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년체의 역사에는 속수(涑水, 사마광)보다 훌륭한 것이 없으며 이를 뒤 이은 것으로는 설(薛, 薛應?, 1500~1574)·왕(王, 王宗沐, 1523~ 1592)·서(徐, 徐乾學, 1631~1694)같은 세 분이 있는데, 서씨의 것은 비록 설씨와 왕씨의 것보다는 우수하지만 그러나 서적을 보는 바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남쪽의 역사를 자세히 쓰고 북쪽의 역사를 소략히 하는 병통이 없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여러 책을 널리 쌓아 놓고 정사(正史)를 고증하며 손수 스스로 재정(裁定)하여 송(宋)에서 시작하여 원(元)에서 마치고 《속자치통감》 220권을 만들고 별도로 《고이(考異)》를 만들어 본문의 아래에 붙였으니 무릇 4번 원고를 바꾸어서 완성한 것이다.
요·금의 정사는 본기를 보는 데 그쳤고, 중간에 한두 명의 열전에만 미치었으니 여러 <전기(傳記)>와 <지(志)>와 <표(表)>는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송(宋)의 가정(嘉定, 1208~1224)이후로 원의 지순(至順, 1330~1332)이전까지는 거칠고 생략된 것이 아주 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두 남겨진 일사(逸事)가 아직 나오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하게 본 바를 근거하기에 이르러서 말을 달려 그 번거롭고 풍부하기가 예컨대 서하(西夏)에서 인척(姻戚)의 세계(世系)를 갖추어 서술한 것과 원말(元末)의 쇄사(?事, 자질구레한 일)는 자료를 철애악부(鐵崖樂府)에서 뽑은 것 같았으니, 편년체의 책은 홀연히 흡사 보첩(譜牒)같고 홀연히 흡사 시화(詩話)같아서 특히 체제(體制)에서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수집한 재료가 비교적 풍부하였고, 핵심을 상고한 것이 비교적 자세하여 이미 진·왕·설씨를 몇 배나 넘어 섰으니 후에 일으킨 공로는 착수하기에 쉽게 하였으니 역시 그것의 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