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연필 출판사에서 기획하는 북토크가 있어서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다녀 왔다. 세 세션 모두 ‘여성’을 화두 삼아 더 넒은 시야를 갖게 하는 책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세션 1에서 정희진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예상했지만 세 세션 중 관객수가 가장 많았다. 선생님의 음성을 오디오를 통해서 계속 들어와 익숙해서인지 들어오시자마자 ‘아! 저분이구나.’ 했다. 나무연필에서 내놓고 있는 ‘메두사의 시선’ 시리즈에 대한 기획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현재 한국의 연구 및 출판 문화의 문제, 좋은 책과 다양한 책을 읽지 않는 독서의 문화가 있는 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모든 언어에는 위치성이 있어 로컬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탈식민주의 과정이기도 하다고. 젠더적 감수성, 남성성에 대한 좋은 연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책들을 번역해 내는 것이 ‘메두사의 시선’의 기획이라고 한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토크 중간에 윤석열 정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션을 듣고 있으면서도 한숨과 탄식,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 이어졌다. 좋은 독자가 있어야 좋은 책이 나온다는 말은 당연하다.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대한민국 사람들, 그마저도 인문학적 통찰을 주는 좋은 책을 읽지 않는 문화가 이어지는 한 출판시장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앞날은 희망적이지 않은 것 같다.
세션 2에서는 과학하는, 예술하는, 여행하는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이라는 여성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근세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 때 활동한 화가이다. 당시 16~17세기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여성들은 식물도감에 들어가는 세밀화를 많이 그려서 경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독일 마르크에 메리안이 모델로 쓰였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메리안이 활동하기 이전 클라라 페트로스라는 여성 화가가 있었다. 그녀는 ‘정물화’라는 명칭이 생겨나기도 전 식탁에 있는 소품, 음식 등이 담긴 정물화의 모태를 그려냈다. 여성은 길드에 가입할 수조차 없어 화가라는 명칭이 부여될 수 없었던 시절에 그녀는 활동했다. 미켈란젤로 등 당대 유럽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화가들은 북유럽 미술의 주요 작가인 여성들을 폄하했다. 이유인즉슨 성모를 그리지 않아서 신성성이 부족하다느니, 조형미와 균형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낮은 평가를 했던 것이다. 지금의 시기 우리가 중세 유럽의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활발한 경제 활동으로 꽃 시장이 발달하여 카달로그에 그림 그릴 기회가 늘어났는데 여성들은 이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북유럽 미술은 정물, 풍속, 꽃 등의 일상을 담은 그림이 많았다고 보면 된다. 메리안은 네덜란드의 황금기가 저물 무렵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수리남에 가서 50대의 대부분을 <수리남 곤충의 변태>라는 책을 집필하기 위한 시간으로 보냈다. 그 시기 여성이 섬에 단독으로 가서 몇 년을 보내며 글을 쓰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그 결과물이 바로 <수리남 곤충의 변태>다.
세션 3에서는 한국 여성미술가들을 조명하며 페미니즘과 교차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자와 사회자가 있어서 경쟁하듯 질문과 답을 이어가는 시간이었는데 두 여성 원로 미술 사학자들로부터 듣는 생생한 한국 현대 미술과 페미니즘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김홍희 선생님은 <페미니즘 미술 읽기>를 근간에 내셨는데 이 책은 경향신문에 페미니즘 미술에 대하여 다룬 칼럼들을 책으로 엮어 심화하여 출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윤난지 선생님이 기획하고 현대 한국미술포럼이 참여하여 소외되고 배제된 한국의 여성 근현대 미술가들 105명을 추려내어 엮어낸 결과물이다. 김홍희 선생님은 페미니스트적 시각으로 미술 현장과 담론을 균형 있게 책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윤난지 선생님이 기획한 105명의 인물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활동을 했음에도 가려져 볼 수 없었던 아티스트들이다. 일단 호명되어야 평가될 수 있다는 윤난지 선생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1990년대가 되면 한국에 포스트 모더니즘을 비롯한 페미니즘 이론이 수입되는데 이 시기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비롯한 신세대 미술가들의 다양한 대안공간에서의 미술 작업들이 현재의 대한민국 미술의 바탕이 되었다. 신세대 미술가들은 정치성과 결합하고 탈이데올로기를 호출하는 방식으로 미술 작업을 이어나갔다. 정체성이 없는 미술 작업은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그들이었다. 그렇다면 현재를 이끄는 청년들인 MZ세대의 미술 작업은 어떨까. 그들은 개인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업주의를 낮게 평가하지 않는 것 같다. 두 선생님들은 그들이 경질적 가치를 꿈꾸기를 바란다고 소망하셨다. 20세기는 여성 미술가들이 외면받아야만 했던 극심한 시기였다. 이제 더는 여성 미술가들이 박절받는 시대는 아닌 것 같지만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비롯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가부장제에 머물러 있다. <페미니즘 미술 읽기>와 <그들도 있었다>를 통해 한 책에서는 여성 미술가들의 인물 열전, 다른 한 책에서는 페미니즘 이론의 실천적 미술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이 책은 미술 생태계에서 남녀 편차가 극심하게 드러나는 한국 미술의 현대화 시기, 즉 20세기를 성별에 따른 필터링 없이 보다 정확하게 바라보려는 시도다. …
105라는 수만큼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을 목차로 묶어 구성하는 것은 모순과 편차를 아우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의 시기와 내용, 방법 등을 고려하여 10개 항목으로 분류함으로써 최소한의 갈피를 잡고자 했다. - P6
북토크기 있기 전 같은 건물에서 특별 기획전인 <차이의 미학> 전시를 보았다. <그들도 있었다>에 포함된 미술가들의 작품도 들어가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특별전 <차이의 미학>은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주제로 한 전시다. 살아가면서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는 우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잊고 타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행한다. ‘다름’을 틀린 것이 아니라 다양성임을 깨닫고, 타인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여정이 필요하다.
전시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는 작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나는 김윤신, 데비한, 김순임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김윤신 작가의 작품은 다양했는데 특히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은 ‘합’과 ‘분’이 동양 철학의 바탕을 의미하듯 두 개체가 하나가 되고,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그리고 반복)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과 미술 재료(나무 등) 자체를 통한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반면 또 다른 작품인 <즐거움의 울림>이나 <내 영혼의 노래>는 동양의 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비상처럼 날개를 펼칠 수 없었던 여성들이 활짝 개화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듯한 느낌이었다.
김순임 작가가 표현한 설치 미술은 <비둘기 소년>이다. 작가가 뉴욕 레지던시에서 동유럽 출신의 이민자이지만 건물 관리인 다니엘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건물에 들어설 때 항상 다니엘을 마주했지만 동료 작가들조차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펠트와 깃털로 제작된 작품으로 다니엘이 소년이었을 때 길에서 음식을 주워먹고 연명할 정도로 어렵게 성장했다고 한다. 어른이 된 소년은 여전히 도시의 그늘처럼 존재한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풍경이 되어버린 도시의 비둘기, 건물의 풍경 같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은 이어진 존재가 아닐까.
데비한 작가의 <비너스 상>은 언뜻 보면 그냥 평범한 고대 그리스 상을 표현했나보다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상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 보면 놀랍게도 모두 다른 모습들을 하고 있다. 눈과 코, 입술이 표현되지 않은 얼굴도 있고 오똑한 코의 얇은 입술을 가진 얼굴, 넓은 볼을 가진 코의 두터운 입술을 가진 얼굴, 뾰족한 코의 두툼한 입술을 가진 얼굴 등…. 작가는 해외에서 이주민으로 살면서 느낀 차별에 대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작가만의 시선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재료를 한국의 전통 재료인 도자기를 사용했다는 것도 특징적이다. ‘미의 척도’인 비너스를 단일한 미로 표현하지 않고 다양한 미로 표현해낸 이 작품에 오래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