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 쇠락하는 산업도시와 한국 경제에 켜진 경고등
양승훈 지음 / 부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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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제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나라로 지금도 여전히 제조업 강국으로 통한다. 울산은 대표적인 제조업 도시인데 그런 울산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울산의 현재를 진단하고 과거는 어떠했으며 미래는 어떨 것인지 예측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사회 문제에 멀어지지 않기 위해 매일 신문을 챙겨 보고 주간지를 구독한다. 덕분에 한국 산업의 문제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불균형성, 나아가 원청과 하청 근로자 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다. 


만약 이 책이 울산의 현재를 바라보고 문제점만을 진단했다면 다른 책들과 별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이 가진 차별점은 울산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기까지의 역사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 나름의 분석을 통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전개부터 흥미를 끌어들인다. 2030년 울산의 모습을 통해 미래를 그려보고 이후 울산의 역사를 훓은 뒤 울산의 현재를 여러 장에 걸쳐 진단하는 방식이다. 


2030년 울산의 미래는 암담하다. 정년 퇴직을 한 노동자들로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정규 일자리가 없어서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여성 구직자의 문은 애시당초 좁은 문이라 말할 것도 없다. 


철강, 자동차, 조선 3대 산업을 대표하는 울산의 시작은 과연 어떠했을까. 나는 당연하게도 1960년대 국가의 주도 하에 공공 프로젝트로 공단이 들어서면서 시작되어 현대 정주영 이하 인력에 의한 개발 노력으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일제강점기가 시작이고 그것도 일본인의 주도 하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최근에는 지역사 연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연구자를 제외하고 애써 찾아보지 않으면 지역사는 잘 알기가 어렵다. 나조차도 그렇다. 아무튼 잡설이 길었는데 울산은 이케다라는 일본인에 의해 태평양전쟁을 위한 공업도시이자 석유 비축기지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는 공업도시 울산을 이해하려면 그 시작이 어떠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공감하는 바였다.


울산은 ‘공업항, 어항, 연락항, 무역항, 공항‘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됐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엮으면 일본의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울산의 역할이 중시됐음을 알 수 있다. 이케다의 구상 아래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전투기의 급유지로 울산을 선택했다. 급유를 한 후 다시 전투기를 띄워 중국 또는 러시아와 교전 지역인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바로 출격할 수 있는 중간 기착지였던 셈이다. 물자는 배를 통해, 인력은 기차를 통해, 전투기는 바다를 통해 움직일 수 있는 울산. 모든 것을 병참기지로서의 기능에 최적화해 설계했다고 말할수 있다. - P50~51


울산이 왜 하필 선택되었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설들이 존재한다. 앞서 보았던 입지적으로 유리했기에 선택되었다는 설 이외에 정유 공장을 준공하고 (멀리 가지 않고 가까이에 공급하는 것이 유리하므로) 석유화학단지 건설로 출발했다는 설, 그 외에 정주영을 비롯한 기업가들이 사업성을 보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정치적인 동맹을 맺어 진행했다는 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결국 이 설들이 복합적으로 엮이면서 공업 센터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국가 주도적으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부터 울산에서는 '공부 못하면 공장 가면 되지.'가 가능했다. 게다가 울산의 산업 노동자들은 IMF 이후 여러 번의 노조 투쟁을 거쳐 정규직 노동자들의 급여 수준은 많이 올라갔다(일부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이들을 '황금 노조'라 부르며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짐작하겠지만 정규직 노동자에 한해서 그런 것이다. 그보다 훨씬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하청 노동자들의 급여 수준은 정규직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하마스 전쟁을 비롯한 국제적 요인, 국내 불경기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원자재값이 상승하고 투자나 소비 심리가 위축된 지금 제조업은 무사할까. 기업이 현재에 안주해 투자하지 않고 정규직도 신입이 아닌 경력직으로만 채운다면 과거 혁신을 주도해 성장할 수 있었던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울산은 연구개발과 설계 조직이 수도권 등으로 다 옮겨 가고 생산 단지마저도 떠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거 생산 현장과 연구 개발이 한곳에 있어 실시간 협업이 가능했던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다(실제로 한국조선해양은 판교에 연구소를 세움). 물론 요즘 세상에 단지가 따로 존재해도 협업은 가능하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산업이라면 몰라도 제조업은 실제 장비들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테스트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원격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울산에 필요한 전문 산업 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세워진 울산과학기술대(UNIST)는 시민의 기대도, 산업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으면서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기업은 신규 인력은 꺼려 하는 동안 일자리가 없는 우수한 엔지니어들은 수도권에 눈길을 돌리는 악순환이 펼쳐지고 있는 형국이다. 

남편을 따라 온 여성들도 일할 곳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생산직 일자리에서 배제된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밀려나있거나 생산직이 아닌 서비스업에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한다. 


저자는 울산의 미래를 제시하며 스마트 주력 산업을 고도화시키거나 데이터 센터를 포괄하는 4차 산업 혁명을 이끄는 신산업의 육성을 꺼내든다. 이를 위해서 예시를 든 것이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피츠버그의 두 산업도시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두 도시는 대표적인 미국의 산업 도시로 쇠퇴를 겪었으나 한쪽은 살아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은 제조업 대신 서비스업과 신산업을 통해 도시의 재구조화를 이루어냈다.

그렇다면 울산은 후자의 모델을 따라가야 하는가. 저자는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제조업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응책은 있어야 하지만 후기 산업 모델을 따르면서도 중산층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확보가 되어야 도시가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좀 뻔한 책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가 읽을수록 꽤 잘 정리된 책이라 여겼다. 개인적으로 읽으려고 했다면 후순위에 밀릴 확률이 큰 책인데 함께 읽는 책이라 읽을 수 있었다. 올 초에 나온 책인데 이런 책은 시기가 지나면 시의성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덕분에 적절한 때에 읽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필 책 나눔 토론이 있는 날 외근이 잡혀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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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1-27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강, 자동차, 조선에서 두 가지 자동차, 조선은 제가 사는 곳에서도 했어요 그런 일 잘 모르지만 지금은 거의 떠났다는 말 들은 듯합니다 지금 여기는 사람 숫자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느낌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시내라 할 수 있는 곳 가게는 거의 장사를 안 하고 비어 있어요 자동차나 조선 그런 게 사라져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드는군요 중심 지역이 예전과 바뀌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울산과 다르지 않네요 여기는 일제 강점기 때 농산물을 빼앗아가는 곳이기도 했군요 울산과 멀지만 비슷한 까닭으로 여러 가지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전히 아파트는 많이 짓기도 해요 그런 곳에 사람이 살지, 빈 곳이 많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11-28 07:57   좋아요 0 | URL
‘지방소멸‘이라는 개념이 나온지도 꽤 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이 책에서도 동남권메가시티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거든요.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서 지방 도시들끼리 연합하여 자구책을 여러 모로 마련하는 중인 것 같지만 정책 하나만으로 바뀔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 지자체, 기업, 중앙 정부 등이 톱니바퀴처럼 이해 관계를 맞춰나아가야하는 일이 아닐. 수도권은 수도권대로 임대료가 높아서 가게들이 텅텅 빈 곳이 많아요. 저는 이렇게 해서 과연 한국 제조업의 미래가 있을까 회의적이었거든요. 이 책 덕분에 그래도 조금은 희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님^^
 

~ 6장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스토아적 영겁회귀가아니라 바로 차이생성, 보다 구체적으로는 힘에의 의지의 영원회귀이다. 모든 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으로 되돌아온다.36)그렇다면 힘에의 의지에로의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추상적으로는 차이생성으로의 회귀이며, 생명/삶의 구체적 맥락에서는 자기 극복을 요청하는 상황으로의 끝없는 회귀이다. - P113

베르그송이 인식론에서의 직관을 보완해서 윤리학/도덕철학의 원리로 제시하는 능력은 곧 ‘창조적 정서(émotion)‘이다.
베르그송에게 창조적 정서는 과학, 예술, 철학 등으로 구체화될 빼어난 직관, 영감으로서의창조적 정서이다. 그것은 아직 악보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작곡가의 마음속에서 장대하게 울려 퍼지는 잠재적 선율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창조적 정서의 가장 위대한 경지는 바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해서 윤리의 새로운경지를 여는 행위의 영웅들에게서 발견된다. 이러한 창조적 정서는 지능이하의 정서가 아니라 지능 이상의 정서이다. "새로운 도덕 이전에, 새로운 형이상학 이전에 정서가 먼저 있고, 이 정서가 의지의 편에서는 약동으로 지능의 편에서는 풀어설명하는 표상으로 이어진다." (MR, 46) 따라서 베르그송에서의 열린 도덕의 근저에는 ‘생명의 약동‘이, 새로운 뉘앙스를 띠게 되는 약동이 존재한다. - P130

의미란 바로 명제에 있어 표현된 것 즉 사건이다. 의미는 말과 사물/사태의 지시관계, 주체와 그 현시물 사이의 현시관계, 그리고 기호들의 변별적차이들의 구조로 해소되지 않는다. 의미의 네 번째 차원, 사실상 이 세 의미론이 바로 그것을 둘러싸고서 성립하는 중심 지점이 존재한다. 의미란 정확히 주체와 사물과 기호 삼자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며,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발생해서 기호로 표현된다. 의미란 바로 사건에 다름 아니다." - P145

이접적 종합에서는 "일련의 술어들이 한 사물로부터 그 개념적 동일성에따라 배제되는 대신, 각각의 ‘사물‘이 그것이 통과하는 무한한 술어들에로스스로를 개방하며, 동시에 그 중심을 즉 개념으로서 또는 자아로서의 그동일성을 상실한다." 이것은 곧 술어들의 배제(철수는 건축가이다. 따라서 비건축가가 아니다.)가 사건들 사이의 소통(철수는 건축을 하거나 또는 음악을 하거나 또는)으로 대체됨을 뜻한다.(계열 24) 이는 배제적 이점이 아니라 종합적 이점의 논리이다. 이렇게 발산하는 계열들을 가로지르면서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긍정하는 것, 사건들 사이의 소통을 도래시키는 것은 곧 스스로를 우발점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곧 (내재적 가능세계론에서) 여러 가능세계들을 가로지르는 것을 뜻한다. - P161

다자들은 부분집합들일 뿐 원소들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상황의 부분이 아니라 오로지 원소이기만 한, 즉 현시되기만 할 뿐 재현시되지는 않는 항들도 존재한다. 이 세 종류의 항들을 바디우는 ‘정규적인‘ 것들, ‘돌출적인‘ 것들, ‘특이한‘ 것들이라 부른다. ① 현시되는 동시에 재현시되기도 하는 항들은 ‘정규적인(normal)‘ 것들이다. ② 재현시될 뿐 현시되지는 않는 항들은 ‘돌출(excroissance)‘을 형성한다. 돌출은 상황에 포함되지만 그것에 속할 수는 없다. ③ 현시되지만 재현시되지는 않는 항들은 ‘특이한(singulier)‘ 것들이다. 특이한 것들은 상황에 속하지만 그것에 포함될 수는 없다. 상황상태는 이것을 그것의 일자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특이한 것들은 사건, 진리, 주체의 성립에 핵심적이다. - P173

주체는 명명행위를 통해서 진리를 지식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며, 그로써지식의 차원을 변화시킨다. ‘당‘, ‘혁명‘, ‘정치‘ 같은 레닌의 개념들, ‘집합‘, ‘서수‘, ‘기수‘ 같은 칸토어의 개념들이 그러하다. 이런 개념들이 첨가됨으로써 지식의 체계는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명명행위는 당연히 기성 지식의저항에 부딪치게 되며, 이때 주체는 진리의 전미래 시제를 끈질기게 지탱해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주체는 항상 전미래에서의 의미를 표명한다.").
그래서 주체의 본질은 바로 ‘진리사건‘에의 충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P189

현대 합리주의는 과학적 인식에 구성적인 측면이 가미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구성주의가 인식에서의 존재론적 무게중심에서 너무 멀어져 과학적 인식을 과하게 주관적인 것으로, 사회적-역사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것을거부한다. - P219

아울러 현대 합리주의는 보다 근본적인 존재론적 함축을 띤다. 이는 곧실재가 플라톤적 형상들로 되어 있다는 가설을 더 이상 확신하지 않는다는점이다. 비판적 합리주의에서의 ‘비판적‘은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암암리에생성존재론을 함축한다. 세계의 근원은 생성인 것이다. 당대에 베르그송과 더불어 프랑스 철학의 두 축(비합리주의와 합리주의)을 형성했던 브렁슈비크에게 구키 슈조는 그와 베르그송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브렁슈비크는 구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베르그송의 제자입니다." 이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맥락에서 볼 때 현대의 합리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세계에 대한 베르그송적 생성존재론을 전제하고서, 그러나 그 생성의 수학적 결을 찾아가는 것임을 뜻했다고 볼 수 있다. - P220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현대 과학, 특히 양자역학이 실증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초를 요청한다는 사실에 응답한 사유였다. 이 인식론에서 그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제2종 인식을 제1종 인식으로부터 설득력 있게 분리했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그는 지각과 이미지의 세계에도 별도의 위상을 부여하고자 했으며 (양자에서 ‘물질‘ 개념이 전혀다르게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그의 현상학적-시학적 작품들로 나타났다.("아니무스와 아니마") 그러나 그의 사유의 문제점은 정작 이 양자 사이의 담론공간이 통째로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 P223

러셀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의 정향은 곧 ‘외연성(extension)‘ 지향의 사유이다. 모든 언어를 정확한 외연을 갖춘 언어로 환원해 애매성과 모호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기하학적 공간에 놓고서 분석할 때 최고의 명료성을 획득할 수 있다. 베르그송 역시 과학적 지능의 핵심을 바로 이기하학에서 찾았다. 그러나 러셀과는 정확히 반대로 베르그송은 이런 외연성의 사유의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그것을 논했다. ‘시간의 공간화‘에 대한 비판, 등질적 공간과 다질적시간의 대비, 양적 다양체와 질적 다양체의 엄격한 구분 등이 그의 사유의 초석을 이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 철학은 러셀의 길과 베르그송의 길로 분열되었다고도 할 수있다. 러셀이 볼 때 베르그송 식의 사유는 애매모호하다. 베르그송이 볼 때 러셀 식의 사유는 피상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화이트헤드의 경우는 흥미롭다. 사유의 전기에 그는 러셀과 더불어 현대 논리학을 정초했지만, 사유의 후기에는 베르그송의 영향 하에서유기체 형이상학을 전개했기에 말이다. 바디우는 외연성을중시한 사유이고, 들뢰즈의 사유는 이 두 극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 P260

분석적 철학 전통은 일상 언어를 형식화해 논리학화하려는 의지, 깔끔 - P294

한 외연성의 사유로 환원하려는 의지로 점철되었다. 이것은 곧 일상 언어와는 상이한 성격을 띤 수학적인 언어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사유를 공간화함으로써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범-기하학화하려 한 시도라고 할수 있다. 이런 경향은 컴퓨터의 발명 이래, 형식언어를 구축하려는 오늘날의 각종 시도로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흐름과 각을 세우면서 추상적인 형식화보다는 일상 언어가 내포하는 역사성, 다양한 맥락들,
미묘한 뉘앙스들, 화자와 화자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 사회-정치적 함의들등을 있는 그대로 살리면서 이해하려는 노력들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상 언어는 그 자체 복잡하고 미묘한 논리를 내장하고 있으며, 형식언어의 ‘정확성‘과는 다른 형태의 ‘정확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언어철학은 이렇게 논리학을 기초로 단단한 형식언어를 구축하려는 경향과 일상 언어의 비-형식적인 구체성과 미묘한 정확성을 살려 이해하려는 경향이 길항해왔다. - P295

들뢰즈의 잠재성은 언제나 현실성과 더불어 생성하는 ‘실재‘이다. 들뢰즈에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외연‘ 및 ‘질‘에 입각한 사유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피상적인 표면적인것이다. 외연들과 질들은 그 아래에서 생성하고 있는 ‘강도적인 과정‘의 끝에서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강도적인 과정은 이 과정의 끝에서 사라지기때문에 (물론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피상적인 눈길에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 P339

내재적 가능세계론: 현실세계 = (그 외연이 다양하게 상대적으로 규정되는)한 주체의 경험세계, 가능세계들 = 타 주체들의 경험세계들

들뢰즈의 가능세계론: 현실세계 = 현실성(내재적 현실세계 및 가능세계들전체), 가능세계 = ①잠재성 또는 ② 형이상학적 표면 또는 ③ 가능세계들

가능세계 형이상학: 현실세계 = 현실성 + 잠재성 전체, 가능세계들 = 논리적으로 구성된 세계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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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무가 존재와 분리되어 존재 바깥을 감싸는 경우가 아니라 존재 사이사이에 분배될 때 생성이 성립한다. 정확히는 단지 사이사이에 분배될 뿐만 아니라 존재-무-존재-무⋯⋯를 경계 짓고 있는 선들이 계속 무너질 때 생성이 성립한다. 존재와 무는 절대 모순을 형성하며, 존재가 존재이고 무가 무일 때 생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는 무이므로(없으므로) 존재만이남는다. 무가 존재 사이사이에 분포하고 그 경계선들이 무너져갈 때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 도래한다. 모든 생성은 차이생성이다. 그리고 이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생성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 P23

경험론적 형이상학자들은 한편으로 ‘경험‘에 충실하되, 이런 주체중심주의를 벗어나 경험의 심층을 응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경험을 피상적인 것으로서 벗겨내고 그것과 불연속을 이루는 실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실재를 찾는 한 본질과 현상의 이율배반과그것과 맞물려 있는 신체와 정신의 이율배반)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어디까지나 경험과 연속되는 그것의 심층을 구체적으로 인식해 들어가려했다. 이렇게 경험과 연속적으로 파악된 실재는 곧 ‘생성‘이었다. 경험론적형이상학의 구도를 통해 새롭게 성립한 형이상학 즉 생성존재론은 현대 철학/탈근대 철학의 핵심적인 성취에 속한다. - P49

오늘날 생성존재론의 구도는 ‘존재‘로부터 ‘생성‘으로의 이행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생성‘으로부터 ‘동일성들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있는것이다. 뒤에서 (6장, 1절) 논할 들뢰즈의 ‘잠재성의 철학‘은 이 과제에 답한각별히 정교한 시도에 속한다.
생성존재론의 또 하나의 의의는 이 존재론에 이르러 마침내 서구적 사유와 동북아적 사유가 서로 통(通)하게 된 점에 있다. 동북아의 형이상학은 처음부터 생성존재론의 형태를 띠었다. 이 전통은 ‘氣‘를 근본 실체로서 생각했고, 기는 반드시 ‘氣化‘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생성은 생성하지 않는 진실재의 ‘타락‘한 모습이었으나, 동북아에서는 정확히 반대로 ‘物‘의 고정된(고정된 듯이 보이는) 모습은 ‘氣‘의 흐름이 일정한 형태로 굳어진 것일 뿐이었다. 세계에 대한 이런 직관은 ‘易‘의 개념으로써도 표현되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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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태어나 그 생명을 축복받은 아이가 대체 얼마나 있을까? 나는 아이를 가지거나 지운 적은 없지만 주변을 보면, 스스로를 빛 쪽에 있다.
고 생각하는 여자는 아이를 낳고, 스스로를 어둠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여자는 낙태를 한 것 같다. 여자는 경제적 사정에 이런 알파를 더해 애를 낳을지 말지 정한다. - P193

여자가 자연에 좀 더 가깝다고 보는 근거는 여자의 비생산적인 가치관, 사고방식이 문명이라는 것에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의비생산성은 여자의 존재 자체가 총체적인 것에, 여자가 남자처럼 사고를 기계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남자는 이론(말)으 - P205

로 총체성을 획득하려 하나, 여자는 그 존재 자체가 총체성을 갖고 있다. - P206

여성해방이란 여자들이 힘을 모아 여자가 살기 힘든 현실을 깨부수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미워해온 여자와 여자의 관계성 속에 에로스를 되살리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자에게 에로스는 나의 자궁, 즉 나의 자연과 내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나온다. 소통은 ‘여자인 것‘에서 오는 아픔과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P214

1960년대의 투쟁은 비일상적인 정치 공간에서 나 스스로를 보편적으로 대상화하려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건 표면상 하는 말이다.
‘00일 투쟁하자!‘는 식으로 1년 365일 중 며칠 정도만 투쟁해서 자신의 비참한 일상성을 승화하려 한다.
우리가 투쟁에서 잘못 내디딘 첫 번째 걸음이 바로 이것이다. 애초에 총체적인 권력의 이러한 총체성이 일상에서 나타나는데도, 머리로만 억압을 밝히려고 하여 문제를 정치적 과제로 집약해서 정치권력을물리적으로 분쇄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승리를 얻고 해방을 향해 최단 거리로 질주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투쟁에서 멀어지고 벗어나 버린 것이다. 투쟁을 하면 언제나 투쟁을 담당한 주체가 품은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다. 정치권력으로 곧 귀결하는 그런 사고방식은 어떤 주체가 있어서 나온 것일까? 이런 주체는 대의를 위해 나를 버린다는 일본전통의 정신 풍토와 근대 합리주의 사고가 합쳐져 나온 것이다. - P228

혁명과 파시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둘은 양극으로 보이지만,
실은 둘 다 비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극한까지 그 생명의 가능성을 불태워다 쓰고 싶은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둘 다 따분한 일상, 시시한 일상, 곧 오르가슴이 없는 일상이 있어야 한다. - P233

맞벌이. 이것은 여자가 휴일인 일요일에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해야 할 이유이고, 직장 퇴근 후 백화점이 문 닫는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뛰어 들어가야 할 이유이다. 또 콘돔을 사용하는 이유이고, 여자가경제력을 갖게끔 하는 이유이다.
맞벌이 여자에게 맞벌이란 실은 일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샅샅이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어떤가? 여자가 "맞벌이하는데 신랑이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그 답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P240

나의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적군파가 생긴 직접적 계기는 1969년 4월 28일 ‘오키나와의 날(오키나와 반전의 날)‘이다. 그날의 패배에18대한 총괄에서 적군파가 나왔다. 앞서 1월 18, 19일에 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공방이 극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활발히활동을 하던 신좌익은 이제 지는 해에 가까워졌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4월 28일 당일에 적이 압도적으로 퍼부은 물량 공세에 신좌익은 박살이 났다.
"오키나와의 날에 벌인 대중적인 무력 투쟁이 패할 수밖에 없었을 - P241

때 자연 발생적으로 도달한 군사적 투쟁의 한계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또 소시민인 투쟁 주체의 한계성 또한 확실히 드러났다.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투쟁의 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혁명이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위는 당시 내가 쓴 전단지 내용이다. 생각해 보니 1969년 4월 28일에 신좌익은 그전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고서 어쩔 수 없이 풍부한 ‘0‘의 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는 저녁놀 가운데적군파와 여성해방운동이 태동했다. 이 둘은 신좌익 운동의 아이들로태어났다. - P242

나의 어둠과 타인의 어둠 즉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타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경합하는 가운데 ‘우리의 내일‘에 빛이 싹튼다.
‘가해자 논리‘는 피억압자 자아를 버리게 할 우려가 있다. 억압자인 동시에 피억압자인 모순 속에 투쟁의 변증법이 숨 쉬고 있는데, 자신을 억압자일 뿐이라고 한쪽으로 기울여 고정하고 굳혀 버리면, 겉으로 내세운 명분밖에 없는 혁명 대의를 사명감으로 갖게 되며, 그런 대의에 나를 바치게 된다. 이런 과정에 ‘가해자 논리‘의 범죄성이 있는 것이다. 내가 실감한 것은 억압자라는 것은 철저히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란 점이었다. 이는 늘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논리였고, 남자들한테 남자다움과 혁명가에 대한 기대를 만족하게 해 주는 논리이다. - P254

‘오늘 내가 느낀 비참함을 그대로 두고 ‘내일 만약에‘로 바꾸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파시즘이 싹튼다. - P259

예전에 일본 여자들은 나라를 위하고 가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몸과 마음을 다 갖고 있는 총체적인 존재인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정숙한 여자‘는 ‘일본의 어머니‘가 되어 전쟁터 후방에서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전쟁터에서 황군 위안부들은 남성의성을 풀어 주는 역할, ‘신국 일본‘이라는 대의를 지키는 그림자 역할을해야 했다.
앞서 썼듯 위안부 대부분은 본국에서 잡아 온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 국내에서는 남자의 배설 행위일 뿐인 ‘프리섹스‘
가 폐지된 집창촌을 대신한다. 한편으로 이런 ‘경제적 동물‘들이 동남아, 대만, 한국에 가서 그 땅의 여자들을 변소 대신으로 삼는다. - P264

문제는 ‘내 생각과 좀 다른데‘ 싶을 때나 놀랐을 때, 그걸 그대로 솔직하게 밖으로 표출할지 말지이다. 말을 가진 여자는 말을 삼키는 여자이기도 해서, 자신이 하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창피하다고 여기며 본심을 감춘다. 인텔리는 어찌 됐건 자신이 엉망이 되는 상태를 잘피하며, 잘 회피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밥그릇을 설거지하는 방법만 해도 사람이 열 명이면 설거지법도 열 가지다. 각자 예전부터 해온 방식에 각자의 과거가 녹아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하자고 할 때 그건 암묵적으로 나 자신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상대가 놀랄 때도 일상다반사로 있다. 둥글게 살자, 사람들한테 맞추자 하고 마음을 먹고서 내 뜻을 드러나지 않게 하려 해도 그리 길게 가지 않는다. 사람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은 남을 속일 수 있어도, 일상적인 일로는 그러지 못하는 법이다. - P286

인간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있고 나서 남이 있는 것이고, 만사가 있고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멋스럽게 이야기를 해 본다 한들, 애초에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집스럽게 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마치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글빙글 도는 개 같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자기 꼬리를 물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난다. 자신의 약점, 되풀이하는 실수에 혀를 차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헛도는 모습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 왔다. - P290

공동체 생활의 마음가짐은 어쩌면 내일 내가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지금 이 시간, 이 만남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 P297

평범한 가정에서는 평범한 부모가 평범하게 아이를 가르친다. 즉 평범한 가정에서는 딸에게 장래에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가 되라고 한다. 어린완벽주의자 여자들은 어떻게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좌절하면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철저히 벌하려고 또 애를 쓴다. 한 되씩이나 되는 밥을 먹고서는 토해 낸다.
강조하고 싶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정이 이상이 된 현실이 바로 이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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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사

생명의 가능성이란 나 자신과 남이 제대로 만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여자가 생명으로 살 수 있는 방식은 남자처럼 바다로 나아가며 자아를 찾아가는 방식에 있지 않다. 나 자신 속에 바다를 품고 내 속의 바다에서 나 자신을 찾아가는 방식에 생명의 가능성이 있다.
-> 이 방식에 나는 의문이 있다. 여자는 왜 바다로 나아가면 안 되는가?

일본에 있는 외국인 가운데서도 유럽이나 미국인한테는 한없이 관용적이면서도(그렇다고 해도 반전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재일조선인을 비롯해 일본에 있는 아시아인들한테는 마치 자기가 생사여탈권이라도 가진 것마냥 군다. 출입국관리법에는 낡아빠진 소위 ‘신국 일본’의 행태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 P136~137
-> 근대 일본 제국주의는 서구를 따르고 동양의 평화를 운운하며 리더임을 표방하고 다른 동양의 민족을 억눌렀다.

당시 나는 내가 끝까지 못 싸운다는 것, 그러니까 각목을 들지 못하는 자신을 아주 창피하게 여긴 것 같다. - P138
-> 시위, 데모를 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큰 결심이 아닐까. 어떤 의도에서 시작되었든 내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몸 담았다면 말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저지른 죄상이 무엇인지 전혀 추측조차 못하는 죄인이었다. 나는 열심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려 했다. 엄마가 자꾸 묻는 바람에 벽에 딱 붙어서. 그런데 뇌리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하고 무서운 표정을 한 엄마의 말만 남아 있었다. - P103

아무리 머리로 제국주의와 싸우는 피억압 인민들이 있다고 확실히 알고 있다 한들,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한쪽 다리에서 모든 것을 출발하는 것이지, 논리로는 잃어버린 자기 다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아픈 사람은 항상 미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거시적 대상황과 미시적 소상황을 합쳐 문제시해야 한다. - P124

1969년 1월 18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체포하는 강제 진압이 일어났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친구와 기동대가 빙 둘러싼 도쿄대 주변을 배회했고 이튿날 오차노미즈에서 벌어진 투쟁에 참가했다.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지금 내가 역사의 모든 것을 묻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 P127

어디에 있든 완벽히 사회에서 자립한 주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각자가 가진 노예의 역사성, 교태를 부리며 살아온 역사성을 짊어지고 걸어갈 수밖에 없다. - P133

남자들은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운동을 하지 않는 여자랑 할 테야."라고 거리낌이 없이 큰소리쳤다. 그런 남자들을 위해 조그맣게 움츠러들어 바리케이드 시위에서조차 밥을 짓고 변소를 청소하는 역할을 담당한 이들이 ‘여자’라는 이름의 암컷들이었다. 어머니의 너그러움과 창녀의 교태를 두루 갖추고 남자들의 혁명 지도부를 떠받쳐 온 ‘엉클 톰’ 같은 여자들. ‘만일 혁명이 된다면’ 하고서 그 환상을 위해 자신을 바친 신좌익 내부의 신데렐라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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