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2>
영국의 찰스1세의 폭정에 의회는 권리청원을 내세웠으나 이를 강제로 무마하려다 결국 체포되어 반역죄로 처형되는 결말을 맞는다.
찰스1세 사후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지만 크롬웰이 집권하면서 또 다른 폭정이 시작되어 국민들은 분노하게 된다. 그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영국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다.

<CH13>
루이14세는 신을 대표한다며 태양왕이라는 별칭을 가졌다. 베르사유 궁전을 지으며 화려하게 치장하면서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높게 매겨 후반부로 갈수록 백성들의 화가 치솟는다.

<CH14>
독일의 제후국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왕국을 다스리던 프리드리히 1세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군대를 파병해 신성 로마 제국을 도운 대가로 1701년에 황제로부터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를 허락받는다. 그는 여러 차례 종교 전쟁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며 군사력을 강화해 18세기에 독일 제후국들을 이끄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CH15>
메사추세츠에 정착한 영국인들과 현지 부족민인 왐피노그족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이어졌다. 그 결과 왐피노그족 추장은 살해되고 부족민들은 쫓겨나야 했다.
뉴프랑스 지역의 휴런족이 약해진 사이 현지 부족민인 이로쿼이 족이 공격하여 뉴프랑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영국 해군 제독의 아들인 윌리엄 펜은 퀘이커 교도로 아버지에게 쫓겨나고 결국 퀘이커 교도를 이끌고 미국의 펜실베니아에 가게 된다.

<CH16>
윌리엄 펜은 모든 이가 평등한 세계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곳이 자신의 국가가 아니라 결국 다른 땅을 점령하여 만들어지는 식민지라는 것이 함정!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넘고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넘어 아이작 뉴턴이 중력을 발견하는 과정은 언제 읽어도 참 흥미롭다. 존 로크가 이야기한 평등과 민주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친다. Western Ideas? 계몽이란 단어가 껄끄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영국은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업 발전을 이룬다.

<CH17>
표트르(영어로는 Peter) 1세는 누나인 소피아와 권력을 경쟁하다 군대가 자신 편에 서면서 오롯이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 차르에 오른 그는 영국의 배와 해군을 부러워해 서쪽으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부동항 밖에 없어 아조브 항구를 얻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를 넘어설 수 없어 결국 유럽을 여행하며 서쪽의 문화를 배운다. 수염을 깎고 옷을 그쪽 방식으로 입으라고 가위를 가지고 따라 다녔다는 것이 포인트!!!

<CH18>
아흐메트 3세 하의 오스만투르크는 서양의 영향을 받았고, 그는 튤립왕으로 불렸다.

<CH19>
벵골 태수인 시라지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불만이 있었다. 영국인이 윌리엄 요새 보강을 명령하자 대군을 동원해 체포하라 명령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지역 군이 맞서며 플라시 전투가 벌어졌으나 영국군이 승리하며 벵골은 영국 식민지가 된다. 영국은 인도 전역에 지배권을 강화한다.

<CH20>
청의 건륭제는 천하의 모든 책을 수집해 정리한다는 명령 하에 사고전서를 짓게 하고 보관을 위해 문연각을 세운다.
1750년대부터 시작된 정복 활동으로 주변 지역인 중가르, 위구르 등 서역, 베트남, 미얀마, 타이완에 손을 뻗친다.

<CH21>
북미를 두고 벌어진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이 세 차례 일어났다.
슐레지엔 지역 영유권을 두고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프로이센과 영국이 승리하여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는 동안 미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이 벌어졌다(영국이 승리).

<CH22>
비록 미국으로 건너가기는 했지만 영국인들은 본토와 같은 권리를 받기를 원했던 영국인. 차별적인 차 관세으로 말미암아 보스턴 차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에서 식민지인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영국 정부는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군대를 보냈다. 영국 정부의 의도를 간파한 식민지인들은 전쟁에 대비해 무장을 하기 시작하고 이는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고 아메리카 식민지는 독립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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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9-23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정말 엄청 성실하시네요. 하기로 한 건 또 반드시 해내시고요. 꾸준히 읽고 싶은 책도 읽으시면서 또 꾸준히 함께 읽는 책들도 읽어내시고 정말 멋져요!!

거리의화가 2024-09-23 07:5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 저는 다락방 님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지 않잖아요. 조카랑 놀아주고 요리도 하시고 가족, 친구와 시간도 보내시고 달리기랑 요가도 꾸준히 하시니^^ 그게 얼마나 에너지가 필요한지 알기에 저는 그저 감탄만 합니다.
저 이번주부터 피티 운동 시작하거든요. 몸이 저질이라 걱정입니다ㅠㅠ 건강을 위해 포기하지 말고 이어가봐야겠어요.
다락방 님 한주 화이팅입니다!

건수하 2024-09-30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글로 복습-예습중입니다 ^^ 피티 시작하시는 군요. 화이팅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4-09-29 18:21   좋아요 1 | URL
수하 님 제 글로 복습, 예습을 하시다니 민망하면서도 감사합니다^^
필라테스 욕심내지 않고 꾸준히 해보려고 합니다. 응원 감사드려요.
 
신장의 역사 - 유라시아의 교차로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2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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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의 역사를 읽으면서 위구르 문화 연구가 중국이 신장 자치구를 설정한 이후 본격화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신장 관련 이야기는 논픽션인 <갑골문자>나 근현대 중국사 관련 책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읽은 바 있었으나 신장 자체만을 다룬 역사를 읽지는 못했는데 이제는 묵혀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싶어 주저없이 집어 들었다.


신장은 1500년 동안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영토였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 중국의 지배 하에 있던 곳이다. 신장은 과거에 ‘중국령 투르키스탄’, ‘투르키스탄’으로 불렸다. 과거 이 지역의 용어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투르키스탄’은 1930년대와 1940년대 각각 생겼다가 단명한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있어 구분이 되지 않는다. 둘째, 중국과 글로벌 지구는 ‘신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반면 신장을 중국이 강제로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위구르 민족주의자들도 ‘중국령 투르키스탄’을 쓰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장이라는 용어를 결국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고대 시기 이 지역은 흉노, 쿠차(월지), 유연, 돌궐, 위구르가 거쳐갔다. 


흉노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 동쪽에는 한나라가 자리했다. 한나라는 흉노와 ‘중가리아’라고 불리는 신장 북부 지역을 두고 계속 투쟁했으나 전반적으로 흉노에 밀려 거점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흉노가 타림분지와 투루판 분지를 이용하여 식량을 얻고 세수를 거둬 들이려 한 반면 한은 유목 세력의 자원을 빼앗고 힘을 억제하고자 서쪽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처럼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쿠차는 3~4세기 거대한 불교 도시였는데 3중으로 된 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천 개의 불교 사원과 불탑이 있었을 정도였다. 쿠차는 한 번쯤 들어봤을 승려 ‘구마라습(쿠마라지바)’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쿠차 인근에는 석굴을 비롯한 많은 불교 사원과 성소가 있었다. 현지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은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화나 불경을 제작하는 일에 후원을 많이 했다 한다.

4세기 중반 이후 유연이 흉노 세력을 뚫고 중가리아를 점령한다. 그러나 한 세기 후 유연은 북위의 공격을 받아 에프탈에게 그 자리를 넘겨준다. 돌궐은 유연의 지배 아래 있다가 국가를 건립했는데 중국의 수와 당 왕조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부침을 겪는다. 


9~10세기 무렵 세력이 재편된다. 위구르는 돌궐의 뒤를 이었다. 코초 위구르가 ‘고창 위구르’, ‘위구리스탄’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동북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면 카라한 조는 중가리아 서부를 책임졌고, 탕구트는 (동)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소그드인 네트워크는 중가리아를 중심으로 서부와 동부를 왔다 갔다하며 상업 흐름을 장악했다. 

중국과 신장 및 서역의 일부 지역사이에서 교역을 하던 상인들은 대부분 소그드인이었는데 이들은 신장뿐만 아니라 북중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도 상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의 상인들은 755년까지 당의 사료에서 "놀라울 정도로 부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P83

소그드인들은 소그드 문자와 마니교 종교를 믿었다. 위구르인들은 소그드 문자를 이용해 위구르 문자를 만들었고 뵈귀 카간 시절에 마니교 개종을 하기도 했다. 카라한조는 투르크의 이슬람화를 이끌었다. 


어느 경우이건 9세기와 10세기 투르크 부족의 정체성(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학문적으로 격렬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이다)에 대해 얼버무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날 중국의 위구르 민족의 정체성과 신장지역에 대한 이들의 역사적인 ‘권리주장‘을 현대의 민족주의자들이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호도된 것처럼 보인다. 코초 위구르와 카라한조 정권 모두 외부의 정복 엘리트들에 의해 수립되었는데, 이 엘리트 집단은 토하라인과 이란인을, 경우에 따라서는 인도인을 그리고 코초에서는 중국인 주민들을 지배했으며 이들과 통혼했다. 유전학적 유산 이외에도 이 제국의 궁정은 정치적,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유산을 이지역과 자신들이 지배한 백성들에게 남겼다. 정복 부족이 어떠한 이름으로 알려졌건 간에 카라한조의 경우는 후일 역사가들이 부여한 명칭이다-이러한 유산 모두가 후일 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과 함께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 P104~105


17세기에 이르러 신장 지역은 이슬람화되었다. 이로서 신장 지역은 문화적으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페르시아 지역과 연결되는 동시에 몽골 이후 북중국 지역의 문화와도 역학 관계로 연결된다. 

청은 러시아가 동진하면서 갈등에 놓이고 영국령 동인도회사가 북진하면서 글로벌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1853년에 이르러서는 청 중앙 정부의 국고가 바닥났으며, 각 성의 조세 기반이 반란, 특히 중국의 곡창이자 비단 산업의 중심지인 풍요로운 양쯔 강 중남부의 성들이 태평천국운동으로 인해 황폐해졌다는 점이다. 이해부터 신장에 지급되는 은 보조금은 연체되었으며 곧 지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신장의 청 당국은 처음으로 비축해 놓은 재원을 사용하고 전당포 주인들에게 이자를 붙여서 자금을 투자했으며 위구르 노동자들을 귀금속채굴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한족과 위구르인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벡들도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관직은 최고 입찰자에게 판매되었고 이들은 이후 자신들의 투자금을 회수하기위해 관할 하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했다. 벡들은 청 당국에 뇌물을 제공한 대가로 자유로이 권력을 휘둘렀다. 이와 동시에, 타림분지의 주민들이 점차 동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장 북부와 남부의 청 팔기군은 노쇠해졌으며 질병과 기아, 아편 중독으로 인해 병력이 손실되고 사기도 떨어졌다. - P183~184


청은 무너져 가는 제국의 힘을 짜내어 1876년 신장을 수복하고 1884년 신장 성을 건설한 이후 현지의 한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신장은 이슬람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서부의 지역들과 문화적으로 더 밀접했다. 1920년대 이후 민족주의와 근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등장,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중국은 양쩡신, 진수런, 마중잉, 성스차이, 장즈중 등 다양한 군벌이 군림하였다. 


1944년 신장 북부의 3개 지구에서 발생한 반란과 뒤이어 생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정부는 지역의 반중국적 정서와 (‘범투르크적‘이지 않은) 투르크 민족주의적 정서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이 운동은 정치단체를 돕고 주요 지도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군수물자와 군사훈련, 고문들을 제공한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소련에 의해 가능해졌으며 또한 통제되었다. 소련은 신장의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및 다른 민족들 사이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후원하고 이용했으며, 1945년 9월에는 동투르키스탄 민족주의자들의 희망보다는 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전략적 목표와 관련된 이유로 인해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제지했다. - P327


중국은 토지 개혁 운동 이후 통치를 확립하고 사회주의 이행을 진행하였으며 신장 지역에 자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5년 신장위구르자치구가 들어서면서 신장이 중국의 통제 하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을 지나 중국에 개혁개방 바람이 불었으나 신장 지역은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90년대 이후가 되면 교육과 의료, 기간 시설에 투자가 이루어지며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일어난다. 개발 붐이 일어나며 이주를 통해 인구가 급증한 것이다. 이로 인한 개발로 인한 환경의 문제, 중국의 지배력과 탄압에 의한 인권 문제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다.


‘엄중 처벌‘ 캠페인 아래 범죄자들과 분리주의 집단들을 체포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는 것에 더해, 1996년의 7호 문건은 1990년대 신장 소수민족들 사이의 문화 영역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집대성했다. 이러한 통제는 종교와 교육 문제에서 특히 명백했다. - P468


2000년대 초 당의 이론가들은 이미 이와 동일한 방향으로 민족 체제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수정하고 있었다. 이를 보여 주는 징후 중 하나가 공식적 영역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변화였는데, 스탈린식 민족 이론과 정책을 반영하는 ‘nationality‘라는 기존의 번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자료들은 ‘ethnic‘이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일례로 ‘Nationalities Affairs Commission‘ ‘Ethnic Affairs Commission‘]되었으며, 2005년 2월 발표된 백서는 ‘중국 소수 민족을 위한 지역 자치Regional Autonomy’s for Ethnic Minorities in China‘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처럼 사장된 스탈린식 민족 정책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중국은 일거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성가신 ‘다국적 국가multi-national state‘로부터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multi-ethnic state‘로 변모했다. 본래의 중국어 용어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새로운 영어 번역은 사실상 위구르인과 티베트인 및 다른 민족들을 (영어에서는 자결권과 아마도 국민 국가를 암시하는 ‘국민‘의 지위로부터 민족 (그리고 국가에 포함된 sub-national) 집단의 지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1990년대 폭력 사건의 여파 속에서 자치와 민족에 대한 재해석은 카슈가르로의 철로 확장만큼이나 명백히 신장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합주의적 접근법을 잘 보여 준다. - P473~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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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9-21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nationality 와 ethnic

거리의화가 2024-09-23 07:58   좋아요 1 | URL
지난달부터 국가, 민족, 인종 이런 개념들에 관한 책들을 좀 읽었거든요. 알고 보니 이 책에도 그런 내용들이 나와서 인상적이었어요^^
 

성폭행은 범죄 행위로 다루어지는 형법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이는 자기 사건의 증인이기도 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발하면, 가해자에 대한 형사 재판에서 국가(검사)가 원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고인은 보통 개인으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 헌법상 권리를 인정된다. 양형 거래가 없는 한, 유무죄는 합리적 의심기준에 따라 재판을 통해 결정된다.
반면 성희롱은 1964년 민권법 ‘타이틀 세븐‘에 근거한 민사 범죄다. ‘타이틀 세븐‘은 일반적인 시민의 평등권에 대한 것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법규다. 성희롱은 인종차별처럼 성별에 기반을유해한 차별 범주로 인식되어 왔다. - P120

페미니스트 비판의 압박하에 강간법은 매우 크게 바뀌었다.
(1) 여성의 ‘싫다‘는 그녀가 동의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그녀가 ‘은근넘어가려 하거나 ‘청하는 게 아니라는 점, (2) 그녀의 성적 이력은 특정한 경우에 대한 동의의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등의 통찰을 크게 반영했다. 피고인의 정당한 법적 절차를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진정으로 여성의 평등한 자율성을 보호하고 그들의 온전한 허구의 투영에 반하는) 주체적 소망과 느낌들을 보호하는 법적 문화를 생성해나가는 과정에서 변화는 느렸고, 풀어야 할 문제점들은 많았다. - P139

1964년 민권법은 고용 환경의 차별에 대해 길고 자세한 절을포함하고 있다. 일부만 읽어 보면 이러하다. "어떤 고용주든 고용이라는 광범위한 맥락에서 한 개인을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국가로 차별한다면, 이는 불법적인 고용 관행이다." (이 법령은시 시대적 특징을 보여 준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보호로부터 노골적으로 제외되었다.) "성별 때문에"와 "성별에 기반한"이라는 구절은 임신과 출산을 포함하는 (그러나 거기에 국한되지 않은 것으로 규정되고 있는데, 바로 뒤이어 모체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고용주가 임신중절 비용을 지불할 의무는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고용주들의 임신중절 비용 지불을 제한하지도 않는다. 이 조항은 보호받는 집단에 ‘불평등 효과‘를미치는 관행들을 금지하는데, 이 관행들이 "사업적 필요와는 무관하고, 아직 논의 중인 직위와 관련"이 없을 때 한해서만 그렇다. 이법령은 또한 법을 집행할 사명을 지닌 평등고용추진위원회(Equal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 EEOC)라는 행정 부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 P160

‘차이‘ 이론은, 두 당사자가 비슷하다면 두 당사자 모두 비슷하게 대우받아야 하지만 다르면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 P175

평등 이론은 차이 이론의 모호한 지점에서 좀 더 깊이 있고 분명한 규범적 논지를 제공한다. 주어진 상황이 차별적인가 아닌가를 묻는 데 있어 (혹은 헌법적인 맥락 속에서 평등 보호 조항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 데 있어) 우리가 보다 더 큰 사회의 권력 구조라든가 그들의 역사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P177

(1) ‘타이틀 세븐‘은 집단이 아닌 개인에 대한 것이며, 그러므로집단 차별의 양상을 보일 필요는 없다. (2) 성별이라는 요인은 고용 결정에 있어서 유일한 혹은 주요한 요인일 필요가 없고 ‘하지만(but/for)‘으로 시작하는 원인이 없었다면 고용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요소다. 사실 고용주는 자신이 완전히 다른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고 믿을 수 있다. ‘어머니인 경우‘라거나 ‘통계적인 기대수명‘과 같은 것 말이다. (3) 고용주가 통과해야 할 시험은 이것이다. 피고용인과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생물학적으로 반대 성별인사람도 같은 대우를 받겠는가? - P194

정치인은 문 앞에서 아우성치는 후임자들이 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스타운동선수나 희소한 예술가, 제도적 이유에 따라 영향력 있는 연방법원 판사들은 그렇지 않다. - P225

존 로버츠는 2017년 연말 보고서에서 "사법부는 2018년을 부적절한 행위를 조사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행동 수칙 및 그 절차가 모든 판사및 모든 법정 근무자를 위해 모범을 보일 만한 근무처를 보장하기적합한지를 신중하게 평가하는 일로 시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해당 수칙을 연구하고 변화를 권고하기 위한 양당 위원회를 설립했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성희롱에만 제한해서 분석한 것은 아니었으나 보고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강조 지점은 성희롱이었다. 사법부라는업무 현장 특성상 축소 신고를 장려하고 있음을 지적하였고, 특히판사와 서기관들의 비대칭적 관계 및 서기관들이 판사에게 사실상삶 전반을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서기관직의 짧은 재임 기간이 있다. 위원회는 직장의 임기가 길어질수록 직원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데 더 편안함을 느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세 가지 영역에서 개정을 권고했는데,
(1) 실질 기준, (2)항의 절차, (3) 괴롭힘을 예방하는 차원의 사전 - P255

교육 등이었다. 첫 번째 영역에 있어서는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 국가, 나이, 장애 유무,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등에 기반한 그어떤 형태의 괴롭힘에 해당하는 행위 및 발언들을 그 어떤 경우에도 만들지도, 용인하지도 않을 것이 판사의 의무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 P256

문화예술계 전체가 분야마다 경계 없는 하나의 거대한 일터가 된다. 이는 막대한 권력과 재력을 지닌 특정한 사람들이 거의모두의 기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지금 당장은와인스타인에게 고용되어 있지 않고 그의 제작사에 고용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처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당신은 늘 고용을 원하는 상태이며 언제 그러한 재력과 권력과 막강한 영향력을 - P274

가진 사람의 선의를 필요로 하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P275

프로 스포츠계에도 성희롱이나 가정 폭력 같은 문제들이 있지만 이 문제들은 예술계와 유사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경계, 강한 조합, 경영진의 철저한 관리 감독, 고발에 진지하게 주목하는것. 반면 대학 스포츠계의 D-I은 전체 구조 자체에 뼛속 깊은 문제가 있다. 바로 집단 행동과 외부 기업의 영향력이다. 이 업계 전체를 좀먹는 성적 부패와 학계의 부패는 고칠 수도 없다. - P319

남성들의 프로 스포츠 세계에 여성들이 편입됨에 따라 미국프로 스포츠 리그 또한 성폭행과 가정 폭력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정책의 필요성을 직시해 왔다. 직장 내 연애는 물론 선수의 ‘가정사‘에 대한 행동 강령이 계약 조항에 명시되었다. 메이저 스포츠의메이저 선수는 전부 이 정책하에 출장 정지를 당해 왔다. 일관적이지는 않았지만. - P327

운동선수들은 불법 약물의 사용이나 판매, 절도, 다른 재산 범죄 및 음주 운전 등 잠재적 형사 범죄들을 많이 저지른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상은 젊은 남성들이다. 이들은 열 살쯤부터 자신들은 피 끓는 남성성의 아이콘이기 때문에법은 자기들보다 못한 남성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고 여기며 자랐다. 그러니 많은 선수들이 성폭행, 성희롱, 스토킹 등 성범죄를저지르는 것이다. 구조상 TV 방송의 승패가 인재 한두 명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 인재들은 성범죄 혐의로부터 열성적인 비호를 받게되며, 경찰, 기소 검사, 판사인 학교 동문들까지 여기에 동참한다. - P339

문제는 더 있다. 이에 가담하는 모든 메이저 스포츠 학교에는지역 팀의 성공에 많은 재정적 지분을 담당하는 기업체가 연계되어있다. 이 결합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 P340

만약 법에 동등한 존중과 비(非)대상화를 지향하는 가치가 적절히 반영되고, 좋은 법이 집행된다면 선한 사람들은 이 진 빠지는 투쟁을 개인적으로 벌일유가 없다. 법은 우리 각자의 분투 속에서 방어벽이 되어 주기문이다. 물론 법은 이상적이지 않고 가끔은 구멍이 나지만, 직장 내성희롱이 단순히 개인적이고 불운했던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불법이기도 하다는 단순한 인식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그 차이는굉장했다. - P379

교만이라는 악에 맞서는 미덕은 자기 자신을 타인보다 낮게생각하는 흄이 말한 겸손 같은 것이 아니다. 그 미덕은 존중에 가까우며, 우위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차단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목소리를 들으려는 의지를 수반한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엄과 가치중심을 보는 것, 나아가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가려지고 황폐해진 변화와 성장의 잠재성을 보는 것이다. 행위와 그 너머의 사람 사이에 아주 강력한 구분선을 그어야 한다. 행위는 강력하게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항상 잠재력과 변화 가능성이 있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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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 막북 초원에 고립된 위구르의 발전 모색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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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돌궐 유목제국사에 이어 흉노 유목제국사를 연달아 읽고, 이 책의 출간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돌궐 유목제국사, 흉노 유목제국사에 이어 위구르 유목제국사가 재출간됨으로써 비로소 고대 유목제국사 3종의 역사가 완성되었다. 


아시아의 유목 세계를 중심으로 한 제국이었음에도 위구르는 앞선 흉노와 돌궐과는 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위구르는 막북 초원을 가로지르는 셀렝게강의 지류들을 따라 발달한 초원을 중심으로 유목을 했다. 위구르의 역사는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만들어진 뒤 중국의 위구르 연구가 본격화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위구르 지배 집단인 야글라카르 출신의 족장 쿠틀룩 보일라는 돌궐을 무너뜨리기 위해 바스밀과 연합하여 카를룩을 초원 서부로 내쫓고 스스로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을 칭하며 자립했다. 753년 국가 회복을 선언한 위구르는 국가 회복 선언 후 독자성을 강조하며 차별화를 들고 나왔다. 쿠를룩 카간 사후 집권한 아들인 카를룩 칸은 체제 정비를 위해 군사 원정을 통해 셀렝게강부터 알타이 산지의 유목 중심 지역을 확보하려 했다. 


카를룩 카간은 유목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세력 갈등을 개인적 노력을 통해 해소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분열을 통합하려 했는데, 이것이 초기 위구르의 취약점이었다.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했던 거란, 키르기스, 튀르기쉬, 카를룩 등이 여전히 신흥 위구르에 도전했다. 또한 위구르는 막남으로 밀려난 돌궐 항호가 다시 막북 초원으로 돌아오는 것도 막아야 했다. 돌궐은 위구르를 다시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적 위협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위구르는 687년 돌궐이 부흥해 막북으로 복귀하자 터전을 잃고 쫓겨난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막남에 건재한 돌궐 항호의 복귀를 막기 위해서는 막북 초원 중심의 체제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를 위해 카를룩 카간은 조상이 물려준 외튀켄을 중심으로 한 셀렝게강 유역의 확보와 유지에 역점을 두었다. - P132


위구르는 체제 정비를 위해 백성인 보둔을 재편하여 정리한다. 핵심 집단은 야글라카르와 인척으로 하고 그 아래 연맹 집단, 종속 집단, 부용 집단으로 나누어 각각 구성한다. 그 뿐 아니라 구성회흘(구성회골)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부족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나 위구르 일(국가)’라 선언하며 국가 연합으로 발돋움한다. 거기에 친병 집단을 확보하고 카간을 중심으로 각각의 장을 대표로 관리를 두고 병력의 수에 따라 그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지배 체계를 완성시켰다. 


안녹산의 난 등이 발생하며 당의 힘이 약해지자 위구르는 당과의 관계를 더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안녹산 진압을 위한 군사를 원조하고 당과의 혼인 관계를 성립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뵈귀 카간 때는 친정을 하기도 한다. 도시 건설을 확대하고 마니교를 수용하면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양쪽으로 단단히 했다. 


안녹산의 봉기 이후 10여 년에 걸친 당의 내전 과정에서 막남 초원에 대한 기미 지배는 완전히 무너졌다. 당뿐만 아니라 복고회은을 대표로 하는 막남 초원의 투르크 유목 세력 역시 약해졌다. 기미 지배를받던 투르크계 유목민(돌궐 잡호)이 7세기 중반부터 약화되었고, 74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돌궐 붕괴 이후 남하한 막남의 돌궐 항호 또한 부흥운동으로 당에 도전하다가 소멸했다. 당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질서가완전히 무너지면서 ‘유목 세계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는 막북 초원을 장악하고, 당과의 경제적 관계를 독점했다. - P172


760년대 위구르는 당으로부터 확보한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탕으로 교역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마니교도 상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무역상이던 소그드 상인이 당의 무역을 제재하고 뵈귀 카간의 숙부인 타르칸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곤란을 겪기도 한다. 


또 780년대 당이 위구르 사신을 살해하면서 위구르는 당과 갈등을 겪게 된다. 당과 토번은 이때 청수지맹을 맺고 위구르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고립되어 있을 수 없었던 위구르는 회골로를 개설하여 북정과 안서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연결(회골로)하여 당과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북정 재진출을 둘러싸고 지배 집단인 야글라카르 간의 내분 과정에서 쿠틀룩은 북정을 점령하며 집권했고 지배 집단도 교체되었다. 820년 당과 화의를 맺고 위구르는 서방 경략을 시작하게 된다. 


쿠틀룩이 북정을 점령해 톈산산맥 주변으로 진출한 것은 위구르가 유목제국으로 발전하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다. 앞서 흉노, 유연, 돌궐 등도 그랬듯이 서방 지역은 공납이나 물자의 획득뿐만 아니라 교통로 확보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몽골 초원에서 성립한 유목국가가목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얻어낸 물자를 유통할 수 있는 ‘교통로‘가 필수적이었다. 이는 오아시스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규모 도시국가라는 취약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목 세력과 연계해 교역하고, 좀처럼 문호를 열지 않는 중국과도 교류할 여건을 만들어야 했다. 소그디아나 출신뿐만 아니라 톈산산맥 주변의 오아시스 주민들은 유목국가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을 도모했다. 즉 유목국가와 오아시스는 한쪽을 잃으면 다른 한쪽도 존립에 문제가 생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 - P249


그러나 위구르는 지배 집단이 갈등하던 와중 자연 재해가 덮치고, 키르기스 공격이 이어지면서 붕괴되고 만다. 멸망은 정말 이렇게 몇 개의 우연과 필연이 겹치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과거 발해의 역사가 떠오르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840년 위구르 유목제국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자연재해에 의해 유목 생산 구조가 파괴되고, 지배 집단의 내분이 발생한 상황에서 키르기스를 비롯한 종속 집단의 공격까지 받는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위구르는 키르기스가 떠난 몽골 초원으로 돌아와 재기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력으로 쪼개지고 흩어져 각자도생하게 되었다. 하나의 유목제국을 형성했던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가 해체되고 만 위구르의 ‘빅뱅 big bang‘은 그 주변의 여러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9세기 후반 국제 질서의 재편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10세기에 본격화되는 이른바 동아시아 ‘민족이동‘의 발단이 되었다. - P302~303


이때 위구르인들은 흩어지고 주변 세계도 재편되었다. 그러나 고창 위구르의 후예인 고창왕은 과거 위구르의 문화 유산을 잊지 않고 이어나갔다고 한다. 


14세기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던 위구르의 후예 고창왕에게 과거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조상이 남긴 역사적 경험은 너무나 중요했다. 조상의 원주지를 새로운 세력인 몽골계 이주민에게 넘겨주고, 대제국을 건설한 그들에게 지배당하며 하서에 머물던 그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영광스러운 역사를 꽃피우고자 했다. 몽골 초원을 무대로 유목제국을 건설했던 선주민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당대의 지배세력인 몽골제국과는 다른 역사 인식을 보여주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했다. - P345


위구르는 기본적인 투르크계적 요소에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변용하여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특히 위구르 문자는 소그드 문자를 변용한 것으로 고창 위구르가 인도유럽어 사용자이면서도 위구르라는 역사 전통을 이어 나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유목 권력이 중국 제도를 받아들여 한화되었다거나, 선진적인 중국 문화와 융합을 이루었다는 식의 설명이 많았다. 이는 유목국가를 정주 농경을 기반으로 한 중국에 비해 열등한 문화로 보려는 ‘문명사관’이자 ‘정주사관’에 따른 것이다. 

이 책은 앞선 흉노, 돌궐 제국사에서도 확인했듯 한문 텍스트 자료로만 사료를 사용하지 않고 비문 등의 현장 자료와 최근 유목사 자료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최신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 결과물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유목국가는 초원에서든 정주 지역에서든 군사적 장점을 유지하면서 외래 요소와의 ‘선택적 공존‘을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역 국가‘를 지향했다. 흉노 이래 모든 유목제국이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전했다. 따라서 위구르를 비롯한 유목국가를바라볼 때 ‘유목 아니면 정주‘라는 이분법이나 ‘유목과 정주만 있는‘ 이원적 성격이라는 관점보다는 ‘다원성‘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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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연대기 1931~2011
남화숙 지음, 남관숙 옮김 / 후마니타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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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끗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 P26~27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돌을 묶은 채 기와 지붕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주룡. 그는 평양의 평원고무에서 일하던 여성 근로자로 죽음을 불사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그곳을 오른다. 그의 연설은 동아일보에 실리면서 을밀대 연설이라는 제목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후 민족주의 잡지에서 인터뷰까지 할 정도였다고. 노동자가 파업이나 시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월급이 밀리는 것이 기본일 테지만 받아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여겼을 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서 퇴로가 없다 생각했을 때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하는 행동이 아닐까. 그야말로 절박함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마지막 노동자로 쌍용노조의 김진숙을 언급하는데 작가의 선택이 탁월하다 여겼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의 모습이 분명히 떠오른다. 높은 곳에 올라가 몇 백일간 자리를 지키며 권리를 주장하던 모습을 말이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계속된 식민 지배와 반식민 저항운동의 역사는 계급과 젠더 정치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행방 후 냉전 구도 속에서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진행된 남한의 민족국가 건설 과정은 계급과 젠더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협상의 불안정성을 증폭시켰다. 이 같은 격동하는 정치 지형에서 노동자와 여성을 사회 경제적으로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는 20세기 내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중대한 문제였다. - P13


한국 여성 노동의 역사가 얼마나 될까를 생각했을 때 한국전쟁 이후 즈음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이렇게 그 시기가 한참 앞서 있으며 노동자의 선두주자로 근대 일제 시기 강주룡을 언급하며 시작한다. 이전에 강주룡의 역사를 읽어본 적은 없었지만 한 장의 강렬한 사진으로, 또 몇 년전 문재인 대통령께서 언급하시기도 한 분이라 이름은 낯설지가 않았다. 


강주룡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사업이 망하여 조선을 강제로 떠나야 했고, 일찍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사망한 뒤로는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그는 1927년 무렵 평양으로 이주한 뒤 시내 고무공장에 취업했다고 한다. 강주룡을 포섭한 것은 지하 공산주의 그룹의 일원인 정달헌이었다. 그는 함경남도를 적색 노조 조직 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적색 노조 조직원 중 고무노동자들을 영입한 조영옥이라는 인물을 통해 강주룡은 평원고무에서 책임자가 되었다. 

이처럼 1930년대 무렵은 조선 내 사회주의 사상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전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남아 있어 많은 노동 쟁의가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평양에서는 10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서울과 부산에서도 각각 4건, 3건의 고무 파업이 있었다. 1931년 평원고무 파업은 이렇게 앞서 있었던 노동운동의 성장에 기반해 있었다. 


1946년 해방 이후 좌파 세력인 전평 중심으로 산업 노조 활동이 시작되었다. 일본 적색 자산을 인수 받은 공장 노동자들은 이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 선거 발언 이후 전평 하에 있던 조방 분회는 총파업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우익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되면서 전평 운동은 궤멸되었다. 조방 사장인 강일매는 조방 쟁의 기간 동안 이승만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노동자를 탄압했다고 한다. 


1952년에는 부산 임시 국회 건물에서 조방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부산 시가에서의 시위는 조방 쟁의로 민란을 방불케 한 분규였다고 한다. 현재 노사 관계를 규정 짓는 기본법인 노동법이 최초 통과(1953)되는데 기여한 핵심 쟁의였기에 의의가 크다.


급속한 도시화, 농촌인구의 대도시 유입과 함께 신흥 중산층 가정의 등장과 소비사회의 도래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낳았다. 1960년대 중반에는 ‘중산층’이나 ‘대중’ 같은 새로운 개념에 대한 논쟁이 처음 언론에 등장한다. 보수적인 젠더 관념이 지속되는 가운데 개발 국가의 경제정책과 성장 제일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돈벌이와 소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급격하게 변화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 약속이 계층 상승을 지향하는 중산층의 상당 부분에서 현실화되면서, 지난 수십 년간 평등을 지향하는 ‘균‘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었던 하층민에 대한 동정적 인식은 물질적 부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신분의식으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계급 차별 문화는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육체노동자들의 열망과 충돌하며 갈등을 낳기 시작했다. - P251


1970년대에는 섬유와 전자 산업이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때 현재의 연공 서열에 따른 임금을 지급하는 체계가 정착되었으며, 가정을 책임지는 남성 노동자들에게 보다 더 많은 임금이 지급되어야 한다는 생활급(?)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생활급이라는 개념은 혀를 끌끌 차게 만든다. 그럼 그 가정이 굴러가게 만드는 일은 누가 하는지 곱씹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공순이'라는 단어도 이 때 등장하였다. '여공'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라는데 나는 '공순이'라는 말 자체가 멸칭이 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말을 나도 대학 때 내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뒤에 붙이는 '순이'라는 말이 불쾌하기는 했다. 현재도 공과에 다니는 여학생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지는 궁금하다(아니길 바란다). 


노동자 분신 사건하면 전태일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보다 한참 앞선 1962년, 광주에 있던 전남방직의 김양이 자살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개신교의 산선, 가톨릭의 Joc를 비롯한 기독교 연합의 여성 노동자들이 합심하여 목소리를 내어 호소력을 발휘하겠다는 일념 하에 1976년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를 조직하기도 한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학출을 택해 노동 지역 현장에 투신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1985년 노학연대를 기반한 구로공단 동맹 파업이 있기도 했다. 

1987년은 대한민국의 전 국민에게 특별한 해였으나 노동자들에게도 노동자 대투쟁 같은 굵직한 사건이 있었으니 특별한 한해였을 것이다. 물론 여성 노동자에서 남성 노동자로 노조 운동 지도부가 변화하였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IMF 이후가 되면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하고 비정규직이라는 또 하나의 체계가 자리를 잡는다. 


현재도 여전히 노동자의 위치는 위태롭다. 대기업에 다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도 위계가 갈리는 것은 기본, 같은 연차라도 남성과 여성 노동급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제는 플랫폼 노동자의 생태계도 추가되었다. 고객과의 사투, 나아가 갑질과의 사투로 노동자는 여전히 피로한 위치에 있다.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만을 다룬 책은 많지만 여성 산업 노동자에 초점을 맞추어 쓰여진 책이라 가치가 있다.

내용은 대중서와 학술서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고 여겨진다. 대중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게 쓰여 있는 편이다. 한국 여성의 노동사를 정제하여 읽을 만한 분량으로 묶었다는 데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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