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不淨)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흐름으로나누어진다. 첫번째는 로버트슨 스미스(《셈족 종교에 관한 강의》, 1889)의 해석으로서, 부정이란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성서》의 부정을 운명적인 의지에 복종하는 유대 유일 신앙에 나타나는 내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바루크 A. 레빈‘에 따른 또 하나의 해석은 부정은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의 지표이다. 그에게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악의 정신의 자율적인 힘과 같은 것이다. - P143

인류학자 더글러스는 관찰 대상이 되는 사회를 연구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사회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반면 종교사가 노이스너는,히브리 유일 신앙의 기념비적인 혁명으로 만들어진 율법으로 정/부정의 대립을 제시하고, 이 율법은 자체로도 충분히 고립된 것으로 축복받은 질서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가-기호학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의식적인 부정을 어느 선까지 분석할 수 있을까 아는 데 있다. 이때 종교사가(노이스너)는 재빨리 멈추어 선다. 반면 인류학자(더글러스)는, 자연의
‘혐오스러움‘ 에 바탕을 둔 것은 문화적으로 부정하다는 사실 앞에 그 둘을 연계시킴으로써 전진한다. 그 자체로 ‘혐오스럽다는 것은, 주어진 상징 체계라는 고유한 계급화의 질서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해서 제기된다. 왜 상징 체계에는 계급 체계가 있는데 다른 것에는 없는가? - P145

정/부정의 배치는 유대교가 스스로를 정립하기 위해 이교도와 그들의 모성 숭배적인제사 의식에 대항하여 치러야 했던 치열한 싸움의 증언이다. 정/부정의 배치는 또한 각 개인의 생활 속에서도 주체가 스스로 분리하는 투쟁을 종결한다. 말하자면 말하는 주체나 법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따라 내내 벌여야 하는 투쟁을종결짓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를 구획짓는 정/부정의 대립이라는 ‘물질적인‘ 의미소는 원초의 물질적인 관습을 다시 취하는 신성한 금지의 은유뿐만 아니라, 동일성이라는 상징적법칙의 탄생에 대한 주체의 경제(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한 것이다. - P148

《성서》에서 말의 논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살생치 못하도록 금하는 것과 공외연적인 인간과 신의 차이에 관한 논리에 근거한다. J. 솔레르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성서》에서의 말의 논리는 <신명기> 제14장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이 육식 동물을 먹지 않도록 하는 논리의 장을 구축하는 것과 관련된다. 육식 생활은 하지만 육식 동물이나 맹금류와 동화되지 않고, 살생 행위도 예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 가지의 판별 기준만이 남게 된다. 즉 새김질하는 초식 동물만을 먹는 것이다. - P153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아이를 낳으면, "제8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陽皮)를 벨 것이다."(<레위기> 제12장 3절)이 할례 의식은부정을 분리시키는 동시에,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불결함을분리하는 수단인 것이다. 할례는 희생 제의를 대신하는데, 그것은단순히 교체된다라고만은 할 수 없고 희생 제의와 동등한 것, 바꾸어 말하면 신과의 계약 증거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할례는 음식물에 대한 터부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은 분리를 각인하는 동시에, 그 속에 분리의 흔적이 나타나는 희생 제의를 절약한다. - P155

어머니의 육체나 출산을 상기시키는 것은, 어머니 내부의 물질들이 육체를 분리시키려는 난폭한 축출 행위로 인해 끌어내어진, 태어나는 육체에 다름 아닌 출생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그런데 피부에는이 물질들의 흔적이 계속되는 것 같다. 그 박해하고 위협하는 물질의 흔적들을 가로질러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않고 피해만을주며 조여 오는 태반 속에서 태어난 육체의 환상은, 문둥병의 현실과 만난다. 한 발자국 더, 우리는 그녀와 더불어 전(前)오이디푸스기의 동일화 과정이 참을 수 없는 것이 되는 어머니를 다시 한번 힘차게 밀어낸다. - P157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은, 상징체계라는 조건이나 계약에 대해서 분리될 수 없는 내재성이다. 따라서 이전의 텍스트에서의 음식물에 대한 혐오를 이후의 예언자들이 변화시켰다고 해도,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이 ‘사악한 권력의현실 형태‘21)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분리하는 요소를 지닌 신성한 성전과 말씀 자체가, 예언자들에게는 고유함이나 자기 동일성과 뗄래야 뗄 수 없이 병행하는 ㅡ 내버릴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부정인 것이다. - P164

상징적이거나 또는 사회적인 계약으로서의희생 제의에 대한 개념을 추월하라고 꼬드기는 것은, 바로 혐오의체계를 강조하는 《성서》 자체라는 점이다. "살생하지 말라"가 아니라 금지나 계율을 준수하지 않으면 어떠한 희생(犧牲)도 드릴 수없는 것이다. 〈레위기 > 제11장은 음식물에 관한 모든 터부의 규칙을 통해 이같은 견해를 보다 분명히 한다. 그 결과 성스러움과 정결의 법칙에 따라야만 희생 제의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법칙이란 무엇인가? 속인인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희생 제의를 제약하는 것이다. 법칙이란, 말하자면 죽이려는 욕망을 가장한 것, 하나의 분류 체계에 불과하다. - P1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은 깊고 추위는 심한데 폐하께서는 어찌해서 나오셨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한 개의 탑(榻, 평상) 이외에는 모두가 다른 사람의 집이니 그러므로 와서 경을 보는 것이요."41

조보가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천하를 적다고 하십니까? 남북으로 정벌을 하시려면 지금이 그때입니다. 원컨대 향하고자 계산하신 곳을 들려주십시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태원(太原, 산서성 태원)을 빼앗고 싶다."

조보가 잠자코 오래 있다가 말하였다.

"신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황제가 그 연고를 물었다.

조보가 말하였다.

"태원은 서북 두 쪽에 해당하니 한 번에 떨어뜨리게 하려면 변경의 걱정거리는 우리가 홀로 감당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잠시 보류하지 않으십니까?42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없앤다면 저 탄환만한 작은 검은 점43은 장차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황제는 일찍이 북한의 경계에 있는 첩자(諜者)를 통하여 북한의 주군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집안과 주씨(周氏, 후주)는 대대로 원수이어서 의당 굽혀서는 안 되었소. 지금 나와 그대는 틈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쪽 한쪽을 곤란하게 한다는 말이요? 만약에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에 뜻을 가지고 있다면 의당 태행으로 내려와서 승부를 결정지읍시다."

북한의 주군이 첩자를 파견하여 복명(復命)하여 말하였다.

"하동지역의 토지와 갑병은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의 10분의 1도 감당하기 어렵지만 구구하게 이곳을 지키는 것은 대개 한(漢)나라 황실이 혈식을 받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황제는 그의 말을 애달프게 생각하고 첩자에게 말하였다.

"나를 위하여 유균(劉鈞, 926~968, 북한의 睿宗)에게 말하여 너에게 한 길을 열어주어 살게 하겠다고 하시오."

그러므로 그의 세대에는 대군(大軍)을 가지고 북벌하지 아니하였다.

북한의 유계업·풍진가(馮進珂)가 단백곡에 주둔하고, 위대(衛隊)지휘사 진정산(陳廷山)을 파견하여 수백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와서 정탐하며 순찰하였다. 마침 이계훈 등의 전군(前軍)이 도착하였는데, 진정산은 즉각 부하를 가지고 항복하였다. 유계업·풍진가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인 것을 알고 역시 달아나서 진양(晉陽)으로 갔는데, 북한의 주군이 화가 나서 그들의 병권을 빼앗았다. 이계훈 등은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잠깐 사이에 쌓아 놓은 풀이 성 안에서부터 바람에 날려 나와서 곧바로 수구(水口)를 막고 그치니 송나라 군사들의 노(弩)에서 발사하는 화살은 뚫을 수가 없었고, 북한 사람들은 이어서 일을 할 수가 있어서 수구는 드디어 막혔다.

곽무위는 다시 북한의 주군에게 나가서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북한의 주군은 듣지 않았다. 엄인(?人, 환관)인 위덕귀(衛德貴)는 곽무위가 배반한 현상이 분명하니 사면할 수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하여 북한의 주군이 그를 죽여 조리를 돌리자 성 안은 조금 안정되었다.

북한 사람들이 조금 있다가 서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성에서부터 몰래 나와서 공격용 전투도구를 곧 불 지르려 하자 송의 군사들은 그들을 쳐서 달아나게 하고 목을 벤 것이 1만여 급이었다. 밤중에 홀연히 군영 벽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전해졌다.

"북한의 주군이 항복하였다."

태원성이 오래되어도 떨어지지 않으니 동서반도지휘사인 이회충이 무리를 거느리고 이를 공격하였으나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고 나는 화살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

전전지휘사도우후인 조정한이 제반의 위사를 인솔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먼저 올라가서 급히 공격하여 죽을힘을 다하기를 원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훈련된 바여서 한 사람이 백 명을 감당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으니, 그러므로 주액(?腋)으로 대비하면서 휴척(休戚)을 함께 하고 있다. 내가 차라리 태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여도 어찌 차마 너희들을 몰아서 칼끝을 무릅쓰게 할 것이며 반드시 죽을 땅을 밟게 하겠는가!"

무리들이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사류(射柳)란 일종의 활쏘기 기교를 연습하는 놀이인데, 청명절에 시행되는 풍속이다. 이 놀이는 조롱박 속에 비둘기를 넣어서 버드나무에 높이 매달아 놓고 활로 조롱박을 맞추어 조롱박 속에 있는 비둘기가 날게 하는 것으로 비둘기를 높이 날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이다. 그런데 거란족은 비가 오기를 바라는 기우(祈雨)를 위하여 사류활동을 한다. 이때에 먼저 장막을 치고 먼저 돌아가신 황제에게 전(奠)을 드리고 황제, 친왕, 재상이 차례로 사류를 하고 패한 사람이 승리한 사람에게 술을 올린다. 둘째 날에는 천막의 동남쪽에 버드나무를 꽂고 자제들이 사류활동을 하며 자제들이 3일간 사류활동을 하는데 비가 오면 상을 내린다.

이달 기사일(22일)에 회주(懷州, 黑龍江省 鶴崗市)에서 봄 사냥을 하였다. 요주(遼主)는 곰을 쏘아 맞추었는데 시중(侍中)인 소사온(蕭思溫, ? ~970)이 이륵희파(伊勒希巴, 夷?畢)인 아리사(牙?斯) 등과 술을 올리면서 축수하였다.

요주가 술에 취하자 행궁으로 돌아갔는데, 근시(近侍)인 소격(?格)·관인(?人)인 화격(華格)·포인(?人)인 석곤(錫袞, 辛古) 등이 시해하였는데 나이는 39세였고, 묘호를 목종(穆宗)으로 하였다.

경오일(23일)에 소사온과 남원추밀사 고훈(高勳)·비룡사(飛龍使)86 니리(尼?, 女里, 경종의 근신) 등이 세종의 둘째 아들 야율현(耶律賢, 948~982)을 받들고 갑기(甲騎) 1천 명을 인솔하고 말을 달려 행재소로 달려갔다.

야율현이 통곡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권하자 드디어 영구(靈柩) 앞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백관들은 존호를 올려서 천찬(天贊)황제라 하고 크게 사면하고 기원을 고쳐서 보령(保寧)이라고 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말에는 정말 느긋하게 놀았다.

토요일에 궁궐에 놀러가볼까 했었는데 일어나보니 가기 애매한 시간이 되어 있었다. 불금에 술을 꽤나 마시고 자는 바람에… 그놈의 술이 원수야!-_-;

아무튼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읽기 시작한지는 꽤나 지났지만 워낙 분량도 많고 페이지 당 글자 수도 많은 편이라 이제야 다 읽었다. 저자의 이론이 정립해가는 과정을 역추적한다는 생각으로 읽어나가면 된다.
공부도 기본 얼개를 세우고 이에 살을 덧붙여 가면서 심화해나가는 과정이라 여긴다.
한 사람의 이론이 체계화하는 과정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었다. 어떤 분야에서 이런 꾸준한 결과물들을 쌓는 작업이 참으로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갖게도 한다.


<갑골문자>는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1999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중국 사회의 모습을 기자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다. 반미, 반제운동이 일어나던 상하이, 베이징 사회,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서의 모습 등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그리고 밀린 드라마를 보느라 시간을 제법 썼다. 초반에는 진도가 안 나가더니 사건의 동기가 수면 위에 오르자 그 이후는 순삭으로 볼 수 있었다.
학습 교재를 통해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역시 재미가 있어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인데… 아무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그날을 꿈꾼다.

또 산책은 이틀 연속 했다. 날이 별로 춥지 않은 듯했는데 호수는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꽝꽝 얼어 있었다. 토요일 날이 맑길래 셔터를 눌렀다.


 


오늘 아침 <공포의 권력>을 읽었다. 어렵다. 너무 어려워… 읽는 것은 글자, 머리는 물음표가 된다.


오염 의식들은 조각조각 자르고, 표식을 떼어내며, 규칙·범주·사회성을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연루된, 그리고 그것 자체의 절단에 내재하고 있는 어떠한 의미 작용도 가지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거꾸로 자문하게 된다. 과연 모든 글쓰기는 언어가 우리에게 인식되는 단계인 제2단계의 의식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다시 기억하도록 하면서 언어 기호 자체를 가로지르는 이 표식떼기, 즉 오염 의식은 언어 기호의 전(前)조건이 되고 벌써 그것들을 넘쳐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글쓰기란 사실상 고유의 이름 저편에 있는 오랜 권한에 도전하는 주체와 대면하고있다. 이 권한이 내포하는 어머니성은 결코 위대한 작가를 회피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아브젝시옹이라 규정된 것과의 맞대면도 더이상은 피하지 않는다. - P121


그래도 위와 같은 문장에서는 눈이 번쩍 하는 것이 있어서 끝까지 읽어보려고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1-15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포의 권력, 잘 읽어나가봅시다. 화이팅!!


거리의화가 2024-01-15 15:31   좋아요 0 | URL
네. 끝까지 읽어나가보겠습니다^^

건수하 2024-01-15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1장 두 번 읽고 2장 읽는 중... 대충 알겠다 싶은 부분도 있고 알쏭달쏭한 부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4-01-15 15:32   좋아요 1 | URL
저는 1장이 가장 좋았고 2장은 좀 어려웠고요. 3장은 또 2장에 비해서 이해가 더 잘 되고 그러네요. 반복해서 읽으니 역시 더 들어옵니다. 수하님도 화이팅!
 

3장

프로이트는 토템 동물의 자리에 아버지를 가져다 놓는 것은 ‘토테미즘(인간과의 연관성 속에서)의테두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단정한다. 이를테면 터부와 토테미즘"에 성스러움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프로이트의 아버지 살해라는 주제, 구체적으로 《모세와 유일신앙》(1938)에서 개진된 유대교에서의 아버지 살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원시 시대 유목민들의 나이든 추장은 살해를 모의한 아들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아들들은 아버지 살해죄로 붙잡힌다. 그러나 이행위, 즉 아버지 살해는 이른바 양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같은양가 감정으로 인해 아들이 결국 더 이상 자의적 권력이 아닌 실질적 권리로 부성의 권위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부족내의 모든 여자들을 소유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와 동시에 공동 사회의 족외혼이나 성스러움을 구축하는 것이다. - P97

성스러움의 한 면은, 살해 행위와 속죄 행위가 그것이 투사하는 모든 종류의 기제들과 강박관념적인 의식들과 더불어 만들어 내는 사회적 관계 자체이다. 다른 한 면은 안쪽의 좀더 내밀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드러나지도 않는 곳으로, 고대적 이원론에서 본다면 융합이 가능할 듯하면서도 동시에 위협하는 존재인, 취약성과 불안정한 동일성의 불확실한 공간을 향해 선회하는 부분이다. 그와 같은 성스러움의 내면은 주체/대상의 비분리를 향한다. - P99

내적 이미지에 맞추어 외부는 희로애락을 생성한다. 따라서 명명할 수 없는 것은 희로애락의감정에 따라 극복할 수 없는 안팎의 모호성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희로애락을 명명한다는 것은, 즉 구별한다는 것은 언어를 개입시키는 것이고, 이때 언어는 안밖의 분리를 수립하는 모든 다른대립들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을 구별해야 한다. - P103

아버지 살해와는 반대항에 위치하며 언어적 전언과 동일한 시적 언어는, 이름들이 스스로 분리된 것처럼 아버지 살해와 화해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시적 언어란 ‘시작‘을 상징화하려는 시도이자 동시에 터부의 다른 면, 즉 기쁨이나 슬픔을명명하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 P104

나르시시즘은 자아의 존재는 고려하지만 외부 대상은 고려하지 않는다.
한편은다음과 같은 대상의(외부의) 비구조가 자아의 동일성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자아는 자기의 대상과, 즉 타자와 구별되지않고서는 명확하게 자리잡을 수 없는 자아이다. 그래서 최초의 나르시시즘적 자아는 자기의 비대상과의 공간적 양가성(내부/외부의 불확실)과 시각의 모호함(고통/기쁨)으로 인해 나약하며 위협받는 불확실한 존재이다. 다른 한편은, 힘이란 이와 같은 나르시시즘적인 지형학이 정신-신체 의학 속에서 어머니-아이라는 이분법에 의해서도, 어떤 타자에 의해서도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아니면 만약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오래 전부터 언어 속에 잠겨 있다면, 생체심리학적인 전제 조건과 오이디푸스적삼각 구조를 그 자체가 허용하는 미래의 주체 속에서만 언어의 각인을 정립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의 주체가 기표를 활성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허용한 이후인 것이다. - P105

정화 의식에서는 더러운 것을 금하고, 그것을 세속 질서로부터 추방하여 성스러움의 차원에 고정시키는 것이 본질적인강조점이 된다. 따라서 더러움은 오염(밖으로부터 오는 더러움)이되고, 그것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면모를 근간으로 하여 성스러운질서를 세우게 된다. 이후 더러움은 가능한 대상으로부터 배제되어욕망의 대상도 아니며, 분리되고 아브젝트한 아브젝시옹이 된다. - P109

우리는 상징 질서 속에서 분석을 통해 여러 주관성을 확증적인 것으로 포착해야만 한다.

사회 문제란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성질의것인가? 여기에서의 주관적 상징 질서의 영역이란, 사회적 상징 체계가 가지는 심오하고 독창적인 모종의 인과 관계를 구축하지 않는다. 주관적 상징 질서의 영역은 주요 상징 기관인 말하는 주체에게만 효과가 있거나, 혹은 특별히 이득을 준다. 게다가 주어진 사회적 상징성의 유지를 위해 그것을 욕망하게 하는 원동력들을 해명한다. 또 그와 유사한 종류의 문제는 ‘예정 조화‘23) 라거나, 아니면 ‘숭고한 질서‘에 대한 세속적인 응수로서 ‘상징 체계‘를 취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주관적 상징 질서의 영역은 의미 작용의과정중에 가능한 변이체와도 같이, 말하는 존재를 규정하는 단단하고도 유일한 보편성 속에 뿌리박고 있는 듯하다. - P111

인간들이 그 위험에 가담한다 할지라도, 오염이 가져오는 위험은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이념들의 구조에 내재하는‘ 힘이다.
위험이란 어디에서, 또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결국은 상징 질서의 취약성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 - P114

월경수가 성적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면 배설물은? 우리는 항문기의 페니스 역시어린아이의 상상력이 여성 성기에 품은 남근이라는 점을 되새길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의 권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최초의 구순기의 욕구 불만 이후에는 항문괄약근의 조절로부터 체험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언어의 상징성 속에 잠기고부터 인간 존재는 언어 법칙의 분신인 권한을 논리적으로, 그리고연대기적으로도 즉시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상징계(lesymbolique)의 반대편에 자리한 기호계(le sémiotique)라고 부른 이 육체에 대한 최초의 지형도는, 말하자면 그것이 아무리 언어의 전(前)조건이라 해도 의미의 지류임을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상징 질서의 방법을 통한 언어적 기호가아니라 언어적 기호가 수립하는 어떤 것이다. 모권은 그 용어의 두 - P117

측면에서 이 고유한 육체의 지형학에 대한 위탁 관리인이다. 모권은 남근의 획득과 언어의 습득이 이루어지는 부성적 법칙과는 구별되지만, 남자의 운명 속에 스며들 것이다. - P118

오염 의식들은 조각조각 자르고, 표식을 떼어내며, 규칙·범주·사회성을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연루된, 그리고 그것 자체의 절단에 내재하고 있는 어떠한 의미 작용도 가지지않는다. 이때 우리는 거꾸로 자문하게 된다. 과연 모든 글쓰기는언어가 우리에게 인식되는 단계인 제2단계의 의식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다시 기억하도록 하면서 언어 기호 자체를 가로지르는 이 표식떼기, 즉 오염 의식은 언어 기호의 전(前)조건이되고 벌써 그것들을 넘쳐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글쓰기란 사실상고유의 이름 저편에 있는 오랜 권한에 도전하는 주체와 대면하고있다. 이 권한이 내포하는 어머니성은 결코 위대한 작가를 회피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아브젝시옹이라 규정된 것과의 맞대면도 더이상은 피하지 않는다. - P121

정/부정의 대립은 그것이 은유화되지 않았을 때 하나의 동일성, 하나의 차이에 대한 바람을 재현한다. 그리고 남녀의 성적 차이의 자리를 차지한다. (정/부정이 성적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마치 카스트 체제에서처럼 족내혼에 의한 양성성의 제도화와 유사하게 나타날수도 있다.) 그것으로부터 정/부정의 대립은 상징 기능 그 자체(제물을 바치는 자/제물/신, 주체/대상/의미), 즉 고유한 분리하는 가치라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정/부정에 단초한 계급은 성적 차이와 자리바꿈한다. (아니면 성적 차이를 부인할까?)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정화 의식을 통해 희생제의의 폭력으로 대체된다. - P131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그것은 기쁨과 양립한다기보다는 질병이나 죽음과 등가물인 군주권이나 앎과 양립하는 개념으로만 존재하였을뿐이다. 오염은 이같은 모호함 속에서 혼동된다. 이렇듯 오염이란실천적으로는 어머니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고유의 한계에 대한위반, 즉 근친상간인 것이다. - P134

민주제로 넘어가는 시기의 그리스에서 아브젝시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알고 있는 말하는 존재(남성인 후손을 남기지 않는)와 상징계에 대면한 주체(이방인인 테세우스에게 죽음의 희열에 대한 모든 명명 가능성을 양도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에게 부과된다.
여기서 아브젝시옹은 또 다른 논리, 즉 성스러움의(사회적·문화적·고유의) 또 다른 가장자리처럼 의식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오염뿐만 아니라 법칙의 오인이나 위반을 향해 내던져진다. - P138

"나는 아브젝트이다. 말하자면 죽을 운명에처한 말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부족함과 타자에의 의존성은(어머니를)욕망하고(아버지를 살해한 오이디푸스에게 무죄를 언도하는 대신, 그로 하여금 단지 그의 극적인 분열을 양도하는만을 허용할 뿐이다. 진실에 대한 모종의 효과에 대해 결정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이방인인 영웅에게 양도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상징계, 언어로 변환된 우리 스스로를 알아본다는 조건으로만 열린 채로 있다. 타자에서도 다른 성에서도 아닌언어 속에서 의미한다는 것, 찔러 버린 눈, 상처, 근원적인 불만족은 시니피앙들의 연결고리에 대한 정의될 수 없는 탐색을 조건짓는다. 그것은 ‘아브젝시옹/성스러움‘이라는 중복된 진실을 향유하는 것과 등가이다. 여기서 두 갈래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승화 작용과 도착성. - P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인간이 되며 말과 동시에 질서를 만든다. 이 질서란 개체의 고유 표식을 없애고 어떤 범주로 묶는 일 그리고 이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일을 통해 성립된다.

힌두교에서 잔여물은 극도로 양가성을 지닌 개념이다. 더러움이 동시에 재생이라는 양가성은 아브젝시옹이 고귀한 순수함이 되는 것이나 난관이 성스러움에 대한 충동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핵심은 잔여물이 통합되지 않은 이와 같은 사유의 구조와 공존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사실도 철저한 사상도 없이 모든 체계에는 잉여만이 있다.

잔여물이 지닌 이러한 양가성은 유일신적이고 일원론적인 세계의 일면적인 상징체계와 대조를 이룬다.

야생의 사회에서 번식을 오염으로 간주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부권이 확립되지 않은 사회에서 지나친 모계 성향에 대항하기 위해 정화의식을 통해 그 지지 기반을 찾는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성과 관련된 오염에 대한 공포는 사회질서 속에 현실적 제재가 적절히 주어지는 경우,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혈통을 중심으로 한 족내혼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양쪽 부모로부터 사회 구성원의 자질을 양도받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규칙은 양성 간의 상징적이거나 현실적인 역할이 균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도 사회의 계급화는, 적어도 사회 내에서 권력을 재는 가장 중요한 잣대인 혈통에 관해서는 양성 사이에 개입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카스트란 사회 구성원의 자질을 이양하는 데 있어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이 동등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신분제라 할 수 있다.

카스트의 족내혼 규칙을 따르던 인도 사회와는 달리, 고전적인 의미의 족외혼을 따르던 대부분 야생의 사회에서는 성별, 씨족 등이 ‘같거나’ ‘다른’ 체계 구분이 생기고, ‘고유한’ 남성과 ‘이질적인’ 여성이라는 확연한 대립 구도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족외혼 체계의 이원론은 혐오와 분리에 대한 세심한 법칙들과 차이의 부재를 보충하기 위한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아브젝시옹은 금지되는 여성성 즉, 이질적인 것으로서 이름 없는 타자를 분리하는 과정이다. 드러난 금지와 분리는 모두 이 원초적인 아브젝시옹 위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의 무의식이나 인류의 무의식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눈먼 오이디푸스는 부정한impur 도시 국가에서 부정agos을 정화katharmos하기 위해 스스로 부정agos, souillure이 되어 추방된다. 오이디푸스의 아브젝시옹은 그가 안다고 믿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맡고 만 숙명적 역할에 대한 풀리지 않는 모호성ambiguite에서 생긴다. 바로 이와 같은 역동적 뒤바뀜이 오이디푸스를 아브젝시옹, 혹은 희생제물(pharmakos)로 만든다.53) 파르마코스란 더러움으로 오염된 국가를 더러움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추방된 속죄양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파르마코스의 모호함이 오이디푸스 비극의 배경이다.

오염은 삶을 정지시킨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보면 오염은 근친상간이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어머니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고유한 경계에 대한 위반으로써 오염이다. 이로부터 크리스테바는 말하는 존재나 사회적 존재의 고유성을 수립하는 최초의 경계선은 여성과 어머니 사이를 지난다고 추론한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파르마코스에 대응하는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이기 때문이다. 이오카스테야말로 야누스 자체이다. 그녀는 유일하다고 믿어지는 존재와 역할에 대해 모호성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전복시킨다. 크리스테바가 보기에, 모든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야누스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자기 몸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재생산하는 존재인 동시에, 말하는 주체로서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여성적 신비나 수수께끼인 이오카스테의 그러한 분열 자체와 결혼했다고 볼 수 있다. 경계선에서 정화 작용 없이 아브젝시옹을 구현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다. 반면에 남성은 같은 경우 아브젝시옹을 인식하고 폭로함으로써 그것을 정화시킨다. 그러므로 이오카스테가 부정한 미아스마(miasma, 나쁜 공기)이며 아고스agos임은 당연하다. 결국 오이디푸스만이 파르마코스(희생제물)인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죽음과 사회, 욕망과 앎,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의 경계에 있으면서 말하는 존재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죽음의 문턱에서 복수의 여신들이 거하는 아테네의 성스러운 숲에서 삶의 종착지를 발견한다. 그가 그곳에 머묾으로써 테베와의 전투에서 아테네를 구원하게 된다. 신탁에 의해 오이디푸스가 머물 자리와 그의 매장 위치의 중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종막은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전하는 사자(使者)의 언급으로 시작된다. 사자는 오이디푸스의 신비로운 죽음을 두고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에 가로놓인 신비한 경계를 언급하고, 오이디푸스가 정화의식을 통해 자신의 삶의 굴레를 벗어나 마침내 신들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결정짓는 외부적인 힘의 대립을 넘어선다. 즉, 죽을 운명을 가진 말하는 주체인 아브젝트로서 오이디푸스에게서 비천함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아브젝시옹/성스러움의 이중의 진실을 향유하는 길은 언어의 시니피앙(signifiant, 기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승화sublimation와 도착perversion을 향한 두 갈래 길이 열려 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 두 길의 교차점은 종교이다.

개인의 의식 속에서 감각적 이미지가 개념적 사고로 이어지는 과정은 꿈을 꾸는 과정과 반대 방향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와 사고 작용에 앞서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정서와 감각의 단계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사회의 분류 체계에서 경계선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위험과 접촉하는 것이고 능력의 근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성스러움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 면은 살해 행위와 속죄 행위와 연관된 사회적 관계이다. 다른 한 면은 안쪽의 좀 더 내밀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드러나지도 않는 곳이다. 이 내면은 취약하고 불안정한 동일성을 가진 불확실한 공간을 형성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성스러움의 내면은 성스러움의 사회적 관계가 만드는 구분과 분리와는 거리가 먼, 주체/대상의 비분리를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어 기제와 사회화 과정이라는 한 면과 공포와 무관심의 과정이라는 다른 면으로 성스러움의 양면을 나누어 볼 수 있다.

모든 주변부(가장자리)는 위험을 감추고 있다. 이것은 인간 육체에도 적용되는 가설이다. 인간 육체는 모든 상징체계에 기본적 도식을 제공한다. 오염에 대한 상징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육체의 부분과 관련을 갖지 않은 오염은 거의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1-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공포의 권력 시작했는데 정말 미치겠네요. 이렇게 단순히 글자만 읽는게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하하하하하

거리의화가 2024-01-15 10:29   좋아요 0 | URL
이해합니다ㅠㅠ 다락방님. 여성주의 책 함께 읽기 제가 참여한 이후로 최강 난이도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도 걔 중에 놀랄만한 문장에는 눈이 뜨일 때가 있고 이 책을 읽고 다시 본서를 읽음으로 재차 읽어 들어오는 부분도 간혹 생깁니다. 그렇다 해도 무지 어렵네요ㅜㅜ 과연 제가 뭘 읽고 있는 건지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