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

840년 위구르의 몰락 이후 초원의 제국에는 실질적인 계승자가 없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을 모전천막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의 지고의 칸이라고선포하면서, 투르크인의 조상들(흉노), 몽골인의 조상들(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다시 투르크인들(돌궐과 위구르)이 번갈아 소유하던 이 옛 제국이이제 영구히 몽골인들에게 돌아왔음을 선언하였다. - P320

칭기스칸 국가의 역사가 지닌 역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행위를 건전한 상식의 격언과 잘 확립된 정의로 규제하는 현명하고 사려깊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막 원시적인 야만상태에서 나타나 공포 말고는 적들을 굴복시킬 수단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았으며, 도시와 농경문화를 지닌 정주민족들의 생활이나 자기 고향인 초원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유목민들의 야수적 반응 사이에 보이는 뚜렷한 차이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놀라움은 라시드 웃 딘이나 『원사의 편찬자가 지도자 개인에게서 보이는 지혜나 심지어 온건함, 이에 반해서 교육과 유전적 회귀와 사회관습에서 보이는 잔인성, 이 양자가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결합된 것을보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기본적으로 같다. - P339

보는 칭기스칸이 아랍-페르시아 문명에 대한 최악의 적처럼 행동하였을지라도 그리고 무슬림 작가들에게 낙인찍힌 대로 지옥의 망령들과 저주받은자들처럼 처신하였을지라도, 그는 이슬람 자체에 대해서는 적개심이 없었다. 그가 세정洗淨의 관행이나 무슬림 방식의 가축 도살을 금지하였지만그것은 몽골 관습이나 미신과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피르도시Firdawsi나 이븐 시나Ibn Sina에 의해 만들어진 동부 이란의 찬란한 도시문명을 파괴하였지만, 그것은 서남 국경 쪽으로 일종의 무인지대나 인위적인 초원을 만들어 자신의 제국에 대한 제방이나 보호벽으로 삼으려는의도 때문이었다. 그가 ‘땅을 죽인 것‘은 바로 이 목적에서였다. 그는 종교전쟁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통치감각이 있던 사람이지만, 동시에초원이 그의 생활방식에 적합하고 통치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에 도시문명을 파괴하고 농경을 폐지하여(동부 이란을 떠나면서 그는 곡물창고들을파괴하였다) 전답을 초원으로 바꾸려고 했을 정도로 정주생활에 대해서는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유목민이기도 하였다. - P355

루브룩은 1254년 8월 18일 뭉케의 회신을 지니고 카라코룸을 떠났다.
"이것은 하늘의 계명이다. 하늘에는 신이 한 분뿐이고, 땅 위에 군주는 신아들 칭기스칸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뭉케는 영원한 하늘과 지상에서의 그의 대리인인 카안의 이름으로, 프랑스 국왕이 자신의 신하임을 인정하라고 명하였다. - P406

쿠빌라이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칭기스칸의 상속자인 반면, 중국에서는 19개 왕조의 충성스러운 계승자이기를 추구하였다. 다른 어떤 천자도 그만큼 자기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 송이 멸망한 뒤 그는 그 왕조의 기구들과 행정요원들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시대에 기능하던 관리들의 개인적 충성심을 확보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땅을 정복한 다음에는 마음까지 정복했으며, 그가 명성을 주장할 만한 가장 큰 권리는 아마 그가 역사상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중국에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 P427

트란스옥시아나의 차가다이 지파가 투르크 영주들의 한낱 허수아비 - P488

임금들로 전락하고 있는 동안, ‘모굴리스탄‘, 즉 탈라스, 추강 상류, 이식쿨, 에비 노르, 그리고 마나스Manas에 있던 유목민들은 한동안의 무정부상태가 지난 뒤 차가다이의 왕통을 다시 수립하였다.

당시 모굴리스탄으로 알려진 일리의 재건된 칸국의 군주를 맞아들이기 위해, 트란스옥시아나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은 차가다이 가문의 사람을 먼저 찾기 시작한 것은 불라지였다.
네이그때 에센 부카의 아들로 알려진 투글룩 티무르라는 인물이 일련의전설적인 모험에 찬 생활을 하면서 모굴리스탄 동부에서 이름 없이 살고있었다. 그의 계보가 진짜든 가짜든 이 사람이 바로 불라지가 찾아서 불러들인 차가다이계 사람이었다. 불라지는 그를 악수에서 정식으로 맞아들한국의 초대 아미르가 되었다. - P489

라시드웃 딘이 재록한 훌레구와 칼리프 간의 서신에는 역사상 가장 거만한 구절들이 사용되었다. 칸은 압바스 가문 36인의 칼리프들의 계승자에게 요구하기를, 바그다드에서 일단 부이조의 총수들에게 주어졌다가 나중에 셀죽의강력한 술탄들에게 위임된 속세의 권력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대는 칭기스칸 이래 몽골군이 세상에 가져온 운명을 알았다. 영원한 하늘의 은총에 의해, 어떤 굴욕이 호레즘 샤들의, 셀죽들의, 다일Daylam 왕들의, 그리고 여러 아타벡들의 왕조를 덮쳤던가! 그러나 바그다드의 문은 이러한인종들 누구에게도 닫히지 않았고, 그들 모두 그곳에 그들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그러면 그러한 힘과 그러한 권력을 가진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는가? 기치에 대항하여 무기를 잡지 않도록조심하라!" - P503

훌레구의 영향권 내에서 기독교도들이 누린 호의는 크게 그의 정비도쿠즈 카툰 덕이었다. 그녀는 케레이트의 공주로서 케레이트의 마지막 군주였던칸 토오릴의 조카이다. 그녀의 지혜를 매우 높이 산 뭉케는 훌레구에게 그녀와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충고하였다.39) 라시드 웃 딘은 "케레이트는 오래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도쿠즈 카툰은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하여 늘 주의를 기울였고,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 기독교도들은 번영하였다.
훌레구는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그들에게 호의를 듬뿍 베풀었고, 배려의 징표 - P506

를 보였다. 그의 왕국 전역에 새 교회들이 건설되었고, 도쿠즈 카툰의 오르두문앞에는 항상 예배당이 있었고 거기서는 종이 울렸다." - P507

가잔은 전적으로 무슬림적인 국내정책과 훌레구아바카·아르군에서유래된 대외정책을 결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이슬람 개종의 성실성과 영구성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본 대로이며, 이에 대하여 라시드 웃 딘이 제공하는 증거도 충분하다. 그는 가족종교인 불교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였으며, 그래서 불교 승려나 라마들은 그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포기하거나 나라를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틀림없이 그의 대외정책에 적합하도록, 그는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고 그들의 총대주교 마르야흐발라하 3세에게 우정을 베풀었다. 1303년 6월, 가잔은 늙은 종정이마라게에 다시 지은 수도원으로 그를 방문해 그에게 명예와 선물과 자신의 배려의 정표를 듬뿍 주었다. - P540

초판의 몰락은 투르크인의 아나톨리아를 운명에 맡겨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304년 술탄 마스우드 2세가 죽고 코나의 술탄국이 사라진 이래페르시아 조정이 임명한 몽골 총독들은 자치 왕들처럼 행세하는 경향을보였다.
우리는 초판의 아들 티무르타쉬가 어떻게 독립을 목표하고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다. 그의 가문에 재앙이 없었다면 그는 아부 사이드가 죽은뒤 코냐나 카이세리에 아나톨리아의 몽골 술탄국을 세웠을 것이고, 그 술탄국은 분명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1327년 티무르타쉬가 몰락하고 8년 뒤에 아부 사이드의 죽음이 뒤따랐는데, 이로써 아나톨리아는 주인 없이 남겨지고 동남의 카라만가와 서북의 오스만가의 토착 투르크 아미르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므로오스만 제국의 발흥은 간접적으로는 1327-1335년까지 중요한 몇 해 동안페르시아의 몽골 조정에서 일어난 분쟁의 결과인 것이다. - P547

킵착칸국의 역사는 다른 칭기스칸 칸국들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다르다. 몽골인들은 정복한 다른 땅에서는 자신들을 어느 정도 주위환경에적응시켰으며 정복된 자들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후손들은 중국인들이 되었고, 이란에서는 가잔·울제이투 아부 사이드로대표되는 훌레구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의 술탄이 되었다.
반면에 남부 러시아의 칸들인 그들의 사촌은 슬라브. 비잔티움문화에정복되고 러시아인이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 지리적인 명명이 암시하듯이 ‘킵착의 칸들‘, 즉 그 이름 그대로 투르크 유목민들의 계승자로 남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도 없고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 러시아 초원에 아무 역사도 남겨놓지 않은 ‘쿠만‘ 투르크인들, 즉 폴로브츠이의단순한 계승자에 불과하였다. - P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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