은 그리스와의 무역으로 상당히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됐다. 앞서 언급한 스키타이의 대규모 고분과 그곳에 보관된, 세련된 황금 부장품들이 그 결과물이다. - P35

공국公國 혹은 대공국이라 하면 왕국이 되기에는 부족한 소국의 이미지를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2장의 주제인 키예프 루스 공국은 중세 유럽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대국이었다. 전성기였던 볼로디미르성공聖公 시대에는 유럽 최대의 판도를 과시했고, 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현공賢公은 자신의 딸들을 프랑스, 노르웨이, 헝가리의 왕에게 시집보낼 만큼 권력을 장악하여 유럽의 장인‘으로 불릴 정도였다.
키예프 공국의 군주는 크냐지knya 라고 불렀다. 크냐지의 어원은영어로 ‘킹‘, 독일어로 쾨니히knig, 스웨덴어로 ‘코눙그Konung‘에 해당되는 단어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크냐지의 아들과 자손을 모두크냐지라 부르면서 그 가치는 왕자나 공작 수준으로 하락했다. 후세에 와서는 크냐지가 다스리는 국가라는 뜻으로, 키예프국도 한 단계 아래 등긎인 공국이라는 단어가 붙게 됐다. - P42

키예프를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하여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했으며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러시아가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임은 새삼스럽게 논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의 논리는 이렇다. 모스크바를 포함한 당시 키예프 루스 공국의 동북 지방은 민족도, 언어도 달랐고 16세기가 되어서야 핀어 대신에 슬라브어가 사용됐을 정도였다.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이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후계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가혹한 전제 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 · 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사회·문화는 몽골에 의한 키예프의 파괴 (1240) 이후에도 1세기에걸쳐 현재 서우크라이나 지역에 번성한 할리치나 볼린 공국으로 계승됐다. - P44

통설로는 슬라브인이원래 살던 곳이 남쪽으로 카르파티아산맥, 서쪽으로 오데르강, 북쪽으로 프리파티강, 동쪽으로 드네프르강에 둘러싸인 지역, 즉 현재의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로 추정한다. 슬라브인은 7세기 초의평화로운 시기부터 이 지역에서 서서히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게다가 그들은 여타 민족이 살던 곳을 떠나 이동한 것과 달리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세력을 확장했다. 여기에는 슬라브인이 유목과 수렵의 민족이 아닌 농경 중심의 민족이었던 요인이 크다.
슬라브인 중에서도 키예프 루스를 형성한 것은 동슬라브인이며 이들이 현재 현재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가 된다. - P45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 방식은 키예프 공(대공)이 아들들을 지방의 공(지사)으로 각지에 배속하고, 대공이 죽으면 장남이 아니라 대공의 다음 동생이 계승하는 형제 상속이 원칙이었다. 한편 동시에 부자 상속도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불완전한 계승 방식은 대가 바뀔 때마다 형제간, 친족 간의 싸움을 일으켰고 결국 이것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혼란과 쇠퇴를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됐다. - P55

몽골의 정복으로 그때까지 명목상 남아 있던 키예프 루스 대공국은 종언을 맞이하고 기나긴 몽골 지배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공국들이 곧바로 소멸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공국은 몽골의지배에 복종하여 세금을 바치는 대가로 존속을 인정받았다. 몽골의지배 아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다. - P69

할리치나 볼린 공국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서남부에 있는 할리치나(러시아어로 갈리치‘, 영어로 갈리샤‘ 또는 갈리치아) 공국과 볼린(러시아어로 ‘볼린‘, 영어로 ‘볼리니아‘) 공국이 병합하여 형성된 공국으로1240년 키예프 함락 후에도 한 세기 가까이 존속했다. 할리치나 볼린 공국에 대해서는 기존에 거의 회고된 적이 없지만 우크라이나에는 더없이 중요한 존재다. 이 장의 서두에서 서술했듯 우크라이나는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키예프 루스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에는 계승할 국가가 없었다는 러시아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할리치나-볼린 공국이다.
우크라이나의 역사가인 토마셰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인구 90퍼센트가 거주하는 지역을 지배했던 최전성기의 할리치나 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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