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과학의 지적 역사에서, "정신"의 개념은 두 가지의 이상한 역할을 해왔다. 과학의 발달을 물리학적 방법을 유기체 영역으로 연장하여 확대시키는 것이라는 의미로 파악해온 사람들은, 정신이라는 개념을 "객관주의"라는 다소 영웅적인 이상(理想)에 도달하는 데에 실패한 온갖 방법과 이론들을 가르키는 악마의 말로 사용해왔다. 통찰, 이해, 개념적 사고, 이미지, 관념, 감정, 성찰, 공상 등의 용어는 정신주의적인 것이라고 낙인찍혔던 것이다. "즉 의식의 주관성에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용어에호소하는 것은 과학 정신의 통탄스러운 실패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이에반하여, 물리적인 것에서 유기체적인 것, 특히 인간으로 연구주제를 옮길 경우, 이론적 접근과 연구절차에서 광범한 수정을 포함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 P76

사람들은 "정신"을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할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그것을 사용하는 경우, 이해상의 결함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그 결함을 지적하고, 실증과학의 한계를 확대하기보다는 그것의 한계를 더욱 강조하고자 했다. - P77

"정신"이란 일종의 재주, 성향, 능력, 취향, 습관 등을 나타내는 말이며,
듀이의 글에서도 쓰였듯이, "앞에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가만히 기
"다렸다가 포용하는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소양이다." 그러한 정신은 행위
"나 사물이 아니라 어떤 행위나 사물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조직된 성향의 체계이다. - P80

지난 반세기 이상 동안, 인간정신의 진화에 관해서 두 가지 견해 모두부적절하지만 가 널리 퍼져 있었다. 첫째는, 프로이트가 "일차적"이라고 부른 인간의 사고과정 —치환, 역전, 압축 등이 그가 "이차적"이라고 부른 사고과정 - 방향성이 있고 논리적으로 질서 있는 사고 등에 계통적으로 선행한다는 명제이다. 이 명제는 인류학에만 국한시켜보면,
문화의 패턴들을 사고양식과 일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가정에 기초해왔다. - P83

이러한 일련의 오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의 정신적 진화에 관한 제2의 관점이 제기되었다. 즉 근본적으로 현대적인 형태를 갖춘 인간 정신의존재는 단지 문화를 획득하기 위한 선결요인이 될 뿐, 문화의 성장은 그 자체로는 정신의 진화에 아무런 의의도 지니지 못한다는 견해이다. - P84

문화의 발생에 대한 임계점 이론은 문화획득 능력의 발전이 영장류의 계통 발생에서 돌발적으로, 즉 한꺼번에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가정에 입각하고 있다. - P85

현대인의 생득적인 일반적 체질(과거, 즉 지금보다 단순하던 시절에
"인간의 본질"이라고 불리던 것)이 이제 문화적, 생물학적 변화의 결과로 보인다는 점이며, 그것은 "해부학적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서서히 문화를 발견해나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신체구조의 많은 부분이 문화적 결과라고 생각하는 편이 아마 한층 더 정확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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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enician Traders

페니키아인들은 가나안 북부 땅에 살았는데 고대에서 가장 뛰어난 선원들이었다. 가나안 북부 땅은 건조하고 메말라서 농작물이 자라거나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surrounded by steep craggy hills)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배를 타고 지중해로 나아가 무역상으로 활동했다. 

나무를 베어다 만든 가구를 다른 나라에 고가에 팔고 소금, 건어물, 수를 놓은 의류(embroidered cloth)들도 팔았다. 

그들은 유리세공을 잘했는데 고대의 유리 세공은 복잡도가 컸다고 한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lye(잿물)를 만든다(장작불에서 얻은 나온 재에 물을 붓고 흘려보내면서 용액을 모은다). lye에 순수한 모래를 섞고 뜨거운 불에 함께 녹인다. 모래가 녹을 정도로 뜨거워지면 bellow라고 하는 펌프로 불을 몇  시간 동안 피운다. 이렇게 만들어진 뜨거운 용액을 주형에 붓는다. 식어서 굳어지면 유리가 되는 것이다. 

다른 고대인들도 유리를 만들었으나 페니키아인들이 glass blowing을 첫번째로 해냈다. 우유에 빨대를 넣고 비누방울을 만들어본 적이 있다면 페니키아가 한 유리 세공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가 충분히 부드러워졌을 때 세공업자들은 이를 펴서 길고 얄쌍하게 만들거나 꼬아서 다른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페니키아인들은 또한 아름다운 달팽이 바깥의 보라색 염색을 만들어내는 데도 이름이 나 있었다. 달팽이를 모아(murex) 레몬 주스와 소금물과 함께 10일을 끓인다. 페니키아 도시 중 Tyre(티레)는 염색 공장에서 나오는 악취(stench)로 유명했다. 염색이 끝나면 울에다 넣고 어두운 보라색으로 변할 때까지 둔다. 보라색 염색이 만들어지기까지 무척 많은 달팽이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보라색 염색된 울은 고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purple was often called "the color of kings" because only king could afford to wear it. 그러고보니 내가 보라색을 그러려고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좋아했군.


The Founding of Carthage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를 항해하다 그들끼리 작은 군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도시 중 Tyre(over in Canaan), Carthage(all the way over in North Africa)가 있다. 

카르타고는 BC/BCE 814년에 자리를 잡았는데 초창기에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점차 커져서 상품들이 활발히 오가는 무역 도시가 되었다. 카르타고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Virgil(베르길리우스)로 카르타고 도시의 시작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다. 

Dido는 페르키아인 공주였다. 그녀는 부자와 결혼해서 궁전에 살았다. 그의 오빠는 Tyre의 왕으로 질투가 많아 자신의 남편의 부에도 탐을 냈다. 그녀의 오빠는 Dido의 남편을 체포하여 죽게 하자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Tyre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Dido는 물 근처에 살고자 하여 땅주인에게 "황소 가죽을 덮을 정도의 땅을 내게 팔 수 있겠는가" 묻는다. 그녀는 땅 속에 숨긴 황소를 수백개의 길고 얇은 줄무늬로 잘라냈다. 줄무늬를 거대한 땅 주변으로 끝에서 끝으로 펼쳐서는 "거기요. 이 땅을 파시죠." 했다. 땅주인은 동의했고 Dido와 친구들은 "Bull's Hide"라 명명한 땅에서 정착하여 카르타고라 이름짓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Carthage to buy and sell their goods. The city bought with a bull's skin became one of the most powerful in the world.



* 줄무늬(stripe)가 정말 그 stripe일까 감이 안 와서 이미지를 찾아봤다. 여기 아래 그림을 보니 내가 이해한 게 맞구나 생각했다. 정말 stripe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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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세상의 절반은 여성

살찐 사람이건 마른 사람이건, 풍만한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우리의 육체는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못하지 않은, 무지개같이 다양한스펙트럼 속에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면 절세 미인과 유방절제 수술을 받은 여성이 그리 크게 다르지 않고 모두들 나름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매체가 만들어낸 여성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전통적인 성역할과는 조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남녀-예를 들어 용접하는 여성과 아기 기저귀를 가는 남성의 사진을 아이들에게보여주고 나서 몇 주가 지나면, 아이들은 역할을 바꾸어 기억하고 있음이밝혀졌다. 그런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현실 속에서 다양한 여성의모습을 볼 수 있어야만 온전한 여성 이미지를 갖게 된다. 일차원적인 방법은 삼차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영화 <집시>의 여주인공인 10대 소녀는 스트리퍼가 되고 나서야 자기몸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한다. 우리 역시 그녀처럼 우리 자신과 다른 여성들의 육체를 사회적 무대와 사적인 침실 안에서만 경험한다. 즉 우리 자신의 육체가 고립되어 있을 때, 인공적으로 가공되었을 때, 남성이 우리 몸을보고 있을 때, 남성의 시선에 의해 평가되기 위해 보여질 때만 자기 몸에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 P71

대부분의 여성들이 실제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일하고 있으므로 일할 - P79

수 밖에 없으니까 도 진짜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만약 모든 시민의 노동권이라는 더 큰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그 말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일할 권리를 얻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여성의 독립이란 호황기에나 가능한 사치라는 엉터리 주장을 들어야만 할 것이다. 고용주는 대량 감원이 아닌 다른 대안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게 될 것이고 언제든 실직할 수 있다는 걱정은 노동자가 저임금을 받아들이게 하는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리하여 재능있는 여성들이 그 재능을 실현하지못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가족이나 나라에 커다란 손실이 될 것이다.
가장 큰 손실은, 생산적이고 존경받는 노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욕구이며 또한 인생의 기본적인 즐거움이라는 것을 여성들이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P80

대부분의 여자들이 좀더 자기주장을 강하게 할 필요는 있지만, 자기주장 훈련은 기존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을 더 잘할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성차별적 어휘에 반대하는 것은 남자들에게도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자기주장 훈련은 혁명이 아니라 개량을목표로 하고 있었다. 즉 여성에게만 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은 남성의 의사소통 방식을 효과적인 유일한 모델로 인정하는 셈이었다. 그런 훈련의 결과 많은 여자들에게 도움이 되었고 남자들도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를 많이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남성의 방식을 따라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게임을 미화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 P83

혼성집단에서는 남자가 말한 주제가 여자가 제안한 주제보다 채택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혼성집단 내에서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이야기하기보다 남자들과 이야기하게 되기가 쉽다. 따라서 혼성집단은 여자들의 생활과 관심보다 남자들의 생활과 관심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P89

대개 약자 집단은 힘있는 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힘있는 자들은 약자들을 잘 알지 못한다. 흑인은 살아남기 위해 백인을 이해해야 했고 여성은 남성을 잘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지배 집단은 약자 집단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간단히 생각해 버려도 된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 라는 생각은 권력의 불균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리고 피지배 집단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 결과, 지배집단이 피지배집단의 말을 듣고 싶어할 때조차 타자는 말하기를 포기하게 된다. 자기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설명하기란 정말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로에 대해 알고있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여자들은 남자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간만큼 여자들도 자기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우리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 P93

낸시 헨리는 몸의 정치학: 권력과 성 그리고 비언어적의사소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은 표정이 풍부해서 남성에 비해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런 감정들은 정형화된 여성 이미지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명랑함뿐 아니라잘 우는 것 같은 부정적인 것도 포함된다." - P97

말하고 듣는 것에서 실현되는 권력을 공격하는 것은 문화의 혈관을 바꾸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관을 통해 이야기가 서로 전달되고, 장기적으로는 인간의 변화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말하고 듣는 것의 정치학을공격하는 일은 매우 급진적인 행위이다. 문자나 시각 이미지 등 우리가 직접 나타날 필요 없는 의사소통 형식과 달리, 말하기와 듣기에서는 우리를숨길 수 없다. 글,그림, 소리를 통해서는 성별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고남녀 구별이 어려운 이름을 써서 우리를 보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하기와 듣기에서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 채로 여러 감각을 사용하여 이해받고 신뢰받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말하고 듣는 방식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꼭 변화시켜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 P99

‘포르노그라피‘ 라는 말은 그리스어 ‘포르네‘ (매춘부나 여자 포로)와 그래포스(서술, 묘사)를 합친 것이다. 그러므로 포르노그라피의 언어적 의미는 ‘성을 사는 것을 묘사한것‘ 이며, 권력의 불균형, 성노예화를 함의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품위를떨어뜨리는 행위를 묘사하는 것도 포르노그라피의 정의에 포함된다. - P104

‘에로티카‘는 섹스와 폭력을 구별하는 데 유용한 용어이다. 섹스와 폭력을 구별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성적 쾌락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에로스(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의 이름에서 나온 말로서 성적 욕망 또는 성애를 의미한다)이며 따라서 에로티카의 개념에는 사랑과공감, 적극적인 선택, 특정한 사람에 대한 갈망 등이 포함된다. 포르노그라피가 매춘부와 관련된 말인 것과 달리 ‘에로티카‘ 라는 말에서는 성별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성애보다 남성간의 동성애가 더가치 있다는 생각했고, 그런 믿음 덕분에 에로티카‘ 라는 말은 권력의 공유를 함축하게 되었다. 하여튼 그 말에는 불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 P105

인종차별주의 주장은 조직적인 학살과 폭행 등의 행위로 이어지고 그행위까지 정당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폭력적인 영화를 보는 것은 폭력을 더 많이 용납하게 만들고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도 높인다는 사실이 실험 결과 밝혀졌다. 모든 인종의 여성들에 대한 성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선전물 역시 집단 혐오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포르노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포르노는 남성의 공격성을 만족시키는 "안전" 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포르노가 없으면 남성의공격성이 실제로 발휘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포르노도 폭력을 미화하는선전물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왜 그것만은 폭력을 예방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걸까? - P108

이제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섹스를 폭력으로부터 분리해내야 한다. 용기를 가지고 포르노그라피를반대하는 시위를 공개적으로 벌이고, 포르노 잡지와 영화를 집 밖으로 내던져야 한다. 포르노 상품을 파는 가게들에 대해 불매 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파시즘 작품을 즐기거나 KKK단의 교의를 지지하는경우에 그것을 심각한 일로 받아들이듯이, 만약 친구와 가족이 포르노를즐겨 본다면 그것을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폭력과 공격성을 섹스와 동일시하는 남성 지배가 종식되기 전까지는 우리 삶에서 에로티카보다는 포르노그라피를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침대 위에서는 포르노만 재현될 뿐이고 사랑을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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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 왕건에서 서희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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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서를 읽는 일은 역시 지식을 적당하게 채우면서도 머리를 가볍게 해주어 즐겁다. 고려의 역사를 실로 오랜만에 읽게 되었다. 계기는 우연찮게도 11월에 방영될 대하 사극이 고려와 관련되어 있어서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중국의 역사를 원나라까지 한 번 훓은 김에 고려의 역사를 병행하여 읽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시작은 가볍게 읽는 것이 좋은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적당하다 여겼다. 책은 TV 프로그램으로 봤다는 이유로 사두기만 하고 정작 읽어보지 못한 채 보관용으로만 갖고 있다 이제서야 펼치게 되었다. 어쨌든 갖고만 있으면 읽게 되는구나.


고려의 역사는 475년 동안 거란, 여진, 몽골(원), 홍건적과 왜구 등 세기 별로 전쟁이 이어지다보니 대부분 ‘전쟁’의 사건과 관련 인물들을 위주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역사 공부를 좀 한 사람이라면 기억할 만한 업적을 가진 초기의 ‘광종’과 후기의 ‘공민왕’ 정도나 알까. 

고려는 조선보다 훨씬 더 알려져 있고, 더 오래 전의 신라보다도 오히려 덜 알려진, 미지의 나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려는 우리 역사상 두 번째 통일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성과 개방성이 살아 있어 오늘날 우리가 배울 점이 있는 나라였다.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고, 화려한 귀족 문화가 발전한 나라였으며, 불교와 유교가 공존한 나라였고, 넓은 세상과 교류한 나라였다. 이런 고려를 미지의 상태로 남겨 둔다면 우리의 한국사 지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P5


고려판 왕좌의 게임의 주인공 왕건 vs 견훤의 승자는 최종적으로 왕건이었다. 둘의 대결을 마치 오늘날의 선거판으로 재해석하여 내놓아 재미를 더한다. 

견훤은 후백제의 왕으로 활동 범위는 주로 오늘날의 전라도 지역이었는데 출생지는 경상도 상주 가은현 출신 호족 아자개의 아들이었다. 대부분의 건국 조상에 해당되는 이에 신화가 부여되듯 그에게도 어릴 적 호랑이가 젖을 물렸다는 설화와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존재한다. 지렁이가 한자로 ‘지룡’으로 표현되는데다가 지렁이의 한자가 ‘진훤’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면 지렁이의 설화가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둘의 싸움에서 견훤이 공산성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고창 전투(930)에서 지면서 승기는 넘어갔고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왕건에게 넘어가면서 힘이 더욱 실리게 되었다. 나중에 신라 경순왕의 귀부, 아들인 신검까지 왕건에게 귀부하면서 둘의 싸움은 종지부가 찍힌다.  물론 둘의 승부를 가른 결정적인 일은 지방 호족 세력들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얻는 데 왕건이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건은 결혼을 통한 동맹을 이용해 지방 호족의 지지를 얻었다. 총 29번의 결혼을 통해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제외하고 세 번째 결혼부터는 정략 결혼이 행해졌지만 이로 인해서 다음 왕위가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제1왕후인 신혜왕후 유씨의 성격은 탄복할 만하였다. 궁예가 학정을 펼치니까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왕건에 가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왕건은 주저하던 상황). 거사를 도모하는 회의 전 왕건이 아내에게 오이를 따오라고 내보냈는데(회의 내용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고의로 내보냄) 밖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휘장 속에 숨었다 그것을 걷고 나와 “의거를 일으켜 포악한 군주를 교체하는 일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장수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저도 의분이 솟구치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며 왕건의 군대 파병을 종용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성을 쓰고 본관이 정착된 것이 고려 초 지방 호족들에게 성을 하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알아두어야 할 키포인트다.

태조는 그 많은 아들 중 둘째 왕후의 아들인 ‘무’에게 일찌감치 정윤(조선으로 치면 ‘태자’)으로 책봉했는데(첫째 왕후는 아들이 없었음) 비록 처가 집안은 한미하였으나 장자 계승 원칙을 가능하면 지킴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는 유독 조선 초기와 특히 비슷한데 왕자의 난까지 닮은꼴로 일어난다. 태조를 이어 혜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병석에 눕자 태조의 아들이었던 왕요와 왕소가 대립했고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난을 일으켜 자신의 외손자이자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려다가 실패하여 왕요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상한 것은 왕규가 혜종의 장인인데 왜 굳이 난을 일으켜서 자기 발등을 찍었느냐 하는 것인데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보니 결과만 놓고 추측할 수 밖에 없어 아쉬움이 인다. 혜종이 얼마 안 가 죽고 왕요가 정종으로 즉위한다. 정종은 서경 천도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자 했으나 민심이 곱지만은 않았고 서경 이외의 호족 세력도 반발했기 때문에 광종이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종은 조선판 태종과 나란히 둘 수 있을 정도로 개혁의 피바람을 몰고 온 왕이다. 집권 초기 7년은 조용히 숨죽여 지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시행으로 호족들을 충격에 빠뜨린다. 특히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노비 해방인데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던 노비를 양민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국가는 노동력을 확보하고 세금을 더 걷을 수 있겠지만 호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노동력이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아무튼 광종 같은 사람이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광종 집권 15년차가 되면 주변의 문제될 만한 인물들(혜종과 정종의 아들 등)을 모두 숙청하기 시작한다. 근데 또 숙청을 하는 동안에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법회를 열고 절을 창건하고 구제안민책을 실시했다는 것을 보면 죄를 씻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조선의 정종도, 고려의 광종도 개국한 왕들에 이어 왕권을 유지하며 강화하고자 짐을 지은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천추태후의 이야기는 언제 봐도 흥미롭고 재미있다. 드라마 <천추태후>가 방영되기 전에는 나도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목종을 섭정하고 김치양과 사랑에 빠졌으며 김치양과 사이에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헌정왕후와 숙부 왕욱 사이 태어난 대량원군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려 사람으로 유교적 이념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려는 남녀를 불문 재산 균분 상속이었으며 부모 봉양 의무도 동일했던 만큼 딸과 아들의 차이가 없는 사회였고 이혼과 재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단지 고려 왕실은 족내혼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김치양의 신분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김치양은 천추태후 근거지인 황주 부근의 동주여서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이 무렵 국경을 수비하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두 아들을 모두 잃었으며 권력도 잃고 본거지로 쫓겨난다. 강조의 변에 대한 기록은 처음에 목종이 김치양을 제거하려고 강조를 끌어들였는데 강조가 김치양을 제거하면서 목종까지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했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천추태후는 강조가 수도로 오는 것을 막으려 했고 목종은 강조가 수도로 들어오길 원했다. 그런데 강조는 목종의 부름을 받고 정변을 일으키면서 김치양을 제거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왜 목종을 폐위하는 것으로 변모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 사건도 사료가 불충분해서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깝다. 강조의 변은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오는 데 빌미가 되기도 했고 향후 고려 사회가 호족 시대에서 귀족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거란의 침입은 1차와 2차로 나뉘어진다. 1차 침입 당시 고려는 성종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왕권이 안정되어 있어 서희 같은 명장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였다(강동 6주 획득). 그런데 제2차 침입 때는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정치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강동 6주가 무너지고 개경이 함락되면서 현종이 몽진까지 하는 상황 속에 패배하고 만다. 


이처럼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의 1권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에서 승리한 935년부터 거란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게 된 993년의 시기를 담고 있다. 책에는 우리가 역사서에서 배우는 내용도 있지만 잘 모르는 사실들, 오해하고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이를 보충한 역사적 사료와 역사 패널들의 대화를 통해서 공부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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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문화 개념이 인간 개념에 미친 영향

과학적인 문화 개념의 발전은 계몽주의에 지배적인 인간관(그것은 그에대한 찬반에 관계없이 명쾌하고도 단순한 것이었다)을 버리는 데에 이르거나, 적어도 그에 관련지어 있었으며, 그것을 대체한 것은 그보다 더 복잡할뿐 아니라 훨씬 덜 명료한 견해였다. 인간 본성에 대한 계몽주의적 관점을명료하게 하려는 시도, 즉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가능한 설명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줄곧 문화에 관한 과학적 사유의 기초가 되어왔다. - P52

이러한 관점의 문제점은 시간과 장소 및 환경이나 학문과 직업, 일시적 유행이나 순간적 의견과는 독립된, 일관성 있는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이미지는환상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인간 본성은 그가 어디에 존재하고 누구이며무엇을 믿는가 등과 서로 깊숙이 얽혀 있는 것으로, 그러한 것들(시간, 장소, 환경, 직업, 학문 등)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고찰이 문화 개념의 발생을 유도했으며, 획일적 인간관의 쇠퇴를 가져왔 - P53

다. 근대 인류학이 그밖의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때로는 거의 모든 것을 주장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확고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특정 지역의 관습에 의해서 달라지지 않는 인간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한 적도없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상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 P54

인간을 그가 속한 관습의 실체 속에 위치지으려는 시도에는 몇 가지의 방향이 있으며 다양한 전략이 차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혹은 거의 모두가 하나의 포괄적인 지적 전략 안에서 추진되어왔다. 나는 그것을인간 생활의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요인 사이의 관계의 "층위적(stratigraphic)" 개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개념에서 인간은 몇 개의 "레벨"의 복합체가 되는데, 각 레벨은 하위 레벨에 덧붙여져서 상위 레벨을 받치고 있다. 인간을 분석하려면 그 층들을 한 층씩 벗겨야 하는데, 각 층들은그 자체로 완전하여 환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한 층을 벗기면 또 다른, 완전히다른 종류의 하위 층위가 드러난다.
개념화의 매력은 그 개념화가 기성 학문 분야에 독립성과자주성을 보장한다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그것이 각자에게 자신의 먹거리를 가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듯이 보인다는 점에 있다. - P56

인간이라는 것이 발생학적으로과연 무엇인가에 관하여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사실을 몇 가지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민족의 문화적 특수성, 즉 그들의 특이한 점들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개념의 구성 또는 재구성에 인류학이라는 과학이 기여한 주요한 공헌은 그것들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를우리에게 보여준 데에 있을 것이다. - P63

우리에 관한가장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결국 우리 모두가 수천 종류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개개인의 타고난 소양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단 한 가지의 삶을 사는 것으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문화의 제어 기제(control mechanism)"라는 관점은 인간 사고가 기본적으로 사회적이고 공적이라는 가정, 즉 인간의 자연스런 거주지가 마당, 시장, 도심의 광장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 P65

문화 패턴들-유의미한 상징으로 조직된 체계 -에 의해서 방향이 결정되지 않은 인간행동은 실제로 통제할 수 없는 맹목적 행동과 감정 폭발로 인한 대혼돈일뿐이며,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의 경험은 거의 형태가 없어져버리게 된다. 문화는 그러한 패턴들의 축적된 총체로서, 인간 존재의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그 특수성의 기초이자 본질적 조건이다. - P66

인간 행동에서 본능에 의해서 통제를 받는 것과 문화적으로 통제를 받는 것 사이의 경계는분명하지 않으며 유동적이다. - P70

우리가 인간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한다면, 다양한 문화뿐 아니라 각각의 문화의 다양한 종류의 개인들의 본질적 속성을 확고히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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