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장

3·1운동은 1차 대전 후 오히려 안정성을 누리는것처럼 보인 이 제국체제에 대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의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은 그 기원에서도 동아시아적차원을 갖는 것이었다. - P355

온 세상이 제국이 아니면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구획되고 차별화된 세상에서인간이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개인들이 집단적 주체를 구성하는 자신의 ‘나라‘를 갖는다는 것과 불가분했다. 제국의 시대에 제국은 문명과 질서의 담지자를 표상했으며,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의 인간은미개인(未開人)과 동일시되는 가운데 각종 권력적 및 문화적 장치에의해서 집단적으로 일반적인 시민권의 밖에 놓이고 그만큼 비인간화의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구조였다. - P357

아렌트에게 있어서, 제국의 시대의 인간에게 ‘나라 없음‘은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가 성립할 조건을 상실한 것을 의미했다. 나라 없음
"이란 우선 인간이 의미 있게 존재할 ‘장소‘(a place)를 빼앗긴 상태를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저마다 인간이 애틋한 소속감을 가진 공동체를 담는 그릇이 상실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아렌트는 더 나아가 "인권과 근대국가 사이의 긴밀한 의존관계"
를 간파했다.
인권의 사상을 현실역사에서 구현하는 공간은 도시국가든 광역적 영토를 가진 큰 사회든, 폴리스(polis)라는 정치공동체 안에서의 정치적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포함한 억압적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과 예방이 국가 자체를 초월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않았다. - P358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일본제국의 지식인들이 제기한 논리는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해 ‘하나의 큰 제국‘을 이루어 두 민족이더 큰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제국의 논리는 작은 정치공동체들을 크고 강한 국가권력에로 통합함으로써 마치 대동사회를 구현하고 나아가 ‘세계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 P359

역사는 제국의 사이클에 다름 아니며 국가는 사라져도 무방한 존 - P361

재단위라는, 세계화 시대에 광범하게 유포된 관념은 정치공동체의단위를 근대의 산물로 간주하는 서양사 중심의 관념이 광범하게 존재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런데 근대국가가 근대의 산물인 것은 맞지만 국가가 근대의 산물은 아니다. 그리스 도시국가 시절부터 국가혹은 "공화국"(republic)은 정치철학의 불변하는 핵심 주제였으며,
이는 미래에도 근본적으로는 변치 않을 것이다. 국가와 그 안에서의정치의 문제를 "역사적 한시성"을 띤 것으로 간주하고 국가 초월의주장에 힘을 실으면 국가권력의 민주적 재편성과 그 심화를 위한 부단한 정치적 참여와 실천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감당해야 할 숙명이자 의무라는 사실을 외면하게 된다. 이 함정을 경계하지 않을 수없다. - P362

동아시아 공산권 사회들은 국가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지배’를추구하는 전체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치러야만 했고, 한국·타이완·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미국과 동맹한 동아시아의 탈식민 사회들은거의 한결같이 반공파시즘의 시대를 연출했다. 전체주의도 반공파시즘도 정치권력이 진리를 지배하려 들면서 개인의 영혼의 자율성을 포함한 인간적 가치들을 부화하는 절대 국가이념을 구축하려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인민해방 혹은 자유라는아름다운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닮은꼴이었다. - P365

동양 평화에 우리가 기여한다는 것은 이러한 대분단체제 너머의동아시아를 꿈꾸고 동아시아의 다른 사회들과 그 꿈을 공유하며 그실현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다. 지정학적 긴장의해체에 우리가 기여하는 길은 말할 것도 없이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통해서 비핵화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양극화된 군사동맹의 질서에 대한 의존을 줄이면서 동아시아공동안보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 P368

중국의 미사일 능력 향상이 타이완문제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미군기지와 일본 본토에 대해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고,
그럼으로써 미국의 동아태 해상패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거론된 것은 적어도 2010년 무렵부터였다. 미 의회는 2000년에 ‘미중 경제 및 안보 검토 위원회‘를 설치해 미중 양국 간 경제 및 무역 관계가미국의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분석해 매년 의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2010년 보고서는 처음으로 중국 공군력과 재래식 미사일전력 팽창이 동아시아 미군기지에 제기하는 점증하는 위협을 분석한 장(章)을 따로 마련했다. - P384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황해상과 동중국해는 중국 해군에게 갈수록 좁아지는데, 그것을 압박하는 미일동맹의 대응도 커진다. 그로 인한 긴장 응축의 복판에 한국은 제주 해군기지를 만들어 섶을 지고 뛰어든 형국이다. 이해군기지에 미국의 핵잠이나 핵 탑재 군함들의 출입이 일상화될 경우 제주도는 동아시아의 발칸에 다름 아니게 될 수 있다.
어떤 지역이 사분오열될 때 그것을 발칸화(Balkanization)라고 표현한다. 다른 뜻도 있다. 필자가 제주 해군기지와 관련해 말하는 ‘발칸화‘는, 여러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겹치며 충돌하는 작지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큰 재앙의 잠재력을 안은 화 - P392

약고로 변해가는 현상을 가리킨다. 미 해군 함정들이 강정 미항에 드나드는 상황이 일상화될 경우, 제주도가 오키나와보다 중국의 심장부에 더 가까운 위치에서 미국의 대중국 군사적 전초기지로서 기능하는 상황이 현실화될 수 있다. - P393

한국군은 제주도와 그 남방해역을 방위할 충분한 해군력을 갖추었으며, 그러한 방위 역할은 한반도 남부의 여러 해양도시들에 충분히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 남부해안의 해군기지들로부터 제주 남방해역을 지킬 수 없다면, 그래서 제주 해군기지 또는 심지어 그 확대가 따로 필요한 것이라면, 2000년대 들어 한국 정부가 대양해군 건설이라는 명분으로 팽창시켜온 해군력 확대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말도 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 등 탐지반경이1,000킬로미터를 넘어서고 공격반경이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첨단 군함들의 존재의의는 무엇인가. - P394

대분단체제의 지리적 표상이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 대분단선은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이 축적되는 지점이며, 이 지점을 따라 남으로는 남중국해에서 타이완해협과 오키나와를 거쳐 북으로는 한반도 서해상에 이르기까지 군사화가 심화되고 심지어 군사적 충돌도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을 언제라도 안고 있다. 이 선상(線上)의 섬들은 그 자체로서 군사적 요충지들이며, 그렇기에 ‘동아시아의 발칸‘들로 작용할 잠재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서 지정학적 긴장의 평화적 관리는 이들 대분단선상의 잠재적 발칸들을 어떻게 ‘평화지대‘로 전환시킬 수 있을것인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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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아브젝시옹에 대한 방법론

타자(autre)의 욕망을 상상하기 때문에 주체는 그 야수적인 고통을 지탱한다. 육중하고도 갑작스런 이질성이 출현한다. 전에는 나의 불투명하고 잊혀졌던 삶 속에 친근하게 존재했던 그 이질성은, 이제는 나와 분리되어서 혐오스러워지고 나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내가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아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 이다. 그 알 수 없는 의미의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무와 환각, 그리고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내가 현실을 인식하려 하면 나는 전멸된다.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은 바로 그런 내 존재의 축, 문화의 도화선, 그곳에 존재한다. - P22

이 하찮고 무의미한 것, 그러나 그들이 바라고 중요하게 생각해서 내게 부과한 사소한 것은 내 창자를 꼬이게 하고, 나를 마치뒤집힌 장갑처럼 만들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내가 죽음을대가로 치르고 타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내‘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맹렬한 구토물과 오열과 더불어 자아를 낳는다. - P23

아브젝트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것 자체가 지정된 한계나 장소나 규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어중간하고 모호한 혼합물인 까닭이다.
아브젝시옹은 도덕을 알면서도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훨씬 더 음흉하고 우회적이며 석연찮은 어떤 것이다. 즉 자신을 숨긴 테러 행위, 미소짓는 증오, 껴안는 대신에 품는 육체에 대한 욕망, 당신을 팔아치우는 채무자, 비수로 나를 찌르는 친구…………. 이런 것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 P25

아브젝트가 주체를 유혹하고는 단숨에 전멸시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주체가 자기 바깥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려는 헛된 시도에 지쳐 자신 속에서 불가능을 발견할 때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불가능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자신이 아브젝트와 다름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고, 아브젝트야말로 자기 존재 자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게다가 주체가겨냥한 모든 대상들의 존거가 최초의 상실에 단초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의 주체의 경험에서 그 절정의 형태를 가질 것이다. 사실 존재.의미· 언어, 그리고 욕망을 가능케 하는 결핍을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자신의 아브젝시옹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 P26

억압의 개념에 관해 프로이트는 신경증에는 부인의 개념을,
정신병에는 기각(배척)의 개념을 주장했다. 이 두 억압의 유형 사이에서 드러나는 불균형은 부정이 대상에 관련되어 있는 반면, 배척은 욕망 그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프로이트의직계인 라캉은 그것을 ‘아버지의 이름의 배척‘ 이라고 해석하였다.)

아브젝트의 상태 속에서 적어도 승화라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마치 신경증에서의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처럼, 아브젝트에서는 ‘나‘와 ‘타자‘ ‘안‘과 ‘밖‘의 대립이 존재한다. ‘의식‘ 과 ‘무의식‘ 사이의 대립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 P29

만약 내가 무언가에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은 무언가 특정한 사물의 형상으로 내게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법칙이나 관계항, 나를 지배하고 조건짓는 구조라는 틀 속에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나의 육체를 위해 법칙을 만드는 이 명령, 이 시선, 이 목소리, 이 몸짓은 정서를 만들어 내고 야기시키기는 하지만 아직 기호가 아니다. 나는 내게 있어 더 이상은 동화될 수 없는 세상에서 기호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순수한 상실 속에서 그것을 펼쳐 보인다. 명확히 하면 나는 다른 누구일 뿐이다. 자아의, 대상들의, 기호들의 출현에 있어서의 모방의 논리. 그러나 내가 ‘나‘를찾으려 하거나 잃어버리거나 혹은 유희할 때 나는 이질적이 된다. - P33

후에 주체와 그 대상이 될 것으로부터 아브젝트를 떼어 놓는 공간이 이 ‘타자‘에 의해 정해진다면, 그것은 이른바 ‘1차적’ (원초적)억압이 자아와 그 대상, 혹은 재현들의 출현에 선행하여 작용하기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2차적‘ (본래적) 억압에 종속하는 것들이나타나는데, 그것은 이미 표지가 된 근거 위에 자리잡고 있는 후천적인 것으로서 불가사의한 공포나 강박관념 · 정신병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보다 일반화시켜서 상상해볼 때, 그 상태란 아브젝시옹의 형태를 가진 인간 세상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 P34

증상 속에서라면 아브젝트는 나를 침입하고, 나는 아브젝트가 된다. 그러나 승화 과정을통하면 내가 아브젝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아브젝트는 숭고함의 경계를 이룬다. 아브젝트와 숭고함은 과정이 같지는 않지만, 그존재 자체가 똑같은 언어와 주체에 의존하고 있다. - P35

누군가가 되기 전의 ‘나‘는 이차적인 과정을 통해 획득된 내가 아닌 분리되고 버려지고 아브젝트한 무엇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의 전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때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과 공존하는 동시에 영원히 그것을 약화 - P37

시킨다. 내가 비치고 나를 알아보게 하는 적어도 가장 아름다운영상은, 영원한 감시자인 억압이 느슨해졌을 때 그 영상을 균열시키는 아브젝시옹위에 나타나는 것이다. - P38

내가 나의 이미지를 기호로 인식하거나 나를 의미화시키려고 본래의 나로부터 변형시키는 바로 그 순간부터 또 다른 체계가 성립 - P38

이때부터 기호는 코라와 코라의 영원한 회귀를 억압하는 것이다. 오로지 욕망만이 이 ‘기원적인‘ 싸움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자아를 또 다른 주체로 쫓아보내고, 더 이상은나르키소스적인 자아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은 타자의 뒤로 처져서 퇴행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스스로생각하고 보존하며 자기 만족하는 장소를 향해서만 돌아올 수 있다. 사실상 이 나르시시즘은 결코 평화로운 샘물에 비친 완벽한 그리스 남신상만은 아니다. 바닥을 뒤흔드는 충동의 갈등이 물을 흐려 놓고, 주어진 기호 체계를 위해 그것에 통합되지 않는 모든 아브젝시옹을 끌어당긴다. - P39

아브젝트는 도착성과 친척뻘이다. 아브젝트는 도착적인데, 내가느끼는 아브젝시옹의 감정은 초자아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금지나 규칙·법을 무시하거나 파기하는차원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왜곡시키고 곡해하고 부패시킬 뿐이다. 즉 그것들을 더 잘 부인하기 위해 실컷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살려 주겠다는 명분으로 죽이는 전제 군주이기 때문이고,
죽음을 추종하면서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가라앉히는, 말하자면 암거래를 하는 유전학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연을 토로하는 척하면서 나르키소스적인 힘을 재정비하는 파렴치한 정신분석학자이기도 하다. 아브젝트란 결국 예술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예술가인 것이다……… - P40

아브젝시옹은 모든 종교의 구성물과 함께 한다. 그리고 그 구성물들이 와해되었을 때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져 다시 나타난다.
우리는 아브젝시옹의 여러 구성물들이 성스러운 것을 규정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 P42

벌려진 상처를 통과하는것은 입문 의식이 아니라, 차라리 ‘틈‘이나 ‘불완전한 단일성‘ 같은 근본적인 결핍을 이질적이고 육체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언어적인 시련이다. 포기한다는 조건부로만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말을욕망하는, 육체의 상처를 벌리고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과 같이 상처입고 불안정한 주체 속에서 모든 현상은 그것이 시니피앙이건 인간이건간에 아브젝시옹이라는 존재 속에서 나타난다. 어떤불가능한 카타르시스와 바뀐 것일까? 프로이트는 처음의 불완전한 카타르시스란 용어를 후에 엄밀히 규정함으로써 심리 치료법으로 사용하였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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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함달달 원서 읽기 3번째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중세 편. 안 읽은 줄 알았더니 책에 밑줄이!ㅋㅋㅋ 아마도 최초에 사고 나서 바로 읽었던 모양. 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다시 초독 느낌으로 읽어나가려고 한다. 


다른 함달달 멤버 동지들도 화이팅!!!





[CH1] The Glory That Was Rome

카펫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과거를 여행할 수 있다면? 로마 제국의 판도가 가장 넓었던 시기를 두루 여행한다. 

영토가 넓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지배력이 두루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경을 통하여 훈족, 반달족, 고트족들이 침입해 들어오는데 제국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또 몇몇 지역에서는 식량이 부족해져 굶주리는 시민들이 생겨난다. 거기에 전염병이 더해지니 로마군이 죽어나간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때 동로마와 서로마(286 AD or CE)로 분열되면서 막시미아누스라는 황제가 한 명 더 생겨났다. 막시미아누스는 통치를 도와줄 부통령들도 선출했다. 410 AD(or CE) 이민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불타고 보물들은 약탈당했다. 




[CH2] The Early Days of Britain

영국 땅에 살던 켈트족은 bards(trained singers)를 갖고 있고 전투력에 자신 있는 부족이었다. Craith는 Giant Fover 소유의 노예를 보고 아름다움에 반해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동료들이 그 과정에서 keen eyes, sharp ears, quick feet를 소유하게 되었다. 

영국 북부 국경을 지키기 위해 버거웠던 영국 왕은 북해 건너편에 살던 앵글로 색슨인들에게 도와주면 자기 땅에서 살게 해 주겠다 했다. 이후 영국의 남동부 지역에는 앵글로 색슨인들이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England라는 명칭은 Angle이란 단어애서 유래했다고. 켈트족 중 북서부 지역에 살던 이들은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가 되어 오늘날의 영국 지형이 완성되었다.

Grendel(그렌들)은 반은 짐승, 반은 인간인 괴물이다. Beowulf(베어울프)는 Grendel이 Hrothgar(흐로스가르)의 hall을 매일 밤 공격한다는 것을 들었다. Beowulf는 Hrothgar에게 Grendel을 처리하겠다 이야기하고 약속대로 승리한다. Beowulf는 Hrothgar에게서 금갑을 받고 bards는 그의 힘을 칭찬했다. 



[CH3] Chritianity Comes to Britain

교황이 어느날 길을 떠나 영국인 출신의 금발 머리를 가진 노예들을 만난다. 그들은 고향인 Angles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교황은 노예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학교도 보내주고 크리스천이 되도록 했다. 

교황은 Augustine(아우구스티네)이라는 크리스천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Augustine에게 영국으로 가 교회를 세우고 포교를 요청하게끔 하자 Augustine은 섬에 건너가 켄터베리에 정착했다. 교회를 짓고 설교를 하자 앵글로 색슨인들 상당수가 크리스천이 되었고 Augustine은 최초의 영국 대주교가 되었다. Brother Andrew는 아일랜드의 대주교가 되었다.

책을 만드는 과정은 워낙 지난하여 수도자만이 책을 만들 수 있었다. 양피지가 booklet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는데 역시 복잡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booklet은 손으로 기록되었는데 성경을 복사하고 편지를 쓰는 일들이 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흰 바탕의 검은색 글씨가 아니라 다양한 색깔로 써진 글씨에 그림도 추가했다. 매일 8시간 노동하여 1년에 2권이나 3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고작이였다. 




* fair: 금발의

* monastery: 수도원

* monk: 수도자, 수도승

* abbot: chief monk



[CH4] The Byzantine Empire

비잔틴 제국은 Justinian(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강력했다. 제국이 커지자 서로 다른 법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그는 the Code of Justinian을 만들어 법을 통일했다. 내용은 고대의 다른 법들과 비슷한 듯 다르다. 콘스탄티노플이 지중해 근처에 있어서인지 Rivers belong to everyone. Everyone in my empire can fish in the rivers, without being told to stop. 이런 항목이 눈에 띄었다.

Justinian 곁에는 아내이자 여제인 Theodora(테오도라)가 있었다. Justinian이 군인일 때 둘은 길에서 만났고 서로 눈여겨보았다가 결혼했다. 황제가 된 Justinian에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명목은 수하에 있던 두 사람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는데 거부하자 사람들은 폭발한다. 도망가려했던 그에게 Theodora가 설득하여 도망가지 않고 사태를 현장에서 수습할 수 있었다.

이때 그리스교가 둘로 나뉘어지는데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가 그것이다. 비잔틴 제국은 동방 정교회의 기지다. 성 니콜라스는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산타 클로스로 불리기도 한다. 




[CH5] The Medieval Indian Empire

찬드라굽타의 후손들은 인도 북부를 통치했다. 찬드라굽타는 굽타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굽타 아래 인도는 평화롭고 부유했다. 그러나 훈족이 처들오자 인도는 여러 소왕국들로 분할되고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다. 왕인 Skandagupta(스칸다굽타)는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을 가서 살아남았지만 인도는 이후 점점 더 약해져 마침내 550년 굽타 왕조는 멸망했다.

인도의 수도자들은 절벽의 동굴에 좁은 공간을 만들고 홀로 생활하며 잠을 자고 부다의 가르침을 이어받는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동굴에 많은 조각이나 그림들을 새겼는데 Ajanta Caves라고 하는 곳이 수백년 이후 사냥하러 왔던 병사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CH6] The Rise of Islam

Bedouins(베두인)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메카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 살던 고아 무함마드는 Bedouins의 형편 없는 생활 습관을 보며 어떻게 하면 그들을 변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다 조용한 동굴에 들어갔다가 알라신의 계시를 받는다. 그는 동굴에서 나와 가족 등 6명에게 유일한 신은 알라임을 선교한다. 무함마드는 7년 후부터 타인을 상대로 선교를 시작한다. 무슬림 신도가 늘어나자 메카의 부자들은 경계를 나타냈고 결국 그들은 배척을 받게 되어 쫓겨나 메디나로 가게 된다(the Hegira). 무함마드가 설법한 흩어져 있던 그의 말을 하나의 책으로 묶여 이슬람 율법 5계명을 담은 코란이 되었다. 




[CH7] Islam Becomes an Empire

메디나 사람들은 자원의 부족으로 굶주리게 되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대상을 메카에 보내게 된다. 그러자 메카에 있던 부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아 결국 두 도시 간에 싸움이 터졌고 이는 7년 이상 지속되었다. 무슬림들이 메카를 정복하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다시 메카로 향한다. 이제 메카는 무슬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점점 더 많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부족들이 무슬림이 되었지만 무함마드가 죽고 만다.  친구인 Abu Bakr(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는 죽었으나 이슬람은 살아있다며 새 지도자인 칼리프가 되었다. Abu Bakr 이후 세력을 넓힌 이슬람은 제국화되었다. 이슬람 제국 칼리프들은 티그리스강 근처의 바그다드를 새로운 도시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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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1-08 09: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h 17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화가님...

듣기만 3챕터 하고 안 읽었더니 들은 것도 다 까먹어 가네요. 저도 이번주엔 시작을 ^^!

거리의화가 2024-01-08 16:27   좋아요 1 | URL
ㅋㅋ 초반에 매일 읽었는데 며칠 놓쳐서 어제 좀 바짝 읽었습니다^^ 까먹는 건 당연한 것 같고요. 저는 음원 다운로드만 해놓고 아직 듣지는 못했습니다. 집에 가서 그 작업부터 해야겠네요ㅋㅋ 수하 님 화이팅!

미미 2024-01-08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화가님! 그럼 이번이 재독이시군요. 부럽...ㅋㅋㅋ
이번 책도 시작부터 흥미진진해요!! 화이팅!!ㅋㅋㅋ

거리의화가 2024-01-08 16:27   좋아요 1 | URL
ㅋㅋ 재독이라고 하기에 민망한데요. 밑줄 그어진 것을 보고 읽은 것을 알다니ㅠㅠ
이번 책도 재미나게 읽어나가보겠습니다. 미미 님도 화이팅!
 

5장 일본 역사문제의 구조와 동아시아 국제질서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일본인에게도전쟁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전쟁에 직접 책임이 있는 세대가 아닌 전후 세대라 하더라도, 일본인은 그들이 속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공동체 단위의 연속성에 의해서 이전 세대의 물질적·문화적 유산과 함께 부채도 상속받는다. 전후 세대가 누리는 일본의 부(富)의 상당 부분이 전후세대 자신의 창조적 노력에 의한 결과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조차전쟁 전의 유산을 기본으로 이를 개조하거나 변용하면서 형성된 것이지 이러한 유산과 관계없이 전쟁 후에 별천지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쟁세대가 남긴 책임도 당연히 상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의 유산상속의 경우에는 상속을 포기함으로써 부채 반환 의무를 벗어날 수 있지만, 일본인으로서앞 세대의 육체적·사회적 유산 상속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전쟁책임만을 상속하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국가·민족에 소속하는 구성원으로서 세계 인류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국가와 민족이 집 - P285

단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을 분담할 의무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의 독립이강하면 강할수록, 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에나가 사부로는 이 말 끝에 다음과 같은 각주를 붙여놓았다. "다만 한가지, 개인에게 있어서 국가·민족의 일원이라는 무게가 전쟁 전에 비해 현저하게 저하되고,
세계 · 인류의 일원이라는 무게가 더 높아짐과 동시에, 일본국 헌법에 국적이탈의 자유라는 선구적인 인권보장 규정이 있는 것처럼, 국적의 이동이나 소속 민족의 변경이 가능하게 된 세계사적 정황에 대해서 말해두고 싶다. 패전 전후에일본군 점령지역 주민들 사이에 남아 그 민족사회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돌아오지 않았던 군인, 군속, 재류일본인이 상당수 있었다. 전후세대에도 어떠한 기회에 이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존재하고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인으로서 태어났으면서도 일본인이 아닌 타민족의 일원으로 변신한사람들에 대해서는 전쟁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나가 사부로, 현명철 옮김, 『전쟁책임, 논형, 2005, 322쪽). - P286

20세기 전반기 유럽 안에서 유럽국가들 상호 간에 행사된 폭력이 같은 기간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폭력에 비해 월등하게 컸음에도불구하고 전후에 잔존하는 역사문제는 유럽이 아닌 동아시아에서훨씬 심각하다. 결국 역사문제는 폭력의 크기가 아닌 폭력의 맥락성(contextuality)의 문제다. 그 맥락의 핵심은 가해국으로 지목된 사회와 그 이웃 사회들과의 관계를 포함한 지역질서의 성격에 있다. - P291

1차 대전 후에 이미 제국체제가 해체된 유럽에서 1930년대 말 시작되는 독일의 침략전쟁은 유럽의 다른 사회들에 대한 식민지배와중첩되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전전의 동아시아는 제국체제로서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적 지배라는 상처 위에 침략전쟁과 제노사이드의 범죄가 중첩되기에 이른다.
전후 일본의 국가와 사회가 짊어지게 된 ‘역사문제‘는 1945년 8월패망하기까지 제국일본이 20세기 전반기에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다른 사회들에게 범한 것으로 인식된 범죄적 행위들로 인한 것이다. - P295

1945년 8월에는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네 나라가 ‘런던협정‘(London Agreement)을 체결해 전 - P299

범재판을 위한 ‘국제군사법정‘(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구성에 합의한다. 이 협정은 부속합의문으로 「군사법정 헌장」을 담았다.
전범재판 법정의 구성과 기본 절차를 규정한 이 헌장은 제6조에서
"이 법정은 유럽 추축국가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으로서 또는 조직의구성원으로서 다음 세 가지 범죄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저지른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할 권한을 갖는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평화에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 전쟁범죄(war crimes), 그리고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였다. 이 헌장은 그와 관련된 모든행위들에 대해 ‘개인적 책임‘ (individual responsibility)을 물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 P300

이들 지방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5,700명 가운데는 타이완인과 조선인이 다수 섞여 있었다. 타이완인은 173명의 유죄판결자 가운데 26명이 사형, 조선인은 유죄판결을 받은 148명 가운데 23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부분은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동원된 군속들이었다. 우쓰미 아이코가 파악한 A급을 포함한 사형자는955명인데, 그 가운데 식민지인은 49명으로 5퍼센트에 달했다. 이에비해 전쟁 중 악명이 높았던 일본 헌병은 총수가 3만 6,000여 명에달했지만, 이들 가운데 전범으로 유죄를 받은 인원은 1,534명에 불과했다. 이런 점들을 주목하면서, 우쓰미 아이코는 일본의 전쟁책임이상당부분 식민지인에게 전가되었다고 비판한다. - P306

다우어에 따르면, 1947년 6월 시점스가모 형무소에는 전범 혐의자 50명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도쿄 재판이 끝날 무렵인 1948년 12월엔 19명만 남았다. 그들 가운데는 일본 우익의 거물들인 고다마 요시오(児玉營士夫)와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 그리고 만주국의 ‘경제적 짜르‘로 불리며 수천 수만 명의 중국인을 노예적인 강제노동으로 착취한 혐의를 받고 있던 기시노부스케(岸信介)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8년 12월 23일 7명의A급 전범들이 처형된 다음 날인 12월 24일, 스가모 형무소의 나머지전범 혐의자 19명은 모두 석방되었다. ‘증거 부족‘이 이유였다. 이미 재판을 받아 종신형이나 7년 금고형에 처해진 18명을 제외하고,
아직 재판을 받지 않은 A급 전범 혐의를 받고 있던 자들을 모두 방면함으로써 미국은 일본에서의 역사 청산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선언한 것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미국이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에대해서는 일본 자신에 의한 사법적 역사 청산 역시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 P309

미국이 다른 연합국들과 일본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의론과 무관하게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제하고 천황제를 상징적인 차원에서나마 존치시킬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하고 있었던 당시 국제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일본 사회는 심지어 사회당까지도 천황제를 상징적 형태로 유지할 것을 결정했을 정도로 전전과의 역사적 단절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었다. 미 점령군 사령부는 그러한 일본과의 화해에 기초해 향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일본 사회 내부로부터의 협력과 동맹을 구하고자 했다. 이런국제적 조건 아래서 일본은 미국에 의한 단독점령의 혜택을 봄으로써 독일처럼 분단되는 불행을 겪지 않고 정치체의 통일성을 유지할수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선택으로 천황의 전쟁책임 면제와 제위의 지속을 보장받았다. 이로써 전전과 전후의 역사적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 P317

가해국 사회의 정치권력에 전전과 전후 불연속성(단절성)이 뚜렷A
할수록 역사반성의 의지와 표현은 실질적이며, 따라서 역사문제 해소가 효과적으로 진척될 수 있다. 반면에 가해국 정치권력에 전전과전후 연속성이 강할수록 역사반성의 의지와 표현은 미약해진다. 그만큼 역사문제는 지속성을 띠게 된다. 그러한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대한 조건은 가해국의 전후 정치권력 재편성 과
‘정에 ‘승전국‘이라는 외부적 요인의 개입 양상이었다. 전전 정치체제의 해체와 지배엘리트의 전면적 교체 여부는 일차적으로 승전국내지 피해국가들이 전후 독일과 일본의 전시 정치제도와 지배엘리트를 해체하는 과정에 얼마나 실질적으로 참여해 철저하게 관철했는지가 결정했다. - P318

A급 전범 히로타 고키의 전기 작가에 따르면, 맥아더 사령부(SCAP, Supreme Commander of Allied Powers)는 전범들의 유해를 보존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했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IMTFE)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스가모 형무소에서 처형된 자들의 일부 유해는 194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수습되어 훗날 야스쿠니신사에 안장할 목적으로 보존된다." 일본 정부가 묘지를 확인할수 있는 처형된 전범들의 유해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1950년대 중엽이었다. - P323

의한 것은 1954년이었다. 실제로 도쿄재판 이외의 다른 각국 전범재판에서 처벌받은 전범들의 유해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기 시작한것은 1960년대였으며, 도쿄재판에 의해 처형된 전범들의 유해가 이신사에 합사된 것은 1978년이었다.

야스쿠니신사가 제사 지내는 "순국영령"(殉國英靈)은 메이지유신에서 "지나사변"까지의 전몰자 33만 2,604주(柱)와 "대동아전쟁"
전몰자 213만 3,823주를 가리킨다. 1978년 14명의 A급 전범들의유해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후,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수상 재임 1982년 11월~1987년 11월)가 일본 수상의 신분으로 처음 이 신사에 참배했다. 나중에 상술하겠지만 탈냉전기에는 수상의 신사참배가 더 빈번해진다. - P324

독일 사법부의 나치범죄 처벌시효는 당시 형법상 범죄 처벌시효가 20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1965년 5월 종료 예정이었다. 나치범죄에 대한 사법적 청산 내지 과거사 청산 작업은 그로 인해 중 - P328

단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었다. 독일 사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격렬한 나치범죄 처벌시효 논쟁을 벌였다. 독일은 결국1965년 시효를 4년 연장했다. 1969년 다시 10년을 연장한다. 그 10년후인 1979년에는 나치의 살인죄에 대해 시효 자체를 폐기해 "나치범죄자 처벌에서 시효문제를 완전히 해결" 했다 - P329

동아시아에서는 피해자로서의 역사인식을 공유한 정치공동체들은 모두 분열된 채로 각각 이질적인 초국적 이념공동체에 편입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리버럴 자본주의(liberalcapitalism)의 초국적 이념공동체를 아시아에서 표상하는 모델하우스로 기능했다. 이 상황이 전후 동아시아질서에 미친 결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P336

첫째, 가해자 정치공동체의 통일된 역사의식은 그것이 새롭게 속- 초국적 이념공동체에 의해 보호받았다. 반면에 대분단체제 기축관계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한 중국대륙은 다른 초국적 이념공동체에속했다. 이로써 전후 동아시아에서는 기축관계 사회들 간 이념적 타자(他者)와 역사인식의 타자가 일치했다.
둘째, 피해자 정치공동체들 내부의 이념적 분열로 인해 이들 사회에서 과거 제국체제의 역사문제는 정치적·외교적 투쟁과 지적 담론의 무대에서 부차화되었다. 이것은 역사문제의 해소가 아닌 ‘응결된지속‘을 뜻했다. 이념적 타자화가 모든 정치적·지적 담론을 우선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에 역사 담론도 억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셋째, 동아시아에서 역사인식의 타자화 문제는 냉전기의 담론에서 부차화되었을 뿐, 이념적 타자화와 일치했고, 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의 지정학적 타자화와도 또한 일치했다. 이렇게 삼중으로 결합된타자화 사이의 상호유지적 상호작용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본질적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 P337

1996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발족한다. 1997년 자민당 내 의원연맹은 난징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책자를 발간하는데 나중에 수상이 되는 아베 신조와 그의 정권에서 문부과학상을 맡게 되는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이 그 작업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1999년엔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법」을 제정해 과거 군국주의일본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히노마루(日)와 기미가요(君)를 각각 일본의 국기와 국가로 법제화한다. 그 연장선에서 2006년엔
‘애국심 교육‘을 담은 「교육기본법」 개정이 진행되었다. - P338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로 기능하는, ‘일본의역사문제‘로 상징되는 동아시아질서 안의 역사심리적 간극을 해소해나가는 것이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인 모두의 절실한 숙제라위
는 점은 누구라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는 질서의 전체 구조의 핵심 요소이자 그 전체를 감싸는 정신적폐쇄회로라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한 역사문제에 그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폐쇄회로를 해체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한 전제는 그것의 현실적이며 논리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정신적 폐쇄회로는 두 가지의 딜레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unrepentant Japan)이라는 문제의 - P348

구조적 조건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분명 일본이라는 특정 사회의역사적 자기성찰 능력의 미성숙을 표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사회의 반성적 역사의식의 미성숙이 미일동맹의 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속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반성을 거부하는 일본‘과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외부 압력이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자체의 지속성에 던지는 문제다.
현재와 같이 동아시아 다른 사회들의국가권력이 주체가 되어 일본에 대해 행사하는 정치외교적 압박 위주의 대화 방식은 대분단체제를 해체시키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지속을 보장할 위험성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 P349

정신적 폐쇄회로를 뚫어낼 열쇠의 단초는 일본 내부에 존재하
는 평화 지향의 시민정신의 존재이며, 그러한 일본 내면의 힘과 지혜롭게 소통할 수 있는 동아시아 다른 사회들의 능력 여하일 것이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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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 방콕, 하노이부터 치앙라이, 덴파사르까지 13개 도시로 떠나는 역사기행 도시로 보는 시리즈
신윤환 외 지음 / 사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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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는 현재 11개국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영역은 상당히 넓다. 도시국가인 상가포르와 브루나이를 제외하면 넓지 않은 나라가 없다. 그에 비하면 인구는 적은 편이다. 그래서 동남아시아는 도시가 중심이 되어 발달했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오랜 역사 동안 중요한 지역에서 거점이 되는 도시가 사실상 나라의 명운을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는 오늘날까지 중요한 관광 명소가 되거나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다른 관광지로 연결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동남아시아 도시들이 중요한 이유다. - P6


얼마 전 아시아사를 읽고 나자 동남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동남아시아사로 굵직한 책을 갖고 있지만 그 책을 읽기 전 징검다리로 입문할 만한 책이 무엇이 있을까 고르다 선택한 것이 이 시리즈다. 마침 2권까지 나와 있었고 평도 나쁘지 않아 보여 도서관에 가서 빌려와 읽게 되었다. 


동남아시아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물과 친하지 않고 해산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휴양지 느낌이 강해서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먹고 노는 관광객으로서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남아시아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근현대 시기를 거치며 많은 부침을 겪었기 때문에 도시가 그야말로 역사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는 도시를 위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관광객으로서 접근성도 좋으면서도 역사학도나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공부할 거리가 많은 곳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그것을 느꼈기에 값진 시간이었다.


5명의 학자들이 7개의 나라에서 고른 13개의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학자마다 다른 국가와 전공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이야기의 스타일이 다른 것이 꽤나 재미있었다. 

태국 현대사를 전공자가 방콕, 치앙라이, 폰사완의 민주화와 민족 갈등, 전쟁 경험을 통해 태국과 라오스의 아픈 현대사를 들려준다. 특히 소수민족과 국경, 그 각각에 대해서, 또 둘 간의 관계에 대해서 포커싱을 맞추어 전달한다.

베트남의 정치, 경제를 전공한 정치학자는 하노이와 호찌민시의 거리와 건축물을 통해 역사를 설명하면서도 베트남의 유적지와 현재를 볼 수 있는 여행 장소를 빠짐없이 소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도네시아 발리를 연구한 인류학자는 덴파샤르, 족자카르타, 수라바야를 소개하는데 지나치게 개발된 자카르타, 발리를 벗어나 현지인의 문화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곳들로서의 매력을 가져서다.

동남아시아 불교 미술을 전공한 미술 사학자는 믈라카, 페낭을 소개하며 일찍부터 외부의 눈에 띄어 식민지가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 그 때문에 다양한 문화의 혼종성을 낳았다고 말한다.

동남아시아 화교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싱가포르, 양곤, 쿠칭을 소개하는데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나는 치앙라이, 폰 사완의 국경 전쟁에 따른 피해와 국경을 오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기억에 남았다. 또 베트남의 하노이와 호찌민을 비교하며 급속도로 개발되고 있는 현재를 주목하기도 했다. 고양이 천국인 쿠칭도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붐비고 지나치게 개발되어 관광화되어버린 자카르타나 발리 대신 현지인들을 느길 수 있는 덴파샤르, 수라바야, 족자카르타는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소망도 생겼다.

믈라카, 페낭은 역사적 가치와 미관만으로 가고 싶은 욕망은 충분하다. 특히 페낭 신학교는 김대건 신부을 비롯한 조선의 신자들이 사제의 서품을 받은 곳이라 특별하게 느껴진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현재 페낭교구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입문하기에 적절한 책인 것 같다. 교양서이기도 하고 대중서이기도 하지만 책의 깊이가 얕지 않아서 좋았다.  


동남아시아 도시들의 탄생 시기는 다양하나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한 것은 식민 지배와 국가 건설 과정에서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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