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일본 역사문제의 구조와 동아시아 국제질서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일본인에게도전쟁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전쟁에 직접 책임이 있는 세대가 아닌 전후 세대라 하더라도, 일본인은 그들이 속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공동체 단위의 연속성에 의해서 이전 세대의 물질적·문화적 유산과 함께 부채도 상속받는다. 전후 세대가 누리는 일본의 부(富)의 상당 부분이 전후세대 자신의 창조적 노력에 의한 결과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조차전쟁 전의 유산을 기본으로 이를 개조하거나 변용하면서 형성된 것이지 이러한 유산과 관계없이 전쟁 후에 별천지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쟁세대가 남긴 책임도 당연히 상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의 유산상속의 경우에는 상속을 포기함으로써 부채 반환 의무를 벗어날 수 있지만, 일본인으로서앞 세대의 육체적·사회적 유산 상속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전쟁책임만을 상속하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국가·민족에 소속하는 구성원으로서 세계 인류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국가와 민족이 집 - P285

단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을 분담할 의무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의 독립이강하면 강할수록, 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에나가 사부로는 이 말 끝에 다음과 같은 각주를 붙여놓았다. "다만 한가지, 개인에게 있어서 국가·민족의 일원이라는 무게가 전쟁 전에 비해 현저하게 저하되고,
세계 · 인류의 일원이라는 무게가 더 높아짐과 동시에, 일본국 헌법에 국적이탈의 자유라는 선구적인 인권보장 규정이 있는 것처럼, 국적의 이동이나 소속 민족의 변경이 가능하게 된 세계사적 정황에 대해서 말해두고 싶다. 패전 전후에일본군 점령지역 주민들 사이에 남아 그 민족사회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돌아오지 않았던 군인, 군속, 재류일본인이 상당수 있었다. 전후세대에도 어떠한 기회에 이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존재하고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인으로서 태어났으면서도 일본인이 아닌 타민족의 일원으로 변신한사람들에 대해서는 전쟁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나가 사부로, 현명철 옮김, 『전쟁책임, 논형, 2005, 322쪽). - P286

20세기 전반기 유럽 안에서 유럽국가들 상호 간에 행사된 폭력이 같은 기간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폭력에 비해 월등하게 컸음에도불구하고 전후에 잔존하는 역사문제는 유럽이 아닌 동아시아에서훨씬 심각하다. 결국 역사문제는 폭력의 크기가 아닌 폭력의 맥락성(contextuality)의 문제다. 그 맥락의 핵심은 가해국으로 지목된 사회와 그 이웃 사회들과의 관계를 포함한 지역질서의 성격에 있다. - P291

1차 대전 후에 이미 제국체제가 해체된 유럽에서 1930년대 말 시작되는 독일의 침략전쟁은 유럽의 다른 사회들에 대한 식민지배와중첩되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전전의 동아시아는 제국체제로서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적 지배라는 상처 위에 침략전쟁과 제노사이드의 범죄가 중첩되기에 이른다.
전후 일본의 국가와 사회가 짊어지게 된 ‘역사문제‘는 1945년 8월패망하기까지 제국일본이 20세기 전반기에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다른 사회들에게 범한 것으로 인식된 범죄적 행위들로 인한 것이다. - P295

1945년 8월에는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네 나라가 ‘런던협정‘(London Agreement)을 체결해 전 - P299

범재판을 위한 ‘국제군사법정‘(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구성에 합의한다. 이 협정은 부속합의문으로 「군사법정 헌장」을 담았다.
전범재판 법정의 구성과 기본 절차를 규정한 이 헌장은 제6조에서
"이 법정은 유럽 추축국가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으로서 또는 조직의구성원으로서 다음 세 가지 범죄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저지른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할 권한을 갖는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평화에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 전쟁범죄(war crimes), 그리고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였다. 이 헌장은 그와 관련된 모든행위들에 대해 ‘개인적 책임‘ (individual responsibility)을 물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 P300

이들 지방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5,700명 가운데는 타이완인과 조선인이 다수 섞여 있었다. 타이완인은 173명의 유죄판결자 가운데 26명이 사형, 조선인은 유죄판결을 받은 148명 가운데 23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부분은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동원된 군속들이었다. 우쓰미 아이코가 파악한 A급을 포함한 사형자는955명인데, 그 가운데 식민지인은 49명으로 5퍼센트에 달했다. 이에비해 전쟁 중 악명이 높았던 일본 헌병은 총수가 3만 6,000여 명에달했지만, 이들 가운데 전범으로 유죄를 받은 인원은 1,534명에 불과했다. 이런 점들을 주목하면서, 우쓰미 아이코는 일본의 전쟁책임이상당부분 식민지인에게 전가되었다고 비판한다. - P306

다우어에 따르면, 1947년 6월 시점스가모 형무소에는 전범 혐의자 50명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도쿄 재판이 끝날 무렵인 1948년 12월엔 19명만 남았다. 그들 가운데는 일본 우익의 거물들인 고다마 요시오(児玉營士夫)와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 그리고 만주국의 ‘경제적 짜르‘로 불리며 수천 수만 명의 중국인을 노예적인 강제노동으로 착취한 혐의를 받고 있던 기시노부스케(岸信介)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8년 12월 23일 7명의A급 전범들이 처형된 다음 날인 12월 24일, 스가모 형무소의 나머지전범 혐의자 19명은 모두 석방되었다. ‘증거 부족‘이 이유였다. 이미 재판을 받아 종신형이나 7년 금고형에 처해진 18명을 제외하고,
아직 재판을 받지 않은 A급 전범 혐의를 받고 있던 자들을 모두 방면함으로써 미국은 일본에서의 역사 청산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선언한 것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미국이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에대해서는 일본 자신에 의한 사법적 역사 청산 역시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 P309

미국이 다른 연합국들과 일본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의론과 무관하게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제하고 천황제를 상징적인 차원에서나마 존치시킬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하고 있었던 당시 국제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일본 사회는 심지어 사회당까지도 천황제를 상징적 형태로 유지할 것을 결정했을 정도로 전전과의 역사적 단절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었다. 미 점령군 사령부는 그러한 일본과의 화해에 기초해 향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일본 사회 내부로부터의 협력과 동맹을 구하고자 했다. 이런국제적 조건 아래서 일본은 미국에 의한 단독점령의 혜택을 봄으로써 독일처럼 분단되는 불행을 겪지 않고 정치체의 통일성을 유지할수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선택으로 천황의 전쟁책임 면제와 제위의 지속을 보장받았다. 이로써 전전과 전후의 역사적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 P317

가해국 사회의 정치권력에 전전과 전후 불연속성(단절성)이 뚜렷A
할수록 역사반성의 의지와 표현은 실질적이며, 따라서 역사문제 해소가 효과적으로 진척될 수 있다. 반면에 가해국 정치권력에 전전과전후 연속성이 강할수록 역사반성의 의지와 표현은 미약해진다. 그만큼 역사문제는 지속성을 띠게 된다. 그러한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대한 조건은 가해국의 전후 정치권력 재편성 과
‘정에 ‘승전국‘이라는 외부적 요인의 개입 양상이었다. 전전 정치체제의 해체와 지배엘리트의 전면적 교체 여부는 일차적으로 승전국내지 피해국가들이 전후 독일과 일본의 전시 정치제도와 지배엘리트를 해체하는 과정에 얼마나 실질적으로 참여해 철저하게 관철했는지가 결정했다. - P318

A급 전범 히로타 고키의 전기 작가에 따르면, 맥아더 사령부(SCAP, Supreme Commander of Allied Powers)는 전범들의 유해를 보존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했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IMTFE)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스가모 형무소에서 처형된 자들의 일부 유해는 194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수습되어 훗날 야스쿠니신사에 안장할 목적으로 보존된다." 일본 정부가 묘지를 확인할수 있는 처형된 전범들의 유해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1950년대 중엽이었다. - P323

의한 것은 1954년이었다. 실제로 도쿄재판 이외의 다른 각국 전범재판에서 처벌받은 전범들의 유해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기 시작한것은 1960년대였으며, 도쿄재판에 의해 처형된 전범들의 유해가 이신사에 합사된 것은 1978년이었다.

야스쿠니신사가 제사 지내는 "순국영령"(殉國英靈)은 메이지유신에서 "지나사변"까지의 전몰자 33만 2,604주(柱)와 "대동아전쟁"
전몰자 213만 3,823주를 가리킨다. 1978년 14명의 A급 전범들의유해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후,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수상 재임 1982년 11월~1987년 11월)가 일본 수상의 신분으로 처음 이 신사에 참배했다. 나중에 상술하겠지만 탈냉전기에는 수상의 신사참배가 더 빈번해진다. - P324

독일 사법부의 나치범죄 처벌시효는 당시 형법상 범죄 처벌시효가 20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1965년 5월 종료 예정이었다. 나치범죄에 대한 사법적 청산 내지 과거사 청산 작업은 그로 인해 중 - P328

단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었다. 독일 사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격렬한 나치범죄 처벌시효 논쟁을 벌였다. 독일은 결국1965년 시효를 4년 연장했다. 1969년 다시 10년을 연장한다. 그 10년후인 1979년에는 나치의 살인죄에 대해 시효 자체를 폐기해 "나치범죄자 처벌에서 시효문제를 완전히 해결" 했다 - P329

동아시아에서는 피해자로서의 역사인식을 공유한 정치공동체들은 모두 분열된 채로 각각 이질적인 초국적 이념공동체에 편입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리버럴 자본주의(liberalcapitalism)의 초국적 이념공동체를 아시아에서 표상하는 모델하우스로 기능했다. 이 상황이 전후 동아시아질서에 미친 결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P336

첫째, 가해자 정치공동체의 통일된 역사의식은 그것이 새롭게 속- 초국적 이념공동체에 의해 보호받았다. 반면에 대분단체제 기축관계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한 중국대륙은 다른 초국적 이념공동체에속했다. 이로써 전후 동아시아에서는 기축관계 사회들 간 이념적 타자(他者)와 역사인식의 타자가 일치했다.
둘째, 피해자 정치공동체들 내부의 이념적 분열로 인해 이들 사회에서 과거 제국체제의 역사문제는 정치적·외교적 투쟁과 지적 담론의 무대에서 부차화되었다. 이것은 역사문제의 해소가 아닌 ‘응결된지속‘을 뜻했다. 이념적 타자화가 모든 정치적·지적 담론을 우선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에 역사 담론도 억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셋째, 동아시아에서 역사인식의 타자화 문제는 냉전기의 담론에서 부차화되었을 뿐, 이념적 타자화와 일치했고, 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의 지정학적 타자화와도 또한 일치했다. 이렇게 삼중으로 결합된타자화 사이의 상호유지적 상호작용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본질적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 P337

1996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발족한다. 1997년 자민당 내 의원연맹은 난징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책자를 발간하는데 나중에 수상이 되는 아베 신조와 그의 정권에서 문부과학상을 맡게 되는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이 그 작업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1999년엔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법」을 제정해 과거 군국주의일본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히노마루(日)와 기미가요(君)를 각각 일본의 국기와 국가로 법제화한다. 그 연장선에서 2006년엔
‘애국심 교육‘을 담은 「교육기본법」 개정이 진행되었다. - P338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로 기능하는, ‘일본의역사문제‘로 상징되는 동아시아질서 안의 역사심리적 간극을 해소해나가는 것이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인 모두의 절실한 숙제라위
는 점은 누구라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는 질서의 전체 구조의 핵심 요소이자 그 전체를 감싸는 정신적폐쇄회로라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한 역사문제에 그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폐쇄회로를 해체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한 전제는 그것의 현실적이며 논리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정신적 폐쇄회로는 두 가지의 딜레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unrepentant Japan)이라는 문제의 - P348

구조적 조건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분명 일본이라는 특정 사회의역사적 자기성찰 능력의 미성숙을 표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사회의 반성적 역사의식의 미성숙이 미일동맹의 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속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반성을 거부하는 일본‘과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외부 압력이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자체의 지속성에 던지는 문제다.
현재와 같이 동아시아 다른 사회들의국가권력이 주체가 되어 일본에 대해 행사하는 정치외교적 압박 위주의 대화 방식은 대분단체제를 해체시키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지속을 보장할 위험성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 P349

정신적 폐쇄회로를 뚫어낼 열쇠의 단초는 일본 내부에 존재하
는 평화 지향의 시민정신의 존재이며, 그러한 일본 내면의 힘과 지혜롭게 소통할 수 있는 동아시아 다른 사회들의 능력 여하일 것이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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