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왕망 신이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평가

"고조가 일어나 三尺검을 가지고서 8년 만에 皇帝의 業을 이루었으니,
그 공을 거둠이 이와 같이 신속하였던 것은 어째서인가? 오직 사람을 알아 잘맡기고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짐은 蕭何만 못하고, 계책을 운용하여 成敗를 결단함은 子房(張良)만 못하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함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人傑인데 내가 이들을 등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천하를 취한 것이다.‘ 하였으며, 韓信 또한 이르기를 가는 군사를 거느리는 것은 잘하지 못하나 장수를 거느리는 것은 잘한다.‘ 하였으니, 이 말이 다하였다.
呂氏의 亂에 漢氏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이 실낱같았다. 그러나 끝내 - P176

禍가 되지 못했던 것은 밖으로 宗藩(宗室諸侯)의 강함이 있고 안으로 絳侯(周勃)와 灌嬰의 충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文帝와 景帝 때에는 天下가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서 거의 형벌을 버리고 쓰지 않음에 이르렀으니, 후세가 모두 칭찬하고 사모할 줄 알아 이에 미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일찍이 안락하고 부유하고 장수하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文帝와 景帝는 백성들의 이 바람을 소요시키지 않았을 뿐이다.
孝武帝는 지나친 사치를 좋아하고 神仙術을 사모하여 宮室을 꾸밈이 한도가 없고 순행과 유람을 그치지 않았으며, 사방의 오랑캐를 계속 정벌하고 형벌을 엄하게 하고 부역을 무겁게 하였으니, 행한 일을 살펴보면 秦始皇에 비하여 어찌 차이가 멀겠는가. 다만 儒學을 높이고 도를 소중히 여기며 현자를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成敗가 이와 같이 달랐던 것이다.
孝昭帝는 어린 나이로의 충성을 분별해서 확고하여 동요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天자가 총명하였는가. 그러나 곽광이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고 돌려주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이다. 孝宣帝는 名과 實을 자세히 살피고 상과 벌을 분명히 내려서, 관리들은 직책을 잘 수행하고 백성들은 생업을 편안히 여겼으니, 효무제에 비하면 功烈이 더 낫다. 孝元帝는 우유부단하여 나라의 업이 처음으로 쇠하였고, 이성제는 酒色에 빠지고 정권을 외가에 맡겼으며, 효애제는 성질이 모질고 괴팍하고 총명하지 못해서 총애하는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침체하여 孝平帝에 이르러서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이 이 틈을 타고 마침내 漢나라의 國統을 차지하였다. 莽은 속임수와 간사함을 믿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동원하고 병난을 일으켜서 죄가 가득하고 원망이 쌓여 천하가 배반하였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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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무런 경계 없이 태어나는 유아는 생후 초기부터 자신의 일부라고 여긴 것들을 몰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타자의 경계를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나의 밖으로 거부되고 배제되는 대상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
ab-jet
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것이 똥, 상한 음식, 오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라캉의 거울 단계 이전부터 유아는 자기 몸의 내부에 있어야 할 것들과 밖으로 추방해야 할 것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몸은 유아가 스스로 분리해야 할 최초의 대상이다.

라캉에 따르면, 생후 6~18개월 사이의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최초로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의 몸과 어머니의 몸이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발견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이다.

생후 몇 개월간 유아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관련해서 멜라니 클라인은 이론적 가설을 세웠다. 이때 유아는 자신의 일차적 대상인 어머니,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젖가슴을 겨냥한 파괴적 충동
impulse
과 이어서 파괴적 환상에 대한 죄책감을 경험한다.
15)
이것을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3~4개월 경 시작되는 ‘편집-분열적 위치’
paranoid-schizoid position
와 생후 6개월 경 시작되는 ‘우울증적 위치’
depressive position
라고 이름 붙였다.
16)
이때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우울함이 이후 다시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되는 사건은 아브젝시옹의 경험과 연관성을 갖는다. 아담보다 먼저 하와는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뱀의 꾐에 넘어간다. 하와는 그 열매를 먹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뱀이라는 존재는 신이 정해놓은 인간과 신 사이의 질서(경계)를 넘어서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 경계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경계가 되고 만다. 태초에 에덴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는데, 최초 인간들은 그 경계선 밖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프로이트는 불안에는 ‘대상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라캉은 ‘불안에는 대상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라캉은 불안을 일으키는 대상이 있지만, 그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라고 한다. 즉, 모른다거나 보지 못했다고 해서, 없다고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불안은 대상과 분리되어 대상이 부재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것인데, 그 대체물이 되는 대상들은 근원적 대상과의 분리와 부재로부터 기인하는 불안을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울 수 있다. 그러므로 불안은 욕망의 대상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욕망의 소급적 원인으로서 근원적 대상 a와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팔루스는 오이디푸스기에 아이가 어머니를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법을 상징한다. 라캉이 말하듯이 팔루스는 상실한 대상 a의 자리를 대체하는 욕망의 대체물이다.
29)
그런데 주체는 최초 대상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대상 a를 욕망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욕망의 간극을 채울 수 없다. 라캉이 말하는 불안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만족 즉, 주이상스
jouissance
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주이상스는 대상과의 근원적 합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근원적 대상인 그 무엇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이고 이것은 의식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섬광의 순간처럼 지나갈 뿐이다. 특히 예술적 형식 속에서 승화라는 형식으로 이러한 전(前)-대상과의 분리의 기억을 되살린다.

크리스테바의 입장은 주이상스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라캉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 크리스테바는 근원적 대상을 전(前)-대상 혹은 불어 ‘그 어떤 것’을 뜻하는 쇼즈
Chose
라고 표기하는데 이것은 프로이트가 쓴 "다스 딩"
das Ding
즉, ‘그것’ ‘그 무엇’ ‘근원적 대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쇼즈’는 포착 불가능한 것이지만 크리스테바는 ‘쇼즈’의 장소
lieu
에 접근 가능한 방법으로 승화
sublimation
를 들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감정(feeling), 정서(emotions), 정동(affects) 사이에 있는 다양한 차이들을 구별한다. 감정은 중추신경에서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의식에서 차단될 수도 있다. 정서는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감정을 말하며, 정동은 이것과 관련된 모든 현상을 말하는데, 그중에 어떤 것은 무의식적이다. 그런가 하면, 기분(mood)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오래 지속되는 정동 상태로서, 지속적인 무의식적 환상에 의해 일깨워지고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정서와 정동, 기분은 어느 정도 겹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참고, 『정신분석 용어사전』,

당혹감과 혐오감을 자아내는 아브젝시옹 자체에는 이성적인 판단과 정동이 항상 뒤섞여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젝시옹은 드러난 기호와 무의식적 충동이 혼합되어 있다.

희열이 찰라의 순간에 상실한 대상과의 합일의 경험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면, 정동은 그 뒤에 남아서 최초 대상 상실의 고통을 반복적인 기분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생 때 탯줄을 자르는 것처럼 인간은 비천시된 것(ab-ject)을 잘라내고 몰아내지만, 이 아브젝시옹의 이질감은 면면히 흐르고 있다가 어떤 계기에 돌출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의 의미화 구조 속에서, 이러한 정동은 기호화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인간이 이 타자의 의미망 속에 갇혀 있다고 해도, 상징계의 의미 작용이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기억을 모두 기호화하기 어렵다.

프로이트는 「억압에 관하여」
43)
라는 논문에서 억압의 두 단계를 말한다. 1차적 억압인 ‘원초적 억압’과 2차적 의미의 ‘본래적 억압’이 그것이다. 2차적 억압인 ‘본래적인 의미의 억압’은 억압된 표상의 정신적 파생물이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생겨나 그 억압된 표상과 연결된 관념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억압은 의식의 거부 행위와 억압된 표상이 다른 것들에 가하는 힘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만약 이 두 힘이 작용하지 않거나, 의식에 의해 거부된 것(2차 억압)에 작용하고 있는 이미 억압된(1차 억압)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억압 과정은 억압이라는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초적 억압은 감춰진 채, 무의식이 억압하는 것을 표상하는 것에서 파생된 것들을 의식은 억압하게 된다.

육체적인 증상 속에서 종양 같은 아브젝트는 나를 침입하고, 나는 아브젝트가 되어 배제된다. 다시 말하면, 암 덩어리는 나를 질겁하게 하게 대상이지만 내 속에서 자라면서 나 또한 암 환자라는 아브젝트가 되어 일상적 삶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승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아브젝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암 덩어리와 친구가 되어 함께 살아간다. 이로써 종양은 더 이상 나를 기겁하게 하는 아브젝트가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삶을 향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죽음과 삶, 비천함과 숭고함이 아브젝트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곧, 비천함의 경계인 아브젝트는 또한 숭고함의 경계를 이룬다. 나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고 마신 성인들의 이야기는 이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지만 프로이트와 달리 고고학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즉, 1차적(원초적) 억압은 최초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지는 근원적 분리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경험하는 아브젝시옹은 고고학적인 원초적 억압을 원형으로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아브젝시옹은 나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젝트를 분리하는 공간 즉,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공간은 이미 아브젝트인 ‘타자’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왜냐하면 나를 지키기 위해 아브젝시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것은 이미 2차적 억압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차적(본래적) 억압은 원초적 억압 즉, 최초 억압된 본능의 표상에서 파생된 후천적인 것이다.

아브젝트가 나를 혐오감과 거부감으로 휩싸고 몰아내듯이, 숭고함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나를 격정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는다. 숭고함은 내가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 망각했던 근원적 대상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되살린다. 말하자면, 숭고함을 통해 바닥없는 기억 속에 묻혀버린 전(前)대상과의 합일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은 밝은 의식 너머의 경험이다. 크리스테바는 이 숭고함을 일탈이자 구획 짓기 불가능한 완전한 결핍이자 즐거움 즉, 매혹이라고 표현한다.

프로이트에게 나르시시즘은 대상으로부터 물러나서 자아에 (리비도) 투여가 발생한다는 관점에서 정의되었지만,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위상학적 관점
55)
이 도입된 이후로 이것은 "이차적 나르시시즘"이 되었다. 한편, "일차적(원초적) 나르시시즘"이란 용어는 타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부재하며 자아와 이드 간의 어떤 분화도 없다는 특징을 갖는 대상 부재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자궁 내의 삶은 대상 없는 이 나르시시즘적 상태와 가장 가깝다.
56)
프로이트는 억압을 원초적(1차적) 억압과 본래적(2차적) 억압으로 나눈 것처럼, 나르시시즘도 1차적 나르시시즘과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나눈다.

아브젝시옹은 대상이 아니라 자아에게 리비도가 쏠리는 (2차적) 나르시시즘을 선행하는 전(前)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아브젝시옹과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공존하면서도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을 균열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나’를 발견하는 것은 원초적 나르시시즘에 균열을 일으키는 아브젝시옹을 통해서이다.
57)
이때 원초적 나르시시즘과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공간을 크리스테바는 ‘코라’
Chora
58)
라고 명명한다.

코라로부터 시작된 충동의 운동이 타자와 결합하면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면, ‘나’를 의미화하고 기호화하기 시작하면서 코라에 대한 억압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코라’에서 자아는 나르키소스적이고 대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가,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의 반복 운동을 통해 원심력을 가지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려고 할 때 분리를 위한 아브젝시옹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아브젝시옹은 충동으로 가득 찬 코라에서 기호 체계로 나가는 통로이다. 이 과정에서 2차적 억압은 기호 체계와 연관되고, 1차적 억압은 나르시시즘의 위기와 연관된다.

클라인은 개인의 충동이 초자아의 기원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클라인은 오이디푸스 갈등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전(前)오이디푸스기를 초자아 형성의 첫 단계로 본다. 그러니까 후기 구강기의 가학적 국면에서 초자아가 자아로부터 분화된다.

반면에, 프로이트는 구강기에서 대상을 향한 에너지 집중
cathexis
과 대상과의 동일시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구강기에는 대상을 향한 공격 본능이 분화되지 않고 따라서 초자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구강기 이후 남근기에 초자아가 등장해서 오이디푸스 갈등을 해결한다고 보았다.

아브젝시옹은 경계의 문제인데,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면 그것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브젝트에 대한 강력한 금지를 명령하는 초자아는 자신과 주변을 지키고자 하는 자아의 방어 본능을 숨기고 있다. 방어적인 자아와 파괴적인 초자아의 투쟁에서 초자아는 자아에 의해 아브젝트의 가면을 쓰고 추방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밝히는 바에 의하면, 이 파괴적인 초자아는 그 공격성을 바깥 대상에 투사하고 안으로는 자아까지 위태롭게 만든다. 불안에 싸인 자아는 투사된 대상을 자기 바깥으로 내쫓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분화시킨 초자아까지 축출한다. 자아는 안심할 겨를 없이 불안에 싸여 초자아를 또다시 분화시키고 축출하는 운동을 반복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초자아는 자아의 다른 얼굴이다. 이것을 문화적으로 확장해서 말하면, 공포와 혐오를 자아내는 아브젝트는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

아브젝트가 된 대상의 거부와 함께 자아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만들어지고 의미화의 기반이 마련된다. 초기 자아가 겪는 이 투쟁은 분명히 최초 대상 즉, 모체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언급되었듯이 이 원초적 대상은 이후 계속적으로 다른 대상으로 대체되어 아브젝트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브젝시옹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면서 의미화의 시초이고, 이것이 문화 속에서 계속 발견되는 많은 아브젝트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 관계(object relations)와 대상과의 관계(object relationship)라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대상에 대한 개인의 태도와 행동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정신적 이미지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실제 사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대상과의 관계는 주체와 실제 다른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즉, 대인관계를 일컫는 말로, 대상 관계는 마음속의 대상 표상과 관련된 심리적 현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대상 관계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보고되는 경험이나 관찰된 행동에 의거하여 추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둘 모두는 개인 발달사의 산물인 무의식적 환상의 영향을 받는다(『정신분석 용어사전』,

초자아에 의해 아브젝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자아는 초자아의 의도와 계획과는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서게 된다. 즉, 초기 자아에서 분화된 잔인한 초자아는 자아를 죽음 충동으로 몰고 가지만 아브젝시옹은 거기서 새로운 의미로 향한 길을 낸다. 비록 그것이 욕지기가 솟는 것으로 의식에 다가올지라도, 그 이면에는 삶과 죽음 충동의 격렬한 투쟁에서 살아남은 새로운 의미가 배태되는 것이다.

아브젝트가 도착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것이 금지나 규칙·법을 무시하거나 파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시키고 곡해하고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브젝트는 금지나 규칙을 더 잘 어기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한다고 할 수 있다.

타락과 구원,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아브젝시옹의 카타르시스 효과는 예술과 종교의 영역을 아우른다. 아브젝시옹이 가진 정화 작용의 다양한 카타르시스는 종교의 역사를 이루고, 탁월한 예술로서의 카타르시스로 연결된다. 곧, 카타르시스적 관점에서 예술적 경험은 분명 아브젝트를 말하고, 그것을 통해 정화되며, 종교의 중요한 부분도 아브젝트 속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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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종교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 아브젝시옹은 주로 문화의 영역에서 특히, 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다. 문학 작품들은 주체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기원에 있는 원초적 억압을 노출시킨다. 문학을 통해 아브젝시옹은 사회의 동일성의 가장자리에서 성스러움의 기능을 대신한다. 그것은 문학을 통한 승화 즉, 카타르시스이다.

실상 우리가 배척하고 가까이 하기를 혐오시하는 것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다른 얼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브젝트는 함축한다. 내심을 가린 겉치레 인사, 비아냥거리는 욕설과 뒷담화, 뇌물 받는 공무원 등은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아브젝시옹의 사례들이다. 관습과 제도는 이질성의 벌어진 틈 같은 것을 감추고 봉합하는 데 익숙하지만, 정신분석은 이 틈을 우리 앞에 상시 열어놓는다. 이 벌려진 상처 같은 틈은 현대 사회가 만든 경계들에 익숙한 우리 정신이 감내해야 하는 이질감이다.

도덕적 인간을 동물(자연)적 인간과 구별해 본체계(예지계)에 집어넣은 칸트와 달리, 헤겔은 부정이 의식 밖에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헤겔은 그 부정 자체가 역사적·사회적인 행위 속에서 제거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칸트나 헤겔 모두 더러움은 제거되어야 할 무엇으로 규정했다.

플라톤에게 카타르시스는 지혜로부터 파생되고 정신에 직관적인 것이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 작용은 언어를 통해 운율과 노래로 나타난다. 운율과 노래는 지성에는 이질적인 정열적이고 육체적이며 성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부정함
l’impur
을 드러낸다.

아브젝시옹을 말하는 언어는 운율과 리듬에 가까운 소리를 형상화할 수 있는 시적 언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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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漢)은 당(唐)이 혼란한 틈을 이어받아서 여기에서 50년 거주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중원에 있는 나라에 많은 연고가 있어서 간과(干戈, 전쟁)가 미치지 아니하였으니 우리 역시 아무 일 없는 가운데 교만하였습니다. 지금의 병사들은 기고(旗鼓, 전쟁)를 알지 못하고 인주는 살아남을는지 망할는지를 모르니, 청컨대 군사적 대비태세를 정비하고 또한 송(宋)과 왕래하며 우호관계를 맺으십시오."

유창(劉?, 942~980)은 채용할 수 없었다. 이에 이르러 처음으로 두려워하여서 소정현을 초토사로 삼았다.

병문(幷門, ?州, 山西省 太原市, 北漢)과 우호적으로 왕래하는 것만 못하니 군사를 발동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게 하면 우리는 황화(黃花)·자오곡(子午谷)에서 군사를 내어 이에 호응할 것인데, 중원은 앞뒤로 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 관우(關右, 함곡관 서쪽)의 땅은 위무만하여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왕소원이 그 말을 그렇다고 생각하여 촉의 주군에게 권고하여 손우(孫遇)·조언도(趙彦韜)·양견(楊?) 등을 파견하여 납환(蠟丸)14의 백서(帛書)로 샛길로 가서 북한(北漢)의 주군15에게 주고 이미 포(褒, 陝西省 勉縣 西老城)·한(漢, 四川省 廣漢市)이 군사를 늘렸다고 말하면서 북한(北漢)과 약속하여 황하를 건너 같이 거사하기로 하였다. 손우 등이 도하(都下)에 이르렀는데, 조언도가 그 편지를 숨어들어 가져다가 바쳤다. 조언도는 흥주(興州, 陝西省 略陽縣) 사람이다.

황제가 행영(行營)에 유시하였다.

"이르는 곳에서는 여사(廬舍)를 불태우거나 이민(吏民)을 내몰아 노략하거나 분묘를 파헤치거나 상자(桑?, 뽕나무)를 잘라 채벌해서는 안 되는데, 어기는 자는 군법을 좇아서 일을 처리할 것이다."

제장들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두가 도륙하려고 하였지만 오직 조빈(曹彬, 931~999)만은 이를 금지하여 마침내 그치었으니, 그러므로 협로(陜路)의 군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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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조금도 범하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가 그 적당한 사람을 얻어서 맡겼구나!"
조빈에게 조서를 내려서 그를 포상하였다.

왕전빈과 최언진(崔彦進, 922~988)·왕인섬(王仁贍, 917~982) 등이 밤낮으로 연회를 열고 술을 마시고는 군무(軍務)를 돌보지 않으면서 부하들을 풀어 놓아 자녀와 재화(財貨)를 약탈하니 촉 사람들이 이를 고생스러워 했다. 조빈(曹彬, 931~999)이 누차 군사를 돌릴 것을 청하였으나 왕전빈 등은 듣지 않았다.

오대(五代)의 방진은 더욱 강하여 부곡을 인솔하여 장원(場院, 곡식을 털거나 말리는 평탄한 장소)을 주관하게 하면서 두텁게 거두어 스스로를 이롭게 하였다.
그 가운데 삼사(三司)에 속한 것에는 높은 관리를 보임하여 그곳에 가게 하여 정해진 액수 외의 것들을 보내어 번번이 자기에게 들여보내고 혹은 사사롭게 뇌물을 받아서 이름하여 공봉(貢奉)이라고 하면서 은상(恩賞)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황제가 처음에 즉위하여서는 오히려 앞의 제도를 따랐기에, 주목(州牧)이나 태수(太守)가 내조(來朝)하게 되면 모두가 공봉이 있었다. 조보가 재상이 되기에 이르자 그 폐단을 개혁하여 없애기를 권하고 여러 주에 명령을 내려서 탁지경비 외에 무릇 금백(金帛)으로 군사들의 실비를 돕게 하고 모두 도하(都下)로 보내어 점유하여 보류할 수가 없었다.

가을 7월에 황제는 서천(西川)의 행영에 어떤 대교(大校, 장교)가 백성의 처의 유방을 잘라내어 그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궁궐로 오게 하여 큰 저자에서 그 목을 베었다. 가까운 신하들이 구하려고 하는 것이 자못 절박하였으나 황제는 이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군사를 일으켜서 조문하면서 치는 것인데 부인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잔인하기가 여기에 이르렀는가? 마땅히 속히 법대로 조치하여 그 억울함을 보상하여야 한다."

12월 초하루 정유일에 처음으로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하여 3년 자최(齊衰)·참최(斬衰)하도록 하여 하나같이 그 지아비를 좇게 하였다.

개봉윤인 조광의가 금중에서 모시고 연회를 열었는데, 조용히 폐하의 복장이 지나치게 초솔(草率)하다고 말하니, 황제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너는 협마영(夾馬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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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살던 때를 기억하지 않느냐?"

애초에 황제는 지금 사용하는 기원(紀元)으로 고치면서 재상에게 명령하여 전 시대에 없었던 연호를 서로 가리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미 촉을 평정하고 났는데, 촉의 궁인들로 액정에 들어 온 자가 있어서 황제는 그 염구(?具, 화장도구)를 보다가 옛날 거울을 얻었는데 그 뒷면에 ‘건덕(乾德) 4년에 주조함’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황제는 크게 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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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내어 재상들에게 보이니 모두가 대답할 수 없었다.
마침내 학사인 도곡(陶穀, 903~970)·두의(竇儀, 914~966) 등을 불러 이것을 물으니 두의가 말하였다.
"이 물건은 반드시 촉(蜀)의 물건일 것입니다. 옛날에 위(僞) 촉왕인 왕연(王衍, 前蜀 後主, 901~926)이 이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마땅히 이는 그 시절에 주조한 것일 것입니다."

"밑에 있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비록 숙맥(菽麥, 콩과 보리)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만약에 번후(藩侯)들이 어루만져 길러주지 아니하고 힘껏 가혹하고 심각하게 시행하였다면 짐은 끊어서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조보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폐하께서 백성을 아끼심이 이와 같으니 바로 요(堯)·순(舜)의 마음 씀입니다."

윤달(윤8월)에 잃어버린 책을 구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무릇 관리와 백성들 가운데 서적을 가지고 와서 헌납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관(史館)으로 하여금 그 편목(篇目)을 살펴서 사관 안에 없는 것이면 이를 거두어들이고 책을 헌상한 사람은 학사원으로 보내어 관리의 이치를 시험 쳐서 묻게 하고 직관(職官)으로 벼슬하는 일을 감당(堪當)할 사람을 보고하라."
이 해에 《삼례(三禮)》의 섭필(涉弼)·《삼전(三傳)》의 팽간(彭幹)·학구(學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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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재(朱載)는 모두 조서에 호응하여 책을 헌상하니 서부(書府)에 나누어 두라고 명령하고 섭필 등에게 과명(科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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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사하였다.

"백성들 가운데 뽕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어서 가꿀 수 있고, 황무지인 밭을 개간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세를 징수하지 않고 보좌하여 오도록 권고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받는다."

조보는 평소에 두의가 강직한 것을 꺼려서 설거정(薛居正, 912~981)·여여경(呂餘慶, 927~976)을 끌어들여 참지정사로 하였고 도곡(陶穀, 903~970)·조봉(趙逢, ? ~975)·고석(高錫, 936~985) 등은 또 서로 무리를 지어 붙어서 함께 두의를 배척하여 황제의 뜻을 중간에서 끊었다. 이에 이르러 죽자 황제는 가엽게 생각하여 말하였다.
"하늘이 어찌하여 나의 두의를 빨리 데려간다는 말인가!"
우복야를 증직하였다.

요주는 비록 야율이뢰합의 말을 다 좇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를 아끼는 것이 특별히 심하였다. 일찍이 가을 사냥을 따라나섰는데, 사슴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한 마리의 수사슴을 불러 왔다. 요(遼)의 법에는 수사슴으로 뿔이 양쪽에 난 것은 오직 천자만이 쏠 수 있었는데, 요주가 야율이뢰합에게 그것을 쏘라고 명령하니 활시위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요주는 크게 기뻐하며 하사하여 준 것이 두터웠다. 이에 이르러 연회를 열었는데 아주 기뻐하며 다시 금으로 된 사발과 가는 실로 짠 비단, 그리고 새끼 밴 말 100필을 하사하였으며 좌우에 있던 사람으로 관직을 받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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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한반도 정전체제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평화체제 전환의 요건



1953년 7월 27일 조인된 한국 정전협정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폭 2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는 것, 이 협정 발효 후 3개월 이내에 전쟁 참여국들이 정치회의를 소집해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책을 마련할 것, 그리고 한반도에 새로운 무기체계를 반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 P242

정전협정 제4조는 "양측 관련 정부들에 대한 권고"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정전협정의 서명 및 발효 후 3개월 안에 양측 군사령관들은 양측 관련국 정부들에게 양측이 각기 임명한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고위급 정치회의를 개최해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국문제의평화적 해결 등을 협상을 통해서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정전협정의 제5조 63항은 이 협정의 모든 조항이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부터 발효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4조 규정대로라면1953년 10월 말까지는 정치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그러나 정치회의 소집은 지연되었다. 북한 측이 한국전쟁 당사자가 아니었던 소련과 인도의 참석을 주장했다. 미국은 반대했다. - P243

문제의 핵심은 (미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유엔군의 남한 주둔을 배경으로) 유엔이 남북한 모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이었다. 공산 측은 유엔의 중립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선거를 포함한재통일 과정에서 유엔의 역할을 거부했다. 6월 15일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자유선거와 유엔 감독"이라는 두 가지의 기본 원칙을 공산측이 거부하기 때문에 회의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성명을 내고 회의장을 떠났다. 공산 측은 회의 계속을 주장했다. 한국문제에 관한제네바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 P245

미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협상을 반대하고 프랑스에게 "자유세계"를 위한 전쟁을 계속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거부했고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군사분계선을 북위 17도선으로 타협해 인도차이나 전쟁이 공식 종결된 것은 1954년 7월 21일이었다.
이 협정은 한편으로 한국의 경우처럼 남북 분단을 전제한 군사분계선을 결정한 정전협정이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베트남의 남북 통일정권을 세우기 위한 선거를 규정한 평화협정이기도 했다. - P246

한국 정전협정 제13항은 한반도에 새로운 무기체계를 들여오지 않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1957년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 측에 이 13항을 무시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1958년 미국 - P247

전술핵무기들과 이것들을 발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사일 체계를 한국에 배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합참의장 래드포드에게 핵무기 중심 미국군사전략 재편을 의미하는 ‘뉴룩‘ (New Look)을 추진하라고 지시한것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2년 11월이었다. 이에 따라 작성된 국가안보회의 문서(NSC 162/2」)는 향후 재래식 분쟁에서도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해 대응한다는 ‘대량보복‘ 전략을 담았다. 그것이 한국 정전협정 조인 3개월 뒤인 1953년 10월이었다.

미국이 대량보복전략을 동아시아에 적용해 오키나와 한국타이완·필리핀·괌에 핵무기를 대량 배치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 P248

미국은 한반도 정전체제의 군사화를 주도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인도차이나에서는 제네바 평화협정의 무력화를 주도한다. 그 배경에는 한국전쟁을 통해 공식화된 미일동맹체제를 바탕으로 동아시아공산주의 봉쇄의 보루로서 일본을 재건한다는 청사진이 있었다. - P249

박정희 정권이 선택한 것은 독자 핵무장 모색이었다. 미국은 핵무장 확산 방지 차원에서 박 정권의 핵무장 기도를 좌절시킨다. 대신 미국은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핵무기의 존재를 사실상 공개하고, 북한에 대한 핵무기 선제사용 위협을 공식화했다.
미국은 또한 한국·일본·필리핀 · 타이완 등 동맹국들의 안보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1976년 한국에서 ‘팀스피릿‘라는 이름의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시작된다. 이 훈련의 규모는 해마다 늘어갔다. 미국은 한국과 미사일협정을 체결해 북한을 직접 위협하는 한국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개발계획을 승인한다. 이로써 한미동맹은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미사일 분야에서의 군비경쟁을 선도했다. 이것이야말로 1990년대초부터 국제화된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의 진정한 뿌리였다. - P254

1990년대 초부시 행정부와 1993년 출범한 클린턴 행정부의 중국가능성이 커진다.
정책은 중국을 미국 중심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통합시켜서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1995-96년 타이완에서 독립론이 퍼지면서 타이완해협에서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미국 신보수주의 정치세력 내부에중국의 잠재적 도전을 미연에 꺾어야 한다는 중국봉쇄론을 확산시켰다. 이들 신보수주의적 중국관은 2001년 이후 부시 행정부의 대중국정책에 반영된다. 그 핵심은 공화당 보수혁명이 1990년대 중엽부터 추구한 국가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라는 목표와 결합해 2002년 ABM협정 폐기로 이어진다. 그 결과 미국과 러시아 관계에서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 사이에도 새로운 차원의 군비경쟁이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P257

김대중 정권에 이어서 2003년 초 역시 진보 정권인 노무현 정부가출범했지만, 부시 행정부가 북미 제네바합의를 폐기해 북미 간 신뢰관계가 완전한 파국에 도달한 이후였다. 북미 간 신뢰가 회복되어야만 가능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성에 의한 북한 핵문제 해결은 이미 기대하기 어려웠다. 2005년 6자회담에 의한 9·19공동성명이 성립했다.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는 이에 서명했지만 재무부는 북한에 금융제재 조치를 발동했다. 성명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미국외교에 대한북한의 불신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북한의 제1차 핵실험은 그 귀결이었다. - P263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대화가 파국을 맞은것은 김정일 정권의 화폐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벌어진 혼란, 그리고 이듬해인 2010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天安艦) 침몰사태 때문이었다. - P264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북한붕괴론에발 하나를 담근 것이었다. 2009년 말에서 2010년 초에 김정일 정부가 시도한 화폐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북한이 경험하고 있던 대혼란, 뒤이은 김정일 사망으로 들어선 김정은 세습정권의 리더십에 대한 광범한 의심, 그리고 김정은 정권이 시도한 많은 미사일 발사 시험의 실패는 북한붕괴론을 부추겼다. 그것이 이 시기 미국의 전략적인내 정책의 무시할 수 없는 근거였다. - P265

미국의 대북정책은 ‘트럼프판 전략적 인내‘의 노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쟁도 해법이 아니지만 평화협정 협상도 대안이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현상유지 전략에 가깝지만, 북한에 대한 기존의 강력한 제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추구하는 반중국 동맹네트워크 유지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매우 친화적이다. - P276

미국과 국제 사회를 향해 평화조약 협상의 명분과 전략적 불가피성을 당당하게 밝히며 설득하는 더 적극적인 한국의 외교가 시급하다. 그 핵심은 미국이 사실상 ‘북한의 비핵화 선행조치 요구‘가 뒤섞인 ‘막무가내식 빅딜‘을 내세울 때, 한국은 포괄적이면서도 단계적 동시행동의 일정표를 담은 일괄타결로서의 평화조약 형태의 ‘합리적인 빅딜‘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는 일이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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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테바는 현대 사회가 운명적으로 살아왔던 거주지를 상실함에 따라 인간을 뒷받침해주던 본래적 장소와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파괴될 위협에 처해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차적 안정성의 파괴가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성을 승화하고 상징화할 수 있는 최종적 지표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을 둘러싼 욕망과 억압으로 인한 문제에 문을 열었다면, 클라인은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간에 심리적 공간의 파괴와 정신적 삶의 멸절로 이어진 광기(정신병) 분석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가 최초 모성과의 대상 관계에서 도출한 아브젝시옹을 문화해석의 열쇠로 삼고 있다면, 리쾨르는 상징 해석과 성스러움이라는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전체성에 대한 시각을 열어준다. 두 대가가 모두 비천함과 성스러움은 인접해 있으며 그 수렴점이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로써 자기중심적인 근대적 자아의 빗장을 열고 타자를 향해 걸음을 옮길 것을 조용히 주장한다. 이러한 사유는 현대인의 메마른 감성에 대한 치유와 새 시대의 영성(靈性)을 위한 지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브젝시옹은 있음과 없음의 경계선에 대해 그가 만든 개념이다. 그런데 아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이 최초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숙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어머니는 생물학적 어머니를 겨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존재의 기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할 때 그 고향은 기술 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이었지만, 크리스테바에게 고향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성이다.

대표적인 지적 기능은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은 주로 ‘속성판단’과 ‘존재판단’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속성판단은 어떤 사물이 어떤 특수한 속성을 지녔나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판단이고, 존재판단은 어떤 것의 표상Vorstellung이 현실계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반박하는 판단이다.

‘부정’의 메커니즘은 나의 본능을 충족시켜줄 대상 상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아가 대상을 내부에서 축출하거나 거부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부정성’은 최초 사유하는 자아의 정립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자아가 본능의 만족에 붙들려 있는 한,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통해 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생의 초기에 유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배척하는가를 아브젝시옹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브젝시옹은 원초적 상실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사고는 항상 원초적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Verneinung의 토대 위에서 등장한다. 즉, 주체는 대상이 상실되었을 때에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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