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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 막북 초원에 고립된 위구르의 발전 모색 ㅣ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24년 9월
평점 :
작년에 돌궐 유목제국사에 이어 흉노 유목제국사를 연달아 읽고, 이 책의 출간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돌궐 유목제국사, 흉노 유목제국사에 이어 위구르 유목제국사가 재출간됨으로써 비로소 고대 유목제국사 3종의 역사가 완성되었다.
아시아의 유목 세계를 중심으로 한 제국이었음에도 위구르는 앞선 흉노와 돌궐과는 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위구르는 막북 초원을 가로지르는 셀렝게강의 지류들을 따라 발달한 초원을 중심으로 유목을 했다. 위구르의 역사는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만들어진 뒤 중국의 위구르 연구가 본격화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위구르 지배 집단인 야글라카르 출신의 족장 쿠틀룩 보일라는 돌궐을 무너뜨리기 위해 바스밀과 연합하여 카를룩을 초원 서부로 내쫓고 스스로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을 칭하며 자립했다. 753년 국가 회복을 선언한 위구르는 국가 회복 선언 후 독자성을 강조하며 차별화를 들고 나왔다. 쿠를룩 카간 사후 집권한 아들인 카를룩 칸은 체제 정비를 위해 군사 원정을 통해 셀렝게강부터 알타이 산지의 유목 중심 지역을 확보하려 했다.
카를룩 카간은 유목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세력 갈등을 개인적 노력을 통해 해소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분열을 통합하려 했는데, 이것이 초기 위구르의 취약점이었다.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했던 거란, 키르기스, 튀르기쉬, 카를룩 등이 여전히 신흥 위구르에 도전했다. 또한 위구르는 막남으로 밀려난 돌궐 항호가 다시 막북 초원으로 돌아오는 것도 막아야 했다. 돌궐은 위구르를 다시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적 위협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위구르는 687년 돌궐이 부흥해 막북으로 복귀하자 터전을 잃고 쫓겨난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막남에 건재한 돌궐 항호의 복귀를 막기 위해서는 막북 초원 중심의 체제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를 위해 카를룩 카간은 조상이 물려준 외튀켄을 중심으로 한 셀렝게강 유역의 확보와 유지에 역점을 두었다. - P132
위구르는 체제 정비를 위해 백성인 보둔을 재편하여 정리한다. 핵심 집단은 야글라카르와 인척으로 하고 그 아래 연맹 집단, 종속 집단, 부용 집단으로 나누어 각각 구성한다. 그 뿐 아니라 구성회흘(구성회골)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부족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나 위구르 일(국가)’라 선언하며 국가 연합으로 발돋움한다. 거기에 친병 집단을 확보하고 카간을 중심으로 각각의 장을 대표로 관리를 두고 병력의 수에 따라 그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지배 체계를 완성시켰다.
안녹산의 난 등이 발생하며 당의 힘이 약해지자 위구르는 당과의 관계를 더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안녹산 진압을 위한 군사를 원조하고 당과의 혼인 관계를 성립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뵈귀 카간 때는 친정을 하기도 한다. 도시 건설을 확대하고 마니교를 수용하면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양쪽으로 단단히 했다.
안녹산의 봉기 이후 10여 년에 걸친 당의 내전 과정에서 막남 초원에 대한 기미 지배는 완전히 무너졌다. 당뿐만 아니라 복고회은을 대표로 하는 막남 초원의 투르크 유목 세력 역시 약해졌다. 기미 지배를받던 투르크계 유목민(돌궐 잡호)이 7세기 중반부터 약화되었고, 74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돌궐 붕괴 이후 남하한 막남의 돌궐 항호 또한 부흥운동으로 당에 도전하다가 소멸했다. 당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질서가완전히 무너지면서 ‘유목 세계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는 막북 초원을 장악하고, 당과의 경제적 관계를 독점했다. - P172
760년대 위구르는 당으로부터 확보한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탕으로 교역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마니교도 상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무역상이던 소그드 상인이 당의 무역을 제재하고 뵈귀 카간의 숙부인 타르칸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곤란을 겪기도 한다.
또 780년대 당이 위구르 사신을 살해하면서 위구르는 당과 갈등을 겪게 된다. 당과 토번은 이때 청수지맹을 맺고 위구르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고립되어 있을 수 없었던 위구르는 회골로를 개설하여 북정과 안서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연결(회골로)하여 당과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북정 재진출을 둘러싸고 지배 집단인 야글라카르 간의 내분 과정에서 쿠틀룩은 북정을 점령하며 집권했고 지배 집단도 교체되었다. 820년 당과 화의를 맺고 위구르는 서방 경략을 시작하게 된다.
쿠틀룩이 북정을 점령해 톈산산맥 주변으로 진출한 것은 위구르가 유목제국으로 발전하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다. 앞서 흉노, 유연, 돌궐 등도 그랬듯이 서방 지역은 공납이나 물자의 획득뿐만 아니라 교통로 확보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몽골 초원에서 성립한 유목국가가목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얻어낸 물자를 유통할 수 있는 ‘교통로‘가 필수적이었다. 이는 오아시스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규모 도시국가라는 취약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목 세력과 연계해 교역하고, 좀처럼 문호를 열지 않는 중국과도 교류할 여건을 만들어야 했다. 소그디아나 출신뿐만 아니라 톈산산맥 주변의 오아시스 주민들은 유목국가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을 도모했다. 즉 유목국가와 오아시스는 한쪽을 잃으면 다른 한쪽도 존립에 문제가 생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 - P249
그러나 위구르는 지배 집단이 갈등하던 와중 자연 재해가 덮치고, 키르기스 공격이 이어지면서 붕괴되고 만다. 멸망은 정말 이렇게 몇 개의 우연과 필연이 겹치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과거 발해의 역사가 떠오르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840년 위구르 유목제국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자연재해에 의해 유목 생산 구조가 파괴되고, 지배 집단의 내분이 발생한 상황에서 키르기스를 비롯한 종속 집단의 공격까지 받는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위구르는 키르기스가 떠난 몽골 초원으로 돌아와 재기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력으로 쪼개지고 흩어져 각자도생하게 되었다. 하나의 유목제국을 형성했던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가 해체되고 만 위구르의 ‘빅뱅 big bang‘은 그 주변의 여러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9세기 후반 국제 질서의 재편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10세기에 본격화되는 이른바 동아시아 ‘민족이동‘의 발단이 되었다. - P302~303
이때 위구르인들은 흩어지고 주변 세계도 재편되었다. 그러나 고창 위구르의 후예인 고창왕은 과거 위구르의 문화 유산을 잊지 않고 이어나갔다고 한다.
14세기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던 위구르의 후예 고창왕에게 과거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조상이 남긴 역사적 경험은 너무나 중요했다. 조상의 원주지를 새로운 세력인 몽골계 이주민에게 넘겨주고, 대제국을 건설한 그들에게 지배당하며 하서에 머물던 그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영광스러운 역사를 꽃피우고자 했다. 몽골 초원을 무대로 유목제국을 건설했던 선주민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당대의 지배세력인 몽골제국과는 다른 역사 인식을 보여주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했다. - P345
위구르는 기본적인 투르크계적 요소에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변용하여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특히 위구르 문자는 소그드 문자를 변용한 것으로 고창 위구르가 인도유럽어 사용자이면서도 위구르라는 역사 전통을 이어 나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유목 권력이 중국 제도를 받아들여 한화되었다거나, 선진적인 중국 문화와 융합을 이루었다는 식의 설명이 많았다. 이는 유목국가를 정주 농경을 기반으로 한 중국에 비해 열등한 문화로 보려는 ‘문명사관’이자 ‘정주사관’에 따른 것이다.
이 책은 앞선 흉노, 돌궐 제국사에서도 확인했듯 한문 텍스트 자료로만 사료를 사용하지 않고 비문 등의 현장 자료와 최근 유목사 자료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최신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 결과물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유목국가는 초원에서든 정주 지역에서든 군사적 장점을 유지하면서 외래 요소와의 ‘선택적 공존‘을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역 국가‘를 지향했다. 흉노 이래 모든 유목제국이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전했다. 따라서 위구르를 비롯한 유목국가를바라볼 때 ‘유목 아니면 정주‘라는 이분법이나 ‘유목과 정주만 있는‘ 이원적 성격이라는 관점보다는 ‘다원성‘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 P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