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최후의 유목제국들

쿠빌라이의 휘하에 있던 투르크인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정복의 무대로 삼았고, 킵착 칸국 아래의 투르크인들은 비엔나 성문까지 치달았으며, 훌레구 휘하의 투르크인들도 이집트의 강가에 다다랐다. 오직 차가다이의영지인 투르키스탄의 ‘중원왕국‘에 있던 투르크·몽골인들만이 칭기스칸 일족의 세 울루스에 둘러싸여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그런데 이제 그들을 둘러싸던 담이 갑자기 허물어진 것이다. 서쪽으로트란스옥시아나를 두르고 있던 페르시아의 국가가 사라졌고, 킵착칸국이지배하던 서북방도 쇠퇴하여 길을 막을 능력이 없어졌다. 고비사막 방향으로도 ‘모굴리스탄‘이 폐허화되면서 길이 열렸고, 델리의 술탄국도 일시적으로 붕괴되어 과거 차가다이 칸국 때처럼 인더스 강을 방어할 만한 상황이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강요되었던 휴식을 보상할 기회가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외곽에 있던 투르크-몽골 울루스들만이 정복의 재미를 맛보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람들은 몽골식 전투의 영광과 보상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이제 마침내 그들의 시대가 찾아왔다.
티무르의 서사시 - 계속된 배반과 살육을 우리가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다면 -는 비록 종족으로는 투르크였지만, 그리고 비록 늦기는 했어도 몽골의 서사사의 일부였던 것이다. - P590

샤 루흐는 티무르조에서 가장 뛰어난 군주였다. 무시무시한 티무르의 이 아들은 비록 평화로운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훌륭한 지도자였고 용맹한 전사였다. 그는 인간적이고 온화했으며 페르시아 문학을 애호하였고뛰어난 건설자였다. 또한 시인과 예술가의 후원자였으며 아시아가 그때까지 배출할 수 있었던 가장 탁월한 군주였다. 그 과정은 칭기스칸에서 쿠빌라이로 진행된 동일한 패턴을 밟아 나갔다. 1407년부터 1477년까지의 그의 긴 치세는 문화적 방면에서 페르시아 문학과 예술의 황금기를 맞아 ‘티 - P642

무르조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가 수도로 삼았던헤라트와 그의 아들인 울룩 벡 -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 - 의 거처가있던 사마르칸드는 이 르네상스의 가장 화려한 중심지였다. 역사에서흔히 일어나는 패러독스처럼 이스파한과 시라즈를 파괴한 도살자의 아들들이 이란문화의 가장 적극적인 보호자가 된 것이다. - P643

모스크바 국가의짜르였던 ‘공포왕‘ 이반 4세 (1533-1584)는 카잔의 독립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하고, 1552년 6월 강력한 포병을 이끌고 와서 도시를 포위하였다. 10월 2일 그는 공세를 취하여 도시를 함락하고 남자주민들의 대부분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으며 모스크들을 부수었다.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에 편입되어버렸다. - P662

서투르키스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후라산의 주인이 된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우즈벡 제국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지난 4세기 반 동안(1055-1502) 수많은 투르크 및 몽골 군주들에게 복속했다가 이제 막 독립을 회복한 페르시아와 충돌하였다. 백양부의투르크멘 유목민들을 넘어뜨리고 권좌에 오른 민족왕조 사파비 (1502-1736)는 이제 우즈벡으로부터 후라산을 빼앗아옴으로써 이란의 재통합을 완성시키려고 하였다. - P671

이 우즈벡 군주는 사파비조의 뿌리(시어파 셰이흐의 가문)를 빗댈 양으로 페르시아의 샤에게 수도자가 구걸할 때 사용하는 그릇을 보내면서세속의 권력은 칭기스칸의 자손들에게 맡겨두고 그는 자기 조상들의 직분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모욕에 대하여 샤 이스마일은 자신이수도자이기 때문에 후라산의 심장부에 있는 마쉬하드의 이맘 레자ImamReza의 성묘에 참배하러 군대를 이끌고 가겠다고 응답하였다.
페르시아의 샤는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그 당시 무함마드 샤이바니의 후방에서는 카자흐가 공격해와 그의 아들 무함마드 티무르MuhammadTimur를 파멸시켜버렸다. 샤 이스마일은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후라산을 침공하였고 자신의 약속대로 마쉬하드에 입성하였다. 메르브에서 그를 기다리던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전투에서 패배해 그 도시 근처에서 - P671

1510년 12월 2일 살해되고 말았다. 주방 올라왔고이 승리는 동방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란 독립의 회복자가 투르크·몽골세력의 부흥자를 죽였다는 사실 - 즉 위대한 사산조 제왕들의 후손이 칭기스칸의 자손을 패배시키고 죽였다는 사실은 이제 시대가 변했고 오랜 세기에 걸친 침입을 끈질기게 참아왔던 정주민이 유목민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시작했으며 농경지가 초원보다 우위를 점하기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 P672

바부르가 통치하던 이란사마르칸드와 현재의 중국령 투르키스탄 지역과의 관계는 단절됨이 없이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트란스옥시아나 사람인 바부르가차가다이 투르크어로 책을 썼지만, 모굴리스탄의 아미르인 하이다르 미르자는 페르시아어로도 저술한 것이다. 하이다르 미르자의 주군인 차가다이가문의 사이드 칸은 투르크어만큼이나 페르시아어로 훌륭하게 말할 줄 알았다. 항공기따라서 16세기 차가다이계 마지막 칸들의 제국을 마치 쇠퇴하는 나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유누스 칸이나 하이다르 미르자와 같이 고도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존재는 도리어 그 반대였음을 입증한다. 중국인들이 그 민족적 특징과 성격을 압살시키고 어떻게 해서든지 외부와의관계를 차단하려고 했던 이 지방은 그 당시에는 이란· 투르크 이슬람으로부터 불어오는 각종 문화적인 훈기를 받아 새로워지고 생기가 넘쳤다. 유누스 칸의 일생이 이를 입증한다. - P691

13-14세기 중국을 지배했던 칭기스칸 일족의 황제들은 천자가 된 뒤에도 언제나 몽골의 대칸으로 남아 있었고, 지나간 19개의 왕조들의 유산을 받아들였으면서도 그들은 차가다이와 훌레구와 조치의 가문이 지배하고 있던 투르키스탄과 페르시아와 러시아의 다른 칸국들의 주군이면서 동시에 칭기스칸의 후예로 남아 있었다.
반면에 만주인들은, 당시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두 삼림이거나 약간의 화전만이 있었던 자기들의 고향 만주를 제외한다면, 중원 제국이 유일한 관심거리였다. 그들이 쿠빌라이 가문에 비해 정신적인 고유성을 훨씬덜 가졌고 보다 철저하게 중국화된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쿠빌라이 가문처럼 결코 중국에서 쫓겨나지 않고 동화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종족적인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칙령을 내렸지만 1912년 그 왕조가 무너졌을 때 이미 과거 만주인 정복자들은 다수의 중국인 속에 빠져흡수된 지 오래였다. 이는 중국 본토에서뿐만 아니라 만주에서도 그러했으며, 하북이나 산서에서 온 이주자들에 의해 퉁구스적인 요소들은 철저하게동화되고 제거되어, 민족분포를 나타내는 지도는 그곳이 완전히 중국인의땅임을 나타내게 되었다. - P719

17세기 초 그들은 거대한 팽창의 격랑에 휩싸였다. 토르구트는 바투와 금장 칸국의 자취를 따라 남러시아의 아스트라 근처 볼가 강 하류로 이주하였다. 호쇼트는 쿠쿠노르 지역에 정착해 멀리 티베트의 라사까지 지배하였다. 초로스, 즉 준가르 본부는 한쪽으로는 모스크바 국가 지배 하의 시베리아에서부터 부하라 - P745

칸국, 그리고 중국의 변경에 이르는 지역을, 다른쪽으로는 홉도에서 타쉬켄트와 홉도에서 케룰렌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들의 ‘수도’인 홉도와 쿨자는 카라코룸을 대신할 듯 보였다.
더구나 그 시대를 표상하듯이 그들은 이미 칭기스칸 일족의 성소들을약탈하였다. 처음에는 갈단의 정치적 활동에 의해, 뒤에는 체왕 랍탄과 체돈돕의 군사적 작전에 의해 그들은 라사의 군주가 되었고, 라마교회의영적인 힘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카쉬가르와 야르칸드에 있던 무슬림 ‘성직자‘인 호자들 역시 비슷한도구였다. 100년 이상 그들은 내륙아시아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그들의 지도자인 홍타이지들, 즉 바아투르, 갈단, 체왕랍탄, 갈단 체렝은 자신들이탁월한 정치가였고 대담하며 먼 안목을 지닌 강인한 전사였으며 칭기스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기마전사들의 놀라운 기동성 유목민의 보편적특징 을 완벽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 역시 거의 성공에 이르른 것이다. 19---라도어떻게 했으면 그들이 실패를 피할 수 있었을까? 만주인들의 지배가늙은 중국에 새로운 활기와 군사적 체제를 가져다 주기 몇 해 전에 출현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명말의 중국은 너무도 피폐해 있어 어느 누구몽골이든, 일본이든, 만주든 - 그것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 왕조가 천자의 권좌에 확고하게 자리잡자마자 중국은150년 동안의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지적이고 적극적이었으며그러면서도 케케묵은 편견에서 자유로웠던 최초의 만주 황제들은 나라를근대화시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는데, 이는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만들어준화포들이 입증해준다. - P7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년체의 역사에는 속수(涑水, 사마광)보다 훌륭한 것이 없으며 이를 뒤 이은 것으로는 설(薛, 薛應?, 1500~1574)·왕(王, 王宗沐, 1523~ 1592)·서(徐, 徐乾學, 1631~1694)같은 세 분이 있는데, 서씨의 것은 비록 설씨와 왕씨의 것보다는 우수하지만 그러나 서적을 보는 바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남쪽의 역사를 자세히 쓰고 북쪽의 역사를 소략히 하는 병통이 없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여러 책을 널리 쌓아 놓고 정사(正史)를 고증하며 손수 스스로 재정(裁定)하여 송(宋)에서 시작하여 원(元)에서 마치고 《속자치통감》 220권을 만들고 별도로 《고이(考異)》를 만들어 본문의 아래에 붙였으니 무릇 4번 원고를 바꾸어서 완성한 것이다.

요·금의 정사는 본기를 보는 데 그쳤고, 중간에 한두 명의 열전에만 미치었으니 여러 <전기(傳記)>와 <지(志)>와 <표(表)>는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송(宋)의 가정(嘉定, 1208~1224)이후로 원의 지순(至順, 1330~1332)이전까지는 거칠고 생략된 것이 아주 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두 남겨진 일사(逸事)가 아직 나오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하게 본 바를 근거하기에 이르러서 말을 달려 그 번거롭고 풍부하기가 예컨대 서하(西夏)에서 인척(姻戚)의 세계(世系)를 갖추어 서술한 것과 원말(元末)의 쇄사(?事, 자질구레한 일)는 자료를 철애악부(鐵崖樂府)에서 뽑은 것 같았으니, 편년체의 책은 홀연히 흡사 보첩(譜牒)같고 홀연히 흡사 시화(詩話)같아서 특히 체제(體制)에서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수집한 재료가 비교적 풍부하였고, 핵심을 상고한 것이 비교적 자세하여 이미 진·왕·설씨를 몇 배나 넘어 섰으니 후에 일으킨 공로는 착수하기에 쉽게 하였으니 역시 그것의 길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부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

840년 위구르의 몰락 이후 초원의 제국에는 실질적인 계승자가 없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을 모전천막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의 지고의 칸이라고선포하면서, 투르크인의 조상들(흉노), 몽골인의 조상들(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다시 투르크인들(돌궐과 위구르)이 번갈아 소유하던 이 옛 제국이이제 영구히 몽골인들에게 돌아왔음을 선언하였다. - P320

칭기스칸 국가의 역사가 지닌 역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행위를 건전한 상식의 격언과 잘 확립된 정의로 규제하는 현명하고 사려깊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막 원시적인 야만상태에서 나타나 공포 말고는 적들을 굴복시킬 수단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았으며, 도시와 농경문화를 지닌 정주민족들의 생활이나 자기 고향인 초원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유목민들의 야수적 반응 사이에 보이는 뚜렷한 차이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놀라움은 라시드 웃 딘이나 『원사의 편찬자가 지도자 개인에게서 보이는 지혜나 심지어 온건함, 이에 반해서 교육과 유전적 회귀와 사회관습에서 보이는 잔인성, 이 양자가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결합된 것을보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기본적으로 같다. - P339

보는 칭기스칸이 아랍-페르시아 문명에 대한 최악의 적처럼 행동하였을지라도 그리고 무슬림 작가들에게 낙인찍힌 대로 지옥의 망령들과 저주받은자들처럼 처신하였을지라도, 그는 이슬람 자체에 대해서는 적개심이 없었다. 그가 세정洗淨의 관행이나 무슬림 방식의 가축 도살을 금지하였지만그것은 몽골 관습이나 미신과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피르도시Firdawsi나 이븐 시나Ibn Sina에 의해 만들어진 동부 이란의 찬란한 도시문명을 파괴하였지만, 그것은 서남 국경 쪽으로 일종의 무인지대나 인위적인 초원을 만들어 자신의 제국에 대한 제방이나 보호벽으로 삼으려는의도 때문이었다. 그가 ‘땅을 죽인 것‘은 바로 이 목적에서였다. 그는 종교전쟁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통치감각이 있던 사람이지만, 동시에초원이 그의 생활방식에 적합하고 통치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에 도시문명을 파괴하고 농경을 폐지하여(동부 이란을 떠나면서 그는 곡물창고들을파괴하였다) 전답을 초원으로 바꾸려고 했을 정도로 정주생활에 대해서는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유목민이기도 하였다. - P355

루브룩은 1254년 8월 18일 뭉케의 회신을 지니고 카라코룸을 떠났다.
"이것은 하늘의 계명이다. 하늘에는 신이 한 분뿐이고, 땅 위에 군주는 신아들 칭기스칸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뭉케는 영원한 하늘과 지상에서의 그의 대리인인 카안의 이름으로, 프랑스 국왕이 자신의 신하임을 인정하라고 명하였다. - P406

쿠빌라이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칭기스칸의 상속자인 반면, 중국에서는 19개 왕조의 충성스러운 계승자이기를 추구하였다. 다른 어떤 천자도 그만큼 자기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 송이 멸망한 뒤 그는 그 왕조의 기구들과 행정요원들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시대에 기능하던 관리들의 개인적 충성심을 확보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땅을 정복한 다음에는 마음까지 정복했으며, 그가 명성을 주장할 만한 가장 큰 권리는 아마 그가 역사상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중국에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 P427

트란스옥시아나의 차가다이 지파가 투르크 영주들의 한낱 허수아비 - P488

임금들로 전락하고 있는 동안, ‘모굴리스탄‘, 즉 탈라스, 추강 상류, 이식쿨, 에비 노르, 그리고 마나스Manas에 있던 유목민들은 한동안의 무정부상태가 지난 뒤 차가다이의 왕통을 다시 수립하였다.

당시 모굴리스탄으로 알려진 일리의 재건된 칸국의 군주를 맞아들이기 위해, 트란스옥시아나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은 차가다이 가문의 사람을 먼저 찾기 시작한 것은 불라지였다.
네이그때 에센 부카의 아들로 알려진 투글룩 티무르라는 인물이 일련의전설적인 모험에 찬 생활을 하면서 모굴리스탄 동부에서 이름 없이 살고있었다. 그의 계보가 진짜든 가짜든 이 사람이 바로 불라지가 찾아서 불러들인 차가다이계 사람이었다. 불라지는 그를 악수에서 정식으로 맞아들한국의 초대 아미르가 되었다. - P489

라시드웃 딘이 재록한 훌레구와 칼리프 간의 서신에는 역사상 가장 거만한 구절들이 사용되었다. 칸은 압바스 가문 36인의 칼리프들의 계승자에게 요구하기를, 바그다드에서 일단 부이조의 총수들에게 주어졌다가 나중에 셀죽의강력한 술탄들에게 위임된 속세의 권력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대는 칭기스칸 이래 몽골군이 세상에 가져온 운명을 알았다. 영원한 하늘의 은총에 의해, 어떤 굴욕이 호레즘 샤들의, 셀죽들의, 다일Daylam 왕들의, 그리고 여러 아타벡들의 왕조를 덮쳤던가! 그러나 바그다드의 문은 이러한인종들 누구에게도 닫히지 않았고, 그들 모두 그곳에 그들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그러면 그러한 힘과 그러한 권력을 가진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는가? 기치에 대항하여 무기를 잡지 않도록조심하라!" - P503

훌레구의 영향권 내에서 기독교도들이 누린 호의는 크게 그의 정비도쿠즈 카툰 덕이었다. 그녀는 케레이트의 공주로서 케레이트의 마지막 군주였던칸 토오릴의 조카이다. 그녀의 지혜를 매우 높이 산 뭉케는 훌레구에게 그녀와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충고하였다.39) 라시드 웃 딘은 "케레이트는 오래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도쿠즈 카툰은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하여 늘 주의를 기울였고,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 기독교도들은 번영하였다.
훌레구는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그들에게 호의를 듬뿍 베풀었고, 배려의 징표 - P506

를 보였다. 그의 왕국 전역에 새 교회들이 건설되었고, 도쿠즈 카툰의 오르두문앞에는 항상 예배당이 있었고 거기서는 종이 울렸다." - P507

가잔은 전적으로 무슬림적인 국내정책과 훌레구아바카·아르군에서유래된 대외정책을 결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이슬람 개종의 성실성과 영구성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본 대로이며, 이에 대하여 라시드 웃 딘이 제공하는 증거도 충분하다. 그는 가족종교인 불교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였으며, 그래서 불교 승려나 라마들은 그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포기하거나 나라를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틀림없이 그의 대외정책에 적합하도록, 그는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고 그들의 총대주교 마르야흐발라하 3세에게 우정을 베풀었다. 1303년 6월, 가잔은 늙은 종정이마라게에 다시 지은 수도원으로 그를 방문해 그에게 명예와 선물과 자신의 배려의 정표를 듬뿍 주었다. - P540

초판의 몰락은 투르크인의 아나톨리아를 운명에 맡겨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304년 술탄 마스우드 2세가 죽고 코나의 술탄국이 사라진 이래페르시아 조정이 임명한 몽골 총독들은 자치 왕들처럼 행세하는 경향을보였다.
우리는 초판의 아들 티무르타쉬가 어떻게 독립을 목표하고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다. 그의 가문에 재앙이 없었다면 그는 아부 사이드가 죽은뒤 코냐나 카이세리에 아나톨리아의 몽골 술탄국을 세웠을 것이고, 그 술탄국은 분명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1327년 티무르타쉬가 몰락하고 8년 뒤에 아부 사이드의 죽음이 뒤따랐는데, 이로써 아나톨리아는 주인 없이 남겨지고 동남의 카라만가와 서북의 오스만가의 토착 투르크 아미르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므로오스만 제국의 발흥은 간접적으로는 1327-1335년까지 중요한 몇 해 동안페르시아의 몽골 조정에서 일어난 분쟁의 결과인 것이다. - P547

킵착칸국의 역사는 다른 칭기스칸 칸국들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다르다. 몽골인들은 정복한 다른 땅에서는 자신들을 어느 정도 주위환경에적응시켰으며 정복된 자들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후손들은 중국인들이 되었고, 이란에서는 가잔·울제이투 아부 사이드로대표되는 훌레구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의 술탄이 되었다.
반면에 남부 러시아의 칸들인 그들의 사촌은 슬라브. 비잔티움문화에정복되고 러시아인이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 지리적인 명명이 암시하듯이 ‘킵착의 칸들‘, 즉 그 이름 그대로 투르크 유목민들의 계승자로 남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도 없고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 러시아 초원에 아무 역사도 남겨놓지 않은 ‘쿠만‘ 투르크인들, 즉 폴로브츠이의단순한 계승자에 불과하였다. - P5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에피소드들에도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특히 바지 사건은 Mia에게 유독 감정 이입이 되어 화도 나고 분해서 눈물도 찔끔 나왔다. 꼭 학교에 브랜드 옷을 입고 가야만 하는 걸까. 자본주의 사회라서 돈으로 외모를 꾸며야만 평가받을 수 있는 건가 싶어 기분이 나빴다. Mia 부모님 입장에서도 이 일을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처참할 것인가. 누구는 사주고 싶지 않아서 안 사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 면에서 Jason은 Yao씨와 마찬가지로 참 아닌 놈이다. 


수학 시험은 바지 사건에 이어 열폭을 터지게 했다. 중국인들은 계산을 잘 한다는 편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Mia 말처럼 누구나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좋아하는 것에 공부를 더 하길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엄마가 Mia를 위로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좀 마음이 아팠다. 물론 엄마의 마음도 이해는 한다. Mia를 위로하기 위해 아빠가 사준 연필 세트로 그나마 Mia의 마음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 CH29 ]

Douglas는 Jason이 계속 아픈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학교 강당에서의 일로 찜찜해하던 Mia는 Jason이 걱정이 되었는데 막상 학교에서 보니 다른 아이들이랑 장난을 치는 것을 보곤 마음이 놓였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는데 내가 입은 꽃무늬 바지에 눈길을 보내는 것을 느꼈다. 그 바지는 엄마가 자선 가게에서 6.99달러에 6개짜리 들어있는 옷 중 하나였다. Jason은 빈정거리며 니 엄마가 보기 드문 눈을 가졌다며 놀렸으나 Mia는 엄마가 사 주신 옷이 좋았고 그에게 꿇릴 것도 없었다.


[ CH30 ]

Yao씨는 Hank에게 그동안 밀린 모텔비를 내지 않으면 나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법에 따르면 30일 이상 집에 거주하는 경우 임대인의 자격이 부여되어 돈을 아무리 갚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막 쫓아낼 수는 없다. Hank는 나갈 수 없다 버텼고 열이 받은 Yao씨는 그 책임을 Mia 가족에게 전담시킨다(아니 무슨). Hank가 돈을 다 지불하지 않으면 그 돈을 우리에게 떠넘기기 위함이다. 


[ CH31 ]

학교에서 Jason은 계속 Mia 옷을 가지고 놀렸다. Mia는 무시하고 넘어가려했는데 소문이 6학년생들에게까지 퍼졌고 결정적으로 화장실에서 6학년 여자 둘이 하는 이야기에 더는 안되겠다 생각해서 편지를 보냈다. "Floral cotton trousers are way more comfy than jeans." 하지만 Mia는 편지를 간직하기만 하고 끝내 전달하지 않았고 여전히 학교에서는 계속 조롱을 당했다. 

어느 날 오후 font desk에 셰보레 한 대가 들어서더니 중국인 남자가 내렸다. Mia는 직감적으로 Aunt Ling의 친구일거라 생각했다. Uncle Zhu는 체켝이 컸고 하얼빈 억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정 기간 잠잘 곳이 필요하다 말하여 우리 가족은 3번 방을 주었다. 

몇 주 후 부모님은 140달러가 빠진 급여를 받았다. Hank가 갚을 돈 중 일간으로 20달러를 계산한 값이다. 아빠는 싸울 태세였다. 엄마는 부엌에서 tofu paste(아무래도 초두부를 말하는 듯)를 꺼내와 입 속에 우걱우걱 넣는데 아빠와 나는 그걸 보며 냄새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 CH32 ]

수학 시험이 있었다. 팀 대항전이었는데 Mia는 하필 바지로 심하게 놀려댄 Bethany와 Joanne, Paula와 같은 팀이 되었다. 그들은 중국인이 계산을 잘한다라고 여기고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Mia가 막상 문제를 못 맞추자 비난했다. Mia는 자신이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고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궁금해했다.


[ CH33 ]

Mia는 바나나를 먹은 후 껍질을 머리에 얹어 놓고 거울을 보며 "The blonde" 금발 머리의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때 엄마가 들어왔고 대체 무슨 일이냐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Mia는 수학 시험 이야기를 했는데 엄마는 그녀를 위로하기는 커녕 수학 시험을 틀린 일에 대해서만 질타하여 서러웠다. 엄마는 아빠에게 "당신 딸이 수학 문제를 틀렸대요." Mia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I don't even like maths. I like English." 엄마는 자전거를 가진 것과 차를 가진 것에 비유하며 현실을 직시하라 말했다.


[ CH34 ]

Mrs.Q가 엄마의 입장을 이해하라며 Mia를 위로했다. 일요일에 빈 캔을 싣고 재활용 센터에 갔다가 6달러를 번 뒤 쇼핑 센터에 갔다. 아빠가 문구점에서 5.99 달러짜리 연필 세트를 사주셨다. 아빠는 "You're a fine story writer." 라며 매일 연필로 너의 모든 것을 쓰라고 말씀해주셨다.


[ CH35 ]

또 다른 중국 이민자인 Uncle Fung이 왔다. 중국에서 회계사를 했고 미국에서는 Riverside에서 웨이터로 일했다고 한다. Hank 일로 Yao씨가 돈을 제하고 주는 바람에 엄마는 그에게 양상추, 마늘에 간장 소스를 넣은 음식을 줄 수 밖에 없었다. Fung씨는 일하던 곳에서 손님이 그를 바닥에 내치길래 "Hey! baby"라고 외치기만 했는데 뭐가 잘못된 것이냐 물었다. Mia는 "Hey! baby"는 남친/여친에게 하는 인사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그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정리해왔던 미국식 구어 표현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Lupe와 weeklies, Mia는 미이라 복장을 하고 Meadow Lane을 돌아다니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 CH36 ]

Mia는 엄마와 함께 쇼핑 센터에 갔다가 하필 Jason 모녀를 맞닥트렸다. Jason은 파자마 사러 왔냐며 Mia에게 빈정거리고 엄마는 Yao씨가 돈도 없는데 쇼핑 센터에 왔다고 생각할까 걱정한다. 


[ CH37 ]

Douglas 선생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깔고) Mia는 Jason 에게 Yao씨가 노동자 에게 행한 부당 대우에 대해서 항의했다. Jason은 그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으면 감사해야 하는 일 아니냐며 따진다.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반성할 기회도 없는 것이겠지.


[ CH38 ]

Jason이 Mia의 연필을 가져가서는 시치미를 떼며 돌려주지 않았다. Douglas 선생님은 보다 못해 연필을 반으로 나누어 하나씩 갖는 것이 어떠냐 했다. 당연히 Mia는 반발했다.


[ CH39 ]

Mia는 Jason에게 연필을 돌려달라는 이유를 담은 편지를 쓴다. 벨이 울려 전화를 받았는데 Yao씨였다. 그는 자기 가족이 라스 베가스에 가기로 되었다고 말하는데 Mia는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결국 자기 없는 동안 모텔에 신경 쓰란 이야기였다. Lupe와 계획을 짜면서 가정부에게는 걸 스카우트 때문에 쿠키를 팔러 가야 한다 말하고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지 말한 다음 Lupe가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Mia가 Jason의 방에 몰래 들어가 연필을 가져오기로 하는 것이었다.  Lupe는 자신은 끼어들기 싫다 말했지만 Mia는 5분 안에 모든 일이 끝날 거라며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그녀는 주저했다. "You mnever stand up for me!" 나는 그녀에게 화를 냈다. 그녀도 화로 대응했다. "You can say all this crazy stuff to Jason because he likes you." 결국 Lupe는 Yao씨 집에 가는 계획은 동참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유는 납득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것이었다. 자신의 아빠는 Yao씨 밑에서 일하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3-12-08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앞으로도 마음 아픈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군요.. 이민자의 설움 ㅜㅜ

거리의화가 2023-12-08 19:40   좋아요 1 | URL
두 부자들이 Mia 가족의 속을 뒤집어놓습니다^^; 하지만 Mia가 그냥 당하기만 하지는 않는 아이라서 좋아요. 앞으로도 재밌게 읽어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근대 시기 조선에 예술가였던 나혜석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문학가였던 하야시 후미코가 있었다. 둘은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세계 여행을 했고 그 여행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나혜석은 1927년 여름부터 시작하여 1929년 3월까지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여행한 뒤 구미 여행기란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하야시 후미코는 1931년 11월부터 시작하여 1932년 6월 돌아와서 삼등 여행기란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그녀의 여행 기간은 나혜석에 비해서 체류 기간이 길지는 않은 편인데 여행 동선이 짧고 들른 장소가 더 적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도 세계 여행을 하려면 시간은 물론이고 비용 문제가 만만치 않은데 둘은 그 시절 세계 여행이라니 일단 놀라웠다. 


나혜석이 어떤 인물인가를 드러내는 질문이 있었다. 


내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즉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인간 실존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고민, 화가로서의 위치성이 눈에 들어온다. 


하야시 후미코는 처음 알게 된 이름이라 아는 정보가 별로 없었는데 찾아보니 "방랑기"라는 여행기가 당시 60만부까지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을 했다고 한다. 


둘은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이 더 많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공통점부터 살펴본다면 여성 문제와 인간으로서의 고민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나혜석은 여성 문제에 이전부터 천착해 있었고 지면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서 소신을 밝혀왔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때 자기 주장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기 쉬운 시절이었다. 하물며 그는 유명한 화가였으니 그녀의 말과 행동이 모두의 관심 대상이 되기 쉬웠다.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개인에게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지 않을까. 나는 그녀가 살아가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을 여럿 경험했을거란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예술 작품을 보거나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부녀의 의복은 자기 손으로도 해 입지만 그보다는 상점에서 만든 것을 많이 사서 입는다. 겨울철에는 여름철 옷에 외투만 입으면 그만이다.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부인이 불쌍하다.


나는 전에 경성에서 어느 극장 앞을 지나면서 동행하던 친척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극장 경영을 하려면 근본 문제 즉 조선 부녀 생활을 급선무로 개량할 필요가 있다고. 실로 여자 생활에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오락 시설은 번영할 수 없다.


내가 런던에 체류할 동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여선생 한 명을 정했다. 방금 예순 살 된 처녀로 어느 소학교 교사요, 독신생활을 해가는 가장 원기 있는 좋은 할머니였다. 팽크허스트 여사 참정권운동자연맹 회원이요, 당시 시위운동 때 간부였다. 지금도 여자의 권리 주장이 나오면 열심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여자는 좋은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조절하여 은행에 저금을 하라. 이는 여자의 권리를 찾는 제1조가 된다." 나는 이 말이 늘 잊히지 않는다. 영국 여자들의 선각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보고서 여자의 힘이 강하고 약자가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여기서는 여자란 나부터도 할 수 없는 약자로만 생각되더니 거기 가서 보니 정치, 경제, 기타 모든 방면에 여자의 세력이 퍽 많습니다. 특히 외교상에 있어 남모르게 그 내면적 활동력이 굉장했습니다. 우리 조선 여자들도 그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지점이다. 나혜석의 극장 이야기를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일이 있다. 대학 친구들이 애를 낳고 돌보느라 극장에 가 본지 한참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결혼 전까지 직장을 다니다가 아이를 갖고 경단녀가 되었다. 극장에 가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야 하는 일이 되다니 그때 들으면서도 내가 더 억울한 느낌이었다. 


하야시 후미코도 여성 문제와 관련되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파리 주택은 거의 아파트라서 일본처럼 그렇게 널찍하고 틀에 박힌 부엌을 소유한 집은 별로 없다. 게다가 집 밖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가족이 많은 탓에 굳이 엄청난 부엌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일본에서 레스토랑을 여전히 사치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동안에는 가정주부가 부엌에서 해방되는 일은 아주 먼 이야기겠지. 잠시 유럽에 살다 돌아오고 나서야 깨닫고 놀란 것은, 주변 여인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엌에서 줄곧 일한다는 사실이다.


일본 여성도 그렇지만 조선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 때는 가정주부가 육아와 살림을 하지 않으면 비도덕적이라고 난타당할 때였다. 지금은 일하는 여성들이 있으나 결국 가사 노동의 짐은 여성이 더 많이 가져간다. 현실적으로 제도적인 뒷받침이 너무나 부족한 것 같다. 


실존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하야시 후미코의 입장이 더 감정 이입이 잘 되었다. 영국에 가서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신이 무척 불안했던 것 같다. '삼등 여행기'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혜석은 일등 칸 기차를 타고 좋은 호텔에서 묵는 등 비교적 여유로운 여행을 했지만 하야시 후미코는 삼등 칸 기차를 타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숙소에 묵으며 여행을 했다. 때문에 막판에는 여행 경비가 떨어져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나의 감정과 상황을 솔직히 직시하고 표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좌절할 것 같은 순간에도 오뚝이처럼 긍정성이 발휘되기도 하는 모습이어서 인간적으로 연민이 가기도 했다.


어쨌든 어느 곳에 있더라도 죽는 건 매한가지라고


슈트케이스 안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파리의 찌꺼기들, 접시 한 장과 전골냄비, 포크와 스푼, 밥솥과 밥그릇 따위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아직은 팔팔하다. 까짓것! 좀 낑낑거리기는 해도, 이따금 눈물이 한가득 고이긴 해도 말이다.


앞으로 사오일 후면 드디어 무일푼 신세가 된다. 물론 돈이 없다고 해서 죽어버리는 시시한 짓은 안 할 생각이다. 런던은 매일매일 안개가 자욱하다. 아, 진짜 좋은 일을 하고 싶다!


얼음 아래로 흘러내리듯 헤엄치는 물고기 냄새를 피부로 느끼며 이대로 아무렇지 않게 바다에 뛰어드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이럴 때 위스키라도 갖고 있다면 한층 즐겁겠지. 나는 입술을 벌리고 진눈깨비를 혓바닥으로 받아봤다. 진눈깨비는 눈과 코, 입술과 어깨를 보슬보슬 두드리며 사라져갔다.


특히 마지막 표현은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그 풍경이 오롯이 연상됐고 나도 마치 진눈깨비를 맛보는 느낌이었다. 


여행에 대한 정보도 제법 상세하다. 나혜석이 여행 장소에 대한 묘사를 자세히 했다면 하야시 후미코는 여행 경비와 동선 등을 상세히 적어 둔 것이 눈에 띄었다. 


하얗게 내려 쌓인 눈이 천 길 골짜기에 묻혀 있고, 쳐다보니 융프라우의 맑고 깨끗한 설암이 눈앞 지척에 나타나 있다. 첩첩산중에 사계절 내내 눈이 쌓여 빙하가 되고, 빙하가 녹아 물이 되어 흘러 폭포로 떨어지고, 폭포가 시내가 되어 냇물로 흘러 곳곳에 호수가 되는 것이 스위스의 생명이다. 이것을 보러 각국 사람이 모여들고 이것을 팔아 스위스 국민이 살아간다.


스위스의 설산이 예전만큼 쌓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겨울에도 눈이 예전만큼 내리지 않고 여름이 점점 길어져만 가고 빙하는 녹고 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을 볼 날도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씁쓸해진다.


파리에서 유명한 것은 지하철이다. 땅 밑 사층으로 차가 놓여 있을 뿐 아니라 한 선은 센강 아래로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든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 사기 조각으로 쌓은 원형 정류장은 깨끗도 하거니와 땅속 길은 찾을 수 없이 복잡하다.


지금은 한국 지하철도 제법 잘 되어 있지 않은가.


마드리드는 다른 도시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성당도 없고 역사적 전설도 없건만 이 도시를 찾아 세계인이 모여드는 이유는 오직 프라도미술관이 있는 까닭이다.


지금은 마드리드에 대성당이 들어섰지만 프라도미술관은 여전히 세계인을 불러 모은다.


여행 가이드북은 1~2년만 지나도 쓸모 없는 것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보다 놀라웠던 것은 변화하는 것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은 보존되어야할 가치를 등한시하고 그저 아파트, 빌딩 등을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씁쓸해진다. 반면 서양은 두 사람이 방문했던 여러 장소들이 여전히 지금도 운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빠르게 바뀌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의 세대들이 가고 나서 앞서 올 세대들에게 물려줄 것들이 남아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여행기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마음으로만 그리던 것을 실제로 만나는 일이다. 이상과 현실은 같지 않더라도 직접 마주한 느낌은 상상만 할 때와는 분명 다르다.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처음 만나는 일에는 문화적 충격을 겪기도 하는데 그런 일들이 여행에서 얻는 값진 경험이라 믿는다.


한국인들이 여행 말미가 되면 김치나 라면을 찾는다는데 나혜석도 미국의 조선 예배당에서 먹은 시래기국으로 고향 생각이 났을까 싶었다. 여행을 하고 돌아 오면 가기 전의 나와 달라진 게 무엇인지 가장 먼저 그 생각부터 드는데 그녀도 다르지 않다는 것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독일에 갔을 때 공원에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하던 기억이 있다. 그 자유가 부럽기도 하다가 '쯔쯔가무시병' 걸리는 거 아냐 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을 보니 '나도 참...' 했었다. 여행에 날씨가 좌우하는 힘이 제법 크다는 사실에 공감했고 어학을 좀 더 잘 했으면 하는 생각은 외국인이면 공통적으로 하는구나 싶어졌다.


하야시 후미코는 대도시보다는 소도시나 시골 등의 자연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돈이 궁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녀는 왠만하면 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걸어다녔던 것 같다. 나도 걷기 예찬론자라 외국에 나가면 어디든 걷는 편이라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바르비종이여! 바르비종의 시골길이여! 너무 감미롭긴 해도 이 달콤함을 후회 없도록 다 써 없애고 싶다. 시골 공기를 잔뜩 들이마셨더니 핼쑥한 뺨에 붉은빛이 돌고 마음마저 차분하다. 런던에서 자살까지 생각했던 나도 이 신선한 풍경 앞에서는 그런 생각 따윈 "개나 줘버려"다.


나혜석은 여행에 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1927년 6월부터 열린 제네바 군축회의로 인터라켄에서는 영친왕과 사이토 총독을 비롯한 각국의 대사, 공사 및 칙임관들을 만나 식사 자리를 가졌다. 관등으로는 감히 참석하지 못할 자리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외국에서 만난 것이기는 해도 그녀의 위치가 고위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친왕이 나혜석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부탁하기도 했다는데 화가로서의 위치를 짐작하게 했다. 제네바 해군 군축회의는 1차 대전 이후 군비 축소 문제의 일환으로 1922년 열렸던 워싱턴 해군 군축 회담에서 전함과 항공모함에 대해서 합의를 본 이후 보조함에 대해서도 적용하기 위해 열린 회의다. 


미국에 가서는 장덕수와 윤홍섭, 김마리아 여사를 만나기도 했다. 장덕수와 윤홍섭은 후일 한민당의 주요 의원으로 활약하는 인물들이고 김마리아 여사는 독립 운동가, 교육가로서 많은 업적을 쌓은 분이다. 서재필을 병원에서 만났다는 것을 보니 장소가 그가 1929년 병리학 전문의를 따고 나서 개업한 병원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조선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는 것을 보면 여전히 고국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앞서 얘기했던 1922년 워싱턴 군축 회의에 서재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의 한 명으로 이승만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귀국하는 길 일본에서 영친왕을 다시 만나고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헤이그에 가서는 이준의 무덤을 찾다가 결국 못 찾아서 이준의 지인들에게 그림엽서를 보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던 것을 보면 그녀도 조선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젝 한다.


나혜석은 조선인이자 식민지 백성 중 하나였지만 내부 계급적으로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그 당시만 해도 그녀 주변에는 상류층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을 것이며 대중들과는 교류가 많이 없었을 것이기에 어떤 한계가 엿보였다.


출발과 동시에 갑판 위에서 관현악곡이 울린다. 태양빛이 흐르는 호수 위에 둥실둥실 떠서 음악 소리에 몸이 싸였을 때, 아! 행복스러운 운명에 감사를 아니 드릴 수 없었고 살에 허덕이는 고국 동포가 불쌍했다.


파초가 널브러진 가운데 여신 동상이 곳곳에 있고 기염 차게 물을 토하는 분숫가에는 웃통 벗은 노동자, 유아들이 한참 무르녹은 멜론을 벗겨 들고 앉아 맛있게 먹는다. 아직도 원시적 기분이 많고, 도로에 흙먼지가 많아 유럽에서는 보지 못한 동양적 색채가 있다. 마차가 많고 노동자가 많으며 걸인이 많다.


그에 반해 하야시 후미코는 일본인이자 피식민지민이면서 주로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 계급에 주목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일본인으로서 일본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나라의 영토와 백성을 짓밟으며 나아가고 있는 것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이와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언제나 진실한 것은 파묻혀 지나가고 다소 연극적인 것이, 으스대는 것이, 상스럽게 비하하는 자들이 어이없게도 어느 나라든 특권을 갖는구나. 프롤레타리아라는 하이칼라 언어를 쓰지 않아도 기나긴 삼등 열차 여행에서 굉장히 착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봤다.


세계대전 이후 대체 어디에 평화가 왔나? 각국의 인민은 녹초가 됐다. 유럽을 걸어보면 지금도 베르됭의 피비린내가 난다. 발 없는 남자, 한 손 없는 남자, 한쪽 눈 없는 남자, 이런 베르됭의 유물이 무얼 하고 있냐면 대개 샌드위치맨이거나 걸인 또는 비올라 켜는 광대다. 과거 인기가 높던 어느 인간의 말로, 그 모습의 사람들이 유럽 각국에서 우글거리며 배출구를 찾고 있다. 파리 직업소개소도 그랬지만, 런던 직업 소개소도 시루에 콩나물 박히듯 어느 곳이나 매일 아침 실업자가 행렬을 짓고 차례를 기다린다. 전 세계가 굶주리고 있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일본에서도 평화박람회가 열렸는데, 대관절 누굴 위해 배를 주리고 저 긴 줄을 이루는 걸까?


런던의 일부 평화주의자는 대장 나라 일본이라고 낙인찍고 있건만, 청일전쟁부터 이노우에 장관 암살까지가 일본을 점점 대장 나라로 만드는 듯하다. 싫증 나는 이야기다. 억지 이론이 통하지 않으니 정치가도 인민도 검술을 배우나 보다.


나혜석도 분명 동양인이자 여성으로서 인종 차별을 겪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여행기에서는 그런 기록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야시 후미코는 그런 일화를 거침없이 적어 놓았다.


파리 카페에서 내게 말을 건 어떤 신사가 "마드무아젤, 당신은 인도차이나에서 왔나요? 요즘 식민지는 어떤가요?" 실크해트에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절대 금물. 더군다나 단안경을 걸치고 내려다보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봐도 눈에 거슬렸다. "논, 논! 무슈. 나는 자포네제랍니다."


아침에는 근처 카페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데 "일본이란 나라는 손톱을 30센티미터나 기른다면서?"라는 것밖에 일본 관련 지식이 없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내 소매를 흔들며 하늘을 달리는 거야?" 하며 웃었다.


나혜석도 조선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고민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가 자연을 가지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조선도 강원도, 금강산 등지를 잘 꾸미면 경쟁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금강산은 이제 가볼 수도 없게 되어 버린 슬픈 땅이 됐지만.  


나혜석은 화가로서 연구를 위해 파리에 더 체류하고 싶어했으나 결국 귀국했다. 그녀가 그곳에 남아 그림을 계속 공부했다면 이후 삶이 달라졌을까. 한국 현대화가인 이성자 선생님도 파리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그녀가 먼저 그 땅을 밟아 개인전도 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 해줬으면 어땠을까. 그녀는 고야와 고야의 그림에서 특히 많은 인상을 받아 유독 감정 이입을 한 글을 남겨 놓았는데 보고서 독자인 나도 슬픔에 잠겼다. 그녀도 그런 화가가 되고 싶었구나 생각했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살았다. 그는 없다. 그러나 그의 걸작은 무수히 있다. 나는 이 묘를 보고 그 위에 걸작을 볼 때 이상이 커졌다. 부러웠고 나도 가능성이 있을 듯했다. 처음이요, 또 최후로 보는 내 발길은 좀처럼 돌아서지를 않았다. 내가 이같이 감응해보기는 전후에 없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3-12-06 15: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경자 화백이 그 시기에 해외여행 다닌 것을 보고 놀랐었는데 이 두 사람은 그가 태어날 때 이미 많은곳을 경험했네요. 앞선 여성들의 용기있는 발자취가 후배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

거리의화가 2023-12-07 09:51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 천경자 선생님도^^ 나혜석은 진짜 지금 봐도 놀라움으로 보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특히 용기와 추진력, 당당한 태도. 저도 세계 여행이 늘 꿈 리스트에 있었는데 이제는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그치만 요즘은 50~60세에도 세계 곳곳을 누비는 분들이 많다고 하니 아직은 꿈으로만 그쳐서는 안되겠죠?ㅎㅎ

독서괭 2023-12-08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두 사람의 차이점이 흥미롭네요. 일제강점기 조선인이지만 부유한 지식인계층이었던 나혜석, 일본인이지만 부유하지 않았던 후미코. 각자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달랐을 것 같아요. 그래도 공통적으로 여성들이 집안일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고 외치는군요^^

거리의화가 2023-12-08 19:43   좋아요 1 | URL
그쵸^^ 나혜석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행기에서 생각보다 꽤나 쏠쏠한 정보를 얻었고요. 후미코란 사람도 새롭게 알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분에게 감정 이입이 더 되었습니다. 저는 고위층이 아니니까요!?ㅋㅋ 서양인이 일본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면서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바라보는 편견이 느껴지면서 오리엔탈리즘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금방 읽히고 꽤나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