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자연 너머 상위의 더 나은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
다른 모든 동물처럼 자연과 자신의 요구를 어우러지게 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의 육체가 지나치게 빈약하고 성품도 좋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이란 가엾은 존재로 빈곤 상태에서 정치 세계를 건설한다고 이야기하며 정치가 인간의 우월성보다 허약함에 맞춰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많은 정치 이론가들은 인간을 정의하기 전에 다른 동물들과 구별하는데, 마키아벨리는 인간과 동물이 매우 가깝고 어떤 면에서도 불행하다고 볼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과 가장 유사한 것이 군주론 18장에 등장하는 고대 스리스의 알레고리다. 여기에서 마키아벨리는 왕자가 될 이를 반인반마 켄타우로스족인 케이론에게 견습생으로 맡겨 배우게 한 알레고리를 찬양한다. 그렇게 케이론은 정치적 성공을 위한 가르침과 본보기에 대한 책인 군주론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상징적인 인물이 된다.

애초에 자연이 너희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병들게 했느냐는 말이지! 너희 병은 야심, 음탕, 한탄, 탐욕이고, (…) 어떤 동물도 너희보다 허약하게 살지 않으며, 더 강렬한 욕망, 더 무질서한 공포, 더 큰 광기를 품고 살지 않아. 한 돼지가 다른 돼지에게 어떤 고통도 주지 않고, 한 사슴이 다른 사슴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지. 그러나 인간은 다른 이에게 죽음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약탈당하거든. (…) 네가 보기에 행복하고 환희에 찬 신처럼 보이는 인간이 있다면, 그를 믿어선 안 돼. 왜냐하면 진흙탕 속 내 삶이 더 행복하니까. 여기서 나는 아무런 불안 없이 몸을 씻고 뒹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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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가 정치학에서 악명이 높은 이유는 정치와 윤리를 분리하고 정치적 인간의 미덕과 미덕 자체를 구별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리스인들이 제거하려던 육체를 정치사상에 다시 통합했다. 그에게 정치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과 욕구로 끓어오르는 것이었으며, 땅에서 육체를 거쳐 일어난 것이었다. (중략)
정치는 미학적 이상이 아니라 삶 자체다.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에서 육체, 욕망, 욕구는 철저하게 젠더화되어 구성되었다. 통제와 지배에 열을 올리는 남성들의 삶, 통치에 관심 있는 이들 그리고 그 모든 사람 너머로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는 데 관심 있는 이들이 지배하는 공동체의 삶이 자리한다.
필연성도 이와 비슷하게 권력 추구의 한계와 위험, 위대함을 향한 원동력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정치 행위자들에게 정치 영역에서 가장 직설적인 힘과 도구를 쓰라는 충고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정치 행위자가 이 충고를 받아들여도 찰나의 승리를 거둘 뿐, 위협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힘(포르투나) 앞에선 행위자의 취약성이 커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세계를 탈신비화하는 데 헌신했지만, 권력의 귀결을 포르투나의 특성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그 노력은 좌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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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18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지금 저 아르떼 출판사 마키아벨리 읽고 있는데 참고할게요.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의 철저하게 젠더화되어 구성된다는 비판은 좀 과한게 아닌가요? 그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그 이상을 넘어서는건 불가능할 거 같은데 말이죠. ^^;;

거리의화가 2022-01-19 07:59   좋아요 0 | URL
마키아벨리 정치 이론을 다루고 그것을 젠더 측면에서 분석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도 이제 마키아벨리 챕터 도입이라. 저도 지금의 기준에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아르떼출판 마키아벨리는 읽기 어떤가요? 궁금합니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으로 얻은 군사적 승리 후 자신만만해했지만 삼국간섭으로 자신들의 전리품을 토해내게 된다. 이 사건은 일본에게 외교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일이었다.
중국은 생존투쟁을 위한 국력 증강을 선택했다.

조약의 성립과 관련해서도 문제가 있었다. 조약 당사자국 간에 동일한 조건의 조약서가 담겨져 있는게 아니고 결국은 더 힘이 센 강대국의 입김에 따른 조약서가 체결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조약의 해석 문제도 있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언어가 아닌 언어의 경우 조약서 해석에 문제가 생길 소지를 담은 채 성립되는 경우도 있다. 해석에 미묘함을 남겨놓아 향후 분쟁을 일으키게 하기도 한다.

미래에 자유주의는 국제관계 이론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오늘날에도 국제관계를 논하는 자리에서 주류이론이거나 최소한 중요 논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관계 이론은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 대부분의 정치가 갖고 있는 관점이지만 통일된 표현이 있었던 적은 없다. - P1328

사회적 다윈주의는 ‘서방’—유럽이 점차로 애용하게 된 자칭—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국경을 초월한 현상이자 갖가지 이론적 변형을 낳았고, 그 변형들이 다시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 P1330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국제관계는 밀림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었다. 전 세계는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대와 연합을 모색했다. 오늘날에는 아무리 작고 가난한 나라라도 전 세계에 외교기관을 주재시키고 있고, 외교 수장의 회담이 끊이지 않으며, 국가 원수가 만나는 정상회담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런 방식의 외교는 1차 대전 이후 시대의 산물이다. - P1331

1815년 이후부터 효력을 발휘한 새로운 외교규범과 국제행위 준칙은 문명진보의 당연한 결과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호를 개방당한 비유럽국가는 조약을 체결할 때 문명세계의 규칙을 지키겠다는 조항을 포함시켜 이행을 보증해야 했다. 새로운 규범과 준칙의 일부 조항은 타국 내정 불간섭 원칙을 피해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충돌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 P1334

19세기에 비유럽세계와 관련하여 외교관의 주요한 기능은 다양한 종류의 조약—통상조약, 보호조약, 국경조약 등—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국제법에 근거한 조약의 개념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중국은 1689년에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한 적이 있었다) 여러 차례 구체적인 상황에서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번역 문제만 해도 미묘한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조약의 실행단계에서 심각한 분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 P1338

개별적인 조약 하나하나가 모여서 결국에는 여러 당사자에게 영향을 주는 조약의 집합이 되었다. - P1340

1815년 이후 중시되기 시작했고 1840년대부터 영국의 법의 결핍을률가들이 개발하고 영국의 정치가들이 현실 정치에 적용했던 국제법은 유럽 바깥의 영토에 대해서는 보호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또한 이 국제법은 공백으로 남겨둔 영역이 많았는데 특히 해양관리 분야가 그랬다. 예컨대, 같은 해역에서 작업하는 포경선 선장들은 포획물의 발견과 최종적인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구체적인 규칙을 합의해두어야 했다. 영국이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한 해양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법의 원칙에 반해 아무리 선의에서 보더라도 국가로 분류되기 어려운 공동체가 보호국으로 선포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런가하면 목록의 다른 한쪽 끝에는 세워진 지 이미 수백 년이 넘고 최소한대다수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안정된 정통성을 누려온 합법적인국가였지만 지도에서 지워진 나라가 존재한다. 14세기부터 국가로서 역사적 연속성을 유지해온 조선은 1905년에 일본의 보호국으로 선포되었다. 1907년, 조선은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가적 위상의 강등에 대해 항의하려 했다. 회의 의장단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회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이 합법적인 국가가 아니거나 현존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입장의 명확한 표현이었다. - P1343

상호 분명한 연관성이 없는 이런 저항에 ‘민족주의’라는 표지를 붙이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별로 본다면 저항운동은 각자의 특수한 원인과 동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운동 배후에는 분노에 찬 애국정서와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서서히 강화되어가는 국제적 정의감과 유사한 의식—이것이 각국의 운도을 하나로 연결시켜주었다—이 존재했다. 이러한 새로운 요구와 가치관의 발원지는 우드로 윌슨의 사상이며 1919년의 파리평화회의를 통해 원칙과 선언으로 포장되어 나온 것일 뿐이라는 해석은 그보다 앞서 유럽 밖에서 일어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유럽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발원지란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 P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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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19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받은 배상금이 너무 막대해서 이후 군국주의로 향하는 일본의 밑천이 되었다죠. 인용하신 페이지 숫자에 깜놀하고 갑니다. ^^

거리의화가 2022-01-19 08:06   좋아요 0 | URL
네 그 배상금을 기반으로 철저히 배를 불렸죠.
페이지수는 총 3권인데 각 권의 페이지수를 따로 안 세고 이어져서 그런거예요 2권이 몇백페이지부터 시작합니다ㅋㅋ
 

19세기 말에 상호 대립적인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모든 국제관계는 단일한 세계체제의 한 요소로 보아야 한다.
는 확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유럽 정치와 주변부를 개념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전부터 내려오는) 주장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세계 여러 장소—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 중국,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심지어 1902-1903년 겨울에는 베네수엘라 —— 에서 부딪쳐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제국의 충돌은 모두 해결될 수 있었거나 그영향이 충분히 억제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이 불문율인 ‘놀이규칙‘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놀이규칙‘ 이란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야심이 좌절되었을 때 그 국가가 다른 지역에서 ‘보상‘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거나 용인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충돌과 대립은 유럽 각국 사이에 항구적인 불신감을낳았지만 어떤 충돌도 유럽에 주는 영향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촉발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 P1291

중요한 해외 이익의 균형은 모두가 예외 없이 쌍방의 협조하에 실현되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집단행동은 오직 한 차례뿐이었다.
1900년 여름, 8국 연합군이 의화단에게 포위된 공사관 구역을 포위망을 뚫고 구조했다. 연합군 군대 가운데서 일본과 미국 군대가 주도작용을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참여는 이 제국의 역사에서최초의 가장 야심찬 외교행동이었다.24)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의 제국주의는 개별 제국주의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5대 강국이 대륙을 초월한 강국이 아니라 유럽의 강국으로서 등장했을 때 유럽의 국제체제는 5대 강국 사이에서 작동했다. 이 체제는 ‘국제정치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 - P1292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제국주의 확장은 정치질서가 혼란한 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간단하게 유럽과 ‘기타지역‘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유럽 내부에도 준(準)식민지 형태의 종속관계가 존재했다. 전통 외교사는 유럽의 약소국이라 불리던 나라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있고강대국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약소국의 행동공간에 대해서는 거의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P1293

먼로 대통령의 "아메리카는 아메리카인에게!"란 선언은 하나의 주의가 되었고 1867넌 프랑스가 멕시코에게 패배한 이후 수십 년 동안에 그 영향이 정점에 이르렀다. 1895-96년의 베네수엘라 위기에서 미국은 전쟁의 위협을 통해 처음으로 파나마 지협 이남 지역에서 영국을 대체하고 패권적 지위를 확립했다. 1904년, 시어도어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먼로주의를 한층 더 강화한새로운 원칙을 선포했다. 그는 미국이 전체 남아메리카에서 "문명화를 위한 개입의 권리를 보유한다고 주장했다. 먼로의 원래 입장이여기서 뒤바뀌었다. 먼로는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루스벨트는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억압하려 했다. 먼로주의는 남아메리카 각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반대했으나 루스벨트는 북아메리카의 군사적 우위에 의존했다. - P1299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뿌리 깊은 ‘중화세계질서‘ (Chinese world order)의 사유방식은 이른바 ‘서방의 충격’으로 하룻밤 사이에사라질 수는 없었다. 예를 들자면, 근대 초기에 외적이 침입했을 때조선은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틀 안에서 대응했다. 생사존망이 걸린최후의 순간에도 조선의 실권파는 청나라 조정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겠다고 선포하기직전까지도 —1895년부터 조선은 중국에 대한 조공을 중단했고, 현대 사조는 중국을 ‘문명세계의 변두리에 있는 야만국‘으로 취급하 시작했는데도 조선은 중국의 종주권 이외에 다른 대안을 상상할 수 없었다. 러일전쟁은 "국제정세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왔고 그 영향이 유럽의 중심지역에까지 미쳤다. 이 전쟁은 중화세계질서를 완벽하게종결시켰다. 중화세계질서가 종결된 뒤 40여 년 동안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공간을 만들려 시도했다. 일본은 2차 대전 시기에 이런 구상에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연속성을 고려할 때 1차 대전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에서 역사의 중요 분기점은1905년과 1945년이었다. - P1306

19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는 지휘구조의 집중화 기민화 체계화였다. 프로이센이 다시 일어서서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여기에 있었다. 1807-1813년에 실시한 전면적인 군사개혁이 프로이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프로이센은 지휘관과 병사 사이의 전통적인 지시-복종 관계를 보다 이성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국가였다. 국왕이 프로이센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고 그 아래에 군사기술과 지식 전시 동원을 담당하는 모든 참모부서가 집중 배치되었다. - P1309

19세기 중반부터 각국이 갖춘 무기의 수적인 차이가 전쟁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군비경쟁은 이제 국제관계의 영속적인 표지가 되었다. - P1311

상대가 백인이었을 때는 식민전쟁의 목적은 정복이 아니라 어떤 지역의 이탈을 막거나 이미 이탈한 지역을 탈환하는 것이었으며 인종주의적 이념은 적용되지 않았다. - P1315

‘종족’이란 요인 하나만으로는 식민전쟁의 잔혹함을 설명할 수 없다. 1812-1813년의 발칸전쟁 과정에서 백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의 잔혹한 정도는 같은 시기의 식민전쟁에 뒤지지 않았다. 전쟁포로는 전혀 보호받지 못했고 종족의 동질화를 위해 체계적인 테러가 자행되었다. - P1316

어떤 군대든 폭력을 통해 약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격대와 에릭 홉스봄이 ‘사회적 반란자’라고 명명한 집단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로빈 후드 유형의 사회적 반란자에 대한 정의는 그들의 목표와 지지자에 의해 결정된다. ‘소규모 매복전’, 신출귀몰한 기습이 이들의 행동 방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 P1318

19세기는 전면전 요소가 형성된 시기였으며, 1914년 이전에는 전면전의 영향이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 P1321

1866년, 중국은 해외로부터 함선을 사들이기 시작하는 한편 국영 조선소를 세워 현대적인 함대를 보유하려 시도했다. 1891년까지 중국은 95척의 현대화된 함선을 취역시켰고 많은 해군장교가 외국 교관으로부터 훈련받았다. 이렇게 하여중국은 지역의 강자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서방의 관찰자들은 함대 건설에 역점을 둔 중국의 군사 현대화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 해군함대는 온갖 유형의 함선을 끌어 모아 구성된 데다 4개의 독립함대로 나뉘어서 연해지역 성의 총독 관할 아래 예속되었다. 함대를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관할 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휘 협조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함대가 출동했다. 1896년 중국 함대는 일본에 패했고 그 뒤로 반세기 동안 중국은 해군을 갖지 못했다. - P1324

원대한 안목을 갖추었던 중국의 일부 총독들처럼 일본 정치엘리트 계층의 지도적 인물들은 메이지유신 이전에 이미 강대한 해군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1868년 이후로, 특히1880년대 중반부터 해군 건설계획은 국가의 첫 번째 중요 목표가 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군비확장 경쟁의 자극도 받아 일본은 해군 증강 힘을 쏟았다. 해군 확장 ——늘 언급되는 공업화만이 아니라 은일본이 강국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비결이었다. - P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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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남성에게 정신은 자연, 외적 요소, 선택된 적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된 무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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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17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 정리 좋아요. 옛날에는 많이 했는데 지금의 저는 도통 안하네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1-17 07:29   좋아요 0 | URL
읽다 보니 정리가 안 되어서 이렇게 쓰면서 하니 역시 더 낫더라구요^^