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 드 경성 -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
김인혜 지음 / 해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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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한국 근대문화(예술)사에 관한 신간을 여러 권 읽었다. 그 중 이 책은 특히나 읽으면서 놀라움을 많이 느꼈는데 작가 자체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만을 다루지 않고 작가의 주변 친분 관계, 그리고 뒷 이야기들을 위주로 다루고 있다. 

최근 들어서야 나는 작가와 작품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작가의 주변 관계를 알면 작가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작품 세계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과거에서부터(작가 자신) 현재(후손)까지의 흐름까지 알려줘서 여러 번 놀라움을 느끼게 했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만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이 정말 많아서 정리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매 챕터가 거의 다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리뷰를 쓰기가 오히려 더 난감한 책이었다.


1부는 작가와 친분을 가진 관계를 다루는데 구체적으로는 미술가와 작가의 만남이다. 이상과 구본웅, 박수근과 박완서, 이태준과 김용준 같은 알려진 관계들도 있지만 정지용과 길진섭처럼 정지용은 잘 알지만 길진섭은 물음표이거나 김광균과 최재덕처럼 둘 다 생소한 경우도 많았다. 


김광균은 그림 같은 시를 쓴 시인으로 유명한데 대표시 ‘와사등’이 있다. 아래 잠시 살펴볼까.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雜草)인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皮膚)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悲哀)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와사등’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시라는데 나는 그 시를 이번에 처음 보았으며 심지어 김광균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봤다. 어쨌든 그림 같은 시를 썼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시를 읽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김광균은 전쟁이 났을 때 후배 예술가(이중섭 등)들을 많이 챙겼다고 한다. 

최재덕은 이중섭처럼 김광균이 아끼는 화가였다고 한다. 그가 김광균에 대해서 이야기한 묘사가 있다. 

경주 박물관 추녀 및 제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지나는 바람 같은 미소를 띤 부처님이 최재덕인 것 같다. …. 그의 그림은 행복한 색채로 덮인 나이브한(순수한) 풍경이 많다. 가을 추수 때 시골로 내려가 그린 들판의 <원두막>, <포도>, <한강의 포플러 나무>, <금붕어> 등 대단히 독창적이고 부드러운 형상이 서려 있는 서정을 나는 이중섭과 맞먹는 것으로 생각한다. - 김광균, ⌜30년대의 화가와 시인들⌟, 계간미술 1982년 가을호


김광균이 왜 이중섭과 최재덕을 아꼈는지 그의 말을 보면 이해가 될 것 같다. 둘의 작품이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시골 감성? 향토성을 지닌 풍경이라고나 할까. 


아래 그림을 보자. 최재덕의 <원두막>인데 마치 이중섭의 <소> 그림과 비슷한 느낌이 연상된다.


심지어 최재덕은 자신의 서명으로 소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최재덕’이라는 한글 글씨를 분해해서 소 모양이 되게 했다. ‘덕’이라는 글자가 소의 다리 모양을 만드는 식이다. 왜 소 모양을 서명으로 했을까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 소는 조선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본인들이 싫어하는 은유의 대상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일견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최재덕의 이름이 생소한 것은 그가 월북을 했기 때문이다. 


2부는 화가와 그의 아내를 다룬다. 생각해보라. 화가에게는 언제나 그의 파트너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 파트너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 파트너가 조력자이기만 하지 않다. 그 자신이 예술가인 경우도 많았다. 가장 놀랍기도 하고 재밌었던 주제가 아니었다 생각한다. 


유영국은 한국 추상화의 대가다. 몇달 전 전시회에서 유영국의 <산>이라는 작품을 만났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화사한 색과 절묘한 배치를 이용해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유영국은 화가 몬드리안을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을 생각해보니 왜 그가 몬드리안을 존경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화가 몬드리안은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이 일어난 것은 인간이 낭만적인 서사에 빠져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예술가는 그런 우매함에서 빠져나와, 수학적 직관을 통해 자연이 지닌 완전한 균형과 질서를 표현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추상화는 시장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잘 팔리지 않는 추상화에 일생을 걸겠다고 유영국은 다짐한다. 평생 알아주는 이가 없으며 돈을 벌지 못할 지 모르는 일에 뛰어드는 결심, 지금 생각해도 무모하리만치 놀라운 도전이다. 그런데 그 무모함의 태도에 김기순 여사는 이끌렸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열심히 해서 만들어놓은 것이 바가지라 하더래두요. 그건 그냥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건 아니죠.” 유영국이 환갑이 다 되어가던 1979년 삼성의 이병철이 그의 그림을 알아보기 시작한 뒤로 삼성가에 그의 작품이 많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살아생전 그의 그림이 인정을 받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유영국은 “내 그림은 살아생전 팔리지 않는다”라고 했다는데 김기순 여사는 안정된 작업 환경을 만들어주고 반복되는 리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그의 뒷바라지를 톡톡히 했다. 


3부는 화가와 그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시대를 관통하여 온몸으로 살아낸 선구자들이다. 


이들 중 나는 오지호의 작품과 생애에 주목했다. 


그의 작품 중 국가등록문화재가 있다. <남향집>이라는 그림이다. 


그림자의 표현이 일품이다. 처음에 이 그림을 보고 오히려 나무보다 그림자가 더 눈에 띈다라는 생각을 했다. 빛에는 그늘이 있듯 앞면이 아닌 뒷면에 주목하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처음 죽음의 위기는 1935~1937년 무렵이었는데 혼탁한 경성의 생활을 접기로 하고 개성의 송악산에 간 그는 1년만 머물 생각으로 갔다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10년간을 머물게 된다. 그런데 하필 위출혈이 발생하여 죽음의 문턱까지 가 5개월간 병원 신세를 졌고 퇴원 후에도 재발과 졸도를 반복한다. 오지호는 더 이상의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 일광욕만으로 자가 치료를 했는데 다행히 정신력의 승리였는지 나아졌다고 한다. 두 번째 위기는 한국전쟁 때다. 그는 1950년 말 고향에서 빨치산에 납치되어 남부군 활동에 끌려다니게 된다. 그는 해방 후 조선대 교수를 역임했고 예술가여서 부대 내에서 반동분자로 몰려 내내 감시생활을 받았다. 1952년 1월 오지호 부대가 백운산에서 군경 토벌대와 대치하다 낙오되어 국군에 붙잡혀 즉결 처형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한 장교가 그를 살려준 덕분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재판을 거쳐 무죄로 풀려났다고 한다(진짜 생각할수록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왔더니 작품 3백점이 몽땅 소실된 뒤였고 이는 작가로서는 최악의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좌절의 순간에도 그는 그림을 다시 그리겠다 결심하고 무등산으로 들어간다.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5.16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 그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활동과 과거 빨치산 이력 때문에 검거되어 빨갱이로 몰린다. 서대무형무소에서 10개월간 옥살이를 하면서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생각할수록 인간승리가 아닐 수가 없다.


오지호는 “고난이 와도 삶은 총체적으로는 환희”라고 이야기한다. 예술은 환희를 표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오지호의 밝고 환한 작품은 결코 어둠을 피하거나 외면해서 얻은 것이 아닌 고통을 직면해서 얻어진 결정체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4부는 예술가로 살아갈 운명, 고통과 방황 속에서 만난 구원을 담았다.


이 중 나는 역시 이성자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지난 번 전시회에서 이성자 말년에 주로 천착했던 우주에 관한 그림이 떠올랐다. 작품을 보고 나니 그녀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이성자는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인 외과의사 신태범과 결혼한다. 그는 이성자와 마찬가지로 자존감 높은 인물이었고 계속되는 관계의 악화로 결국 이성자는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그녀는 파리 화단에 빠르게 주목을 받으며 진입했고 회화 공부한지 3년 만에 <국립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평론가의 호평을 받았다. 1964년에는 이성자 개인전이 열리면서 프랑스 문화부 관계자의 주목을 받고 작품이 프랑스 정부에 영구 소장되는 쾌거를 낳는다. 한국에는 세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성자를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군이 되었다고 한다. 몇 년동안을 떨어져 지내면서 보지 못했을텐데 아들들의 인품도 놀라웠던 지점이었다. 


말년에 이성자 작품은 우주를 향해 나아간다. 우주의 하늘과 별과 행성들은 수많은 점처럼 흩어져 있다. 우주를 보고 있으면 인간은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뜻일까. 작가의 중심성을 찾아가는 표현인 것 같기도 하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이상하리만치 슬픔이 느껴진다.




한국 근대 예술가들을 꽤나 팠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모르는 인물들이 이렇게나 남아 있다는 것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기쁨을 느끼게도 했다(앞으로 더 눈여겨볼 예술가들이 있다는 것이므로). 


다채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책이다. 한국 근현대 미술에 관심이 없다 해도 이 책의 인물과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인물 하나쯤은 궁금해서 파게 되는 욕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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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지 - 몽골제국이 남긴 '최초의 세계사' 라시드 앗 딘의 집사 1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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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는 몽골의 지배를 받던 이란에서 칸의 최측근으로 재상의 직책을 수행한 ‘라시드 앗 딘’에 의해 쓰여졌다. 집사는 몽골 군주의 칙령과 후원을 받아 집필되어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원자료를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원제목은 ‘연대기의 집성’으로 몽골 제국을 건설하고 통치한 군주들의 연대기를 종합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 인도, 아랍, 투르크, 유럽, 유태 등 여러 민족의 역사들이 집대성되어 가치를 더한다. 집사가 ‘최초의 세계사’라고 불리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한다.


라시드 앗 딘은 이란 중부 하마단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제약과 의술을 익힌 뒤 몽골 군주가 ‘일 칸’인 시기에 궁정에 나아가서 ‘가잔 칸’ 시기 이후에는 문관으로는 최고직인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 인물이다. 안타깝게도 1318~19년 일 칸국의 군주를 시해했다는 고발로 처형되고 말았다. 


가잔 칸은 라시드 앗 딘에게 몽골제국사만 집필하도록 하였는데 가잔 칸이 사망할 때까지도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후 즉위한 울제이 투 칸이 기존에 집필하던 몽골제국사의 내용은 ‘가잔 사’로 명명하고 자신의 치세 이후 벌어진 일과 세계 각 민족의 역사를 넣어 2부 내용으로 삼고 각 지역의 지리적 특징을 3부 내용으로 하도록 함으로써 집사의 내용이 처음과는 달리 확장되었다. 


‘집사’ 제1부 원문의 제목은  ⌜투르크 종족들의 흥기에 관한 역사와 그들이 여러 부족으로 갈라지게 된 상황에 대한 설명•각 부족 조상들의 정황에 대한 전반적인 서술⌟로 되어 있지만, 편의상 학자들은 이를 ⌜부족지⌟라고 부른다. ⌜부족지⌟는 배치상으로도 ‘집사’의 첫머리에 나올 뿐만 아니라 집필 시기 면에서도 다른 부분들에 비해 가장 먼저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 P35


당시 일 칸국의 몽골 귀족들은 선조의 이름이나 업적을 대부분 아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를 위해서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내용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다. ⌜부족지⌟는 2권에 나오는 몽골 제국의 역사에 관한 인물에 대한 배경 지식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다. 


⌜부족지⌟의 내용은 유목집단의 구성에 따라 오구즈족, 몽골이라 불리게 된 투르크족, 투르크족, 원래부터 몽골이라 불리던 종족 이렇게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구즈족은 노아의 증손자라고 하는 전설의 인물 오구즈가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 그와 함께한 집단과 그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 투르크족은 오구즈와 연합하지 않은 이들 중 스스로를 몽골이라 부른 집단이냐 아니냐에 따라 구분이 지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애초부터 몽골이라 이름불린 집단이 있다.


라시드 앗 딘에 의하면 이들 네 집단은 모두 아불제 칸의 아들인 딥 야쿠이의 후손이라고 한다. 아불제 칸은 성경과 코란에 나오는 노아에 해당되고, 딥 야쿠이는 야벳에 해당된다. 따라서 ⌜부족지⌟에 보이는 종족 관념은 노아의 아들 셈이 아랍 유태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함이 흑인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야벳이 투르크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서아시아 주민들의 전통적인 이해방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P37


⌜부족지⌟를 통해서 이 네 부족에서 배출된 중요 인물들과 후손들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부족의 계보가 무척 복잡하기 때문에 인물들의 계보를 단 번에 그려낸다는 것은 무리다. 그저 참고서를 하나 얻었다 여기고 2권 이후 다양한 역사적 일화들을 확인할 때 도움을 받는다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각 부족은 칭기스칸이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 동참한 집단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았던 집단이 있기 때문에 칭기스칸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것을 추천한다. 


오구르 종족은 무함마드 무스타파의 시대에 무슬림이 되면서 유일신을 믿는 집단이 되었다. 오구즈와 그의 아들 이후 오랜 동안 그 종족으로부터 많은 군주들이 나왔고, 각 시대마다 24개의 지파로부터 강력한 군주가 출현하였으며, 군주의 자리는 오랜 기간 동안 그의 가문에서 떠나지 않았다. (…) 그들의 통치와 지배는 이란 땅에도 미쳤다. (…) 또한 위구르족 역시 이 투르크 집단에 나왔고, 거주지가 몽골 지방의 경계와 가까우며, 그들이 오구즈의 사촌들에게서 나왔다. - P122~123


오래 전에 몽골화된 투르크족들은 저나름의 별칭과 이름을 갖고 있었고, 독자적인 지도자와 아미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잘라이르 오이라트 타타르와 다른 종족들처럼 그 각각에서부터 지파와 부족이 다시 갈라졌다. 그들의 목지와 거처는 정해져 있었고, 그들의 외모와 언어는 몽골의 외모와 언어와 흡사했다. 그때는 몽골의 지파가 투르크에 속하는 한 종족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성공과 막강함과 용맹함으로 인하여 다른 종족들도 모두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 P125


투크르족들은 각각의 종족에 군주와 지도자가 있었고, 정해진 목지와 거주지가 있었으며, 그들은 각기 몇몇 종족과 지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또 다른 투르크인들과 몽골계 투르크인들은 오늘날 이 종족에 대해 별다른 경외감을 느끼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몽골의 군주인 칭기스 칸의 일족이 지고한 주님의 힘에 의해 그들을 정복하여 눌러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 종족들이 투르크의 [다른 어떤] 집단들보다 더 중요하고 웅대했으며, 강력한 군주들도 있었다. - P195


니르운 몽골은 알란 코아가 남편인 도분 바얀이 죽은 뒤 출산한 자손들에게서 나온 종족이다. 알란 코아는 남편이 죽은 뒤 빛에 의해 임신하여 세 아들을 출산했다고 한다. 칭기스칸은 6대 선조인 카불 칸의 손자이자 칭기스칸의 아버지인 에수게이 바하두르의 아들이다. 

칭기스 칸의 부친인 이수게이 바하두르의 자식들은 ‘보르지킨 키야트’라고 불리는데 투르크어에서 ‘보르지킨’은 회색빛 눈을 지닌 사람을 뜻하며, 그들의 피부색은 누런 빛을 띤다. 그들이 얼마나 대담하고 용맹했는지, 그 용맹함은 본보기로 이야기될 정도였다. 종족들이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되면 그들에게 매달려 청원하고 공납과 선물을 바치면서 그들의 힘과 용맹을 [보태 줄 것을] 간청했고, 그들의 지원과 도움으로 강력한 적을 정복하고 패배시켰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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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 24 ] The Wars of the Greeks


Greece’s War With Persia

페르시아인들이 그리스를 침략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 땅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몇몇 도시는 수중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에 메신저를 보내 “우리는 페르시아 대왕이 보내서 온 사람들이다. 이 땅을 원하는데 동의한다면 흙과 물을 보내라.” 아테나인들과 스파르타인들은 분노했고 메신저를 우물에 던져버리자 페르시아는 예상대로 싸움을 걸어왔다. 첫 전투는 마라톤에서 시작됐다. 아테네군은 스파르타에 도와달라 요청했으나 축제 기간동안은 참여할 수 없다고 군대 보내기를 거부했다. 아테네인들은 홀로 페르시아군을 상대해야했으나 불굴의 의지로 전투에 승리했고 마라토너인 Pheidippides는 마라톤에서 26마일의 거리를 경주하여 마라톤에 도착했으나 힘이 다 빠져 사망했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살라미스 전투에서는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이 합심하여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The Greeks Fight Each Other

그리스는 대리석으로 된 건물을 많이 지었는데 거기에 화려한 friezes(=pictures, carved in marble)를 새겨 넣어 실감나는 전투 묘사를 해 놓았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종식되었으나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가 더 강해질 것을 모두 두려워했다. 평화 대신에 그들은 싸움을 택했다. 둘 간에 펠로폰네소스전쟁이 25년간 이어지게 된다.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의 강한 공격력을 알았기 때문에 성에서 방어하며 싸우려 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군이 성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전염병이 돌더니 아테네군의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이때 페리클레스도).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는 “전투에 나설 자 나를 따르라!” 로 아테네 군인을 모은 뒤 스파르타 주둔지를 함께 공격했다. 그러나 아테네 남성들은 전투력이 약했고 스파르타군이 그들을 무찔렀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인들에게 분노하여 아테네를 버리고 스파르타 캠프로 넘어간다. 그러더니 “나는 폴리스로 가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다.” 스파르타인들은 그의 말대로 몰래 아테네를 침투하여 아테네인들을 사로잡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 


[ Ch 25 ] Alexander the Great


Philip and His son

마케도니아에 필립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를 정복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소아시아와 페르시안 제국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공격하기 전 사망하고 만다. 그 소원은 아들인 알렉산더가 물려받게 된다. 

알렉산더의 어릴 적 일화가 있다. 부케팔루스라는 검은색 종마를 얻은 일이다. 그는 다루기 어려워서 아버지 필립왕 조차 포기한 놈이었다. 그는 말이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이용해 부케팔루스를 자신의 말로 삼는다. 부케팔루스는 알렉산더가 나간 전투 어디든 따라다녔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이후 정복하러 나간 소아시아 땅에서 “고르디언의 매듭”이라는 전설의 매듭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고르디언의 매듭을 풀어야 소아시아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몇 백명의 사람이 시도해보았으나 성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알렉산더는 칼로 slice the knot in half 로 매듭을 풀고 소아시아 뿐 아니라 이집트, 페르시아 제국까지 모조리 제압했다고 한다. 전설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Alexander’s Invasions

알렉산더의 정복 사업에 차질이 빚어진다. 인도 앞이었다. 점점 더 많은 군인들이 죽어나가면서 군인들이 싸움을 거부했다. 알렉산더는 멈추고 싶지 않았으나 그는 결국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인도에서 더는 나아가지 않기로 한다. 

알렉산더는 후대에 자신이 위대한 통치자였음을 알리기 위해 수년간 도시를 건설한다. 이집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가 있다. 오늘날 이집트 관문 도시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인들이 배를 타고 들락날락하기 좋았다. 그러나 그는 살아 생전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가 죽고 나서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명 학자, 작가들이 사는 미술, 음악, 교육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330 피트 높이의 등대인 파로스 등대가 존재한다. 이것이 the Seven Wonders of the Ancient World 중의 하나다. 아쉽게도 오늘날 등대가 남아 있지 않다. 최근에 다이버들이 알렉산드리아 항구 바닥에서 돌덩어리를 찾아냈는데 그 등대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The Death of Alexander

알렉산더는 20살 때 왕이 되었고 불과 11년 동안 제국을 다스리는 왕의 지위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원정을 나가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몸이 점점 약해지면서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 한다. 장군이 그를 보러 왔을 때 눈만 깜빡였다고. 사인은 독살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말라리아에 의한 사망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무튼 그는 유리관에 들어가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졌고 알렉산드리아에 석관으로 모셔졌다. 그가 죽고 나자 소아시아 북부와 마케도니아를 한 사람이 다스리고 다른 한 사람,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 넘겨받는다. 그리고 세 번째로 셀레우코스가 소아시아 남부를 넘겨 받고 인도까지 영토를 섭렵하게 된다. 그 후손들은 셀레우코스인들과 시리아인들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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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0-14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금전에 한 챕터 클리어 했습니다ㅎㅎ 약간 어려워지는것 같긴한데 역사 이야기라 흥미진진해서 완독할 수 있을거라 생가합니다. 화가님 즐거운 주말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3-10-15 16:03   좋아요 1 | URL
내용이 길어지기도 하고 어려운 단어들이 더 늘어나죠. 그래도 이 책을 완독하고 나면 기본적인 고대 역사의 흐름은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요 미미님!

독서괭 2023-10-14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쭉쭉 달려가시는 화가님! 저도 좀전에 20챕터 읽었어요. 끝까지 함께 해요~~

거리의화가 2023-10-15 16:04   좋아요 1 | URL
남은 내용이 아직 많아서 거의 매일 한 챕터 읽어야 겨우 끝낼 수 있겠더군요. 괭님도 힘내시고요! 화이팅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10-15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읽으셨네요?
추석 쇠고 나니 뭔가 더 분주해져 여기 저기 쏘다니며 볼일보느라 읽기에 영 진도가 붙질 않네요. 겨우 한 챕터씩 읽고 있는데도 전 아직 13챕터네요.^^;; 부지런히 읽어야하는데 말입니다. 일단 읽는 게 급해서 기록을 미루다 보니 나중에 이걸 어떻게 정리하나? 싶지만, 읽을 수록 역사 이야기는 재밌네요.^^
암튼 화가님만 쫓아갑니다.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10-16 09:13   좋아요 1 | URL
날씨가 요새 정말 좋아서 책 읽기에 더 힘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혼식도 많을테고 여기 저기 행사가 많을테죠. 정리 안하면 나중에 다 잊어먹어서 저는 읽고 바로 쓰고 있어요. 읽을수록 재밌으시다니 제가 왜 기분이 좋은거죠?ㅎㅎㅎ 나무님 화이팅입니다!
 

사람들은 거리 성매매가 ‘가장 비천‘ 해서 그 이하로 전락할 곳은 없다고 간주하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후에 성매매를 연구한 국제 연구 결과들을 접했을 때, 거리 성매매가 아닌 다른 유형의 성매매와 성산업에서 폭력이 더욱 만연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시애틀의 한 연구는 스트립 클럽, 마사지 숍, 포르노물제작 산업에 유입된 여성들이 거리 성매매에 유입된 여성들보다 삶의 조건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적고, 폭력을맞닥뜨리게 될 위험이 더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P119

성매매 업소나 에스코트 에이전시에 있으면 어떤 구매자를 만날지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알고 있었다. 승자하기 전에 성구매자를 볼 기회가 있는 거리에서의 상황과는 다르다.
이런 이유로 거리 성매매 여성의 자율성이 가장 크다.
이는 거리 성매매여성을 가장 불행한 부류로 묘사하는 일반적 생각과는 대조된다. 성매매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고다른 면에서 운이 좀 없더라도 거리 성매매에서 가장 자율성이 높다.
이것이 바로 1993년도 성범죄법이 거리 성매매 여성들에게 충격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처음부터 별로 많지도 않았던 자율성 중 일부가 강탈되었다. 믿기 어렵게도그 법령은 성매매를 하는 남성이나 여성, 혹은 성매매 자체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 법령은 성매매를 목적으로 유인하는 행위를 불법화했다. 유인한다는 말은 성구매를 하려고혹은 자기 자신을 성매매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돌아다니는행위를 뜻하는 법률 용어이다. 따라서 그 법안은 거리 성매매 여성들만을 범죄시하고, 표적으로 삼았다. 이는 성매 - P120

매를 실내로 몰아넣는 뚜렷한 결과를 초래했다(의도됐다고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더 이상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고, 부작용으로 과도한 고통을 야기했다. 처음으로 삽입 성교를 시작해야만 했다. - P121

여성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스트립 쇼를 해가 없는 구경거리로 여긴다. 그렇지 않다. 음란하고 외설스러운말들을 아우성치는 술 취한 남자들 50, 60명 가운데 서서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층들을 천천히 벗겨낼 때, 심장이 가슴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리는데 무해하거나 재밌지 않다. 정신적으로 철저히 침범된다. - P125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름이 남았을 테다. - P127

여기서 타락의 상호작용이라 함은 심리적으로 취약한남성의 마음이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성매매 여성이고의적으로 이용하여 조종한다는 점과 관계가 있다. 인위적인 조작을 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종류의 남자에게는 필수적으로 그렇게 하게 된다. 성매매에서는 이를 수행해내는 능력이 요구될 뿐이다. 이것이 성매매 여성이 일종의 자율성을 지닌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런 종류의 구매자는 조종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주인‘을 알아봐야만 한다는증거일 뿐이다. 한 가지 이유이다. 그것이 성적으로 그를흥분시키기 때문이다. 여성이 실제로 통제력을 가진다기보다 그렇게 인식하고픈 남성의 필요가 그 중심에 있다. - P133

서로에게 해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쪽모두 알면서도 그중 누구도 신경 쓸 자비심은 없다는 점은타락이 상호작용하는 또 다른 본질이다. - P137

성매매 구조 속에서는 기본적으로 성적 동등함이나상호 존중이 없으므로, 진정한 관계를 맺기 희망하고 찾아다니는 사람은 성과 없이 계속 실망할 것이 뻔하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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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66
발해 태수로 봉해진 ‘공수’가 백성들을 안민하며 자리를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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