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autre)의 욕망을 상상하기 때문에 주체는 그 야수적인 고통을 지탱한다. 육중하고도 갑작스런 이질성이 출현한다. 전에는 나의 불투명하고 잊혀졌던 삶 속에 친근하게 존재했던 그 이질성은, 이제는 나와 분리되어서 혐오스러워지고 나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내가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아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 이다. 그 알 수 없는 의미의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무와 환각, 그리고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내가 현실을 인식하려 하면 나는 전멸된다.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은 바로 그런 내 존재의 축, 문화의 도화선, 그곳에 존재한다. - P22
이 하찮고 무의미한 것, 그러나 그들이 바라고 중요하게 생각해서 내게 부과한 사소한 것은 내 창자를 꼬이게 하고, 나를 마치뒤집힌 장갑처럼 만들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내가 죽음을대가로 치르고 타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내‘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맹렬한 구토물과 오열과 더불어 자아를 낳는다. - P23
아브젝트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것 자체가 지정된 한계나 장소나 규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어중간하고 모호한 혼합물인 까닭이다. 아브젝시옹은 도덕을 알면서도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훨씬 더 음흉하고 우회적이며 석연찮은 어떤 것이다. 즉 자신을 숨긴 테러 행위, 미소짓는 증오, 껴안는 대신에 품는 육체에 대한 욕망, 당신을 팔아치우는 채무자, 비수로 나를 찌르는 친구…………. 이런 것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 P25
아브젝트가 주체를 유혹하고는 단숨에 전멸시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주체가 자기 바깥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려는 헛된 시도에 지쳐 자신 속에서 불가능을 발견할 때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불가능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자신이 아브젝트와 다름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고, 아브젝트야말로 자기 존재 자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게다가 주체가겨냥한 모든 대상들의 존거가 최초의 상실에 단초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의 주체의 경험에서 그 절정의 형태를 가질 것이다. 사실 존재.의미· 언어, 그리고 욕망을 가능케 하는 결핍을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자신의 아브젝시옹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 P26
억압의 개념에 관해 프로이트는 신경증에는 부인의 개념을, 정신병에는 기각(배척)의 개념을 주장했다. 이 두 억압의 유형 사이에서 드러나는 불균형은 부정이 대상에 관련되어 있는 반면, 배척은 욕망 그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프로이트의직계인 라캉은 그것을 ‘아버지의 이름의 배척‘ 이라고 해석하였다.)
아브젝트의 상태 속에서 적어도 승화라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마치 신경증에서의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처럼, 아브젝트에서는 ‘나‘와 ‘타자‘ ‘안‘과 ‘밖‘의 대립이 존재한다. ‘의식‘ 과 ‘무의식‘ 사이의 대립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 P29
만약 내가 무언가에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은 무언가 특정한 사물의 형상으로 내게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법칙이나 관계항, 나를 지배하고 조건짓는 구조라는 틀 속에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나의 육체를 위해 법칙을 만드는 이 명령, 이 시선, 이 목소리, 이 몸짓은 정서를 만들어 내고 야기시키기는 하지만 아직 기호가 아니다. 나는 내게 있어 더 이상은 동화될 수 없는 세상에서 기호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순수한 상실 속에서 그것을 펼쳐 보인다. 명확히 하면 나는 다른 누구일 뿐이다. 자아의, 대상들의, 기호들의 출현에 있어서의 모방의 논리. 그러나 내가 ‘나‘를찾으려 하거나 잃어버리거나 혹은 유희할 때 나는 이질적이 된다. - P33
후에 주체와 그 대상이 될 것으로부터 아브젝트를 떼어 놓는 공간이 이 ‘타자‘에 의해 정해진다면, 그것은 이른바 ‘1차적’ (원초적)억압이 자아와 그 대상, 혹은 재현들의 출현에 선행하여 작용하기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2차적‘ (본래적) 억압에 종속하는 것들이나타나는데, 그것은 이미 표지가 된 근거 위에 자리잡고 있는 후천적인 것으로서 불가사의한 공포나 강박관념 · 정신병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보다 일반화시켜서 상상해볼 때, 그 상태란 아브젝시옹의 형태를 가진 인간 세상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 P34
증상 속에서라면 아브젝트는 나를 침입하고, 나는 아브젝트가 된다. 그러나 승화 과정을통하면 내가 아브젝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아브젝트는 숭고함의 경계를 이룬다. 아브젝트와 숭고함은 과정이 같지는 않지만, 그존재 자체가 똑같은 언어와 주체에 의존하고 있다. - P35
누군가가 되기 전의 ‘나‘는 이차적인 과정을 통해 획득된 내가 아닌 분리되고 버려지고 아브젝트한 무엇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의 전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때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과 공존하는 동시에 영원히 그것을 약화 - P37
시킨다. 내가 비치고 나를 알아보게 하는 적어도 가장 아름다운영상은, 영원한 감시자인 억압이 느슨해졌을 때 그 영상을 균열시키는 아브젝시옹위에 나타나는 것이다. - P38
내가 나의 이미지를 기호로 인식하거나 나를 의미화시키려고 본래의 나로부터 변형시키는 바로 그 순간부터 또 다른 체계가 성립 - P38
이때부터 기호는 코라와 코라의 영원한 회귀를 억압하는 것이다. 오로지 욕망만이 이 ‘기원적인‘ 싸움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자아를 또 다른 주체로 쫓아보내고, 더 이상은나르키소스적인 자아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은 타자의 뒤로 처져서 퇴행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스스로생각하고 보존하며 자기 만족하는 장소를 향해서만 돌아올 수 있다. 사실상 이 나르시시즘은 결코 평화로운 샘물에 비친 완벽한 그리스 남신상만은 아니다. 바닥을 뒤흔드는 충동의 갈등이 물을 흐려 놓고, 주어진 기호 체계를 위해 그것에 통합되지 않는 모든 아브젝시옹을 끌어당긴다. - P39
아브젝트는 도착성과 친척뻘이다. 아브젝트는 도착적인데, 내가느끼는 아브젝시옹의 감정은 초자아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금지나 규칙·법을 무시하거나 파기하는차원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왜곡시키고 곡해하고 부패시킬 뿐이다. 즉 그것들을 더 잘 부인하기 위해 실컷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살려 주겠다는 명분으로 죽이는 전제 군주이기 때문이고, 죽음을 추종하면서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가라앉히는, 말하자면 암거래를 하는 유전학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연을 토로하는 척하면서 나르키소스적인 힘을 재정비하는 파렴치한 정신분석학자이기도 하다. 아브젝트란 결국 예술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예술가인 것이다……… - P40
아브젝시옹은 모든 종교의 구성물과 함께 한다. 그리고 그 구성물들이 와해되었을 때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져 다시 나타난다. 우리는 아브젝시옹의 여러 구성물들이 성스러운 것을 규정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 P42
벌려진 상처를 통과하는것은 입문 의식이 아니라, 차라리 ‘틈‘이나 ‘불완전한 단일성‘ 같은 근본적인 결핍을 이질적이고 육체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언어적인 시련이다. 포기한다는 조건부로만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말을욕망하는, 육체의 상처를 벌리고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과 같이 상처입고 불안정한 주체 속에서 모든 현상은 그것이 시니피앙이건 인간이건간에 아브젝시옹이라는 존재 속에서 나타난다. 어떤불가능한 카타르시스와 바뀐 것일까? 프로이트는 처음의 불완전한 카타르시스란 용어를 후에 엄밀히 규정함으로써 심리 치료법으로 사용하였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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