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얼음

1) 차가운 사람. 감정. 행복의 약속.
나는 따뜻하기보다는 차갑고 냉정한 쪽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뜻하다는 말을 들었던 경우도 있으나 가면에 의한 얼굴일 가능성이 크다. 어머니께 종종 "너는 너무 냉정해." 하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서운하다거나 섭섭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니까.

사람들과 지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하호호'한 척이 많았고 그걸 알아챈 이가 내 옆에 산다. 감정이라는 것을 속이기도 싫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라고 표현하는 법을 늘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2) 냉기는 보존? 정지될 수 있을까. 인간을 냉동고에…
SF 소설이나 미래를 담고 있는 이야기들을 보면 인체를 냉동고에 보관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현재도 수술이 필요할 때 등 장기를 보관할 때 냉동고를 이용한다. 그런데 사체를 굳이 냉동고에 보관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들긴 한다. 죽은 사람은 화장하여 대기 속으로 날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사체들을 보관하려면 장소가 필요하고 그것들이 쌓이면 결국 꽤나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유족의 입장에서는 모습을 언제라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겠지만. 

3) 산고로 사망한 어머니, 유산과 남편의 사망으로 인한 상실의 경험들
예전에는 산고로 사망하는 경우가 무척 많았다. 지금도 유산의 비율이 무척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전에는 더욱 높지 않았을까. 나 포함 총 4명의 형제를 낳아 키우신 어머니도 유산의 경험이 있다. 넷째를 낳은 후였다는데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한다. 4명을 낳아서 키운 것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어머니가 무척 힘든 순간들이 있었음을 느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참았던 순간들도 많았을 것이다. 
메리 셸리가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에 담은 것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4) 프랑켄슈타인은 액자식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읽었을 때 영화 속에서 등장하던 로보트 같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와는 달리 멀쩡한 사람이 등장하고 험난한 상황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는 인간의 투혼에 무척 놀랐던 적이 있다. 원작이 있는 경우 각색을 정도껏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 인간의 과신에 의한 '경고'로 읽히기도 하고 괴물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자에 대한 배신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러 험난한 상황에서도 배움을 놓지 않는 지적 열정이 보이기도 하는 등 방향에 따라 여러 생각을 낳게 만드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메리 셸리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가 18살, 천재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프랑켄슈타인』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는 미친 과학자와 복수심에 불타 비틀거리며 걷는 괴물을 보여 주는 데 급급하면서, 진지한 심리 소설인 원작에서 멀어진다. 그 결과 원작의 시작과 끝이극지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물을 찾아 나섰다가거의 죽음 직전의 상태에서, 얼음에 갇힌 배를 만나 구조된다. 고집 세고, 외롭고, 야망 있는 젊은 선장과 함께 잠시 생명을 연장한그는, 북극을 찾아 나선 선장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P66

냉기는 거의 모든 것을 보존한다. ‘동결하다(freeze)‘라는 단어가 현대 영어에서는 ‘시간을 멈추다, 진행을 멈추다, 영상을 멈추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시간이 강이라면 아마 그 물은 얼음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렇게 흐름을 멈추고 정지한 시간이 극지방의 완고한 안정감이다. 그리고 그곳엔, 해마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는 해안선의 극적인 불안정함이 있다. 얼음이 해안 마을을 둘러싸고 배는 봄이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땅에 균열이 생기고, 바다가 얼어붙으며, 걷거나 썰매를 타고 그 위를 지나다닐 수있게 된다. 얼음이 녹으면 얼음덩이들이 함대처럼 서로 충돌하고,
뗏목에 타고 있던 사람이나 짐승은 그대로 갇히고 만다. - P69

사람들은 성격이나 감정을 말할 때 온도와 관련한 표현을 쓰기도 한다. ‘따뜻하거나 냉담한 마음, ‘차가운‘ 기질, ‘뜨거운 열정처럼. 극지방의 태양에 관해 쓴 지 1년쯤 후, 그러니까 남편이 갑작스레 익사한 후에 메리 셸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마음이 차가운 사람인 걸까?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 마음 한가운데 있는얼음같이 차가운 무언가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적어도 이 차가운 심장에서 나온 감정이 만들어 내는 눈물은 뜨거운 것임을."
내색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그녀는 차가운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듣곤 했다. - P71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메리 셸리의 삶에서 결코 멀리 있는 것이아니었다. - 유산, 남편의 죽음: 상실 - P72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라는작은 우주와 그 자아가 반향을 일으키는 더 큰 세계의 작은 신이된다. 『프랑켄슈타인』이 동화라고 생각하면, 그건 바보 같은 짓을벌이던 와중에 죽어 가는 낯선 이를 구한, 혹은 그 낯선 이의 이야기 덕분에 구원을 얻은 월턴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허영심 가득한 고독, 그 실수에서 깨우침을 얻은 월턴은 죽음 같은 극지방과 영광을 쫓던 자신의 야망을 버리고, 온대 지역으로, 동료애와 생존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올 준비를 한다. 월턴의짧은 이야기가 마치 조개껍데기처럼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감싸고 있고, 그 책 전체에 메리 셸리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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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제에 이어 어제 북한에서 탄도미사일이 연이어 발사되었다. 최근 한미동맹이 핵협의그룹(NCG) 2차 회의에서 대북 핵 작전 훈련을 천명하며 부산에 미 핵 잠수함을 입항시킨데 따른 북한의 대응이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121817004669496


이와 관련된 기사를 오늘 보았다. 


정욱식 대표는 전작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북한이 온다>를 통해서 2019년 이후 북한 정책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 바 있다. 


그동안 북한은 미국과의 오랜 적대관계를 평화관계로 전환하는 것을 국제전략의 핵심 목표로 잡았다. 곡절과 부침이 있었지만, 2019년까지는 이러한 기대와 목표를 접지 않았다. 북한이 핵개발을 지렛대 삼아 대미 관계 정상화를 노렸다면 미국은 북핵을 명분으로 '한반도의 현상'을 유지·강화하고자 했다. 미국이 바라는 한반도의 현상이란 정전체제와 한미동맹, 남북·북미·북일 간의 긴장관계다.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의 실패와 6월 30일 이루어진 남북미의 소득 없는 정상회동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핵무력을 국가의 중심 정책으로 삼게 되었다.


그 때 저자의 미래에 대한 대안은 다음과 같았다. 


안정성이 결여된 억제 관계는 무력충돌의 위험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며 '한반도형 3C'를 제안한다. (한미동맹과 북한이 군비경쟁보다는) 군비통제를 통해 군사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접근, (보복 위협이 빈말이 아님을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적대적 신뢰보다는) 서로가 선제공격하지 않고 우발적 충돌 발생 시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우호적 신뢰 구축의 노력, (두려움 주기식의 전달을 지양하고) 상호만족할 수 있는 해법을 찾으려는 대화와 소통 방식의 마련 이다.


'또야?'라며 생각을 회피하거나 단절하기도 문제지만 과도한 몰아가기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


대만이 '포르모사'라고 불리던 시절 1867년 로버트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우연히 읽기 시작했다. 

포르모사는 다양한 부족들이 살고 있었던 만큼 부족 간에 문화적 차이가 컸다. 또 마침 당시 서양이 서서히 아시아를 향해 개항의 문을 열라고 압박하며 들어오던 무렵이어서 갈등이 확산될 배경이 만들어졌다. 

역사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어서 흥미롭다. 페이지 수가 많아서 걱정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읽기가 어렵지는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 읽었던 <도해 타이완사>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모란사 사건은 언급되었던가? 개산무번 사건은 기억이 날듯 말듯했다. 이렇게나 기억이 흐릿할수가(불과 2년 전 읽은 책인데ㅠㅠ). 

결국 다시 찾아보는 것으로...(책은 왜 읽는 것인가)


-> 찾아본 결과 모란사 사건은 물론이고 개산무번 사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둘 다 여러 번 언급됨. 하... 재독은 안되더라도 그 부분은 다시 찾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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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12-19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구절이 저에게도 와 닿습니다.
책는 왜 읽는 것인가...

분명 몇 년 전에 읽은 책인데 1도 기
억이 나질 않습니다.

우리 책쟁이들은 모두 무당산에서
장삼봉 선생 앞에서 태극권을 배우는
장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2-20 10:03   좋아요 2 | URL
피에르 바야르가 ‘책을 잊어버려도 괜찮다. 어쩌면 책을 집어들고 읽는 것은 망각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라고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강박증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ㅎㅎㅎ 그래서 재독, 삼독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미미 2023-12-19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칼 융이 그러더군요. 일단 경험한 바는 소멸되지 않는다고요ㅋ 무의식에 모두 저장된대요. 그 말이 조금 위안이 되었어요>.<

거리의화가 2023-12-20 10:03   좋아요 2 | URL
ㅋㅋㅋ 칼 융도 그런 말을 했군요. 어쩐지 위로가 됩니다!^^
 

동아시아를 위한 전투는 초강대국 투쟁을 제3세계에 가져왔다. 이지역 전역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자 미국 지도자들은 세계 지배를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목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1949년10월부터 1950년 6월 사이의 몇 개월은 제3세계에서 냉전이 형성되는 데 핵심적인 기간이었다.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주의 대국으로 등장하자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뒤집혔고, 개발 도상 세계 전체 - P88

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커졌다. 워싱턴과 모스크바의냉전 지도자들은 중국, 한국, 인도차이나에서 맹렬히 진행된 일련의아시아 혁명들을 두고 하나의 응집된 전선으로 결합해 전략적 계산을 수행했다. 한편 동쪽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자 주저하던 소련 지도자들은 아시아 혁명가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동지들은 냉전 투쟁의 방향을 중부 유럽에서 동아시아의 포스트식민주의국경 지역과 그 너머로 돌렸다. - P89

마셜은 마오쩌둥과 장제스 사이에서 소련의영향력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중국 공산당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영속적인 합의를 중재하고자 했다. 마셜은 한 손으로는 장제스에 - P111

게 정치 개혁을 시행하라고 압박하는 한편, 다른 손을 이용해 국민당 정권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이 지원으로 국민당은 만주에 대한통제권을 재천명할 수 있을 터였다. 총사령관은 마셜의 압박을 못 견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4대 승전국 중 하나로서 장제스는 명령을 받기보다는 명령을 내리기를 기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워싱턴은 중국에서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고분고분한 정권을 찾았다. 마셜의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장제스의 저항은 원치 않는 분규를 일으켰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위협에 직면하여 장제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 P112

마셜은 국민당은 워싱턴에 "군사 지도자들이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결심하면서 창출하고 있는 진공 속으로" "자금을 계속 쏟아붓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경고하며, 장제스에게개혁을 실행하라고 끊임없이 압박했다. 국민당은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오래전에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마셜은 완고한 총사령관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군사력이 중국 공산당과의 투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며 경고를 무시했다. 1947년 1월 7일, 백악관은 마셜 장군이 미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외교는실패했다. - P133

만주에서 중국이 승리함으로써 자원과 산업, 그리고 "한국과의 필수적인 전략적 연계"가 소련의 궤도 속으로 들어왔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대중국 정책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나타냈다. 내전이 계속되는 한, 중국 공산당은 모스크바와 여전히 동맹 관계에 있을 터였다. 그러므로 내전과 불안정의 지속은 궁극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정책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모스크바의 스탈린과 그의 동지들은 확실히 중국 공산당의 잠재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6월에 스탈린은 ‘표도르 쿠즈네초프(전 붉은 군대 사령관)‘라는가명으로 글을 쓰면서, 옌안의 크렘린 요원에게 마오쩌둥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은 이 중국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 P136

모셔 오기 위해 하얼빈에 비행기를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 P137

실제로 장제스의 옌안 점령은 피루스의 승리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최정예 부대를 버려진 중국 공산당 수도에 투입한 바로 그 순간에도 공산주의자들은 만주를 계속 방어했다. 만주는 장제스가 이 지역에 사단들을 마구 투입하면서 정부군의 ‘전략적 덫‘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국민당 군을 만주로 더 깊숙이 끌어들임으로써 미약한 병참선을 길게 늘이고 난징의 예비 자원을 소모시키는 일련의 양동작전陽動作戰을 벌였다. 게릴라 전술에 의존하고 대규모 교전을 거부하는 공산군 사령관들은 수적으로 우월한 정부군 - P138

을 서서히 소모전으로 고사시키는 전략을 따랐다. 한 프랑스인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허우마시를 점령하면서 2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여단장을 비롯해 18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신장시를 점령할 때 그들은 네 명이 다쳤으나, 도시를 방어하려고 했던 700명의 의용군 중에서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국민당 군2개 연대가 방어했으나 공산군 3개 연대의 공격을 받은 치워를 점령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수비대 전체인 2000명을 사로잡는 전과를올렸다." - P139

1949년 1월 6일 중국 공산당 사령관들은 쉬저우 수비대에최후의 공격을 개시했고, 나흘 뒤 약 20만 명의 정부군이 항복했다. 화이허淮河 전투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결정적인 승리는 놀라운 속도로 다가왔다. 마오쩌둥과 그의 사령관들은 "기쁨에 넘쳤다." 그러나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정복한 거대한 영토를 통치해야 하고, 혁명을농촌의 기원으로부터 도시의 미래로 옮겨야 하는 이중의 난제에 직면했다. 동북부에서의 패배 소식이 난징에 있던 장제스의 귀에 들어가자총사령관은 자신이 직면한 재앙의 규모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는 "패배한 전투들에 대한 보고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며 들어온다"
고 탄식했다. "북중국과 만리장성 아래 지역은 붕괴 직전이다." 장제스는 이제 두 가지 과감한 행동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정부를 난징에서 타이완으로 옮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임하는 것이었다. - P153

마오쩌둥식 사회주의혁명은식민지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 마오쩌둥의 체계에서는 탈식민지화와 민족 해방에 대한 요구가 계급투쟁이라는 수사를 대신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뒤쫓아 한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알제리,
중동, 라틴아메리카의 반식민주의 혁명가들은 전부 그들 자신의 무장투쟁을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서 마오쩌둥의 게릴라 모델에 주목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냉전 국제 시스템 주위에 크게 울려 퍼지면서, 주요 행위자로서 베이징의 등장을 나타내고 개발 도상 세계에들어맞는 새로운 방식의 사회주의혁명이 출현했음을 알렸다. 아시아의 남부 가장자리 전체에서 호 모양으로 발생한 일련의 포스트식민주의 해방전쟁은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시작했다. 마오쩌둥의 혁명 세력은 옌안에서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이 시작으로 이제 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예정인 하나의 운동을 풀어놓았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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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시신(侍臣)들에게 말하였다.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여 나를 받들게 하는 일은 짐(朕)은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다. 구혁(溝?, 봇도랑, 해자)을 열어 경읍으로 가도록 하는 것은 대개 부득이한 것일 뿐이다."

황제는 장리(贓吏, 뇌물 받은 관리)를 아주 싫어하여 이후로는 내외관으로 장죄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기시(棄市)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을해일(13일)에 요(遼)의 사천(司天)인 왕백(王白)·이정(李正) 등이 역서(曆書)를 올렸다.
이보다 먼저 후진 천복(天福) 연간에 사천감인 마중적(馬重績)이 주문으로 을미원력(乙未元曆)을 올렸는데 조원력(調元曆)이라고 불렀다. 태종(太宗, 요의 耶律德光)이 후진을 멸망시키고 변(?)에 들어가게 되자 모든 관청의 요속(僚屬)·기술(技術)·역상(曆象)을 거두어서 중경(中京, 內蒙古 赤峰市 寧城縣)으로 옮기니 요에는 비로소 역(曆)이 있게 되었다. 왕백 등이 올린 것은 바로 조원력이다.

황제가 말하였다.
"인생이란 흰말이 틈새를 지나는 것 같은데, 행하는 바가 부유하고 귀하게 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여도 금전을 많이 쌓아 놓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스스로 즐기는 것을 많이 하고 자손들로 하여금 가난하거나 궁핍하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병권을 풀어 놓고 나아가 큰 번진(藩鎭)을 지키면서 편리하고 좋은 전택(田宅)을 골라서 사 놓고 자손들을 위하여 영원한 기업을 세우지 않는가? 노래하는 아이와 춤추는 여인을 많이 데려다가 매일 술 마시며 서로 즐거워하며 천수를 마치라! 짐은 또한 경들과 약속하여 혼인하고 군신 사이에 양쪽에서 시샘하거나 의심함이 없게 하여 아래 위가 서로 편안한 것이 역시 좋지 않겠는가?"

오대시기에는 요(遼)가 발해 땅을 전부 가지게 되자 흑수부의 백성들 가운데 혼동강(混同江, 흑룡강 우안의 최대 지류)의 남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요에 적(籍)을 두면서 숙여진(熟女眞)이라 호칭하였고, 요에 적을 두지 아니한 사람들을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렀다.

여진의 선조는 옛날 숙신(肅愼, 흑룡강, 송화강 일대) 땅에 거주하였는데, 원위(元魏, 북위)시기에 물길(勿吉)이라 불렸고, 수대(隋代)에 이르러 호칭을 고쳐서 말갈(靺鞨)이라고 하였으며, 당(唐) 초기에는 흑수부(黑水部)와 속말부(粟末部) 두 부(部)를 가지고 있었으며, 뒤에 가서 속말부가 대단히 강해져서 발해국(渤海國)으로 호칭하였고 흑수부는 이어서 그들에게 속하여 불리어졌다.

애초에 후주 세종이 이미 강북을 빼앗고 강남에 편지를 보내면서는 당(唐)이 회골(回?)의 가한에게 불러 주는 방식처럼 다만 국주(國主)라고 불렀을 뿐이었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서(書)라고 하는 용어를 고쳐서 조(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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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용어로 불렀다.

요(遼)의 야율해리(耶律諧里, 解里)가 와서 항복하였다.

지금부터 사자를 사방으로 나가게 하면서 반드시 마땅히 그 적당한 사람을 심사하여 선택해야 하오."

정해일(30일)에 북한(北漢)에서 항복한 백성들을 형(邢, 河北省 邢台市)·명(?, 河北省 永年縣 東南) 두 주로 옮기고 사람 수를 계산하여 부속(賦粟)을 내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가족으로 경사에 있는 자들은 아주 두터운 위무를 받았으며, 군(郡)에 있는 관각(??, 전매)의 이로움은 모두 이들에게 주었으니 그들이 도모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여 무역을 하게하고서 통과하면서 걷어야 하는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서 변방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부유하게 되었으며 결사대를 모집하고 기를 수가 있었고 간첩을 부릴 수 있어서 적의 사정을 환히 알았으니 매번 변경에 들어갈 적마다 반드시 먼저 알고 예비할 수 있었고, 복병을 두어 습격하였다.

진주의 서북쪽에 있는 석양진(夕陽鎭)은 옛날 복강현(伏羌縣, 甘肅 甘谷)의 땅으로 서북쪽으로는 대수(大藪, 큰 숲)에 이어져 있어서 재목이 나오는 곳인데 융인(戎人)들이 오래 동안 그 이로움을 오로지 하였다. 상서좌승인 수양 사람 고방(高防)이 지진주(知秦州)가 되어 채조무(采造務)를 설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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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재목을 가져다가 경사에 공급하자고 건의하였다.

조서를 내렸다.
"조정의 신하가 사자로 나가는데 돌아오는 날에는 보았던 민생의 이로움과 병통을 갖추어 보고하라."

오대 이래로 절도사는 친하게 따르는 사람을 진장(鎭將)으로 보임하여 현령(縣令)과 항례(抗禮)하였지만, 무릇 공사(公事)는 오로지 주(州)에만 보내지니 현의 관리는 직책을 잃었다. 이에 이르러 다시 현으로 통할하니 진장이 주관하는 곳은 향촌(鄕邨)에는 미치지 못하고 다만 곽내(郭內)에서일 뿐이었다. 추밀사 조보의 말을 따른 것이다.

"세 개의 기한을 주는데, 매 기한은 각기 20일이다. 첫 번째 기한 안에 잡는 사람은 현령과 현위가 각기 1선(選)을 감해주고 반이 넘어서 잡는 사람은 2선(選)을 감해 준다. 두 번째 기한 안에 잡는 사람은 각기 1자(資)를 뛰어 넘게 하고, 반의 기한을 넘어서면 2자(資)를 뛰어 넘게 한다. 세 번째 기한 안에 잡는 사람은 현령과 현위에게 각기 1계(階)를 덧붙여 주고, 반을 넘으면 2계(階)를 덧붙여 준다.
세 번째 기한이 지나도 잡지 못하면 현위는 1개월의 녹봉을 깎이는 벌을 받고 현령은 이를 반으로 한다. 현위는 세 번 벌(罰)을 받고 현령은 4번 벌을 받으면 모두 1선을 전(殿)으로 하며 3전(殿)이면 관직을 정지한다. 현령과 현위가 도적과 싸워서 모두 잡은 사람은 나란히 비(緋)를 하사하고 현위에게는 현령을 제수하고 이어서 양자(兩資)를 뛰어 넘게 하고, 현령은 별도로 발탁하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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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따라 지도를 그려보면, 학살은 개발 도상 세계를 관통하는일정한 길을 쫓아가면서, 모두 합쳐 냉전 시대에 발생한 전사자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광범위한 세 전선에 집중되었다. 전선 각각은세 개의 지방 전쟁군중 하나와 연계된 지역 투쟁들로 이루어졌고,
이 지방 전쟁군들은 다시 지구적 냉전 네트워크와 연결되었다. 각 전선은 소련과 중국의 국경을 따라 만들어졌고, 지방 권력의 대두에 집중되었으며, 탈식민지화의 뒤를 쫓아 전개되었다. 다량의 병력이 주둔한 중부 유럽의 변경 지대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남았던 반면, 동쪽에서는 격렬한 충돌이 불타올랐다. - P16

제국 권력들이 더 이상 자신의 제국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다수의 민족주의자, 혁명가, 군사 지도자들이 부상하며 식민지 세계 곳곳에서 권력을 요구했다. 이 포스트식민주의 세력은 군사력 부족을 혁명 열정으로 보충하고자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 달 후, 세계 위기의 대략적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초강대국이 곧 냉전으로 알려지게 될 지구적 권력을 위한 투쟁을 점점 더격렬하게 벌이는 동안, 개발 도상 세계의 인민들은 전면적이고 보통은 폭력적인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국가를 건립하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급변하는 지정학적 풍경 위에서 서로 맞닥뜨린 초강대국, 혁명가, 작은 국가들은 1945년 이후의 세계 위기에서, 그리고 그후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빚을 때 각자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었다. - P46

스탈린은 유럽 국경 지대의 안전을 확보한 후 튀르키예, 이란을 통과하여 극동으로 향하는남쪽 측면으로 눈을 돌렸다. 크렘린이 처음으로 시험 삼아 한 조치는 이란 북부 지방에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 종족에 초점을 맞췄다.
이 지방은 1941년 이래 붉은 군대의 통제를 받았다. 그것은 소련군과 영국군이 테헤란이 추축국을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각 이란북부와 이란 남부를 점령하는 연합국 합동작전의 일환이었다. 1945 - P54

년 6월 스탈린은 일곱 군데의 다른 장소에서 적어도 10개의 유정을개발할 목표로,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이란 북부에서 유전을 지질학적으로 조사할 특명 조직을 구성하는 극비 법령을 통과시켰다. - P56

1946년 여름 합동참모본부는 암호명이 핀처 PINCHER인 미래의 대소련 전쟁 계획을 입안했다. 중동이 이 계획의 중심에 있었다. 이 계획은 소련군이 유럽으로 밀고 들어오면 서방열강이 전열을 가다듬고 중동에 설치된 영국공군기지로부터 전략 폭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상정했다. 이 항공 작전이 소련군의 공세를 멈추는 데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나면, 서방 열강은 튀르키예와 동지중해를 통과해 북쪽으로 소련으로 진입하는 - P66

지상군 공격을 준비할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나폴레옹에게도, 히틀러에게도 치명적인 것으로 밝혀진 동유럽을 통과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피할 터였다. 따라서 워싱턴의 관리들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련을 공격하는 가장 실행 가능한 경로는 튀르키예의 기지를 출발해 중동을 통과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 P67

케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적 경향에대한 장기적이고 끈기 있지만 확고하고 빈틈없는 봉쇄여야 한다는것이 분명하다." 케넌은 미국에 "러시아가 평화적이고 안정된 세계의이익을 침해하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변함없는 대항력으로 대처할것을 요청했다. 케넌의 시각은 워싱턴의 봉쇄 전략의 기반을 형성하게 될 터였다. - P74

리프먼은 봉쇄를 "전략적 괴물"로 혹평했다. 봉쇄는 값비싸고 다루기 힘들며, 미국을 냉전 주변부에 널리 퍼져 있는 국가들의내정에 끌어들일 것 같았다. - P76

스피크먼은 ‘주변 지역‘이 심장지대로 들어가는 주요 접근로를 관할하고, "해상 세력과 대륙 세력 사이의 충돌을 완화하는 거대한 완충지대를 형성했다"라고 설명했다. 이 거대한 중간 지대는 1945년 이후의 세계에서 지구적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열쇠를 지녔다. 스피크먼은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하며,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통제한다"라고 설명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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